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2)

***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 천혜의 대지 바이렌하그의 적법한 주인.

그건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가 지나가면 모든 백성이 머리를 조아렸고 바이렌하그 가문을 찬양해 왔다. 물론 절대적인 충성심이 아닌, 목숨을 보호해 주는 자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비아누트는 그들의 찬양이 언제나 감흥 없었다. 바이렌하그 대공령 위에 터 잡은 모든 게 그의 것이었다. 나무와 호수, 꽃들과 농작물, 심지어 사람마저.

그러니 지키는 것이 당연했고, 원한다면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비아누트는 마땅한 이유 없이는 죽이거나 지키지 않았다. 그가 정한 규칙대로라면 그랬다.

검은 나비를 잡은 건 아주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벤치에 앉자마자 우연히 검은 나비를 봤을 때는 그럴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가짜 율리아나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고, 나비를 보던 붉은 눈동자를 기억해 냈다.

천진난만하고 무방비한 소녀의 눈, 그건 확실히 율리아나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대공가에 빌붙으려 작정한 사기꾼치고는 허점이 많았다. 그건 비아누트에게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껏 필요해 의해 선과 악을 구분해 왔다. 악한 자는 틈나는 대로 죽이고, 선한 자만 영지 안에서 살게 했다. 가짜 율리아나에게도 적용해야 마땅한 규칙이었다.

그녀가 영지에 불필요한 악인이라는 걸 느끼는 즉시 죽일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지금껏 주시해 온 가짜 율리아나는 모순덩어리였다. 바이렌하그가에 빌붙은 기생충이지만 그 어떤 것에도 기생하지 않았다.

뼛속부터 귀족인 듯 굴다가도 돌아서면 자괴감을 느끼는 얼굴을 했다. 무엇보다 순진무구한 눈빛을 가진 창녀라는 게 모순의 정점이었다.

비아누트는 창녀 마리아가 선인지 악인지 구분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썼지만 아직도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며 유감스러운 사실을 발견했다. 창녀 마리아의 모순적인 특징에 흥미를 느끼는 스스로였다. 그게 규칙을 깨고 나비를 잡은 이유였다.

방으로 돌아온 비아누트는 나비를 가둔 손수건을 쥔 채로 널찍한 창틀에 누웠다. 요새 들어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일광욕이나 풍경 감상에 딱히 관심 없는데도.

그는 누운 채 무릎을 올려 세워 발로 창틀을 짚고는 팔베개하며 천장을 주시했다. 모든 신경은 손수건에 갇힌 나비에게 쏠려 있었다. 안에서 어떻게 망가지고 있을 궁금했고, 그 모습을 보고 창녀 마리아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알고 싶었다.

그때 백발의 문관 브리언 자작이 노크 후에 들어와 창틀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전하, 브리튼의 공주님께서 친필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비아누트의 이채로운 눈동자가 브리언에게 향했다. 나른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요새 들어 그는 늘 그랬다.

브리언은 그게 휴식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의 경고라는 걸 알았다. 비아누트의 배 쪽에 내밀어졌던 서신이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사이드 테이블에 두겠습니다.”

머뭇거리던 브리언은 고민 끝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빠르게 답장하는 만큼 브리튼의 공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회신에 걸리는 시간으로 사내가 가진 애정을 가늠해 볼 수 있으니까요.”

정치와 검술에는 시간을 써도 여인에게는 무심한 젊은 대공을 위한 첨언이었다. 영지 내 모든 관료와 주교가 대공의 혼인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는 비아누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해야지.”

지금껏 그는 할머니가 병상에서 일어나면 하겠다며 혼인을 차일피일 미뤄 왔다. 어릴 적에 황망한 사건으로 약혼자를 잃은 까닭이었다. 현재는 공석으로 둔 그 자리를 다른 여인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수록 관료들의 근심은 깊어졌고 국왕까지 나서 대공의 책임을 다하라 명했다. 그러니까 영지를 물려줄 아들을 하루라도 빨리 생산하라는 임무를 하사한 것이었다.

사춘기 후 깊어진 육욕은 거스를 수 있었지만 왕명을 어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이미 결정된 혼사를 기대하고 기뻐해야 했다. 그가 창틀에 걸터앉았다.

브리언은 그의 선택에 안도하다가 창틀 아래 바닥에 놓인 크리스털 그릇을 들여다봤다. 안에는 햇빛에 잘 말린 붉은 육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녀석이 오늘은 밥을 먹지 않은 모양이군요.”

비아누트는 브리언이 말한 ‘녀석’이 하얗고 작은 개라는 걸 알았다. 녀석은 방으로 데려온 첫날에 조금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고 짖더니 제 울음소리에 놀라 침대 밑으로 도망갔다. 그 후로 본 기억이 없었다.

손난로의 본분을 잊을 정도로 겁이 많은 것 같았다. 밥은 먹나 싶을 정도로 입도 짧았고 움직일 때 기척도 없었다.

비아누트는 문득 녀석과 비슷한 붉은 눈의 소녀를 떠올렸다가 손으로 눈가를 매만졌다. 그때 브리언이 밥그릇을 침대 밑으로 넣더니, 허기를 달래러 온 녀석을 잡아 쑥 빼내며 말했다.

“잡았다, 요 녀석!”

그러곤 비아누트의 앞으로 가져왔다. 그때까지도 녀석은 앞다리로 브리언의 가슴팍을 밀며 달아나려고 하고 있었다.

“기회 될 때 잘 어루만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녀석이 전하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먼저 찾아올 테니까요.”

“…….”

“훗날 폐하께서 요 녀석과 함께 입성하라고 명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레 충언한 브리언이 그의 품 앞에 강아지를 내밀었다. 그는 한데 뭉쳐 쥐었던 손수건 끝에 책을 올려놓고는 녀석을 마지못해 품에 안았다.

예상보다 더 부드러운 온기가 차가운 손을 적셨다. 눈매를 나른하게 좁힌 비아누트는 녀석의 배를 어루만져 봤다. 기분 좋은 따스함이 손바닥을 타고 들어와 온몸으로 번졌다.

그의 속눈썹이 느리게 떨렸다.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기에 탐내지 않았던 감각이었다. 강인한 기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므로 추위와 외로움, 두려움을 이겨 내는 방법부터 배웠으니 필요성을 느낄 새도 없었고.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추위를 녹이는 온기가 한편으로는 조금 불쾌하게 느껴지는 거다.

그때 눈치를 살피던 녀석이 그의 품에서 소심하게 달아났다.

하얀 뒷모습을 보던 비아누트는 지금보다 더 이전에 처음 느껴 봤던 온기의 맛을 떠올렸다. 그 달콤한 맛을 알게 해 준 붉은 눈동자의 소녀가 시야에 잔상처럼 번졌다.

불쾌감의 원인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정원에서 가짜 율리아나의 턱에 손을 대는 순간 기분 좋은 온기를 느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온기는 완벽히 소유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미간을 좁힌 비아누트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온기를 잡듯 주먹을 쥐었다. 이렇게 갈구할 필요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혼인하면 평생 느낄 하찮은 감각일 테니까.

브리언은 도망치는 녀석을 잡으려다가 등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그러곤 녀석을 부르려다 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이름은 지으셨습니까?”

비아누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녀석은 손난로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고, 사명을 다하고 죽으면 그만이니 이름을 붙여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름을 붙여 두면 길들이기 편하겠지. 녀석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녀석은 겁이 많고 기척을 내지 않는다. 부드러운 온기를 가졌고, 손대려 할수록 달아난다. 그리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마치 가짜 율리아나처럼.

검지로 아랫입술을 훑던 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마리아.”

필사적으로 가져보려 했던 온기는 어느샌가 완벽히 날아가 버렸다. 손을 펴 창백해진 손바닥을 확인한 그는 소유의 한계를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가짜 여동생에게 놀랄 만한 보답을 주기로 결정했다.

심심풀이 앙갚음이었다. 선물을 보고 망가지는 표정을 즐기기라도 해야겠다.

다만 기뻐하는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 아주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하리만큼 손끝이 짜릿해졌다.

감각이 망가진 모양이다. 단지 어젯밤 잠을 설쳤기 때문에.

***

또 하루가 밝았다.

그리즈는 반쯤 넋을 놓은 채로 모든 수업에 임했다. 교사 탈리 백작 부인은 어제 그리즈가 할머니께 선물 드리려던 손수건을 잃어버린 까닭에 오늘도 울적한 거라고 짐작했지만 그건 한 가지 이유에 불과했다.

그리즈는 가련한 나비가 눈앞에서 잡혀 가던 광경을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던 스스로가 너무 비겁해 부끄러웠다.

나비가 누구 때문에 잡힌 건데. 나비가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비는 꽃술을 배불리 먹고 멋지게 하늘을 유영하고 있을 텐데….

하루 일정을 힘겹게 마친 그녀는 힘없이 방문을 열었다.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앞으로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걸 겁내게 될 것 같아서.

멍하게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을 대공이 유도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더러운 창녀가 사람처럼 자연을 누리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같았다.

그리즈 역시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빼앗으려 하는 그가 싫어졌다. 싫어하니 반항하고 싶어졌다.

되레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 마음을 떳떳하게 여기고 싶었다. 그가 그것을 죽이면 다른 걸 사랑하고, 또 다른 걸 사랑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걸 남김없이 죽여도 상관하지 않고.

하지만 생각을 거듭하니 문제가 생겼다. 그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죽여 버리면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지는데….

차라리 생각을 달리했다. 싫은 것들을 억지로라도 좋아해서 그가 없애 주기를 기다리자고.

그러나 그것도 문제였다. 그를 없애려면 그를 좋아해야만 하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었다.

곰곰이 고심하던 그리즈가 힘없이 침대에 누웠다. 말도 안 되게 의식하는구나. 가짜 여동생이 무엇이나 된다고 그가 그 정도로 신경을 쓸까.

천장을 응시하던 그리즈는 좋아하는 것들 잃지 않도록 천천히 그려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언니, 동생 그리고 벨린, 로렐, 티아. 그러다 잠이 들었다.

다행히 티아와 정오를 느긋하게 즐기는 꿈을 꿨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는 줄 알았지만 잠결에 노크 소리를 들었다.

살짝 눈을 뜨자 새카만 방이 보였다. 눈가를 비빈 그리즈는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방문을 열었다.

당연히 벨린이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 타 버린 초를 갈아 주기 위해서, 혹은 급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하지만 문 앞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신사가 서 있었다. 그가 대공의 집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리즈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어쩐 일이신가요. 이 시간에….”

특별한 용건이기를 기도했다. 대공께서 마음을 바꿔 가짜 여동생을 멀리 보내 주기로 했다든가, 아니면 디르크와 혼인시키지 않기로 했다든가…. 아니면 차라리 김빠질 만큼의 별것 아닌 용건이기를. 입술이 바싹 마르는데 집사의 대답이 울렸다.

“대공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아가씨.”

그리즈의 눈가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집사는 어떠한 양해도 구하지 않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한참을 걷자 며칠 전에 왔었던 대공의 서재에 도착하게 됐다.

“전하, 율리아나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모두가 잠들었는지 주변이 고요했다. 정원의 벌레 울음소리만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일정 간격으로 복도를 밝힌 벽의 촛불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잠들기 딱 좋은 분위기에서 대공은 어찌 아직까지 서재에 있는 걸까.

“들어와.”

방 안에서 차분한 저음이 들렸다. 문을 열어 준 집사가 그리즈 혼자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그리즈는 피곤한 마음에 그대로 입고 잔 옷을 내려다봤다. 분홍색 레이스 드레스였다. 가슴부터 배까지 지그재그 모양의 끈으로 조여 입는 구조였다.

다행히 정오쯤에 벨린이 다시 묶어 준 리본이 그 모양 그대로였다. 이 정도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겠지. 그리즈가 서재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는 평상 같은 창틀에 길게 누워 천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창유리로 보이는 보름달과 그의 섬세한 실루엣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때 그녀를 흘끔 바라본 그가 창틀에 걸터앉아 두 팔로 창틀을 짚었다. 다리가 길쭉한 덕분에 바닥을 짚고도 남은 발이 앞으로 쭉 뻗어졌다. 매끈한 가죽 신발 끝으로 촛불이 아롱아롱 비쳤다.

한 발치에서 멈춘 그리즈는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때 그가 드레스를 의미 없이 훑어보다가 팔짱을 꼈다. 오늘 퍽 바쁜 하루를 보냈던 건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까이 와, 율리아나.”

피곤함을 무릅쓰고 불렀다는 건 중요한 용무가 있다는 의미 같았다. 이 저택을 떠나라거나, 디르크와 혼인하지 말라거나. 그리즈는 희망의 끝을 붙잡은 채 그의 발끝 앞에 섰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창틀에서 손바닥만 한 검은색 액자를 집어 내밀었다.

“선물이야.”

그의 코앞으로 내밀어진 선물을 보던 그리즈는 곤란해하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선물을 받으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것도 편히 벌린 그의 종아리 사이로. 새로운 방식의 굴욕감을 주려는 건가.

그는 왜 가져가지 않느냐는 듯 액자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은은한 촛불이 어린 분위기와 보름달이 보이는 창가 앞에 앉은 사내 그리고 그 사내의 여유로운 미소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누구든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법이다. 그러나 그리즈는 끌림을 거부하듯 고개 숙인 채 걸었다. 걸음을 멈췄을 땐 시야 양옆으로 사내의 길쭉한 종아리가 자리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때쯤 이게 어떤 구도인지를 알 수 있었다. 주인과 개. 부르면 달려가고, 간식을 주면 먹고, 작은 선물에 행복해하는 그런 관계였다. 대공과 창녀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구도일 것이다. 이로 문 입술을 파르르 떨던 그리즈가 액자를 건네받았다.

액자 안에는 영영 다시 보지 못할 줄 알았던 것이 보란 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날개를 멋지게 펼친 검은 나비였다.

하늘로의 비행을 금지당한 채로 그대로 굳어 버린, 그에게 저주받은 나비였다.

그리즈가 슬픔에 젖은 눈동자를 가리듯 눈가를 매만졌다.

그는 자신을 방어라도 하듯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지금 기분이 좋은지 싫은지 읽으려는 듯했다. 새파란 눈에 무언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니, 어쩌면 텅 빈 것도 같았다.

키우던 늑대개에서 저런 눈을 본 적 있었다. 정원에서 하얀 토끼를 키웠었는데 움직임이 워낙 빨라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했다. 토끼를 만져 보겠다는 마음은 토끼를 잡겠다는 열망이 되었고, 그리즈는 하루가 멀게 토끼의 뒤를 쫓았다.

그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늑대개가 어느 날 근사한 털을 바람에 날리며 질주해 토끼를 잡아 왔다.

주인이 지대하게 관심 가지는 토끼를 질투한 건지, 단지 주인이 원하는 걸 안겨 주고 싶었던 건지 그런 건 알 수 없었다.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칭찬해 달라는 듯 꼬리 흔드는 모습이 유독 가슴에 박혔으니까. 그동안 너도 사랑받고 싶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즈의 가슴은 그때처럼 먹먹해졌다. 하지만 대공 비아누트의 가만한 시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단지 나비의 죽음이 슬퍼서겠지. 그게 당연하니까. 나비를 보는 그리즈의 눈동자가 슬픔에 젖어 흔들렸다.

“저는 살아 있는 나비를 좋아해요.”

대공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해하지 못 하는 얼굴을 했다. 앞으로 나비가 그립다면 정원에 나갈 필요 없이 액자를 보면 되지 않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다 차갑게 굳어 버린 표정을 본 그의 눈동자는 바닥을 배회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 눈동자가 다시 그리즈의 얼굴에 닿았다.

“나는 이게 좋아.”

그가 나른하게 말하며 보조개를 드러냈다. 그러곤 눈물을 참는 여인의 얼굴이라도 보상으로 삼으려는 것처럼 천천히 곱씹었다.

그리즈는 최대한 고개를 푹 숙여 표정을 가리고는 혼란에 빠졌다. 울상이 된 얼굴을 씹어 대는 파란 눈동자가 너무나도 진한 생기를 머금고 있으므로.

그렇게 맛있을까. 그렇게 기분 좋을까.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기에 그는 이 정도로 못된 인간이 된 걸까.

어찌 됐든 그가 용건을 마친 것 같았기에 나가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의 검지가 다가와서는 무언가 확인하듯 그리즈의 턱선을 느리게 쓸었다.

의미 없이 건드려 보는 것 같았다. 벌벌 떠는 반응이 재밌어서. 혹은 괴롭히는 행위가 즐거워서.

그리즈는 반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덤덤하기 힘들었다. 사내의 평평한 가슴팍이 자꾸 보였고, 그 몸에서 로즈마리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생각을 지배당하는 것 같았다. 네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내가 손대고 있으니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너무 긴장한 탓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꿰뚫듯 보던 그가 의아하게 웃었다.

“긴장했네.”

“…….”

“창녀라더니.”

사내에게 웃음 팔고 몸 팔아 연명해 온 여인이 고작 검지 하나 닿았다고 귀까지 붉힌 게 이상했던 거다. 변명해야 했지만 당장은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기도 버거웠다. 그리즈는 그저 자신이 창녀라는 사실을 긍정했다.

“맞아요. …그거.”

이마 쪽에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그 의미를 짐작하는 순간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졌다.

“증명해 봐.”

올해 겪은 일 중에 최고로 이상한 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늘 공무에 치이는 대공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것도 이상했고, 창녀라는 걸 증명해 보이는 것도 이상했다.

귀를 의심하던 그리즈가 초조하게 고개 들었다. 공들여 빚은 것처럼 잘생긴 얼굴이 어두운 시야에 들어왔다. 색다른 흥미에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창녀인 걸 증명하려 안간힘을 쓴다면 퍽 재밌겠다는 듯, 줄행랑을 치면 그건 그거대로 즐겁겠다는 듯.

어쩌면 악몽을 꾸는 걸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아닌 여인에게 그가 이토록 열띤 가학심을 드러낼 이유는 없으니까.

그러나 다급하게 베어 문 아랫입술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명백한 현실인 것이다. 그가 무엇을 위해 이리도 냉혹하게 구는 건지 알고 싶었다.

“어째서 증명해야 하죠?”

그의 대답에는 조금의 고민도 없었다.

“거슬려서.”

그가 상냥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육하원칙에는 기꺼이 대답해 줄 정도로 논리적인 사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지극히 비논리적인 감정을 드러냈고 그것은 크나큰 이질감을 몰고 왔다. 차가운 성군이라고 하인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던 사내는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그리즈의 눈앞에는 나른한 분위기 속에 집요한 시선을 지닌 사내만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태초부터 지닌 무방비한 얼굴일지 몰랐다.

하지만 누구도 몰랐을 얼굴을 보고 기뻐할 마음은 없었다. 브리튼의 공주, 그녀가 봐야 할 얼굴을 고작 창녀 따위가 먼저 봤다는 사실에 유감을 표했을 뿐이다. 그리즈는 힘겹게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거슬리셔서….”

불안정한 어둠 속에서 흔들림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눈에 영혼이 머무른다던데.”

햇살 가득한 정오, 그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런 말을 했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게 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황빛 촛불을 흡수한 신비로운 눈동자가 그리즈의 눈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 기회에 그리즈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였다. 처음엔 진한 파란색 홍채를 보았고, 동공에 가까워질수록 밝아지는 눈동자를 보았다.

그의 눈은 신비롭게도 안으로 갈수록 노란빛을 띠었다. 언젠가 봤던 새벽하늘의 은하수 같았다.

어머니는 은하수가 갈 곳 없는 별들이 이룬 강이라고 말씀하셨었다. 그 말을 들은 그리즈는 방황하는 별들을 어서 집으로 보내 달라고 신께 기도드렸었다.

그때 그랬듯 지금도 막연히 기도했다. 당신 역시 방황하는 중이라면 어서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기를.

결핍 가득한 신비로운 눈을 샅샅이 바라보던 그리즈는 시선을 피했다. 역시나 그녀의 눈을 살펴봤던 그는 불만족스럽게 말했다.

“더러운 창녀의 영혼은 어딨을까.”

그리즈의 눈동자를 보고 느낀 감상평이었다. 천한 눈빛을 기대했던 그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 것이었다.

아마도 매음굴에서 왔다는 창녀가 창녀 같지 않아 의문을 가진 거겠지. 창녀가 아니라면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또 어떤 사기를 칠 생각인지 궁금해서.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뿐이에요.”

작게 말한 그리즈가 고개를 떨궜다. 그는 미끈하게 휜 자신의 입술을 검지로 훑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눈은 됐어.”

곧바로 드레스를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더럽고 천박한 대접을 정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사실을 실토할 기회를 주듯 소매를 천천히 걷어 팔꿈치까지 올려붙였다.

그러나 그리즈는 그가 준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귀족 사회에서도 처녀성은 큰 가치가 있었고, 그만큼 돈이 됐다. 이 시점에서 가치가 부풀려진다면 그녀는 가장 돈 많고 가장 변태 같은 사내에게 팔려 나갈 것이 자명했다.

그리즈가 입을 꾹 닫고 있는 동안 그는 다른 쪽 소매도 걷어 올렸다. 그러곤 정말로 직접 알아보겠다는 듯 아랫입술을 느리게 물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발 떼면.”

“…….”

“죽는 거야.”

다른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면 혼비백산하며 달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대공 비아누트는 동정이며 혼전순결을 중요시한다고 했다.

거짓말쟁이가 또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보고자 고결한 영혼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누가 어떻게 만지든 상관하지 않는 모습만 보이면 그는 흥미를 잃을 것이다.

그래, 이것만 버티면…. 그리즈는 애써 감흥 없는 눈으로 창밖의 달을 바라봤다.

“마음대로….”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은 그는 앞섶을 여미고 있는 리본 끝을 잡았다.

일순간 그리즈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훅 떨어졌다. 길쭉한 손가락이 리본을 느릿하게 당겼다.

갑자기 배가 허전해지며 가슴 끝이 아찔해졌다. 숨이 파들파들 떨리는데 들킬까 봐 제대로 내쉬지도 못했다.

매듭에서 해방되자 몸에 비해 커서 곤란했던 가슴이 끈을 열며 풍만한 크기를 되찾았다. 물론 그는 그것을 세세히 보는 듯하면서도 그 무엇도 보지 않았다. 역시나 시험할 생각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리즈는 안도하지 못했다. 네글리제를 사내에게 보이는 것조차 처음이라서, 주변이 너무 어두운 까닭에 바이렌하그 대공만 보여서, 그와 초야라도 치르는 것 같아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긴장하며 만진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끈적했다.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온몸이 눅눅하게 젖어 버릴지도 몰랐다.

“옆구리에 창녀 표식이 새겨져 있어요. 보기 싫으시다면 그려 드릴 수도 있어요.”

애써 담담하게 말한 그리즈가 손으로 표식이 있는 자리를 짚었다. 어깨가 움직이자 가슴이 자연스레 출렁거렸다.

그의 시선이 분홍색 끈 사이로 보이는 하얀 네글리제를 덮쳤다. 정확히는 얇은 네글리제 속으로 훤히 비치는 가슴골이었다.

극도로 긴장한 그리즈는 귓속에서 삐익, 하는 소음을 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찰나, 여체 앞에서 어둡게 빛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는 어릴 적에 모친을 잃었다고 했다. 그 후 성기사단으로 보내졌다고 했으니 유모를 통해 여인의 몸을 인지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껏 제대로 느껴 보지 못했던, 아니 볼 수도 없었던 여인의 속살을 보는 걸지도 몰랐다.

그림자처럼 지내다가 사라지려던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그에게 가슴을 보여 준 첫 여인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그리즈에게 있어 그는 허벅지가 끈적거릴 만큼 체온을 높인 첫 사내가 되어 버렸다.

점점 더 새카매지는 그리즈의 시야 안에서 새파란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 안에서 차가운 열망이 위험하게 들끓었다. 듣기 좋은 날숨이 그녀의 귓가로 번졌다. 매음굴에서 들었던 사내들 호흡보다 더 진하고 깊었다.

그를 똑바로 마주 볼 용기를 잃은 그리즈는 고개를 돌렸다. 벽에 그의 그림자가 단정하고 유려하게 드리워 있었다.

다시 본 정면에는 사내가 눈매를 나른하게 푼 채 흐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에 벽 그림자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즈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곧 방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조금만 참으면. 왼쪽 배의 각인만 그가 확인하면.

어떤 사건에도 그랬듯 인내하며 느리게 심호흡했다. 그때 가슴 쪽으로 기울어지는 그림자를 보았다. 볼 때마다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입술이 부드럽게 벌어져 있었다. 안 돼, 안 돼…!

“대, 대공 전…!”

그 순간 커다란 손이 가슴의 밑을 둥글게 쥐어 올렸다.

“대, 대공, 흣….”

본능적으로 젖을 짜내려는 듯 그의 손끝이 가슴을 부드럽게 눌렀다. 가슴 끝이 간지러웠다. 뜨거운 오싹함을 처음 느껴 본 몸이 순식간에 망가진 것 같았다.

그리즈는 힘이 풀려 굽혀지려는 무릎에 억지로 힘을 주다 못해 그의 어깨를 잡고 지탱했다. 그러자 오히려 자세가 편해진 듯 그가 가슴 위쪽을 머금었다.

“안, 안 돼, 안 돼요….”

사내의 뜨거운 입술이 예민한 부위에 닿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질척한 입김과 숨결이 가슴골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너무도 생생해 쓰러지듯 어깨에 매달렸다.

성인이 체중을 지탱하는데도 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상대가 쓰러지지도 못하도록 허리와 등을 끌어안은 채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살결이 질척대는 소리가 고막을 푹푹 찔렀다.

그리즈의 피부가 뜨거워졌고 호흡이 들떴다. 아까부터 축축했던 허벅지 안쪽에서는 끈적한 전율이 감돌았다. 그 전율은 그와 사랑을 나누는 듯한 착각이 깊어질수록 집요하게 안으로 번져 왔다.

점점 흐릿해지는 그녀의 시야로 밑을 내려다보는 그가 들어왔다. 그의 시선 끝에는 네글리제 표면으로 뾰족하게 드러난 유두가 있었다.

숨을 낮게 터트린 그가 이로 네글리제를 물어 내렸다. 살짝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이 너무 색정적이라 그리즈는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렸다. 꼿꼿하게 세운 분홍 꼭지를 드러낸 제 꼴을 보고서도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그가 그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습한 호흡이 그대로 떨어지는 건지 유두가 순식간에 짜릿해졌다.

“읏, 대공, 멈춰 주세요, 대공, 전하….”

못된 사내로부터 이상한 감각을 느끼고 자괴감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어깨를 미친 듯이 쳐 댔다. 그럴수록 출렁출렁 흔들리는 가슴을 보고 그가 더 흥분한 건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일순간 쭈뼛 선 유두가 대공의 입술 안으로 격렬히 먹혔다. 아니, 놀랄 만큼 부드러운 혓바닥에 먹혀 버렸다.

갑작스레 꼿꼿해진 혀가 꼭지를 사정없이 문지르기 시작했다. 주변이 다시 어두워진다. 대공의 혀가 어디를 어떻게 맛보는지 눈앞에 그려졌다.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렬한 행위에 그리즈는 판단력이 흐릿해졌다. 몸을 흔들며 이상한 소리로 울고 싶은 충동을 견뎌 내느라 목덜미에서 진땀이 났다.

점점 탁해져 가는 시야로, 고개를 비스듬히 튼 그가 보였다. 단정했던 흑발은 헝클어져 있었고, 코끝은 가슴에 파묻혀 있었다. 그는 그걸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만족감에 젖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혀를 더 능란하게 굴렸다.

은하수 같던 그의 눈에는 진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랜 세월 아무것도 먹지 못해 허기진 영혼이 모습을 드러낸 거다.

그리즈는 이상한 충동을 느꼈다. 그의 영혼이 만족할 때까지 채워 주고 싶었고, 또 채워지고 싶었다.

덜컥 두려움을 느낀 그리즈가 그의 팔을 강하게 물었다. 원래부터 탄탄했던 목덜미가 근육으로 더 단단해지는 광경이 곁눈으로 보였다.

그 찰나 팔이 살짝 풀렸고 그리즈는 네글리제를 가슴 위로 올리며 달아났다. 늦은 시간이라 복도가 텅 비어 있었다. 방에 도착할 때까지 다행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하아, 하아, 미친….”

후들거리는 몸으로 의자에 앉고서야 나비 박제 액자를 지금까지 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즈는 차마 나비를 보지 못하고 액자를 뒤집어 놓았다.

온몸의 수분을 몸 밖으로 흘린 건지 입이 말랐다. 다급하게 마신 홍차에서 유독 씁쓸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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