소설리스트

11화 (11/32)

***

“하인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어 보니 곧 그분들이 오실 것 같아요. 아가씨의 어릴 적 친구분들이요.”

머리를 손질하는 벨린의 목소리가 들떴다. 반면 그리즈는 옥수수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간밤에 그에게 박제되는 꿈을 꿨기 때문이다. 여인의 몸 구석구석을 느긋하게 탐닉하는 그에게 꿈속에서까지 시달리느라 영 기운이 없었다.

정오가 될 때까지도 어젯밤의 일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충동적이었을까. 아니면 의도했던 걸까. 방에 혼자 남은 후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러다 덜컥 겁이 났다. 혹시나 이게 시작이라면… 앞으로 밤마다 그가 불러내서 조금씩 더 원하면 어떻게 하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세상에 매음굴 창녀보다 쉬운 여인이 어디 있을까. 배운 것 없고, 저속하고.

권력자의 일탈 상대로 최고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기 전에 모두의 뜻대로 디르크라는 사내와 혼인이라도 해야 할까….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그리즈는 할머니의 부재로 홀로 점심을 먹고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왈츠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날 때부터 박치로 태어난 까닭에 춤 수업이 가장 힘들었다.

그나마 왁스 칠 한 바닥을 유영할 생각으로 위안 삼았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순간이니까. 감옥에 갇힌 듯 답답했던 몸에 자유가 주어진 것 같아서.

빛이 새어 들어오는 복도를 유유히 걸었다. 연회장의 하얀색 양 문이 가까워질 무렵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모퉁이에서 사내들이 나타났다. 대공 비아누트, 집사장 그리고 쿠엔틴.

당황스럽게도 대공만이 시야에서 크게 확대되었다. 그리즈는 감각 체계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뜨거웠던 입술의 감촉과 진한 로즈마리 향이 가슴 아래서 끼쳐 올랐다.

눈을 감자 허기진 악마 같던 그림자가 번뜩 떠올랐다. 걱정이 엄습해 왔다. 그가 다가와 말을 걸면 어떻게 하지? 밤늦게 서재로 불러내기라도 하면….

다급히 눈뜬 그리즈는 연회장 문 앞까지 한달음에 걸어가서 그를 곁눈질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단정한 그는 머리칼을 자연스레 쓸어 넘기며 그녀를 보았다.

아마도 성욕 어린 눈빛이지 않을까 했다. 이미 속살을 맛봤으니 자신의 여인이라는 듯 굴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지나치게 침체되어 있었고 차가웠다. 불결한 매춘부를 보는 눈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하찮은 생명체를 보는 듯했다.

이내 그는 복도 정면을 주시하며 미끈하게 걸어 나갔다. 그리즈는 그의 형체가 희미해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제 일은 없던 걸로 할 거라고 그가 몸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게 당연한 거지. 분명 잘된 일인데 마음 한 부근이 이상하게 아팠다.

대체 무얼 기대했던 걸까. 아름다운 공주와 혼인할 예정인 그가 천한 여인을 원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리즈는 애써 안도하며 연회장 문을 열었다. 나흘 전 수업 때보다 자세가 나아졌지만 나비처럼 자유로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정원 산책도 미루고 방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풍경을 즐겼던 그 벤치에 혹시나 그가 앉아 있을까 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볼일을 보다가 돌아온 벨린의 낯빛은 창백해져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리즈가 이유를 물으려는 사이 벨린이 고개를 푹 숙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아가씨, 정말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아까 티아가 타, 탈출했어요.”

티아는 요새 부쩍 호기심이 늘었다. 그러니 예상 못 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잡지 못했다면 큰 문제였다. 그리즈가 창백해진 입술을 움직였다.

“…어디로? 아직도 못 데려온 거니?”

벨린은 죽을죄를 쥐었다는 듯 손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급히 잡으러 갔는데 그, 그게…. 이리저리 냄새를 맡으며 날뛰더니 하녀장님이 나오는 틈을 타 전하의 방으로 달려 들어갔어요.”

“뭐…?”

“다시 데려오려 했지만 침대 밑으로 들어가서 나오질 않아 일단 그냥 돌아왔습니다. 침대 밑에 있었던 다른 녀석을 찾아 들어간 것 같아요.”

그리즈는 진한 현기증을 느꼈다. 하필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대공의 방이라니. 그대로 놔뒀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리기라도 하면 찾기도 힘들 터인데.

저택이 너무도 넓었다. 너무 혈기왕성한 녀석이라 호수로 달려들 수도 있고, 말발굽에 차일지도 몰랐다.

“전하께서는 방에 계시니?”

방이 비었다면 문 앞에서 이름이라도 불러 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주인이라고, 부르면 달려와 줬던 녀석이니 주인 목소리에 부리나케 나오지 않을까 해서.

급한 마음에 방을 나섰다. 뒤따라오던 벨린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는 조금 전까지 방에서 휴식 중이셨어요. 그래서 저와 하녀장님이 티아를 빼내지 못하고 돌아왔던 거였거든요.”

“전하께서도 아셔?”

“아뇨, 말씀드리지 못하고 바로 나왔어요. 오늘 유독 저기압이셔서….”

계단을 오르는 그리즈의 발걸음이 현저히 느려졌다. 일단 가서 확인은 해 보아야겠지만 그가 안에 있는 분위기면 당장 돌아와야지.

“나 혼자 다녀올게.”

귓속말하듯 말한 그리즈가 서재 옆방 문 앞에 섰다. 바이렌하그 가문 문양이 멋스럽게 양각된 양 문이 보였다. 살짝 벌어진 틈새로 환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턱대고 티아를 불렀다간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틈새로 안을 좀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즈는 한쪽 눈을 감고 문틈을 들여다봤다. 처음엔 새하�R던 시야로 창틀과 사이드 테이블이 보였다. 창틀 앞에서 사내의 다리가 바닥을 짚고 있었다. 그녀는 그게 창틀에 앉은 비아누트의 다리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도 창가에 있었는데…. 햇살을 받는 걸 좋아하는 걸까.

빛을 받아 화려해진 붉은 눈동자가 창가의 사내를 좇았다. 그는 창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원에 무언가 흥미로운 게 있는 것 같았다.

햇살을 흡수한 옆 테가 근사하다는 생각을 지운 그리즈는 조용히 돌아왔다. 벨린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울음을 터트릴 기색이라 일부러 차분하게 말했다.

“방이 비면 알려 줘. 내가 문 앞에서 티아를 불러 볼 테니까.”

“네. 자, 잘 보고 있을게요, 아가씨.”

“나는 정원에서 바람 쐬고 있을게.”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한 그리즈가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가 정원으로 나갔다. 흥미로울 만한 일은 없었다. 저택 뒷문 꽃밭에서 하인들이 울타리를 보수하는 중이었고, 기사들은 무리 지어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이 저택의 주인인 그는 수만 번도 넘게 봐 왔을 광경이었다. 고작 이걸 보기 위해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건가.

의아해하던 그리즈는 오늘 들어 처음으로 기지개를 켰다. 그때 문득 시선을 둔 2층 창가에서 또다시 대공 비아누트를 보았다.

먼 거리였지만 그와 눈을 마주쳤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아주 또렷하게 벤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팔을 스르륵 내린 그리즈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알아 버린 여인에게서 벗어나려는 듯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휑하게 열린 창문만이 남았다.

그리즈는 의사와는 상관없이 쿵쿵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길게 호흡했다. 설마… 그가 매음굴 창녀를 보려 기꺼이 고개 숙였던 건 아니겠지.

아마 마침 휴식을 끝내고 일하러 가려던 참이었겠지. 그렇게 오만한 성격에 당황해서 자리를 피할 리도 없을 테니까.

한동안 벤치에 앉아 꽃바람을 마셨다. 벨린은 뒤늦게 나타났다. 침울했던 아까와는 달리 미소 지은 채였다.

“아가씨, 좋은 소식이 있어요!”

다행히도 티아를 찾은 모양이었다. 그리즈가 벌떡 일어나 간절하게 물었다.

“찾았니?”

벨린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또다시 그리즈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네. 지금 아가씨 방에 데려다 뒀어요. 그런데 그….”

그러고 보니 벨린이 어떤 방법으로 티아를 데려온 걸까.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매만지던 그리즈가 벨린의 말을 따라했다.

“그런데 그…?”

벨린은 말해도 되는지 아닌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2층 계단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전하께서 언제쯤 외출하시려나 해서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봤거든요. 그런데 티아랑 다른 녀석이 침대에서 나와서 뛰어놀고 있더라고요.”

그리즈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감싸며 대답했다.

“티아가 탈출한 걸 들켰구나….”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벨린이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외출 채비를 하시다 말고 티아를 유심히 보셨어요. 그 녀석이 어쩌다 거기까지 왔는지 추측하시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다가 티아에게 네 주인이 보냈냐고 넌지시 물으셨는데….”

벨린은 자신의 실수로 제 아가씨가 오해받을까 봐 걱정하는 중이었다.

“설마 오해라도 하신 걸까요? 아가씨께서 오라버니의 관심을 끌고자 방에 티아를 넣어 둔 것이라고요.”

그리즈는 그가 그렇게 여기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는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어 봤을 것이다.

여인이 보란 듯이 손수건을 떨어트리고 가거나, 실수인 척 그의 옷에 차를 엎거나, 그의 공간에 물건을 두고 가서는 우연인 척 돌아와 관심을 끄는 일 말이다.

그가 가진 게 아주 많은 사내이기 때문이다. 그와 잠자리하면, 그의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를 적자로 인정받으면 제아무리 천한 신분의 여인이라도 명망 높은 귀족이 될 수 있다. 그야말로 단번에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지름길 아닌가.

억울한 면이 있지만 그리즈는 오히려 그가 자신을 그런 속물로 바라봐 줘서 고마웠다. 바보 같아서 이용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게 나았다. 그가 그렇게까지 경계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저택이 어수선해졌다. 요 며칠 자리를 비우셨던 할머니께서 오전 중에 돌아오실 거라고 했다.

벨린과 대화하던 그리즈의 낯빛이 근래 들어 처음으로 밝아졌다. 맹수의 왕국 같은 이 저택에서 할머니는 따스한 안전지대 같았다. 그리즈는 자신의 작은 목소리를 듣고자 귀 기울이고, 예쁘다고 칭찬해 주는 할머니를 통해 잠시나마 불안감을 잊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그리즈는 무거워진 마음으로 기도했다. 할머니에게만큼은 절대 실망 끼쳐 드리지 않게 해 달라고.

늘 그랬듯 신께서는 대답이 없었지만 이번 기도만큼은 반드시 들어주실 거라고 믿었다. 공주 자리에서 폐위당하고 매음굴에 팔려 가게 두신 걸 원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지옥 같은 세상에 홀로 남겨 둔 것도 감사히 받아들이겠다는 기도도 덧붙였다.

벨린에게 치장 받는 내내 그리즈는 할머니께 선물 드리기 위해 준비한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황금색 실로 불사조를 자수 놓고 있었다. 처음 티타임을 갖던 날 들었던 할머니의 얘기를 기억해 둔 덕분이었다.

“요새 들어 창밖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늘더구나.”

먼 훗날 눈 감으시게 된다면 불사조로 다시 태어나 세상을 유유자적 여행하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다. 그리즈가 또래 소녀처럼 미소 지었다.

그때 불쑥 문이 열리며 스테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즈는 일순간 굳어 버린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마침 머리 손질을 마친 벨린이 떨어진 머리칼을 손에 쥔 채 고개 숙였다.

“그럼 저는 나가서 마님 마중을 준비하겠습니다.”

벨린이 나가자마자 스테판은 눈으로 티아를 찾았다. 그러다 침대에 엎드려 있는 티아를 보고는 잡아들어 품에 안으며 말했다.

“며칠 만에 보는군. 너도, 얘도.”

티아가 반가워서 안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손난로가 필요할 정도로 추울 뿐인 것이다.

예상이 맞았는지 스테판은 손을 티아의 배에 넣었다. 티아가 깜짝 놀라며 발버둥 쳐도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탈스바그에 좀 다녀왔어. 손바닥만 한 곳인데 뭐가 그리 소란스러운지.”

평소 같았으면 그냥 흘려 넘겼겠지만 스테판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싶었다. 약점을 찾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리즈가 초승달 모양의 눈썹을 위로 올리며 물었다.

“탈스바그요?”

스테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톱만 한 내 영지지.”

“아….”

“돌아오는 길에 좋은 소식을 가져왔어. 모래쯤에 네 소꿉친구 디르크와 아델이 도착할 거야. 둘은 남매야. 디르크는 너와 동갑이고, 아델은 너보다 두 살 어려.”

기억해 두라는 듯 똑똑히 말한 스테판이 테이블에서 홍차를 따라 마셨다. 그리즈는 오늘도 화려하게 치장한 그를 살펴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직접 그쪽 가문과 서신을 주고받으시나요?”

스테판은 느긋하게 테이블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래. 지금 디르크의 어머니와 네 혼담을 나누고 있기도 하지.”

“…….”

“내친김에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네 사교계 데뷔 연회를 열자고 제안해야겠어. 디르크는 그때까지 붙잡아 놓을 테니까 잘 지내 두렴.”

술술 말하는 걸 보면 이미 계획했던 모양이다. 디르크를 이곳에 부르고 오랫동안 머무르게 해서 청혼을 받아 내려는 속내가 보였다.

하지만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걸까. 의아해하던 그리즈가 나지막이 물었다.

“정말 절 혼인시키실 생각인가요?”

스테판은 홍차의 향을 한동안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착하고 순진한 디르크는 네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도 모를 테니까.”

“…….”

“내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데 혹시라도 머리 굴리다가 걸리면.”

말을 잇는 그의 눈매가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괜히 그의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던 그리즈는 다급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아뇨, 저도 이 저택에서 어서 나가고 싶어요.”

“그래?”

“다만 혼인으로 제가 무얼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해요.”

그리즈의 붉은 눈동자는 그의 약점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짜 조카를 혼인시켜 그가 얻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다행히 빙빙 돌려 물은 덕분에 스테판은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놀란 눈치였다. 여태 바보처럼 협박만 당했던 여인이 뒤늦게 제 몫을 챙기려 들지는 몰랐다는 듯.

“무얼 얻고 싶지?”

의아하게 물은 그는 이내 교활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에도 한계가 있으니 차라리 그녀가 동업자로 나서 주는 게 좋다는 의미였다.

“네가 얻을 수 있는 건 등신같이 착한 남편이지.”

“…….”

“얼굴도 그만하면 준수하고.”

디르크를 상상해 보던 그리즈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연기했다. 그러곤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쳐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후작 각하께서는요?”

“나?”

짧게 반문한 그는 생각보다 쉽게 속내를 내비쳤다.

“나는 든든한 우군을 얻게 되겠지.”

아마 디르크의 가문을 우군이라고 표현하는 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스테판은 든든한 우군을 필요로 하는 걸까.

짐작 가는 답은 하나였다. 대공에게 군사력을 보태 줄 인간은 아니니, 그의 권력을 뺏으려 준비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곤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대공이나 할머니께 사실을 알리고 싶지만 내밀 수 있는 증거가 없지 않나. 정쟁에 눈이 밝은 사람들이니 눈치챌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까.

곰곰이 고심하는 찰나 스테판이 경고하듯 눈을 날카로이 떴다.

“디르크의 가문이 내게 힘을 주게끔 네가 도울 거야. 안 그러면 네 출신이 낱낱이 밝혀질 테니.”

“아….”

일순간 탄식이 터졌다. 죽어야지만 저 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디르크…. 디르크는 어떤 사내일까.

스테판의 눈치에 못 이겨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하녀장이 찾아와 얼어붙었던 분위기를 깼다.

“말씀 중에 송구합니다만 마님께서 정문을 통과 중이라고 합니다.”

스테판은 마침 기다렸다는 것처럼 물 흐르듯 방을 나섰다.

“가지.”

그리즈는 가죽신의 뒤꿈치만 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저택 문 앞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는 대공이 보였다.

뒤늦게 나타난 사람들에게 으레 눈짓으로 인사라도 할 법했지만 그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차갑게 분노 중인 뒷모습만 보였다.

하지만 누구를 향한 분노일까. 순결했던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 여인에게. 아니면 충동에 무너진 자신에게…?

소리 없이 질문을 던지던 그리즈는 뒤늦게 고개 저었다. 자꾸 생각하지 말자. 집무에 차질이 생겨 잠시 예민해진 건지도 모르잖아.

그때 마차가 도착했다. 며칠 전보다 안색 좋은 모습으로 내린 할머니가 그리즈의 손부터 부드럽게 쥐었다.

“본의 아니게 집을 너무 비웠구나. 할미 보고 싶었지?”

아이처럼 미소지은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대공의 관심이 그녀의 얼굴로 떨어졌지만 그녀는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손등에 깃든 할머니의 온기를 잠시라도 더 느끼고 싶었으므로.

“네, 매일매일 기다렸어요.”

하인들은 할머니의 짐을 저택 안으로 바삐 옮기고 있었다. 산만한 틈으로 스테판이 할머니를 반갑게 끌어안았다.

“건강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의사에게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어머니를 다시는 마중할 수 없을 줄 알았거든요.”

그리즈는 스테판의 가식이 퍽 불쾌했다. 그는 할머니의 회복을 자식 된 도리로 기뻐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할머니께서 건강을 회복하시어 힘을 보태 줄 수 있게 된 게 좋을 것이다.

시커먼 속내를 모르는 할머니는 아들의 환대에 환히 웃어 보였다. 장성한 자손들이 마중 나온 자체만으로도 행복감이 넘치시는 것 같았다.

“다들 나와서 반겨 주니 고맙구나. 집에 아무도 없었다면 돌아올 생각조차 못 했을 거야. 마차 타는 게 의외로 고역이었거든.”

가볍게 농담하신 할머니가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렇게 모인 김에 차나 한 잔씩 하자꾸나.”

티타임 장소는 할머니의 방 테라스였다. 레이스 테이블보가 멋스럽게 깔린 테이블 앞에 할머니가 먼저 앉았고 대공과 스테판에게 자리를 권했다.

눈치를 살피던 그리즈는 뒤늦게 앉았다.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대공의 존재감에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였다.

잠시 정신을 놓으면 맹렬했던 체온이 가슴에 어린다. 입술의 부드러운 감각, 갈증에 무너진 얼굴과 그녀를 집요히 갈구하던 숨결 또한 그랬다.

그러다 가슴에 박히려 하는 그를 떨쳐 내려 고개 저었다.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왜 대공 비아누트를 자꾸만 떠올리고 긴장하며 나약하게 가슴 떠는 건지.

그녀는 스스로도 이해 못 할 감정에서 달아나려 눈을 감았다. 근사한 외모와 막강한 권력에서 풍겨 오는 단내에 취하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앞에 놓인 차를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 모습이 할머니의 눈에 이상하게 비친 모양이었다.

“별일 없었지?”

그리즈는 정신 차리고 가슴께를 문지르며 말했다. 거듭 선명해지는 그의 입술을 지워 내듯이.

“네, 없었어요.”

“하긴 짧은 사이에 뭔 일이야 있었으려구.”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스테판은 찻잔을 들어 라임 차의 향을 음미하다가 넌지시 물었다.

“대주교님은 괜찮으시죠?”

“그래, 비아누트가 혼인할 거라는 얘기에 무척 기대하고 계시더구나.”

사람답게 말하고 웃는 그들과 달리 대공은 조각상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티타임이 퍽 지루한 게 아니라면 어제의 사건 때문일 것이다.

창녀 앞에서 일생일대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게 수치스럽겠지. 그게 정말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수치스러워서 피하고 싶은 건 서로 마찬가지이니까.

대공을 곁눈질하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라임의 산뜻한 향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 찰나 할머니가 실크 파우치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리즈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성당에서 이런 걸 팔더구나. 아름다운 색감을 보니 네 생각이 났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본뜬 문양의 손수건이 멋들어지게 흔들렸다. 그리즈는 손수건을 받아 들고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봤다.

“와… 이런 문양은 처음 봐요.”

이렇게 선명한 빨간색과 파란색 색실은 희귀할 것이다. 아마 할머니도 손녀 생각에 큰맘 먹고 사 오셨을 테지. 그리즈는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는 걸 깨닫고는 손수건만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할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좀… 특이하지? 마음에 안 드는 거니?”

화들짝 놀란 그리즈가 손사래 쳤다.

“아뇨, 정말 예쁘지만 귀한 물건이잖아요.”

유유히 차를 마시며 기다리던 스테판이 그때 활짝 웃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율리아나.”

눈치껏 받으라는 의미였다. 그리즈는 손수건을 꼭 쥐며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기다렸다는 듯 스테판이 화제를 전환했다.

“이렇게 모인 김에 드리는 말씀인데 율리아나를 위한 사교계 데뷔 연회를 여는 게 어떨까요? 마침 디르크와 아델도 조만간 바이렌하그 저택에 머무를 테니까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말하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랄 지경이다. 하긴 저 정도나 되어야 남의 눈에서 피눈물 뽑고도 뻔뻔히 살아가겠지. 그리즈가 티 나지 않게 치를 떠는 사이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도 시기가 늦었긴 하지.”

귀족 여인이라면 열다섯쯤 사교계에 데뷔하는 게 관례이니 사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리즈는 기묘하게 웃는 스테판을 보고 조만간 정말로 사교계에 데뷔하리란 걸 직감했다.

“그럼 날짜는 언제로 잡는 게 좋겠습니까?”

“이왕 하는 거면 제대로 준비하고 싶어. 한 달 후쯤이 좋겠구나.”

“그럼 초대장은 제가 준비할게요, 어머니.”

그리즈는 오가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할머니는 이번엔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바이렌하그 가주의 의견을 물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대공은 응당 관심 가져야 할 대소사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는 채 생각에 잠긴 그에게 일제히 관심이 쏠렸다.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무슨 일 있니?”

그제야 대공의 몸에 영혼이 스르륵 들어온 것 같았다.

“없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한 그는 라임이 가라앉은 차만 주시했다. 할머니는 그런 그가 익숙한지 느긋이 미소지었다.

“여동생이 슬슬 혼인 준비를 하니 오라비로서 싱숭생숭한 게로구나.”

“아닙니다.”

“정말 아닌 게야? 어릴 때부터 너는 맞으면 맞을수록 강하게 부정했었지 않니.”

더 부정하면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았는지 그는 입을 닫았다. 다른 날보다 샤프하고 어두운 눈매를 살피던 할머니가 화제를 돌렸다. 일상 얘기가 한동안 이어졌고 이후 티타임을 마치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즈는 선물 받은 손수건을 꼭 쥐고 침대에 누웠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조금 쉴 생각이었지만 할머니의 말을 자꾸 곱씹고 있었다.

“정말 아닌 게야? 어릴 때부터 너는 맞으면 맞을수록 강하게 부정했었지 않니.”

맞으면 맞을수록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이라….

세상에 그렇게 삐뚤어진 사람이 존재하는 게 퍽 신기했다. 할머니께서 과묵한 손자를 좀 놀리셨던 걸까.

길게 한숨 쉬는 찰나, 벨린이 앞치마로 이마를 닦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벨린은 저택 내에서 일어났던 일을 제 아가씨에게 알리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는지 부쩍 말을 늘렸다.

“한바탕 짐 정리가 끝나고 이제야 저택이 좀 조용해졌네요. 마님께서는 낮잠에 드셨고, 후작 각하는 집무실로 가셨어요.”

“그렇구나. 알려 줘서 기뻐, 벨린.”

당연한 일이라는 듯 벨린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간만에 그림을 그리시려는 것 같아요. 아까 보니 집사장님이 물감을 배합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림?”

그가 어디서 어떤 그림을 그리려 하냐고 물으려 하려던 그리즈가 입술을 닫았다. 대공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알고 싶은 이 마음이 어디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보를 모으기 위함이라고 뒤늦게 합리화했지만 그럴듯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은 관심이었다. 스테판 같은 최악의 인간에게 휘둘리다 보니, 대공이 그나마 인간답게 보이는 부작용을 겪는 것이다.

그래도 고질병이 아닌 부작용에 불과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즈가 안도하는 사이 벨린이 창밖을 내다봤다.

“이제 승마 수업 받으러 가실 시간이에요.”

“그래, 가야지.”

말 타는 게 몸에 밴 덕분에 승마는 어렵지 않았기에 비교적 가벼운 걸음으로 마구간 앞에 도착했다. 지상의 천국이라는 바이렌하그의 별칭에 걸맞게 하늘이 새파랬고 잔디는 푸르렀다. 불안하고 심란한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승마 수업은 말을 타고 문관을 뒤따라 대공저 주변을 달리는 게 전부였지만 그리즈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앞으로 어떠한 비상 상황에서 말을 타게 될지 몰랐다. 저택 정문과 후문의 경비를 살피기도 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저택 문이 항시 닫혀 있었고, 입출입자와 수송물을 경비대가 엄중하게 확인했다. 짚더미에 숨어서 나가는 것도 무리였다. 율리아나로서 나가는 게 아니라면 잡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몰래 외출증을 받을 만한 방법이 없다. 율리아나가 오면 보고하라고 경비대장에게 말해 두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리즈는 철옹성 같은 정문을 살피다가 고삐를 돌렸다. 다행히 쾌청한 날씨라 공기가 맑고 시야가 훤해 기분이 풀렸다.

이런 날씨라면 무얼 하더라도 즐겁겠지.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멋진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질 것 같기도 했다.

탁 트인 호숫가, 들꽃 언덕, 작은 편백나무 숲을 들렀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풍경을 그리는 대공은 없었다. 없으니 궁금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씨에 그는 무얼 그리는 걸까. 수집방 안에서 박제된 짐승을 그리는 게 아니라면 어딘가에 있을 터인데.

한바탕 땀 흘리고 돌아왔을 땐 티아가 또 자취를 감춘 채였다. 그리즈는 할머니께 선물 받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복도를 샅샅이 뒤졌다.

그때 대공이 로비 계단으로 내려왔다. 한 손으로 하얀 강아지를 쥔 채였다.

로비로 나가려던 그리즈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신경 못 쓰는 사이 티아가 또 형제를 만나러 갔었구나. 방은 빠져나가는지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다고 자책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뒤늦게 티아를 발견한 벨린이 대공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저, 전하. 같은 실수를 반복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1층으로 완전히 내려오려 하던 대공이 계단에서 멈췄다. 어쩐 일인지 그의 눈동자가 로비를 훑었다. 복도 모퉁이에 반쯤 숨은 그리즈를 찾아냈다.

예상하지 못했던 관심이다. 그리즈는 신경이 서서히 당겨지는 기분으로 벽을 짚었다. 할머니의 테라스에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그였다. 이제 와 무엇 때문에 관심을 두는 걸까.

어제처럼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피부가 홧홧해졌다. 그리즈는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던 가슴께를 꾹 누르고는 방으로 달아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영역에서, 또 다른 그의 영역으로 자리를 피했던 것이겠지만.

방으로 돌아온 것은 다행스럽게도 벨린과 티아뿐이었다.

“휴… 전하께서 다행히 문책하지 않으셨어요. 앞으로 정말 주의할게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티아는 그리즈에게 달려가 꼬리 흔드느라 바빴다. 그리즈는 형제를 그리워하는 짐승을 나무라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쓱쓱 긁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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