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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찾아올 때까지 스테판은 저택 내에서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마부가 나타날 만한 지역에 사람을 풀고, 그들에게 보고를 받느라 바쁜 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대공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계속 2층의 집무실에 있다가 저녁 수련을 마치고 목욕 후에 방으로 돌아가는 걸 벨린이 봤다고 했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적잖게 궁금했다. 마부가 도착하려면 멀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런 일에 많은 시간을 쓸 가치는 없다는 뜻인가.
달빛 한 점 없이 어두웠던 밤이 지나갔다. 안개로 꽉 막힌 오전의 하늘이 그리즈를 반겼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안식일이었다. 하인들이 일찍이 저택 내 성당으로 예배드리러 간 까닭에 저택이 조용했다.
스테판은 어디서 밤을 새운 건지 파리한 모습으로 나타나 짧게 상황을 전했다. 사람을 여기저기 풀었지만 어디에서도 마부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항만으로 보낸 암살자의 소식이 끊겨서 수색하는 중이라고 말하고는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리즈는 창가에서 시든 꽃잎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항만으로 간 암살자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혹시 마부를 죽이려다가 대공 측 사람에게 발각된 건 아닐까.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 길이 없기에 피가 바싹바싹 말랐다. 이러다 스트레스로 자신이 먼저 죽게 될 것만 같았다.
그때 문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불규칙하게 경기를 일으키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대공이 모든 사실을 알고 죽이러 온 것이라는 망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찰나였다.
“아가씨, 오전 예배가 끝나자마자 달려왔어요. 벨린입니다.”
그리즈는 그제야 깊게 호흡했다. 그러곤 낙엽처럼 메마른 입술을 검지로 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 벨린? 들어와.”
활기차게 들어온 벨린은 눈으로 티아를 찾느라 바빴다. 그러다 이불을 헤집고 나오는 티아를 확인하고는 환하게 웃음 짓다가 저택의 상황을 전했다.
“마님께서는 외출하셨대요. 정말 건강이 좋아지신 건지, 묘지에 가셨나 봐요. 1박 2일 일정으로요.”
그리즈는 정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말씀은 없으셨는데. 오전 내내 초조해하며 고심하고 있었던 탓에 할머니가 나가시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묘지?”
그리즈의 물음에 벨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느 분을 추모하시는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매년 이맘때쯤 꼭 다녀오셨거든요.”
“아….”
“아마도 중요한 분의 무덤에 가시는 것 같은데 늘 남모르게 조용히 가시곤 했어요. 성묘를 숨기고 싶어 하시는 눈치이니 괘념치 마세요, 아가씨.”
상냥하게 말한 벨린이 티아를 다시 침대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교리를 배우실 시간이네요. 저는 아가씨를 작은 예배실에 모셔다드리고 다시 돌아가려고 해요.”
무언가를 배울 정신은 아니었지만 마땅한 핑계가 없었기에 작은 예배실로 향했다. 그리즈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제에게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제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음에도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사제는 심란한 그리즈의 표정을 보고 수업을 이어 가기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휴식 시간을 주고 예배실을 나갔다.
그때 키가 큰 사내 고고하게 걸어왔다. 그리즈는 그가 대공 비아누트라는 걸 깨닫고 극도로 긴장했다.
정체불명 여동생이 예배실에 있다는 소식에 관찰하러 왔나 싶었다. 그러나 그는 예배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모르는 듯 고개 돌려 성녀상만을 주시했다.
그리즈는 그림 같은 옆 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윽하게 그늘진 눈 밑이 몽롱한 분위기를 풍겼다.
낯선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쓱 돌려 눈을 마주쳤다. 어둡게 빛나던 파란 눈동자에 늘 그랬듯 경계심이 어렸다.
사람을 처음 본 늑대 같았다. 살갑게 손을 내밀어도 본능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마는.
다만 늑대는 목숨을 빼앗길까 봐 경계하는 거라지만 그는 어째서 한낱 여인을 경계하는 걸까. 독기 품어도 그의 머리칼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을 텐데. 대체 여인에게 무엇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서?
그때 쿠엔틴이 짧은 갈색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러곤 그의 옆에 서서는 다급하게 귓속말했다.
심각하게 서로를 주시하던 두 사내의 시선이 연달아 그리즈에게 꽂혔다.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직감할 수 있었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터져 버린 것 같다고.
복도에서 발소리가 홀연히 울리기 시작했다.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다급했지만 서두름 없는 소리를 듣고 스테판의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두 사내가 뻔히 지켜보는 상황에 스테판과 대화 나눠 봐야 좋을 건 없었다. 급하게 일어난 그리즈가 예배실을 나갔다.
역광을 받은 복도 끄트머리에서 스테판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새카만 실루엣에서 혼란, 배신감, 분노 같은 게 풍겨 왔다. 그 모습을 본 그리즈는 정말로 오늘이 생애 마지막 하루가 되리라는 걸 예감했다.
결국 스테판은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후계자 싸움에서 비아누트에게 이미 한 번 졌던 사내이니 예상 가능했지만.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기 시작했다. 그 더럽고 위험한 매음굴에서 어떻게 견뎌 왔는데. 그렇게 그려 왔던 요하네스를 드디어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리즈가 눈가를 붉히며 서럽게 물었다.
“제 정체… 대공께서 알게 되셨습니까?”
스테판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그러곤 원망이 깃든 그리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 탓이 아니야. 네 탓이지.”
“…….”
“간밤에 없어졌다던 암살자 말이야. 없어진 게 아니라 대공에게 잡혀 고문당하고 있었더군.”
“…….”
“재밌는 게 뭔 줄 아니.”
본인이 저지른 일이면서 남일 얘기하듯 하는 모습이 너무 뻔뻔해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그리즈의 눈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 눈을 빤히 마주친 스테판이 작게 속삭였다.
“애초에 대공은 마부를 찾지 못했어. 그 대신 덫을 놓은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얘기가 들려왔다. 대공이 마부를 찾지 못하고 덫을 놓았다고…?
“마부를 잡았다는 정보는 거짓이었어. 내가 그 말을 전해 듣고 사람을 풀면 잡아다가 고문할 생각이었던 거지. 네 정체가 적잖게 궁금했나 보더군.”
말을 멈춘 스테판이 그리즈의 얼굴을 느리게 살폈다. 그러다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의아하게 물었다.
“왜 너를 직접 고문하지 않았을까. 네가 율리아나가 아니라는 건 진작 알아챈 눈치였는데.”
“…….”
“숫총각 대공께서 드디어 제대로 된 여인 냄새를 맡고 관대해진 걸까.”
낮은 비아냥거림이 들리는 찰나 복도 끝에서 쿠엔틴이 나타났다. 더 이상 대화 나눌 시간이 없다는 걸 느낀 스테판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필 그 암살자가 매음굴에 동행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어. 아마 모든 얘기를 듣게 됐겠지. 네가 오두막에서 온 율리아나가 아니라 매음굴 출신 창녀라는 사실도 말이야.”
쿠엔틴이 가까워지자 철갑의 스산한 소리가 점점 커졌다. 벌써부터 칼날이 목에 닿은 것처럼 소름 끼쳤다. 입술이 덜덜 떨렸을 때였다.
어느덧 스테판의 앞에 서며 차갑게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스테판은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먼저 발을 뗐다. 그러나 쿠엔틴은 앞장서지 않고서 그리즈를 바라봤다.
“같이.”
그간 상냥했던 쿠엔틴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신성시했던 아가씨가 사실은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창녀라는 걸 알게 되고 혐오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지금껏 사내와 육체관계 해 본 적 없는 몸이지만 애써 깨끗한 척 변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살기 위해 사내와 관계 맺을 수밖에 없는 매음굴 여인들을 더럽게 여기는 것 같아서. 그 여인들과 다르다는 걸 증명하고 홀로 고고한 척하는 건 의미 없었다.
“예….”
그저 쿠엔틴을 따라나섰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한 번 울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꾹 참았다.
운이 좋으면 목숨 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은 가지지 않았다. 그동안 희망을 가진 탓에 이 꼴이 되지 않았나. 차라리 부모님과 함께 죽었더라면 이렇게 고된 삶을 살지 않았을 터인데….
암담함을 느끼며 걷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대공의 방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서재 중앙에 가져다 놓은 의자에 비아누트가 앉아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친 채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은 그가 재밌는 구경을 앞둔 사람처럼 눈매를 좁혔다.
평상시에는 성스러움마저 느껴지는 고결한 사내였다. 오늘따라 살벌하게 날 선 눈동자를 보자 덜컥 두려워졌다. 그가 신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격분한 것 같았다.
입술을 파들파들 떨던 그리즈가 그의 앞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문을 닫고 들어온 쿠엔틴이 그녀의 종아리를 꾹 눌러 무릎 꿇게 만들었다.
“흣….”
높았던 그리즈의 시야가 푹 주저앉았다. 그녀는 비소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사내들은 그녀의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고, 그녀는 더러운 바닥만 들여다보는 관계 말이다.
그리즈의 허망한 눈동자가 그의 신발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하실 말씀 있습니까.”
그가 숙부에게 진상을 물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스테판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래, 있어.”
그가 숙부인 자신을 당장은 죽이지 못할 거라는 확신 덕분인지 뻔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율리아나를 데려온 건 오두막이 아니라 오르파담의 매음굴이었어. 율리아나의 출신 때문에 가문의 평판이 떨어질까 봐 숨길 수밖에 없었지.”
“…….”
“하지만 이 아이는 율리아나가 맞아. 내가 장담하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픽 웃는 소리가 났다. 들어줄 가치도 없다는 의미였다.
이내 대공이 탄탄한 손을 자신의 허리 뒤에 가져갔다. 스산한 쇳소리가 고막을 건드렸다.
곁눈으로 본 대공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살인할 수 있도록 허리에 검집을 차고 다니는 건가.
그때 대공이 꼬았던 다리를 풀어 앉으며 상체를 서서히 숙였다.
뼈도 부술 수 있을 만큼 날 선 검이 그리즈의 턱을 쓱 쓸었다. 이내 턱을 들어 올리게 했다.
낮았던 시야가 높아지며 대공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카만 머리칼을 한쪽으로 넘겨 이마를 드러낸 그가 지독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말해 봐.”
얼음장처럼 차가운 칼날에 목이 잘릴 것만 같았다. 일순간 중병에 걸린 듯 호흡이 가빠지고 이가 덜덜 떨렸다.
“하아, 하아, 하, 하아….”
어차피 죽을 테니 스테판의 만행을 속 시원히 폭로하고 싶은 충동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스테판이 매음굴 여인들에게 화풀이하기라도 하면….
후들후들 떨던 그리즈가 입술을 독하게 다물었다. 외롭겠지만 죽는 것만은 혼자 하고 싶었으므로.
대신에 눈동자로 처절히 절규했다. 나는 당신이 아는 대로 매음굴의 창녀가 맞다고. 다만 귀족 대접받으며 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단지 조금의 자유를 얻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당신과 당신의 숙부, 이 저택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별것 아닌 자유. 누구는 목숨과 바꿔야 할 그 자유.
그 천금 같은 자유를 얻어 내 존재를 그리워해 준 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 앞에서는 매음굴 창녀가 아니라 그리즈 베네딕트가 될 수 있으니까.
너무 주제넘은 욕심을 부렸지. 욕구 해소용으로 쓰이는 살덩이가 아니라 남에게 의지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가진 게 없어 그게 불가능하다면 요하네스를 만나 작은 인사라도 건네고 싶어서.
꼭 해결해야만 했던 숙제를 두고 죽게 될 것 같은 예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요하네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예술품 상점 주인에게라도 전하고 올 것을…. 찾아 줘서 고마웠다고, 당신 덕분에 지금까지 치열히 살아올 수 있었다고.
눈물이 앞을 가려 대공의 모습이 일그러졌다. 눈을 감아 눈물을 주르륵 떨쳐 내 봤지만 눈을 뜨면 금세 차오르는 까닭에 뺨만 더럽혀졌다.
그 모습을 내내 바라보는 대공은 웃지도, 인상 쓰지도 않는 얼굴을 했다. 눈물 젖은 뺨을 훑는 그의 눈동자가 느리게 떨렸다. 그 눈 속에 담긴 감정이 분노가 아니라 부디 애도이기를 바라며 그리즈는 눈을 감았다.
뾰족한 칼끝이 피부를 살짝 찔렀다. 이내 가차 없이 안쪽을 파고들 줄 알았지만 자비라도 내리듯 부드럽게 거둬졌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그리즈의 눈이 대공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미 그녀에게서 검과 시선을 모두 거둔 그는 스테판을 넌지시 응시하며 말하고 있었다.
“율리아나가 아니라는군요.”
비통해하는 눈을 보고 그가 느낀 점이었다. 스테판의 협박 때문에 입을 다문 사실도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았다.
당장은 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그리즈가 폐부에 가득 찬 공기를 내쉬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스테판의 대답이 울렸다.
“목에 검이 닿으면 누구라도 울게 돼.”
단지 두려워서 흘린 눈물이니 의미 두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들은 대공이 검을 허리 뒤편에 꽂아 넣고는 눈가를 검지로 쓸며 말했다.
“방금 그 얼굴.”
“…….”
“숙부도 봤어야 했는데.”
손가락을 스친 눈동자가 나른한 꺼풀을 벗고 싸늘해졌다. 그가 스테판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 검을 들이대고 싶은 상대는 그녀가 아니라 스테판이라는 듯.
대공은 세 치 혀에 놀아날 인물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는지 스테판이 미간을 만지작거리며 고심했다. 그 끝에 나온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사실…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
마치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진실을 어렵게 토해 내는 말투였다. 하지만 대공의 권력을 탐했다는 걸 스스로 자백할 리 없는 인간인데. 그리즈가 미심쩍은 마음으로 스테판을 곁눈질했을 때였다.
“저 아이가 율리아나가 아니라는 사실은 보름 전쯤 깨달았어. 어머니를 병상에서 일어나게 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거지.”
정말 의도치 않은 일이 일어나 답답하다는 듯 스테판이 자신의 가슴께를 쥐어 당기며 말을 이었다.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지만 쾌차하는 어머니를 보니 생각이 많아졌어. 이 아이가 율리아나가 아니란 걸 아시면 충격받으실 테니까. 아마 건강이 예전보다 더 나빠지실지도 모르지.”
스테판은 이 모든 게 할머니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한 일이라고 변명했다. 어쩜 저리 뻔뻔하고 가증스러울 수가….
입 안에서 비난이 맴돌았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 부끄러움도 모르고 신의도 없는 최악의 인간. 속으로 읊조리던 그리즈는 그녀만이 아는 진실을 말할까 봐 입술에 힘을 줬다.
스테판은 그녀가 살기 위해 말을 아낄 거라는 걸 예상했는지 그를 더 과감히 설득했다.
“바이렌하그의 정신적 지주가 여기서 더 쇠약해지면 백성들도 슬퍼할 거야. 물론 우리 가문을 견제하는 가문에서는 축배를 들 거고.”
“…….”
“이미 그런 계산은 끝났잖아, 비아누트.”
모르는 사실도 아니라는 듯 그가 스테판을 싸늘하게 주시하며 물었다.
“그래서?”
심기가 불편해질 대로 불편해진 그에게 격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익숙한 듯 스테판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이 아이에게 율리아나 역할을 맡기는 게 가문을 위한 일이야.”
대답을 들은 그가 픽 웃었다. 흠잡을 수 없이 수려한 눈매에 냉소가 깃들었다.
“창녀에게?”
지금껏 대공은 육체관계를 신성시하게 여겨 왔으니 창녀와 한 공간에 있는 것도 불쾌할 것이다. 그 점을 느낀 스테판이 잠시 고심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설득할 방법을 찾아낸 듯했다.
“창녀치고는 욕심이 없더군. 그게 이 아이를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지.”
“…….”
“율리아나가 아니라고 끝까지 주장했거든.”
그 말을 듣던 그리즈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모르는 사이 크게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드러내 놓고 욕심부렸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런 상황을 맞기도 전에 내쳐졌을 테니까.
눈물이 말라 뻣뻣해진 입술을 열어 길게 한숨 쉬었다. 그때 스테판이 대공의 눈치를 살피다가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 아이를 잘 데리고 있다가 어딘가의 왕실로 시집보내어 이득까지 챙기는 게 최선이야. 만약 이 아이가 주제넘은 욕심을 부리면 가차 없이 죽이면 되고. 보기보다 현명한 아이이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러니까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서나,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율리아나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내내 듣고 있던 그가 다시 다리를 꼬고는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보기보다 현명하다라.”
차가운 시선이 그리즈의 온몸을 샅샅이 관찰했다. 그리즈는 자비 없는 짐승의 장난감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더 숙였다. 빛이 들지 않아 캄캄한 시야로 낮은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랬다면 계속 내 눈에 띄지도 않았을 텐데.”
그 말을 듣고 그가 잘못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껏 그를 피하려 노력하지 않았나. 어째서 그는 그의 눈에 계속 띄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내 그리즈는 대공의 시선이 닿은 목 뒤가 따가워져 눈을 꽉 감았다. 그는 의문을 풀었는지 회중시계로 시선을 돌리고는 짧게 말했다.
“대화 즐거웠어.”
얘기는 끝났으니 이제 나가라는 뜻이었다.
종일 새카맸던 시야로 한줄기 빛이 들어왔다. 대공의 손에 죽을 뻔했지만 살아남았다. 죽지 않은 것은 신에게서 축복을 받아서인지, 저주를 받아서인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그리즈는 계속 굳어 있어 뻐근해진 몸을 일으키려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런데 그때, 청천벽력 같은 말이 들려왔다.
“나머지는 나가고.”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아주 잠시.
“너는 남고.”
쿠엔틴이 스테판에게 나가자고 눈짓했다. 스테판은 모든 진실을 아는 여인과 대공을 단둘이 두는 게 불안했는지 머뭇거렸지만 버티고 있지 못했다.
끼익.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두 사내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가 오롯이 지켜보고 있는 느낌에 그리즈가 안절부절못했을 때였다.
“이름.”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 그가 다시금 이름을 물었다. 본명을 묻는 것이다. 그리즈는 그랑디아 왕실에서 받은 이름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름… 없습니다. 매음굴에서는 마리아라고 불렸어요.”
마리아는 두 집 꼴로 한 명씩 있는 흔한 이름이었다. 더군다나 성녀 마리아 밀랍상 앞에서 기도하는 그가 동명의 여인을 쉽게 죽이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비겁한 수를 쓸 만큼 살고 싶었으니까.
그는 마리아라는 이름에 담긴 뜻을 가늠해 보는 듯했다.
“마리아라….”
그러다 그 이름이 매음굴 창녀의 것이라는 사실에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 노래는 어디서 배웠지.”
베네딕트의 자장가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이 저택 창가에서 불렀고, 석고상실에서 부르다가 그에게 들켰던 그 노래…. 그리즈가 먼지 한 톨 없는 그의 신발만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매음굴에서 배웠습니다.”
“창녀에게서?”
허스키하게 물은 그가 그리즈의 목을 가볍게 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 그녀는 마녀처럼 불그스름한 눈동자로 그를 확인했다.
왜인지 그의 눈이 서늘하게 묻는 것 같았다.
어떤 창녀에게서? 그 자장가로 밤 상대도 재워 줬나?
그 노래가 매음굴에 울리는 걸 상상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건지 목덜미로 푸른 핏줄이 펄떡였다. 그에게 많은 의미가 깃든 노래임이 분명한 것 같았다.
시선을 책장으로 피한 그녀가 말했다.
“…송구합니다.”
고작 창녀에게서 사과받자고 그가 시간을 투자하는 건 아닐 것이다. 더 가치 있는 목적이 있어 물어보는 거겠지. 조심스레 추측하는데 그가 목덜미를 쥔 손을 스르륵 풀었다. 차가운 손이 멀어지자 턱 밑으로 더한 한기가 몰려왔다.
“흣….”
그는 등줄기로 소름을 느끼는 그리즈를 살피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너를 살려 둔 이유가 있어.”
그 이유는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 느꼈던 스테판과 대공의 관계로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여동생이 가짜였다는 걸 조만간 대외적으로 탄로 내어 스테판과 함께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스테판과 가짜 여동생이 성적으로 부정을 저질렀다고 엮어 손쉽게 처리할 계획일지도 몰랐다. 일순간 그리즈의 눈앞이 또다시 새카매졌다.
“저는… 이 저택을 나가고 싶어요.”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간절히 이루고 싶은 소망에 가깝지만 꼭 요하네스를 만나야만 했다. 아마 요하네스는 아버지의 추종자나, 반란군에게서 살아남은 베네딕트 가문 일원일 것이다. 그러니 3년 동안이나 그리즈 베네딕트를 수소문했겠지….
그 하나만 바라보고 연명해온 세월이 억울해서라도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 죽어도 가문을 위해 복수하다가 눈 감아야 했다. 그리즈 베네딕트란 이름으로, 더 고통스럽게 죽게 될지라도.
“제가 이곳을 나가 평민으로 살 수 있도록 전하께서 도와주신다면… 그 은혜는 평생에 걸쳐 갚겠습니다.”
냉정한 사내가 그런 자비를 내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차하게 납작 엎드렸다. 그의 시야에 훤히 드러난 등에서 차가운 비소가 떨어졌다.
“평민으로 살겠다고. 가진 건 몸뿐인 빈털터리가.”
“…….”
“그럼 몸 파는 평민이 되겠네.”
비웃음당해도 괜찮았다. 조금의 자유만 허락받을 수 있다면.
커다란 발에 짓밟혀도 견딜 수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손 하나 정도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그리즈는 간절했다.
“저는 단지 살고 싶을 뿐이에요. 추하게 발버둥 쳐서라도 살 수 있다면 그걸로 행복합니다.”
그는 바닥에 치욕적으로 얼굴을 처박은 채 행복을 논하는 여인을 충분히 우스워하다가 읊조렸다.
“고개 들어.”
“…….”
“살고 싶은 이유. 납득시켜 봐.”
그때쯤 그의 말과 행동이 언제나 예상과는 한 발씩 다르게 움직인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여동생이 가짜라는 걸 확신하면서도 희귀한 강아지를 선물했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 바라보면서도 초상화를 그려 달라 했었고, 식사에 초대해 마지막 기회를 주기도 했었다. 아까는 죽일 듯이 응시하면서도 목덜미에 상처 하나 내지 않지 않았다.
어떻게 죽일지 고심하는 듯하면서도 살게 해 주려 하는 그가 너무 어려웠다.
도망치면 죽을 때까지 추격해 와서 목덜미를 낚아채려 하다가, 울음을 터트리면 한발 물러나 무섭도록 주위를 어슬렁거렸던 늑대개 같았다.
왕궁에서 그런 개를 키운 적이 있었다. 다만 그 개는 관심을 표현했던 거였는데….
그리즈는 저 사내의 말과 행동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게 뭔지 알 수 없었고, 당장은 거대한 관 같은 이 저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고개를 든 그리즈가 간절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그 눈을 빤히 내려다보던 그는 이번에도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했다.
“찾아 줄게.”
“…….”
“해야 할 일이 있어, 대신.”
그게 뭔지 맞춰 보라는 듯 그가 시선을 마주치며 미묘하게 웃었다. 그러곤 의자 팔걸이를 잡았던 손을 서서히 바지 앞섶으로 가져갔다.
“말 안 해도 알지. 창녀라면.”
그녀의 얼굴을 덮고도 남을 만큼 큰 손이 상의를 쭉 당겨 바지 밖으로 뺐다. 그는 보란 듯이 상의를 이로 물고서 바지의 허리 매듭을 풀었다.
상의 아래로, 구획이 명확하게 나뉜 복근이 드러났다. 울퉁불퉁한 진흙, 아니 단단한 바위 같았다.
그가 느리게 호흡하자 갈빗대에 비스듬히 붙은 근육이 단단해지며 진한 관능을 풍겼다. 성숙한 사내의 상체가 얼마나 굵고 탄탄한지 느낄수록, 이상하게도 허벅지 안쪽이 짜릿해져 몸을 뒤틀고 싶었다.
그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주시했다. 닳고 닳았을 여인이 고작 반라를 보고 긴장하는 게 이상하다는 듯.
혼란스러워하던 그리즈는 그가 무엇을 시키려 하는 건지 뒤늦게 짐작했다. 매음굴에서 신물 나도록 봐 왔던 광경이 있었다. 여인에게 아래를 빨게 하고서 소리 없이 앓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대공 역시 그런 방식으로 정욕을 풀어왔는지 몰랐다. 혹여라도 여인의 몸에 씨를 흘려 사생아를 잉태시키지 않기 위해 차선을 택한 걸까.
고결한 대공의 민낯이 충격적인 마당에 문득 묘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닥쳐왔다. 그가 정말 여인에게 아래를 허락했을까. 여인의 입술이 그곳에 닿는 순간 그는 어떤 얼굴을 했을까.
미끈한 입술로 나른하게 소리 내며 밑을 보는 그가 상상되자 아랫배가 쭈뼛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두려워서? 아니면, 아니면 설마….
세차게 뛰는 심장을 느끼던 그리즈가 고개를 푹 숙였다.
“대, 대공 전하. 이렇게 미천한 것이 어찌….”
말 안 해도 그녀가 미천한 건 알고 있다는 듯 그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곤 자연스레 풀어 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묶듯 크게 쥐어 들었다.
“해 봐.”
이내 머리칼의 감촉을 느끼려는 듯 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단단한 손끝이 두피를 건드리자 그리즈는 발끝에 힘을 주며 입술을 벌벌 떨었다.
지금껏 살아오며 사내의 것을 입에 담아 본 적 없었다. 그가 여인과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왔다면, 입술을 대자마자 미숙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터인데.
얼마나 더 비참하게 이 세상을 굴러야 요하네스를 만날 수 있는 걸까. 끝내 만날 수는 있을까. 그가 다른 곳으로 떠났을지도 모르는데….
그리즈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무조건 살아갈 것이라는 집념이 조금씩 흐려져 갔다. 매음굴에서 나오기만 하면 뭐라도 될 줄 알았지. 괴한에게 쫓기고 겁탈당하고 죽어 가는 꿈을 꾸며 하루하루 메말라 가는 건 여전하지 않나. 차라리 외롭고도 고단한 이 삶을 그냥 이쯤에서 멈춰 버릴까….
“차라리….”
한스러운 목소리가 잇새로 번졌다. 지금껏 해 본 적 없던 죽고 싶다는 생각을 이토록 아름다운 귀족 저택에서, 고귀한 대공 앞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차라리 주, 죽… 죽….”
단번에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가슴속에서 절규하는 울림 때문이다.
사실은 살고 싶어. 모두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며 살고 싶어. 매음굴 빌튼과 스테판 그리고 당신을 저주하면서 죽기는 싫어. 숨을 거둔 후의 내 얼굴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평화로운 채로 남겨지기를 바라니까.
울림이 점점 커지지만 차마 토해 내지 못하고 그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어차피 반쯤 옷을 벗은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기에.
“차라리… 주, 죽여 주세요.”
먹구름이 몰려온 건지 서재가 어두워졌다. 그 속에서 그가 동굴 속 늑대처럼 눈동자를 파랗게 빛내고 있었다.
“죽는 게 낫다고? 다리는 잘만 벌렸을 게.”
그는 앞섶을 열지 않고 손을 떼며 의아해했다.
“너무 황송해서?”
일개 창녀라서 감히 대공의 몸에 손댈 수 없는 거냐 묻는 것 같았다. 울기 직전이었던 그리즈는 감정을 추스르며 작게 말했다.
“…네.”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면서도 답을 찾지 못한 채로 결론 내렸다.
“맞는 것 같네. 주제를 잘 아는 거.”
보조개를 보이며 웃는 그에게서 묘한 점을 찾았다. 아래를 빨아 달라고 할 만큼 흥분한 상태라고 보기에는 너무 여유로운 게 아닌가.
지금껏 봐 왔던 매음굴 손님들은 대부분 숨소리가 거칠었고 손등과 목덜미에 핏줄이 일어서 있었다. 무엇보다 여인을 느끼고 싶어져 딱딱해진 중심부 윤곽이 바지 위로 훤히 들여다보였다.
짝짓기를 원하는 수컷들을 회상해 보던 그리즈가 그의 앞섶을 조심스레 내려다봤다. 남색 바지 어디에도 그가 흥분했다는 흔적은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하나의 의심이 스쳤다. 혹시 그녀가 사내들에게 몸을 주고 원하는 바를 이룰 여인인지 알아보기 위해 유혹했던 게 아닐까.
그의 것에 입술을 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까 그 단도가 목에 꽂혔을까…. 순결한 유일신 신자인 그가 혼전순결을 지키고 있다는 소문이 결국 사실이었던 걸까.
그리즈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본명이 무엇이든, 누구를 찾는 중이든 더 이상은 관심 없어진 것 같았다.
“대화 즐거웠어.”
대화는 늘 그랬듯 그의 의지대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