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32)

***

폭풍 같은 사건을 겪은 탓에 곧바로 몸살이 왔다. 그럴 처지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이불 속에 틀어박혀 며칠이나 사경을 헤맸다.

꿈에 어머니가 나왔다. 어머니는 생전에 좋아하셨던 금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사파이어가 박힌 왕관을 쓰고 있었다.

그리즈는 햇살이 따스한 들판을 둘러봤다. 양옆으로 숲이 우거져 있고 앞에는 강줄기가 가로질러 있었다.

강줄기 너머에는 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남동생이 테이블에 앉아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티타임을 갖는 듯했다. 악사들의 연주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왔고, 포도주를 따라 주는 집사도 보였다. 테이블의 다섯 개 의자 중에 두 개가 비어 있었다. 하나는 어머니의 것, 하나는 그리즈의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리즈를 강 너머의 테이블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다 딸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습진의 흉터가 남은 손을 보며 말했다.

“우리 딸…. 왜 이리 몸 상했니.”

그제야 그리즈는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행색을 내려다봤다. 하얀색 일상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치맛단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에도 색 바랜 상흔이 있었다. 매음굴에서 오래도록 살며 얻은 상처들이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해 어머니를 속상하게 만들기 싫었다.

“그동안 많은 일을 했어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리즈를 안쓰럽게 보던 어머니는 강 너머를 보며 디저트를 먹자고 했다. 그리즈가 좋아하는 호박파이와 홍차도 잔뜩 있고, 특별히 딸기케이크를 공수해 왔다고 했다.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달콤한 디저트와 천국 같은 풍경. 그리고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가족을 만날 수 있다니….

그간 했던 고생들이 생각나 눈물이 왈칵 터질 뻔했다. 그리즈는 눈물을 참으며 강을 건너기 위해 치마를 위로 들었다.

그때 문득 온화하게 웃는 어머니의 모습 앞으로, 참수당한 어머니의 머리가 겹쳐 보였다. 강 너머에서 빨리 오라 손짓하는 언니와 동생의 바싹 말라 죽은 시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버지는 또 어떠한가. 새빨간 혈안으로 타릴루치 대공을 똑똑히 노려보며 숨을 거두셨었는데….

빨리 달려가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 그리즈가 움직임을 멈췄다.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가족에게 어떤 말을 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직은 그 어떤 목표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그리즈는 천국에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꿋꿋이 살아남아 요하네스를 만나서 삶의 의지를 얻었다고. 그 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릴루치 가문에게 복수했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는 일을 겁쟁이였던 내가 해냈다고.

이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다가 한 치의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 가족을 만나러 온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혼자 비겁하게 살아남은 죄를 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흡을 파르르 떨던 그리즈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아직 마치지 못한 일이 있어요.”

어머니는 몹시 아쉬워하면서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다 그녀의 생각이 완고하다는 걸 느꼈는지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 쉬었다.

“얼마나 기다리면 되니?”

“늦지 않게 갈게요.”

그리즈는 어머니와 오래도록 포옹했다. 곧장 꿈에서 깼지만 진한 여운을 느꼈다.

이불을 덮어쓰고 소리 없이 눈물 흘렸다. 그러다 꿈을 차근차근 회상해 보고는 어머니를 따라나서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꿈속에서는 금방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던 목표들이 허황된 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오쯤이 되자 며칠 동안 극진히 병간호해 줬던 벨린이 이마 수건을 갈러 들어왔다. 할머니께서는 외출하신 김에 대주교도 만나고 오실 거라고 한다. 스테판이 그녀의 건강을 몹시 걱정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율리아나가 깨어났다는 얘기가 벌써 저택 내에 퍼진 건지, 벨린이 나갈 때쯤 스테판이 찾아왔다.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은 그리즈는 침대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다가 일어났다.

“본의 아니게 오래 누워 있었습니다, 후작 각하.”

스테판은 이 정도는 봐줄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계속 숙부라고 부르도록 해, 율리아나.”

며칠 사이 그의 낯빛이 더 좋아졌다. 대공이 가짜 여동생의 정체를 알고도 침묵한 게 확실히 좋은 일인 것이다.

그를 살피던 그리즈는 대답 없이 고개 숙였다. 무려 3일 내내 누워 있었던 까닭에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운이 따라 줬어.”

나지막이 말한 그가 오만한 갈색 눈으로 그리즈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말 잘 듣는 개를 칭찬하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이내 묘한 의심이 서렸다.

“비아누트가 네게 유독 관대한 것 같아.”

그리즈는 그럴 만한 이유를 추측하는 스테판을 보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가 관대했다니. 까딱 실수했다간 목이 잘려 나갈 뻔했는데….

하물며 대공은 대답하기 힘든 질문만을 골라 했었다. 그녀를 시험대에 올린 후 죽일지 말지 매 순간 결정하는 것 같았다.

절대 관대하지 않았다고 확신한 그녀는 뒤통수를 느리게 문질렀다. 뜨겁고 단단한 손끝이 느껴졌던 두피의 감각을 지우듯.

“숙부께서 나가신 후에도 저는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요.”

진실 어린 눈을 보던 스테판이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 풍경을 내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내 기분 탓이었나 보군.”

“…….”

“그런데 말이야…. 혹시 비아누트가 조건을 내걸지는 않았나? 나를 감시하라든가, 아니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매일 보고하라고 했거나.”

스테판은 대공이 그녀를 살려 둔 진짜 이유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이 그런 제안을 했다면 아마도 발 벗고 나섰겠지만.

“대공께서는… 제가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걸 유흥 삼아 구경하시려는 것 같았어요.”

사뭇 진지했던 스테판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건 집안 내력이라서.”

타인의 고통에 무디고 잔혹한 성격이 집안 내력이라니.

그러고 보니 진짜 율리아나도 사람을 여럿 죽였다고 했지. 이 집안사람 모두 그런 부류일까.

“어찌 됐든 비아누트는 전 대공께서 목숨 바쳐 지킨 가문에 흙탕물이 튀는 걸 원하지 않아. 네가 율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 없지. 잘된 거야.”

기분 좋게 말한 스테판이 뒤돌아 그리즈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러곤 뭔가 생각하는 듯 턱께를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불만스러운 얼굴이군.”

이미 그는 그렇게 확신한 눈치였기에 아니라고 부정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리즈는 그저 입술을 다물었다. 스테판은 망토를 살짝 올린 후 침대에 편히 앉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너를 대단한 가문의 사내와 혼인시킬 생각이야. 그때가 되면 너도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할 수 있어.”

그녀를 혼인시켜 이득을 챙길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혼인만 하면 꽃길이 깔려 있다는 얘기를 어떻게 믿을까.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의 집안 내력이니까.

그리즈는 그가 원하는 누구와도 혼인할 수 없는 이유를 댔다.

“배에 매음굴 표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어요.”

스테판은 그건 문제도 아니라는 듯 픽 웃었다.

“그 샌님이 그런 흉터를 알아볼 리가 없지. 혹여나 알게 되더라도, 오두막에서 살다가 매음굴에 팔려 가게 됐다며 가엽게 울면 너와 같이 울어줄 인간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즈가 미간을 살짝 좁혔을 때였다.

“혹시라도 달아날 생각이라면 접는 게 좋을 거야. 밖은 정말 위험하거든.”

걱정스레 말한 스테판이 갈색 시선으로 그리즈의 엉덩이를 느릿하게 훑었다. 여체를 훑어보는 것 같은 느낌에 그리즈가 움츠리자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산기슭마다 도적 떼가 무리 지어 살고 있어. 숲을 헤매다가 도적 떼에게 잡히면 죽을 때까지 겁탈당하게 될 거야.”

“…….”

“아이를 낳아도 아비가 누군지 모르겠지. 그저 씨암말처럼 또 낳고, 또 낳게 될 거고.”

마치 진심으로 조카를 걱정하는 숙부처럼 조언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제 손으로 그렇게 만들 거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인간 탈을 쓴 악마. 빌튼보다 더 악독한 인간. 그리즈가 이를 강하게 물었다.

스테판은 침대에서 일어나서는 잘 차려입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렇게 되기 싫으면 얌전히 붙어 있어.”

최악의 인간이었다. 상대가 나약한 여인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꽁꽁 묶어 두고 이용하려 하다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그랑디아의 법도였다. 그리즈는 지금껏 그대로 행한 적은 없었지만 스테판에게만은 그랑디아의 방식대로 갚아 주고 싶은 충동이 앞섰다.

그때 스테판의 약점을 가장 잘 알 만한 사람이 눈앞에 떠올랐다.

대공 비아누트. 스테판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해 이긴 사내.

하지만 그에게 직접 물을 수는 없지 않나.

그런 이유로 답답해하는 그리즈를 보며 스테판이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다시 교육받게 될 테니 치장해 두렴. 며칠 뒤에 네 친구들을 초대할 예정이니 열심히 배워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지.”

“…….”

“아, 네 남편 될 사내도 올 거야.”

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벨린이 찾아와 준비를 도왔다. 벨린이 그간 저택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성실히 알려 주었지만 정작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조만간 남편 될 사람이 올 거라는 얘기만 맴돌았다. 가만히 있다가는 모든 게 스테판의 뜻대로 이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친구들이 오면 외출하게 해 달라 해서 우선 예술품 상점에 가 볼까.

이런저런 고심하며 치장을 마쳤다. 벨린을 데리고 방을 나서 로비 쪽으로 나가는 찰나 계단을 오르려 하던 대공과 쿠엔틴을 만났다.

볼 때마다 상냥하게 웃어 줬던 쿠엔틴은 무뚝뚝하게 바닥을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 늘 경계심이 어려 있던 대공의 파란 눈에는 일말의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조금 이해할 만도 했다. 신분 상승의 기회인 대공의 밤 시중을 거부했으니 말이다. 고작 매음굴에서 구르던 창녀 따위가.

그는 그녀가 밤 시중을 거부한 합리적인 이유를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고, 그래서 흥미를 갖는 것 같았다. 그리즈가 방향을 비스듬히 트는 찰나였다.

그가 그리즈를 나른한 목소리로 불렀다.

“율리아나.”

그가 창녀에게 말 붙일 줄 몰랐다는 듯 쿠엔틴이 두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리즈는 차마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 폭 앞에 서서 고개 숙였다.

“대공 전하.”

그는 진짜 귀족처럼 격식 차리는 그리즈의 모습을 충분히 우스워하며 즐겼다. 그러곤 깨끗이 정리된 긴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라고 부르라는 얘기였다. 그렇게 말하고는 픽 웃기까지 했다.

그가 작은 동물을 툭툭 치듯 괴롭히는 거라는 걸 느낀 그리즈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빨리 벗어나야 했다. 그가 흥미를 잃고 목덜미를 덥석 물어 채기 전에. 그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티 나게 다급해졌다.

“오라버니, 저는 수업 받으러 이동하겠습니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래.”

아니, 사실은 방심하는 찰나 꽉 움켜쥐어 죽이려는 것 같았다.

“이따 정원으로 나와.”

“…….”

“산책하게.”

그 전에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부터 두려워하게 만들 계획인지.

***

교양 수업은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귀족 예절을 모두 꿰고 있던 덕분이었다.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 찰나 쿠엔틴이 교육실로 들어왔다. 전시도 아닌데 갑옷을 입은 쿠엔틴의 모습이 의아했다. 물론 쇳덩이의 무게를 이기고 편히 검을 휘두르기 위해 수련 중이라는 건 뒤늦게 알아챘다. 묵직한 쇠 마찰음에 목덜미로 소름이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리즈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다 싶어서.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피를 말릴 생각일까. 불안해하던 그리즈는 최대한 그를 피해 보려 애썼다.

“자수 수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 시작될 거예요.”

책상에 올려 뒀던 자수만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렸다. 쿠엔틴은 그게 몹시 거슬린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전하를 기다리게 할 생각입니까.”

말하자면 전하를 기다리게 할 생각이라기보다는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가 싫은 건 이상하게도 아니었다. 그의 오만한 시선을 받을 때마다 지금의 스스로가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게 싫었다.

그런 눈빛을 주는 건 쿠엔틴도 마찬가지였지만 상처로 와닿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대공 비아누트에게만 민감히 반응하게 되는 걸까.

“가시죠.”

쿠엔틴이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자수판을 낚아채서는 교육실을 나갔다. 할머니께 드릴 선물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리즈가 어두워진 낯빛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어제는 비가 하루 내내 오더니 오늘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햇살을 쬐는 잔디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금물결 같았다.

그 금물결 중앙, 그리즈가 틈틈이 찾곤 했던 벤치에는 비아누트가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책을 쥐고 있었고 다른 손의 장갑은 중지를 이로 물어 벗겨 내고 있었다.

짙은 흑발은 햇빛을 받아 근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쯤이 되자 해가 쨍쨍한 날이 싫어졌다. 수치와 모멸감에 휩싸인 얼굴을 그에게 더 선명히 보이는 게 싫었다. 분명히 그가 또 차가운 말로 상처 주려 할 테니까.

그리즈는 애써 덤덤하게 꽃과 나비를 응시하며 걷다가 벤치 앞에 섰다. 어떻게라도 반응할 줄 알았던 그는 성서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냉대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듯.

어딘가에서 꽃향기를 진하게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의 그윽한 향을 느끼는 찰나 노란색 평상복 치마가 허벅지까지 뒤집혔다.

무심히 글자를 따라 움직이던 파란 눈동자가 느리게 허벅지에 와닿았다. 바람 앞의 꽃도 아닌데 묘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흠결 없던 눈빛이 서서히 혼탁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혼란한 시선을 읽으니 목덜미가 홧홧해졌다.

사내가 속살을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손에는 성서를 쥔 채로. 누구보다 금욕적인 얼굴로.

그의 잇새에서 나지막한 숨결이 훅 번졌을 때 그리즈는 반대로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 떨림, 두근거림 같은 게 그에게로 퍼져 나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안에서 거침없이 쌓이기 시작했다. 호흡이 들뜨고 꿈꾸는 것처럼 몽롱해지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볼품없이. 그가 원하는 모습대로.

그 순간 어두워진 눈동자가 예고 없이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왔다. 혼탁한 망막에 무언가가 가득 차 있었다. 혼란, 아니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눅눅한 탐욕이었다.

“아….”

그리즈는 참았던 숨을 기어코 터트리며 자신의 꼴을 내려다봤다. 군살 없이 쭉 뻗었으면서도 허벅지가 탄탄한 체형이었다. 피부도 하�R지만 매음굴에서 얻은 피부병으로 지금은 한쪽 종아리부터 무릎 위까지에 거무스름한 흉터가 있었다.

보잘것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늘 그랬듯 비웃음당해야 마땅한데.

그의 목덜미에서 맥동하는 푸른 핏대를 보고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한 그리즈는 다급하게 치마를 내렸다. 그는 예상 못 한 사건에 직면한 듯 미간을 좁히며 책을 내려놓았다.

“숙부가 계획을 바꿨나 보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숙부가 계획을 바꾸다니 무얼 어떻게…?

그는 때아닌 더위를 느낀 건지 어깨에 둘렀던 늑대 털 망토를 벗어 벤치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옆자리를 보며 말했다.

“앉아.”

그리즈는 짧은 명령에 따라 벤치에 앉았다. 긴장감인지 불안감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분 때문에 엉덩이만 살짝 걸친 상태였다.

햇살을 삼킨 물빛 눈동자는 다시 성서로 떨어졌다. 그리즈는 사내의 책 읽는 옆 테를 곁눈질하다가 다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짙고 풍성한 속눈썹과 가지런한 눈썹,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 그리고 바람에 자연스럽게 쓸어 넘겨진 검은 머리칼도 그랬다. 어쩌면 들꽃이 만개한 바이렌하그 대공가의 풍경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래, 사내가 관능적인 꽃말을 가진 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푸르른 풍경 덕분일 뿐.

그리즈가 풍경을 내다봤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밀려와 발끝을 불안하게 까닥거리고 있었다.

쿠엔틴은 자수판을 옆구리에 낀 채 나비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옆에서 차분한 저음이 느리게 울렸다.

“디르크가 온다고 하던데.”

아마도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즈는 조만간 저택에 오기로 했다던 율리아나의 친구들이라고 추측하며 물었다.

“그게 누군가요.”

그가 기다란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율리아나의 소꿉친구.”

“…….”

“너를 그자와 혼인시키려는 생각인 거지.”

오늘 스테판도 그와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이 올 것이라고…. 아마 바이렌하그 가문에 가장 큰 이득을 줄 가문을 고르고 골랐을 테니 대단한 사내겠지.

그리즈는 디르크에 대해 궁금하기보다는 대공의 생각이 알고 싶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가짜 율리아나를 내보내 줄 생각이 있는지, 혹시나 해서….

“해야 하나요.”

담담한 질문이 정원에 아스라이 울렸다. 그가 책을 한 장 더 넘겼다. 그러다 귀가 간지러운 건지 귓불을 꾹 눌렀다 떼며 대답했다.

“응.”

그제야 가문에 이득을 주는 일이라면 그가 뭐든 동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대공 역시 얼굴 한 번 못 본 여인과 왕명에 의해 혼인을 준비하고 있다는데.

그리즈는 이 저택에 계속 머물다가는 기어코 디르크와 혼인하게 되리라는 걸 직감했다. 그 전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까. 저택 문밖으로 나갈 수나 있을까. 숲속 곳곳에 숨어 있다는 도적 떼는 또 어떻게 피하고.

여전히 햇살이 환하건만 눈앞은 먹구름이 낀 듯 새카맸다. 그때 더 이상 집중하지 못하겠는지 그가 책을 덮으며 말을 이었다.

“혼인만.”

혼인만 하라는 얘기에 담긴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리즈는 벤치에 댄 손끝을 불안하게 까딱거리다가 꽃밭을 바라봤다.

얼마 전에 봤던 검은 나비가 윤이 나는 날개를 팔락거리며 들꽃 위에 앉아 있었다. 그간 보이지 않아 다른 곳으로 떠난 줄 알았는데 계속 머물렀었던 모양이었다.

붉은 생기를 되찾은 그리즈의 눈동자가 나비를 하염없이 좇았다. 그 모습을 내내 바라보던 그 역시 나비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리즈는 그 시선을 느끼다가 그를 살짝 곁눈질했다. 나비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하고 싶은 눈빛이 읽혔다.

사실 나비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햇살 좋은 날에 나타나 자연을 누리다가 때가 되면 유유히 날아갈 수 있는 나비의 자유로움이 부러운 것이었다.

다만 저 검은 나비를 본 순간에는 조금 더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아홉 살에 겪었던 보석 같은 추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시기의 그리즈는 부모님이 참수되는 걸 지켜본 후 탑에 갇혀 있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충격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아버지의 추종자가 투쟁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밤낮없이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사흘을 보내자 탈수 증상이 왔다.

갈가리 찢어진 성대에서 나는 쇳소리를 들으며 이러다가는 죽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 이후부터는 악착같이 울었을 것이다. 어서 울다 지쳐 숨을 거두고 부모님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밤처럼 새카만 돌 감옥 구석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사람 기척이 날 리가 없는 2층 벽으로 돌이 탁,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쪽에는 정찰용 창문이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문이었는데 햇빛이 그곳에서 구원처럼 내려오던 광경이 지금도 생생했다. 옹송그려 울기만 하느라 창문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까.

그리즈는 하루 내내 그곳에서 들어오는 빛을 바라봤다. 간절히 살고 싶어 했을 때는 새카만 어둠만 보이더니 이제 와 빛에 가까워진 이유를 생각하면서.

그 후로 이틀이 흘렀다. 뒤늦게 빛이 보이는 이유는 신의 장난 때문이라고, 그렇게 결론 내렸다.

수분이 부족해 바싹 마른 입술로 한숨 지었다. 그때 또다시 벽 쪽에서 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시작된 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됐다.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던 그리즈는 먼지가 끈적하게 눌어붙은 의자를 창문 앞에 내려놓은 후 밟고 일어섰다.

처음 느껴졌던 건 햇빛 때문에 눈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감각이었다. 다급하게 고개를 숙인 채 심호흡을 했던 건 아주 잠시.

그 순간 작은 돌멩이가 이마로 거세게 날아들었다. 그리즈는 빙빙 도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짚고 밖을 내다봤다. 나무숲 사이에 서 있는 흑발 소년이 보였다.

희한하게도 소년이 서 있는 주변에만 돌이 없었다. 소년이 지금껏 계속 탑으로 돌을 던졌던 것이다.

마땅한 돌을 찾던 소년은 자리를 옆으로 옮겨 또다시 돌을 주웠다. 이번엔 얼굴로 날아들지도 몰랐다. 그리즈는 다급하게 의자에서 내려와 다시 구석에 옹송그렸다.

그때 의자 밑쪽으로 떨어져 있던 많은 돌을 보았고, 그녀는 소년이 돌을 던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소년이 타릴루치 가문의 추종자라서? 아니면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는 의미의 항의일까?

그렇게 결론 내리자 그간 느껴 왔던 서글픔이 복받쳐 올랐다. 그녀는 며칠 전에 사랑했던 사람들을 잃었다. 치유하거나, 죽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조차 허락하지 않다니.

지금껏 쌓인 슬픔, 분노, 원망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아서 창가에 떨어진 돌을 주워 밖으로 마구 던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비겁한 생각을 했다. 나는 철옹성 같은 감옥에 숨어 있으니 너는 나를 해칠 수 없어. 그러니 계속 돌을 던질 거야. 더 이상 네가 나를 비난할 수 없도록!

현기증이 날 정도로 힘주어 돌을 던졌던 것 같다. 그러나 너무 지쳐 있었고 며칠 동안 먹은 게 없었던 까닭에 금방 나가떨어졌다.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땐 또 그 지긋지긋한 돌벽 감옥에 있었다. 그리즈는 춥고 곰팡내 나는 구석에서 다시 웅크려 생각에 잠겼다. 분노가 가라앉으니 걱정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어제 마구 던졌던 돌에 그 소년이 맞았으면 어떻게 하지. 단지 비난받기 싫었을 뿐이었는데….

어쩌면 소년이 탑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창문에서 환히 들어오는 빛줄기 아래로 낯선 것들이 보였다. 손수건으로 휘감은 빵, 나무 물통 그리고 기도하는 성녀의 청동상.

누가 어째서 이런 것을 던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을 전해 준 자의 속뜻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져 왔다. 살아가라고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깨닫는 순간 그리즈는 다른 의미로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치유되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상실의 슬픔, 온몸과 머릿속 깊숙이 박힌 상처 그리고 뼛속까지 사무친 외로움까지.

한참을 울다가 밖을 내다봤을 때는 또 그 흑발 소년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돌멩이가 아닌 수련용 목검이 쥐어져 있었다.

소년은 한동안 검술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탑을 올려다보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녀를 본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소지품을 손바닥에 펼쳐 놓고 한참이나 보더니 몇 개를 탑 쪽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초콜릿, 금화, 기도용 묵주…. 그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서 선물한 것 같다는 생각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꽃과 나비는 없었지만 소년이 검을 휘두르며 멋지게 춤추기 시작했으니까.

마치 길을 잃고 헤매는 검은 나비 같다고 생각했다.

볼품없는 대지에 영영 갇혀 무엇이라도 꽃피우려 애쓰는.

그날의 아름다운 풍경과 향긋한 숲 냄새를 떠올려 보던 그리즈가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검은 나비를 좋아해요. 떠오르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고 어쩌면 그 역시 그런 그리움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를 살피던 그리즈가 정면을 바라봤다. 그녀는 검은 나비가 가여웠다. 어두운 색 때문에 유독 천적들의 눈에 튀는 그 특별함이 가여웠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쿠엔틴이 대공도 나비를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단지 호의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진짜이기를 조금은 바랐다.

검지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그리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께서도 나비를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정원에서의 휴식도 좋아하시는지요.”

그는 그냥 웃었다.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그게 아니라면 쿠엔틴의 인사치레를 곧이곧대로 믿는 게 우습다는 듯.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어째서….”

어째서 용건을 확실히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앉아 있느냐는 질문을 하려 했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 말을 흐리는데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 나비, 꽃. 아름다워.”

그의 시선이 분홍색 들꽃에 살포시 내려앉은 검은 나비에 닿았다. 그리즈가 그의 시선을 따르려는 찰나 나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욕심내 볼 가치가 있지.”

분홍색 꽃에 푹 빠진 나비는 정신없이 꽃술을 빨고 있었다. 그 뒤로 쿠엔틴이 상체를 낮춘 채 나타났다. 나비를 노려보는 눈빛이 살쾡이 같다고 느꼈을 때였다.

“그런데 무작정 욕심부리면 어떤 꼴이 될까.”

그리즈는 그의 얼굴에 어린 한 줌의 흥미를 보고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설마, 설마…. 심장이 북처럼 울리는 순간 쿠엔틴이 자수 판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잽싸게 나비를 덮쳤다.

“그, 그만…. 잡지 마세….”

벌떡 일어났을 때는 이미 쿠엔틴이 손수건을 주머니처럼 쥐고 있었고, 나비는 그 안에서 처절하게 날뛰고 있었다. 그 광경을 참담하게 바라보는 그리즈의 얼굴을 보던 그가 만족스럽게 일어났다.

그가 먼저 발을 떼자 쿠엔틴이 뒤를 따랐다. 그리즈는 입술을 파들파들 떨며 고개 숙였다.

대공은 산책하고 싶은 게 아니었고, 나비를 수집 중인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느긋하고 집요하고 파괴적인 놀이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즈는 어느새 쩍 금 간 심장 부근을 부여잡고 아프게 헐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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