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32)

***

다행히 하루가 아무 일 없이 흘렀다. 그리즈는 저녁까지 귀족 수업을 받았고 할머니와 식사한 후 방으로 돌아왔다.

몇 시간이 흘렀지만 머릿속에서는 대공과의 만남이 계속 반복됐다. 아마도 그 역시 조용한 석고상실에서 휴식했던 것이겠지….

그런데 그가 베네딕트의 자장가에 관심 가지는 이유가 뭘까. 베네딕트 가문이 그와 인연 맺은 적은 없었는데….

밤새 잠을 설친 그리즈는 벨린의 성화에 못 이겨 가까스로 눈을 떴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치장을 빠르게 마치고 티아와 놀아 주고 있었다.

그때 문 앞에서 인기척이 울렸다. 누구냐고 묻자 사내가 점잖게 대답했다.

“대공 전하의 집사 브람입니다.”

그리즈가 숨을 멈추는 찰나 벨린이 문을 열어 줬다. 정정한 노신사가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단지 집사일 뿐인데도 호흡이 버거울 만큼 긴장했다. 대공의 눈과 귀가 온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즈는 미묘한 불안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은 걱정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혹시 대공이 여동생의 정체를 알아내고 부른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친화력이 좋은 벨린도 대공의 집사는 어려웠던 건지, 먼저 나서서 용건을 묻지 못했다. 방에 어색한 정적만이 감돌자 집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아침 식사를 제안하셨습니다.”

그리즈는 눈을 크게 떴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대공께서 왜?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혹시 자장가에 대해 물으려고 부르는 걸까.

그리즈는 계속 그를 마주쳐 봤자 허점만 들킬 거라고 생각하며 나직이 대답했다.

“송구합니다만 오늘 속이 좋지 않습니다.”

다행히 요새 계속 잠을 설쳐 낯빛이 좋지 않았다. 얼굴을 흘끔 본 집사도 그 말을 믿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직접 만나 뵙고 이해를 구하시는 게 어떠실지요.”

함께 식사할 수 없는 이유가 있더라도 대공의 앞에서 말하라는 얘기였다. 이내 이럴 시간이 없다는 듯 문 쪽을 바라봤다.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했지만 피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거운 발을 움직여 집사를 따르다 보니 어느덧 2층에 도착했다.

“대공께서 조용하게 식사하시길 원하시어 집무실로 모셨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나지막이 말한 집사가 왼쪽 복도 첫 번째 방문을 열었다. 창가에 책상이 있었고 벽은 온통 책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왔다.

그리즈는 창문 위의 벽을 장식한 늑대 머리를 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냉기 가득한 집무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음식 냄새가 어디선가 풍겨 왔다.

그때 그녀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던 집사가 방문을 닫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바쁘실 때면 종종 식사하는 곳입니다.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지요.”

그러곤 서재 옆 붉은 커튼이 쳐진 곳으로 먼저 걸어가서는 안쪽을 향해 말했다.

“전하, 율리아나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1층은 하인들의 기척으로 늘 소란스러운 반면 2층은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다. 식사하지도 않았건만 벌써 체기를 느꼈을 때였다.

“들어와.”

커튼 안쪽에서 묵직한 허락이 떨어지자 집사가 커튼을 열었다. 정면에 창문이 있었고, 천장에는 황금 샹들리에가 자리했다. 그 아래에 멋스러운 음식들로 차려진 식탁이 보였다.

식탁 앞에는 그림처럼 수려한 사내가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느릿하게 돌려 그리즈를 보며 낮게 말했다.

“앉아.”

그리즈는 이곳까지 오며 내내 준비한 문장을 조심스레 꺼냈다.

“송구합니다만… 오늘은 속이 좋지 않아서 식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무심한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앉아.”

처음에는 핑계일 뿐이었지만 정말로 속이 체한 듯 갑갑해졌다. 그의 냉랭한 시선이 올가미처럼 목을 조였던 탓이었다. 버틸수록 숨통까지 닥쳐올 것 같았기에 억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집사에게 눈짓했다. 기다리던 집사는 그리즈의 앞접시에 스테이크와 으깬 감자, 샐러드를 덜어 주고서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대공은 덜덜 떠는 여인을 새파란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낯선 성별을 가진 작은 동물을 탐색하는 듯했다.

이내 뼈만 앙상한 손가락을 주시하던 시선을 점차 위로 올렸다. 가녀린 손목과 팔뚝을 훑었다. 뒤이어 풍만한 가슴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탄탄했던 그의 목덜미가 묘하게 단단해지며 핏줄을 펄떡였다. 이내 거침없었던 시선이 가슴골에서 멈칫하며 멈췄고, 그는 보면 안 될 것이라도 본 듯 접시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먹어.”

한동안 그의 시선을 숨 막히도록 느끼던 그리즈가 포크를 무겁게 쥐었다. 거절해도 어차피 먹게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소화가 잘되는 감자를 덜어서 입 안에 넣으며 방 안을 조용히 살폈다. 창문이 북쪽에 있는 까닭에 공간이 어두웠다. 그의 등 뒤 장식장에는 성녀 석고상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중년쯤으로 보이는 사내와 여인의 초상화가 하나씩 있었다.

사내는 비아누트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고 얼굴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전 바이렌하그 대공이자 그의 아버지인 발데마르겠지. 로비 계단에서도 저 사내의 초상화를 본 적 있었다.

그 옆에는 활짝 웃는 여인의 초상화가 있었다. 싱그러운 미소의 소유자였다. 평균 신장이 큰 이곳 여인들과 달리 체격이 아담했다. 아홉 살 이후로 못 먹고 자란 그리즈와 비슷한 체구였다.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몸도 많이 약했던 모양이었다. 그 몸으로 아이를 둘이나 낳은 게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초상화를 살펴보던 그리즈는 불현듯 부모님의 초상화가 반듯하게 걸려 있던 그랑디아의 왕궁 풍경을 떠올렸다.

어린 그녀는 화려하고 기품있게 보여야 하는 공주의 삶을 늘 답답해했다. 공식 일정을 마칠 때면 울적한 마음으로 부모님의 초상화가 자리한 복도를 지나갔었다. 그 일상이 소중한 줄도 모르고 자기 전 머리를 빗겨 주던 아이에게 언제나 불평했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 타릴루치 공작의 장녀였던가.

아마 지금 왕궁의 모든 혜택을 누리며 행복해하고 있겠지. 찢어 죽일….

어디선가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때 서늘한 시선이 얼굴로 느껴졌다. 시시각각 무너지는 표정을, 그가 신기하게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의 초상화를 보고 슬픔에 젖은 율리아나인 척, 같잖게 연기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오늘은 이쯤 해야 했다. 친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일도, 타릴루치 가문에게 강탈당한 왕궁을 그리워하는 일도.

그리즈는 버석하게 마른 목을 포도주로 축였다. 그가 그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고 나서야 나지막이 말했다.

“초상화. 신선했어.”

어제 엉망진창으로 그렸던 그의 그림 얘기였다. 자장가에 대해 묻지 않아 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그가 보답을 주겠다는 듯 넌지시 말했다.

“기회를 줄게.”

“…….”

“죽이기엔 아깝거든.”

그 말을 듣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율리아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공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긴 어렸을 때는 개를 몽둥이로 때려죽였던 소녀가 지금은 강아지를 곱게 키우는 게 누가 봐도 이상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눈동자 색도 달랐고, 이웃 나라 왕실에서 전해져 온 자장가를 부르기도 하지 않았나.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버겁게 쿵쾅거리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 모습을 무섭게도 바라보던 그가 한쪽 입매를 느릿하게 올렸다.

“네 낯짝 말이야. 반반해서.”

“…….”

“귀족 정부나 하면서 빌어먹고 살아.”

그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 같았다. 이걸 거절하면 후폭풍이 닥쳐오리라는 걸 예상한 그리즈는 사색이 됐다.

기회를 줄 테니 스테판의 계획을 사실대로 말하라고 겁박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독뱀 같은 스테판을 배신하면 처절하게 복수당할 것이다.

그럼 사실을 알리는 대신 스테판을 막아 달라고 부탁해 볼까. 아니, 짐승보다 못한 매음굴 창녀의 목숨을 대공이 지켜 줄 리가 없지 않나.

그리즈는 입술을 꿋꿋이 닫고 있었다. 묵묵히 기다리던 그가 크리스털 잔에 든 물로 입가심하고는 낮게 말했다.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그가 부탁이나 제안 따위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정말로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것이다. 재밌는 초상화를 그려 준 일에 대한 보답으로.

이 기회에 진실을 실토하지 않는다면 그의 손에 참수당할지도 몰랐다. 샤토의 왕처럼 푸르죽죽해진 얼굴만 광장에 매달리는 걸 상상하자 가슴속이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하지만 대공에게 사실을 고하자니 스테판의 독기 어린 말이 발목을 잡았다.

“낌새가 이상하다고 달아난다면 네 목이 잘릴 거라는 것만 명심하렴. 너와 살 맞대고 살던 매음굴 여인들도 괜한 화를 입을 테지.”

그 말대로, 스테판이 작정한다면 여인들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드리안, 마리, 클라렌 그리고 다른 이들까지 분풀이로 죽일 텐데. 죽지 못해 살아온 그 여인들이 무슨 죄라고….

서글픈 한숨을 길게 내쉬는데 대공이 지루한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시간 없어.”

“…….”

“언제까지 친절할까, 내가.”

여인에 관심 없는 그가 이렇게 여인을 따로 불러내어 식사하는 건 엄청난 친절을 베풀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그리즈는 그 친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공을 화나게 하면 그녀 혼자 목숨을 잃게 되겠지만 스테판을 화나게 하면 매음굴의 많은 여인까지 죽게 된다.

꿋꿋이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는 여인을 보고 그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불쾌하다는 의미 같았다. 이내 그는 긴 손가락 사이에 잔을 끼워 넣고 포도주를 마시며 말했다.

“식사 즐거웠어.”

제안은 이렇게 끝내겠다는 의미였다.

식성이 좋은 건지 그는 식탁 위 접시를 대부분 비웠다. 반면 그리즈는 스테이크 한 덩이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조각조각 잘라 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손이 후들거려서 더 이상 먹지 못할 터였다. 사색이 되어 일어난 그리즈가 집사의 안내를 받아 커튼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참….”

짧게 말한 그가 냅킨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마부를 데려오고 있어.”

“…….”

“너를 안다던데.”

마부? 어떤 마부…?

“그게 무슨 말씀….”

그리즈가 덜덜 떨리는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일순간 눈앞이 새카매졌다. 설마 매음굴에서 이 저택까지 가짜 율리아나를 데려왔던 마부를 얘기하는 건가?

시야에 들어온 그는 냅킨으로 입술을 점잖게 닦고 있었다. 그에게 무어라 물을 기회는 없었다. 지옥문이 닫히듯 커튼이 빠르게 닫혀 버렸으니.

그게 식사의 끝이었다.

***

대공의 방을 나섰을 때쯤에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당장 단두대에 목이 얹힌 것처럼 목덜미가 아릿했고, 심장이 뛰어 죽을 것만 같았다.

물론 대공이 마부를 찾는 건 당연한 절차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여동생 율리아나가 느닷없이 돌아온 게 이상했을 테니, 율리아나를 데려왔던 마부를 찾아 진상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테판이 마부를 배 태워서 멀리 보냈다고 했는데 어떻게 찾아냈을까. 이미 마부에게 모든 사실을 캐내어 들은 걸까.

혼비백산하며 방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복도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빨간 곱슬머리의 벨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셨군요, 아가씨.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요새 들어 늘 그랬듯 벨린은 편히 미소 짓고 있었다. 반면 정체를 들키기 직전의 그리즈는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낯빛이 시체처럼 파리해져 있었다. 벨린은 대공과의 식사가 어땠느냐고 물으려다가 연갈색 눈썹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안 좋은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그 이유를 알려 줄 수 없는 그리즈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정체를 들키기 직전인 마당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다급한 마음으로 치맛단을 잡아 들었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이 저택만 아니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눈치를 살피던 벨린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후작 각하께서 찾으셨어요. 급한 일이니 식사를 마치는 대로 오라고 하셨는데….”

스테판이 율리아나가 대공과 식사한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던 모양이었다. 무슨 얘기를 은밀히 나눴는지 캐물으려는 거겠지.

그리즈는 스테판과 이 일을 상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간에 저택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공의 방에서 율리아나가 나왔다는 얘기가 이미 전해졌을 텐데. 가지 않으면 그가 찾아올 것이다. 저항해 봤자 의미 없었다.

고심하던 그리즈가 방을 나섰다.

“어디로 가면 되니?”

분위기를 살피다가 심각해진 벨린이 뒤따르며 대답했다.

“후작 각하의 집무실로 모실게요.”

그리즈의 눈앞에는 한 가지 광경이 연거푸 반복됐다. 참수대에 누운 자신의 모습과 그 앞에서 검을 든 채 서 있는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였다. 그가 소름 끼치도록 평온한 얼굴로 목을 내려치리라고 생각하자 손발이 벌벌 떨렸다.

그런 그리즈를 지켜보던 벨린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저택을 나와 왼쪽의 별채로 들어갔다. 기사단이 쓰는 사무실도 함께 있는 건지 갑옷 입은 사내들이 종종 보였다.

햇빛이 쨍쨍한 복도 안쪽으로 쭉 들어간 벨린은 가장 끝에 있는 문을 노크했다. 누구냐는 질문이 안에서 들려오자 벨린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후작 각하, 율리아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대답은 곧장 들려왔다.

“들어와.”

그리즈는 문을 열어 준 벨린에게 돌아가라고 명하고서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스테판은 소파 테이블에서 펜촉으로 서신을 쓰다가 외눈 안경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비아누트와 아침 식사를 했다는 얘기 들었어.”

그는 평소보다 상기된 그리즈를 살피다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조금 궁금해지더군. 네가 대공을 피하지 못하는 걸까, 피하지 않는 걸까.”

나긋나긋하게 말한 그가 손가락 사이에 낀 시가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가 뱉어 냈다. 희뿌연 연기 속에 가려진 얼굴이 악마처럼 느껴져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을 때였다.

“네가 대공을 유혹해서 나를 갖고 놀 작정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사내들에게 다리 벌리면서 익힌 기술을 썩히기는 아까울 테지.”

잠시 말을 멈춘 그의 입가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한 서늘함이 어려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대공은 아랫도리로 움직이는 사내가 아니야. 사실 아랫도리가 제 기능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군.”

그리즈는 호흡을 턱 막는 담배 향을 느리게 마시며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저 사내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게 된 이 순간에도 저 사내는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고 있는 거다.

애초에 믿을 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까이할수록 독이 되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저런 인간에게 대공이 마부를 찾았다는 정보를 굳이 알려야 할까. 차라리 대비할 틈을 주지 않은 채 홀연히 저택을 떠나 버리면 알아서 대공의 손에 죽지 않을까.

마음 같아선 그렇게 독하게 마음먹고 갈 길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저택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곧장 죽은 목숨이 될 것이었다.

또한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갖춘 대공이라도 이런 일로 숙부를 죽이기는 힘들 터였다. 숙부의 어머니인 할머니가 버젓이 살아 계시니 말이다.

이미 발등엔 불이 떨어졌고 어떻게 발버둥 쳐서든 불을 꺼야 했다. 그리즈는 일단 지금의 죽을 고비만 넘기고 저택을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하기로 마음먹고 덜덜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대, 대공 전하가 마부를 데려오고 있대요.”

그런 정보를 한낱 창녀에게서 들을지는 몰랐는지 스테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시가를 한 모금 더 빨고서 재떨이에 비벼 끈 후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마부? 대공께서 네게 직접 그리 말한 건가.”

그녀가 그랬듯 스테판도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창백해진 스테판을 보던 그리즈는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를 손등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네, 마부를 증인으로 데려와 캐묻기 전에 기회를 주시려 저를 식사 자리에 부른 것 같았어요.”

스테판은 손에 쥐고 있던 시가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고는 고심하기 시작했다. 대공의 속내를 헤아리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짖지만 않았지, 으르렁거리는 표정을 보고 짐작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대공과 숙부와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한 것 같았다.

권력다툼. 아니, 이미 대공이 움켜쥔 권력을 저치가 탐내는 거겠지. 2인자라면 누구든 그렇듯.

그리즈는 둘 중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미리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땅에 묻힐 이가 스테판이 되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십 분여가 흘러서야 스테판이 상황 판단을 마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부가 지금 잡혀 오고 있다면 항만으로 들어올 거야. 바다 건너로 보냈으니까.”

“…….”

“차라리 그냥 죽였어야 했는데.”

애초에 저자가 가짜 조카를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었다. 자신의 만행을 후회하지 않고 마부를 살려 둔 걸 후회하다니. 그리즈가 치를 떨다가 이를 지그시 물었다.

스테판이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자는 듯 출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사람을 보내 알아봐야겠어.”

그러니까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너는 잠자코 기다리라는 의미였다. 이 저택에서? 얼마나? 눈동자를 불안하게 떨던 그리즈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저는 그때까지 다른 곳에 있게 해 주세요.”

지극히 합리적인 요청이라고 생각했다. 대공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숨어 있다가 정체가 탄로 나면 달아나고, 아니라면 돌아오면 되니 말이다.

그러나 스테판은 그조차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내 그리즈 앞에 서서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율리아나…. 같잖게 머리 쓴다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니.”

여인처럼 곱상한 스테판의 얼굴이 햇빛을 받아 더 수려하게 빛났다.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도, 충분한 권력과 재력을 갖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그가 조금이나마 가여워졌을 때였다.

“너는 이 저택에서의 할 일을 해.”

요란 떨지 말고, 내뺄 생각도 말고 평소대로 지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목숨이 달린 마당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복종하다시피 그의 말을 들어온 그리즈가 처음으로 그를 선명하게 응시했다.

“제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만약 전하께서 제 정체를 알게 되시면요…?”

햇빛을 흡수한 갈색 눈동자가 그리즈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리즈는 그 눈에 생각이 빨아 들여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미 엄습해 온 두려움과 불안, 절망까지 나른하게 좀먹히는 것 같았다.

끝내는 그에 대한 분노까지 읽힐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시선을 떨구고 그의 턱선을 곁눈으로 바라보는 찰나, 미끈한 입술이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

“…꼭 그거 같구나.”

작게 속삭인 그가 회색 머리칼을 매만지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티아.”

벌벌 떠는 그녀의 모습이 강아지와 비슷하다는 얘기였다. 그 말에 반응할 여력은 없었다. 텁텁한 담배 향과 라벤더 향이 순식간에 폐부에 차 현기증이 돌았던 탓이었다.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에 휘청거리다가 그의 팔뚝을 잡았다.

그가 그 손을 묘하게 응시했다. 더러운 창녀가 손을 댔다고 진저리 칠 줄 알았지만 그는 신경질을 내지도, 밀어내지도 않은 채 다른 얘기를 꺼냈다.

“항만과 국경지 곳곳에 암살자를 대기시킬 거야. 마부가 죽는 건 시간 문제겠지.”

마치 반란을 모의하는 것처럼 낮고 치밀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 일에 목숨 건 여인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 같았다.

“증인만 제대로 찾아 없애면 넌 진짜 율리아나가 되는 거야. 숙부인 내가 널 데려온 이상 대공은 대외적인 의심을 드러낼 수 없어. 자, 그럼….”

“…….”

“너는 이 저택에서의 할 일을 해.”

물론 결과는 처음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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