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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하루가 흘렀다. 밤새 온몸이 새카만 괴한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려 잠을 설쳤다.
아침 일찍 찾아온 하녀장이 오늘부터는 여러 가지 수업을 받을 거라고 알렸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나 스테판에게는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몸을 치장하는 내내 대공이 혈안이 되어 찾아오는 상상을 했다. 돌아온 율리아나가 사실은 매음굴 출신이라는 걸 그가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할머니의 집사가 찾아왔을 뿐이었다. 할머니가 아침 식사를 제안했다면서.
식사는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할머니는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손을 유심히 살피기만 하셨다.
집사가 빈 접시를 치우기 시작하자 호두 파이를 주문했다. 오늘은 몸 상태가 제법 좋으신 모양이었다. 엊그제보다 밝아진 표정으로 부드럽게 물으셨다.
“연회는 어땠니?”
마침 할머니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던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즐거웠어요.”
할머니도 마찬가지로 즐거웠는지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예법을 잊지 않았더구나.”
그리즈는 그동안 할머니가 귀족적으로 인사하는 모습이나 식사 예절, 대화 예절이 밴 자신의 모습을 눈여겨보는 걸 느끼고 있었다. 조금 부족하긴 해도 귀족의 행동 양식을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진짜 율리아나라고 믿기 시작한 눈치였다.
속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대체 이 불안이 얼마나 계속될까.
“…네.”
꽉 막힌 목소리로 대답하는 순간 집사가 호두 파이를 가져왔다. 할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이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호두 파이를 보니 옛 생각이 나는구나. 사실 나는 호두보다 사과를 좋아했지만 네가 좋아하는 탓에 늘 호두 파이를 먹었지. 너를 잊어버리던 날에도 그랬어. 혹시 기억나니?”
고소한 파이 향을 맡던 그리즈가 내심 울적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리즈가 기억을 잃었다는 얘기를 이미 들었던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그날은 내가 공작가 부인들을 바이렌하그 숲 입구로 데려갔던 날이었단다. 친목을 다질 겸 하얀 망아지를 보상으로 내걸고 사냥 대회를 열었지.”
집사가 나이프로 파이를 여덟 등분 했다. 싸한 시나몬 향이 퍼지자 할머니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시기에 나는 하루하루 늙어 간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어. 그래서 부인들에게 알리고 싶었단다. 아직도 나는 건재하고, 그건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야.”
쪼르르, 쪼르르. 두 개의 찻잔에 홍차를 따른 집사가 방을 나섰다. 할머니는 냅킨에 손을 닦고는 크게 한숨 쉬었다.
“젊은 부인들을 이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승부욕이 활활 타오르더구나. 네가 따라나설지도 모르겠다고 우려하면서도 보모에게 맡기고 사냥에 나섰지.”
“…….”
“사슴 두 마리를 잡아 돌아왔을 때 너는 사라지고 없었고 하녀들이 맨발로 숲을 뛰어다니며 오열하고 있었어. 그제야 나는 내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이었어.”
그리즈는 지옥 같았을 그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사슴 두 마리를 사냥한 대신 금쪽같은 손녀를 잃은 할머니의 심정이 어땠을까.
자식 잃은 슬픔은 겪어 보지 못한 탓에 비슷한 고통을 떠올렸다. 눈앞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줄줄이 참수되는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그날의 어머니는 머리를 잘리고 나서도 눈동자로 그리즈를 찾아내어 절박하게 위로했다. 슬픈 순간은 빨리 떨쳐 내고, 부디 당신 몫까지 살아가 달라는 듯.
어머니가 어서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가길 바랐기에 그리즈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어머니의 영혼이 까만 동공으로 빠져나가는 광경을 애타게 바라보았었다.
고작 아홉 살 소녀에게 어머니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 세상이 무너진 그날로 다시금 돌아간 듯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던 찰나였다.
“신을 믿니?”
그리즈는 차오르는 슬픔을 삼키며 생각에 잠겼다.
“저는….”
사실 세상이 무너진 그날 신에 대한 믿음도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다. 부모님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어두운 탑 안에 갇혀 형제자매의 부고를 들어야 했다. 참수되기 위해 성으로 돌아가서 바싹 마른 형제자매의 시신을 직접 보기까지 했다.
왜 나는 데려가 주시지 않느냐고 신을 원망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을 저 버릴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신의 천국에서 평화를 누리고 계신다고 믿고 싶었으므로. 그리즈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니는 신을 믿는다는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참, 다행이구나. 나도 믿고 있거든.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도 신께서 의도하신 일이란 것을 말이야.”
신께서 모든 사건을 의도한 것이라…. 그 말이 맞다면 신께서는 믿음 깊은 소녀를 어째서 지옥 같은 세상에 남겨 비참하게 살게 하시는 걸까.
한숨 짓는 찰나 할머니의 시선이 넌지시 느껴졌다.
“네가 이렇게 나타난 것도 신께서 의도하신 바겠지….”
할머니는 일주일 넘게 방에서 골몰한 결론을 말하며 처음으로 편안하게 웃어 보였다.
“뭐… 그 덕분에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이란다.”
사심 없는 미소를 보자 목에 덩어리가 턱 걸린 듯 갑갑해졌다. 스테판이 할머니를 속이고 있다는 진실이 목을 거슬러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 할 것 같았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의아하게 살피다가 창밖을 내다봤다.
“사실 젊었을 때는 신의 뜻을 깨닫기 위해 발버둥 쳤었지. 신께서 내 남편을 빼앗아 간 이유도 알고 싶었고, 그때쯤 스테판을 임신하게 된 이유도 궁금했었거든.”
“…….”
“하지만 이제는 그냥 겸허히 기다리기로 했어. 네가 돌아오게 된 이유도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할머니의 말을 곱씹던 그리즈는 조금 묘한 점을 느꼈다. 할머니는 손녀가 돌아온 걸 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지 않는 눈치였다. 마치 의도를 헤아리려 하는 것 같았다. 그게 어떤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하며 홍차로 입을 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호두 파이를 접시에 덜어 주며 부드럽게 물었다.
“오늘부터 교육받게 될 거라는 얘기 들었니?”
오늘부터 흠결 없는 귀족이 되기 위한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즈가 후식용 포크와 나이프로 파이를 자르고는 대답했다.
“…네.”
할머니는 어서 먹어 보라는 듯 눈짓하며 말했다.
“앞으로 불편한 게 있다면 편히 얘기하렴.”
입 안에 파이를 넣자 독특한 시나몬 향과 고소한 호두 향이 절묘하게 번졌다. 단단하고 퍼석한 식감이지만 달콤한 맛이 녹아들어 절로 군침이 돌았다.
“이렇게 맛있는 파이는 처음 먹어 봐요.”
마음 같아선 파이를 먹는 데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할머니께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리즈가 파이 한 조각을 해치운 후 조심스레 말했다.
“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사달이 벌어지기 전에 요하네스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스테판은 순순히 보내 줄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니 누구에게든 부탁해야만 했다. 사실을 알게 된 스테판에게 시달리더라도 말이다.
“바이렌하그 성당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그곳의 경치가 천국처럼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조심스레 말한 그리즈가 눈치를 살폈다. 할머니는 홍차로 입가심하라는 듯 찻잔을 쓱 밀어 주며 대답했다.
“그래. 조만간 같이 가자꾸나.”
인자하게 웃으시는 할머니를 보자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죗값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그리즈는 차마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할머니가 무슨 말이냐는 듯 두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스테판입니다, 어머니.”
할머니는 홍차로 입을 축이고 대답했다.
“들어오거라.”
여우 털로 만든 망토를 걸친 탓에 그가 한 마리의 여우처럼 보였다. 아마 여우같이 교활한 마음으로 온 거겠지. 매음굴 창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여인을 할머니와 두는 게 불안했을 테니까.
그리즈가 불쾌함을 숨기려 억지로 미소 지었다. 역시나 비슷하게 미소 지은 스테판이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티타임을 방해해 죄송하지만 율리아나의 가정교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그 점을 생각지 못했다는 듯 무릎을 살짝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부터 바빠질 아이를 내가 너무 붙잡고 있었구나.”
그리즈는 미안한 표정의 할머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제게는 정말 행복한 티타임이었어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스테판이 먼저 방을 나섰다. 그 뒤를 조용히 따르던 그리즈는 복도를 지나며 문득 어제 정원에서 봤던 하얀 꽃을 떠올렸다. 매음굴 아드리안에게 그 꽃을 전해 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지금은 능력이 없어 여인들을 탈출시켜 줄 수 없으니 그들이 살 방법이라도 도모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즈는 수업에 들어가기 전 정원에 들러 하얀 꽃을 한 다발 땄다. 그러곤 이 작별 선물을 아드리안이란 여인에게 전해 달라고 스테판에게 부탁했다. 앞으로 율리아나 역할에 충실히 임하겠다는 약속도 함께였다. 스테판은 못 들어줄 부탁도 아니라는 듯 흔쾌히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
정신없이 교육받으며 보름을 보냈다.
예절, 교양, 자수, 그림 등 대공 영애의 기품을 지키기 위해 배워 둬야 할 것이 많았다. 그나마 어렸을 때 배웠던 예절과 승마, 그림은 몸에 배어 쉬웠지만 왈츠는 최악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침대에서 테이블까지 걷기도 힘들어하셨던 할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을 회복했다. 요새는 종종 정원을 산책하며 소소한 행복을 즐기신다. 그리즈도 할머니를 뒤따르며 산책하는 시간을 유일한 행복으로 느꼈다.
또 아침이 왔다. 간밤에 티아가 놀아 달라며 밤새 낑낑댄 탓에 잠을 설쳤지만 서둘러 일어났다. 때마침 새 드레스를 갖고 들어온 벨린이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가씨.”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뭐가 그리 두려운지 벌벌 떨었던 벨린은 요새 부쩍 웃는 횟수가 많아졌다. 벨린이 무얼 두려워했던 건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었다.
간단한 목욕을 마치고 치장을 시작했다. 벨린은 의자에 앉은 그리즈의 머리칼을 빗으로 빗어 주며 작게 감탄했다.
“머릿결이 전보다 더 좋아지셨어요. 슬슬 윤이 나기 시작하네요.”
지금껏 살기 위해 치열하게 식사한 덕분이었다. 물론 저택 주방장의 음식 솜씨가 좋은 덕분이기도 했다.
원체 말수가 적은 그리즈는 하얗게 웃기만 했다. 반달처럼 휜 회색 속눈썹을 바라보던 벨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수업은 견딜 만하세요?”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어. 왈츠만 빼고.”
벨린이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연습하시다 보면 어느샌가 실력이 늘어 있을 거예요.”
슥슥. 그리즈는 머리칼을 빗는 소리를 나른하게 듣고 있었다. 일주일 전쯤부터 말문을 연 벨린이 노곤한 정적을 깼다.
“어제 외출은 마음에 드셨나요?”
“외출…?”
“바이렌하그 성당에 다녀오셨잖아요.”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그리즈가 잠시 입술을 닫았다.
사실 어제 할머니와 함께 외출했었다. 대성당 근처에 사는 석고상 공예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가는 김에 대성당에도 들렀다.
마침 할머니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제를 만나 담소를 나눴고, 그리즈는 광장을 구경하겠다고 빠져나갔다. 조금 헤매다가 예술품 상점을 찾아서 주인에게 넌지시 요하네스를 아냐고 물었지만 주인은 이 가게를 새로 인수한 까닭에 잘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사촌 형님의 가게를 인수했으니 기회가 되면 물어봐 주겠다고 했다. 그리즈는 기약 없는 약속에 한숨 쉬며 편백나무가 무성한 숲을 지나 저택으로 돌아왔다.
“응. 또 가고 싶을 정도로 멋있는 곳이었어.”
그리즈의 요점은 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반면 벨린은 전혀 다른 일에 관심이 있었다.
“석고상 공예가도 만나셨어요? 엄청 미남이라던데.”
그리즈는 돌아오는 길에 석고상 공예가를 만났던 일을 회상했다. 할머니께서 율리아나의 석고상을 만들어 가족 전시실에 넣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굴의 틀을 만드는 내내 요하네스를 찾을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공예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였었나, 미남이었었나.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하다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래, 미남이었던 것 같아.”
벨린은 관심 없는 듯한 그리즈의 반응을 살피다가 대답했다.
“하긴 대공 전하를 오라버니로 두셨으니 어떤 미남도 성에 차지 않으실 거예요.”
이 저택에서 지내며 느낀 점이 있었다. 어떤 대화를 하든지 대공의 얘기로 전환된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대공의 능력과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겠지만 말이다. 그리즈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린은 동백유를 바른 손으로 머리칼을 손질해 주며 말을 이었다.
“아차, 전하께서는 어제 새벽에 돌아오셨어요.”
지난 일주일간 노르드발츠 왕궁에 머물렀던 그가 어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덕에 조금 숨 쉴 만했는데….
마부는 아직 찾지 못한 걸까. 앞으로도 찾지 못할까. 불안감으로 차가워지는 손을 맞잡았을 때였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드디어 혼인하실 모양이에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약혼자가 있었던 걸까.
“혼인?”
벨린이 정수리에 머리 장식을 얹어 주며 대답했다.
“문관들이 나누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는데, 국왕 폐하께서 전하께 브리튼 왕국 장녀와의 혼인을 주선하셨다고 해요.”
“…….”
“사실 전하께서 지금껏 여인에 관심 없으셨던 터라 모두가 걱정이 많았어요. 후사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출정하시니 불안할 따름이었죠.”
얘기를 듣던 그리즈는 고개를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대공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만큼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건강한 자식을 많이 낳는 것도 그 책임 중 하나였다.
다만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혼인하는 사내는 지금껏 본 적 없었다. 목숨 걸고 출산하는 건 여인이지 않나. 사내들은 은밀한 쾌락을 즐기면 되니 말이다. 그조차도 하지 않아서 관료들을 노심초사하게 만든 그가 조금 궁금해졌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시니?”
머리 손질을 마친 벨린이 면포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어릴 적에 잃은 약혼자를 깊게 그리워하셨다고 해요. 지금까지요.”
벨린은 그의 과거를 길게 얘기하기 부담스러웠는지 브리튼의 공주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브리튼의 공주님은 현재 바다 건너의 따스한 나라에서 유학 중이시라고 해요. 아마 한 달 뒤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그때 직접 만나 혼인하시지 않을까요?”
귀족들 사이에서 얼굴도 못 보고 혼인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벨린도 그의 혼인이 한 번에 성사될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어떤 사내도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혼인이 성사되겠죠. 아무리 아름다운 공주님이라도 우리 대공 전하를 뵈면 마음이 설렐 테고요.”
그가 돌아왔다는 말에 어두컴컴했던 그리즈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밝아졌다. 혼인하려면 준비할 게 많을 테니 가짜 여동생에 대한 의심도 흐려질지 몰랐다.
치장을 마친 후 티아를 품에 안은 채 방을 나섰다. 로비를 지나 첫 번째로 나오는 서재가 그녀의 교육실이었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천장이 높고 햇살이 환히 들어오는 공간이 그녀를 반겼다. 그녀는 바싹 마른 양피지 향을 기분 좋게 마시며 캔버스 앞에 앉았다. 티아는 바닥에 내려 두었다.
수업이 시작됐다. 미술 교사 프렌체는 일주일 전부터 그녀가 그려 온 정물화에 음영을 넣는 법을 설명했다. 새빨간 사과 그림이었다. 꼭지 아래에 윤기가 흐르는 모습을 표현해 둔 덕에 사과 향이 물씬 풍겨 왔다.
아마 음영을 넣고 마무리하면 첫 작품이 완성되겠지. 사과를 좋아한다고 하셨던 할머니께 선물할 생각이었다.
어서 완성하고 싶은 마음에 붓부터 쥐었다. 그때 로비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문득 귀에 걸렸다.
요새 와서 깨달은 점인데, 이 저택의 하인 하녀들은 걸을 때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발소리의 주인은 스테판이나 대공일 것이다.
그 두 사내 중 누구도 만나기 싫었던 그리즈는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거뒀다. 발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왠지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고 느껴져 심장이 쿵쿵 울렸다.
붓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프렌체가 그 점을 지적했다. 그 순간 발소리가 코앞에서 멈췄다.
끼익.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창백해진 낯빛의 그리즈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테판의 방문을 예상했기에 그의 머리가 있을 법한 곳에 시선을 뒀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왔던 건 탄탄한 목에 자리한 목젖이었다.
눈동자를 위로 올려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늘진 자리에서도 빛을 받은 듯 또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누구든 사로잡을 만큼 근사한 얼굴을 가졌지만 서늘한 눈가 때문에 어둡게 빛나는 사내,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였다.
그를 본 프렌체가 급히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였다.
“대, 대공 전하, 처음 인사드립니다. 율리아나 아가씨의 미술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프렌체라고 합니다.”
그는 눈으로 서재를 훑으며 들어오다가 걸음을 멈췄다. 책을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그 점을 같이 느낀 건지 프렌체가 바닥을 보며 말을 이었다.
“본의 아니게 전하께서 예전에 사용하셨던 서재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마님께 허락받았지만 불편하시다면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입니다.”
부쩍 낯을 가리던 티아는 그를 봤던 걸 그새 까먹었는지 의자 밑으로 숨어 버렸다. 티아를 좇던 그의 시선이 노란 드레스 밑단으로 향했다. 그제야 그리즈는 너무 긴장한 까닭에 그에게 인사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는 일어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돌아오셨다는 말씀을 듣고도 인사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가지런히 겹쳐 배에 둔 손에 식은땀이 나오려 했다. 어서 인사라도 받아 주길 바랐지만 그는 생각지도 못하게 웃었다.
“아직도 있군.”
그러니까 자리를 비운 일주일 안에 그녀가 자취를 감추거나 쫓겨날 줄 알았다는 얘기 같았다. 그는 느릿하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둘 중 하나겠지.”
“…….”
“겁이 없거나, 진짜거나.”
동백유를 발라 풍성하게 만 그리즈의 머리칼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그가 가볍게 쥐어서는 촉감을 느꼈다. 신기한 건 무조건 손대고 보는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시선이 사과 그림에 흘끗 닿았다. 눈치를 살피던 프렌체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교계에서 화가로도 유명했던 작은 마님을 닮아 미적 감각이 뛰어나십니다. 아마 계속 연습하다 보면 뛰어난 화가가 되실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곳의 교사로 일하기 위한 입바른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건지 그가 미간을 좁혔다.
“재미있네.”
프렌체가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대공은 우매한 자에게 늘 그래 왔던 듯 친절히 설명해 줬다.
“내 모친을 닮았다는 얘기.”
“…….”
“확인해야겠어.”
그가 까만 털 망토의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봤다. 그리즈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불길한 예감이 몰려온다. 볼일을 보고 가려던 그를 프렌체가 실언으로 붙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았기에 입술을 떼었다 붙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의 속눈썹이 참 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려 봐.”
차갑게 웃은 그가 느릿하게 창가 소파로 가 앉았다. 프렌체가 사색이 되어서는 안절부절못했다.
“저, 전하. 아무리 미적 감각이 뛰어나도 아직은 초상화를 실력이 되지 못합니다.”
이내 도와 달라는 듯 그리즈에게 절박한 눈빛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리즈는 고민했다. 앞으로 더 연습해서 제대로 된 초상화를 선물하겠다고 고할까.
딱딱하게 굳어 버린 입술을 열었다. 그가 철제 소파에 길게 누워서 팔걸이를 베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판단은 내가 할게.”
3인용 소파임에도 그의 다리는 반대쪽 팔걸이를 벗어나 있었다. 차마 올리지 못한 반대쪽 다리는 바닥을 길게 짚은 채였다.
어쩌면 그는 모친을 닮았다는 말로 눈을 가리려 했던 미술 교사와 정체가 불분명한 여동생을 한곳에 묶어 보내 버릴 생각인지도 몰랐다. 그런 그에게 멋진 초상화를 그려 보란 듯이 선물하고 싶었지만 그럴 실력이 없는 게 개탄스러웠다.
그리즈가 후들후들 떨리던 붓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송구하지만 아직은 실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시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는 확고한 의사를 드러냈다.
“그려, 율리아나.”
그러곤 느긋이 웃으며 율리아나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율리아나, 율리아나…. 그녀가 율리아나라는 이름을 쓰는 게 여전히 낯선 눈치였다.
선택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잘 그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일지. 아니면 그의 명을 거부하고 더 낯선 관계가 될지.
차마 그를 거부할 자신이 없던 그리즈는 침울해진 얼굴로 이젤 앞에 앉았다. 그러곤 다가오는 프렌체에게 스테판을 찾아 달라고 작게 속삭였다.
“숙부께 상황을 전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프렌체는 목탄을 더 가져오겠다며 서재를 나갔다. 그리즈는 하나 있던 목탄 끝을 면포로 감싸 쥐고는 새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을 벌벌 떨고 있지만 그림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섯 살부터 그림을 배웠었다. 초상화를 완성해 본 적은 없었지만 사람의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캔버스를 바꿔 가며 공들여 그린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을 살려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싫었는지 팔로 눈가를 가렸다. 그리즈는 덜덜 떨면서도 원하는 바를 명확히 요구했다.
“…눈.”
“…….”
“눈이 안 보여요.”
뒤늦게 팔을 뗀 그가 시선만 돌려 그녀를 주시했다. 마치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이 맞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눈?”
그리즈는 짧게 들려온 반문에 위축되면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왜 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다. 그리즈는 반란군이 쳐들어오던 날 그랑디아 왕궁에서 벌어진 살육의 현장을 떠올렸다.
그날 그리즈는 탁자 아래에 숨어서 살해당하는 사람들을 보았었다. 그들이 죽는 순간 하나같이 동공이 훤히 열렸다.
그리즈는 그 후부터 사람의 영혼이 눈동자에 머문다고 믿었고, 낯선 이를 만나면 눈부터 유심히 살폈다. 유독 탁한 눈을 가졌거나 파악하기 모호한 눈빛의 주인은 의식적으로 피해 다니곤 했다.
후자에 속했던 대공은 피해 다녀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계속 시선이 갔고, 그런 그에 대해 알고 싶었다.
지금 그의 영혼을 들여다볼 기회가 주어진 건지도 몰랐다. 그리즈가 캔버스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사내를 내내 주시하며 대답했다.
“영혼이 머무는 곳이니까….”
예상 밖의 대답이었는지 그는 말이 없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묘했다. 그녀의 말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정말 그를 그려야 했다. 새하얀 캔버스에 덜덜 떨리는 목탄을 댔다.
무슨 생각인지 그가 쿠션을 베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햇빛을 흡수한 새파란 시선이 일순간 그리즈의 눈가를 훑었다. 사람의 눈동자에 영혼이 머무는 게 사실이라면 그걸 확인하겠다는 듯.
그리즈는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듯, 그 역시 나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소리 없이 수색당하기 시작했다. 공주 자리에서 폐위당하고 매음굴에 팔려 간 불행한 영혼, 살기 위해 남의 자리를 꿰찬 부끄러운 영혼을 말이다.
그는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리즈는 치부를 내보인 것처럼 목덜미가 뜨거웠다. 그의 유려한 얼굴이, 고결한 시선이, 순수한 호기심이 오래 머물수록 수치심이 진해졌다.
캔버스 위에서 방황하던 목탄이 뚝 부러졌다. 반쯤 남은 목탄을 응시하던 그리즈는 어지러운 생각을 삼키며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두 명의 남자가 반복해서 떠올랐다. 피를 뒤집고 쓰고 돌아왔던 대공, 다른 한 명은 나비를 좋아한다던 대공.
상상의 좋은 점은 원하는 모습을 마음껏 그려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환한 햇살 정원에 누운 사내를 상상했다. 그를 사랑하게 된 나비가 하나둘씩 몰려들었고, 그는 나비들에게 나른한 시선을 나누어 주게 되었다.
상상 속에서의 따사로움이 목탄 끝에 녹아들자 캔버스를 거니는 손길에 속도가 붙었다. 슥슥. 규칙적인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지만 어쩐지 그에게서는 무료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즈는 지금 그의 얼굴을 세세히 살피고 있듯, 그 역시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시선이 너무 선명해 숨 막혀 올 때면 따스한 그를 상상하며 달랬다.
어느덧 스케치를 마치고 붓으로 파란색 물감을 풀었다. 그러곤 오늘 내내 회피했던 파란 눈동자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햇살 덕분에 눈동자가 홍채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바다의 물을 담아둔 듯 청량한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전부였다. 사람이라면 지녔을 법한 따스함, 상냥함, 행복감 혹은 분노, 슬픔 같은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쯤 세상 위에 선 자가 직면한 문제를 깨달을 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너무 많이 가진 탓에 더 이상 원하는 게 없는 것이다.
당연히 갖고 있었으므로 어떤 행복과 만족도 느낄 수 없을뿐더러,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것이다.
그게 그의 영혼이 모호하게 느껴졌던 이유였다. 그는 선하거나 악할 수 없었다. 그 무엇도 원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그를 조금이나마 가여워하며 채색을 시작했다. 문득 그의 눈동자에 따스한 영혼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알량한 동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슥슥. 불규칙적인 소리가 또다시 하염없이 이어졌다. 그때 문 앞에서 노크가 울렸다. 드디어 프렌체가 스테판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스테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스테판은 파리해진 눈으로 상황을 살피느라 바빴다. 그러다 우연히 대공을 만난 듯 답지 않게 연기했다.
“여기 계셨군요, 전하.”
소파에 누워 있던 대공이 느릿하게 일어섰다. 스테판의 등장이 달갑지 않은 건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드리운 채였다.
지금껏 두 사내의 관계를 짐작만 했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혈통이 같은 덕분에 닮은 느낌이 있었지만 각각 내뿜는 분위기가 완벽히 달랐다.
스테판이 애지중지 키워진 하얀 늑대개 같았다면 대공은 태어나자마자 야생에서 자생한 검은 늑대 같은 느낌이 강했다.
어쩌면 대공의 체격이 더 컸고 흑발을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들을 살피던 그리즈가 고개를 숙이는 사이 스테판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우연히 프렌체를 만나 얘기 들었습니다. 율리아나에게 초상화를 부탁하셨다고요.”
스테판의 미성과 대비되는 저음이 바닥 낮게 깔렸다.
“그렇습니다, 숙부.”
남매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게 부럽다는 듯 스테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여유로운 걸음으로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스케치할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선이 얼마나 흔들렸는지, 목탄이 어떻게 번졌는지.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그림을 보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목탄이 번져 새카매진 캔버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대공의 얼굴을 확대하여 그렸는데, 얼굴의 형상은 흐릿했고 눈동자만이 청명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사실 목탄을 잡을 때부터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화폭의 그림처럼 수려한 인물을 어떻게 더 멋있게 표현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보여 주기가 겁날 만큼 엉망진창인 그림을 보자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의 기억에 최악의 초상화로 남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테판도 같은 생각인 듯 그림을 몸으로 가리며 말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율리아나는 적성에 맞는 활동을 찾고 있습니다. 돌아온 지 이제 한 달이니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지요.”
목소리는 여유로웠지만 얼굴에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아마도 공무로 늘 바빴던 대공이 그녀에게 친히 초상화를 그리라 명할지는 몰랐기 때문일 터.
“불쾌하실 수도 있으니 그림이 완성되고 감상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침착하게 말한 스테판이 날 선 눈으로 그리즈를 쏘아봤다. 대공은 급속도로 침울해지는 그녀의 눈동자를 살피다가 그림 앞에 섰다.
고고한 눈동자가 여지없이 캔버스를 훑기 시작했다. 처음엔 새카매진 배경을 봤고, 그다음은 공포를 형상화 시킨 듯 정신없이 흔들린 선을 봤다. 마지막으로는 채색을 마친 한쪽 눈동자를 주시했다.
적잖게 실망감을 드러낼 줄 알았던 그는 어쩐 일인지 파란 톤의 색채를 유심히 보기만 했다.
그리즈가 그림을 그리며 느꼈던 당혹감과 두려움, 동정을 읽고 이해하려는 것 같았다. 가슴에서 떨어져 나갈 듯이 뛰어 대던 그리즈의 심장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리즈의 잇새로는 가쁜 숨이 번졌다. 그때 모호하게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너도 있네.”
그녀에게 하는 말이었다. 움찔 놀란 그리즈가 눈을 크게 뜨며 올려다봤다.
“네?”
그는 재미있다는 듯 그림 속의 파란 눈동자를 훑었다.
“그림 속에.”
그의 짙고 긴 속눈썹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자 투명하게 표현된 망막이 보였다. 그 안에 노란 드레스를 입은 형상이 앉아 있었고 의자 밑에는 하얀색 덩어리가 있었다.
그게 자신과 티아라는 걸 깨달은 그리즈는 알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그의 눈에 비친 형상을 보이는 대로 표현했을 뿐이었다. 거기에 알량한 동정심을 담아 따스한 눈빛을 더했는데, 그가 자신과 티아를 다정하게 응시하는 그림이 되어 버렸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지나치게 엄습한 공포와 긴장감 때문일까. 아니면 혹시 대공의 무엇이라도 된 듯한 착각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던 그리즈가 작게 말했다.
“의도한 건 아니에요. 단지, 그리다 보니….”
스테판은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피다가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색다르군요. 지금껏 대공 전하를 근엄하고 냉혹한 군주로 표현한 초상화가 전부였지 않습니까? 저라면 이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을 겁니다.”
나름의 묘수였다. 그림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대공의 칼날을 피하려는 것이다.
대공은 돌아온 여동생이 모친만큼의 재능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스테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유난히 그리즈를 감싸고도는 모습을 의아하게 주시했다.
“꼭 아버지 같군요, 숙부.”
묘한 의미, 혹은 의심이 담긴 듯한 말이었다. 웃고 있는 스테판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즈는 팽팽한 실처럼 당겨진 분위기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림만 조금 더 잘 그렸어도 부드럽게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눈앞이 새카매지는 찰나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뒤이어 문 앞에서 문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 전하, 실례하지만 항만으로 향하실 시간입니다.”
그 말을 들은 스테판이 당겨진 실을 탁 놓듯 시선을 피했다. 대공은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들어와.”
스테판이 내심 안도하며 대공에게 인사했다. 그리즈는 이내 나가는 스테판의 뒤를 따라나섰다.
개미 한 마리 없는 복도가 나오자 스테판이 이마의 식은땀을 닦고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도록 하렴.”
여지없이 따가운 시선을 받자 내심 분해졌다. 매음굴 포주처럼 여인을 잡아다 이용하면서도 요구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정작 당사자는 하루라도 빨리 이 저택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데….
그리즈는 이 저택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날을 세워 그를 바라봤다. 탐욕스러운 빌튼 같은 인간, 양심도 없는 쓰레기. 대체 율리아나를 이용해서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 시선에 깃든 생각을 읽은 듯 스테판이 조소했다.
“그 전에 상황 파악부터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
“온갖 사내들이 맛본 걸레를 구제해 준 내게 항상 감사해야지.”
이내 그는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발길을 꺾어 로비 밖으로 나갔다. 그리즈는 울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교육은 강행됐다. 십자수와 승마, 왈츠 수업을 마치고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벌써 저녁이 되어 있었다. 그리즈는 할머니와 따스한 날씨 얘기를 나누며 식사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마침 벨린이 방 정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오늘 좋은 일이 있었던 건지 콧노래를 부르며 테이블을 닦는 뒷모습이 보였다.
오늘 내내 긴장했던 몸이 벨린 덕분에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즈는 꼬리를 흔들며 펄쩍펄쩍 뛰는 티아를 안고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구나.”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화들짝 놀란 벨린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리즈는 벨린의 이마 옆에 꽂힌 작은 크리스털 핀을 바라보았다.
“예쁜 머리핀이네. 새로 산 거니?”
처음 본 핀인 것 같아서 으레 관심 가진 것이었다. 그 말에 활짝 웃은 벨린이 머리핀을 매만지며 말했다.
“조금 전에 쿠엔틴 나으리께서 저택 하녀들에게 하나씩 선물하셨어요. 대공 전하와 항만에 갔는데 마침 무역상을 만나셨대요.”
하녀의 선물까지 챙겨 오는 쿠엔틴이 참 상냥한 사내구나 싶었다. 그리즈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린이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값비싼 물건을 사셨대요. 루비라는 보석이 박힌 귀걸이인데 비둘기의 피처럼 붉고… 아니, 마녀의 눈동자처럼 붉고 신비로운 색이라고 하셨어요.”
그리즈는 두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랑디아에서 살며 많은 보석을 접해 봤지만 루비라는 보석을 본 적은 없었다. 어머니께서 사파이어를 선호했던 까닭에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루비?”
작게 물은 그리즈가 피처럼 붉은 보석을 상상했다. 벨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쿠엔틴에게 들은 전설을 얘기해 주었다.
“영생을 가진 불사조가 삶이 지루해져 루비로 환생했다는 전설이 있대요. 그 덕에 루비를 소지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해요.”
“아….”
“전설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가격이 엄청난가 봐요. 금화를 스무 개나 주고 들이셨다던데… 아마 브리튼의 공주님을 위한 선물이겠지요?”
금화 스무 개면 작은 저택을 사고도 남을 정도의 돈이었다. 물론 브리튼의 공주에게는 그만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겠지. 루비를 상상해 보던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아마도.”
의자를 닦은 벨린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뭐… 어쩌면 수집 방에 두기 위해 구매하신 걸 수도 있겠네요.”
청소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벨린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출입증 없이 저택을 나가는 법이나, 담벼락에 개구멍이 있는지 물었지만 그런 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새벽녘이 돼서야 잠든 그리즈는 매음굴로 돌아가는 꿈을 꿨다. 실제로는 부엌에 숨어서 열린 문틈으로 난교를 지켜보며 괴로워했었지만 웬일인지 꿈속에서는 매춘부가 되어 있었다. 스테판에게 계속 창녀 취급을 받다 보니 뇌도 그렇게 믿기 시작한 것 같았다.
찜찜한 기분으로 눈을 뜨자 똑같은 하루가 반복됐다. 벨린이 새벽같이 와서 그녀를 목욕실로 데려갔고, 그녀는 홀로 목욕한 후 의상실에 들러 붉은 드레스를 입고는 방으로 돌아와 치장을 받았다.
다른 날이라면 창밖의 절경을 감상하며 감탄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 하루하루 깊은 함정 속으로 추락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처음 빠졌을 때는 빛으로 환했던 탈출구도 이젠 까마득히 멀어져 한 줄기 빛만 내는 듯했다.
그러니 어떡하면 좋을까. 스테판도, 대공도 피할 수 없는 이 마당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게 이상했는지 머리를 땋아 주던 벨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가요?”
고개를 저은 그리즈는 벨린을 안심시키듯 대답했다.
“…아니, 좋아.”
잠시 정적이 흐르자 벨린이 유심히 얼굴을 살폈다. 아마 근심 가득한 표정이 보일 것이다. 그걸 숨기려 했을 땐 이미 늦었다.
“그럼 혹시 일정이 너무 빠듯해서 힘드신 건가요?”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저택을 무사히 탈출할 만한 방법을 대놓고 물을 수도 없고….
방 안이 또다시 조용해졌다. 한동안 머뭇거렸던 벨린이 작게 입술을 열었다.
“후작 각하께서 아가씨를 어서 사교계에 데뷔시키고 싶어 하시는 모양이에요. 일정이 좀 빠듯한 것 같아서 저희 하인들도 아가씨가 너무 힘드실까 봐 우려하고 있었어요.”
“사교계?”
“예. 혼기가 조금 지나셨으니까요.”
얘기를 듣던 그리즈가 생각에 잠겼다.
제대로 된 귀족 여인으로서의 삶은 사교계 데뷔로 시작된다. 다른 여인들과 친분을 쌓아 가문 간의 이득을 도모할 수도 있고, 혼인처를 알아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운 좋게 막강한 혼인 상대를 구하게 되면 가문 안팎으로 많은 권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여인에게 있어 사교계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일 것이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가짜 조카에게 그런 황금 같은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일까. 가짜 조카가 힘을 얻을수록 그는 불리해질 터인데….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머리 손질을 마친 벨린이 창가의 보라색 들꽃 상태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일정이 너무 힘들면 말씀해 주세요. 하녀장님에게 부탁해 마님께 넌지시 알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즈는 자신을 등진 벨린의 빨간 머리를 따뜻하게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뭐가 그리 무서운지 벌벌 떨기만 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마음을 열고 도와주려 하다니.
아무것도 아닌 여인에게. 아니, 평민보다 못한 미천한 여인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리즈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그러다 삼촌이 알게 되면 네가 피해 보게 될지도 몰라.”
벨린은 맞는 얘기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그리즈를 돕고 싶어 했다.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요. 아가씨의 변화를 다들 감사해하고 있거든요. 저도 그렇고요.”
이내 벨린은 노랗게 시든 잎을 떼어 내어 나무 휴지통에 버리고는 그리즈를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려는 듯했지만 그리즈는 벨린이 말한 ‘변화’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다.
“…변화?”
일순간 벨린은 흡사 어마어마한 말실수를 한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아, 저. 저, 그게 아니라…. 죄, 죄송합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단지 묻기만 했는데… 대체 무얼 두려워하는 걸까.
실종되기 전의 율리아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문득 알고 싶어졌다. 변화라는 단어를 곱씹던 그리즈가 벨린을 유심히 주시하며 물었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저 궁금해서 물은 거니까. 그런데 변화라니… 혹시…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몹쓸 짓이라도 하고 다녔던 거니?”
벨린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져서는 겁에 질린 숨을 몰아쉬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본의 아니게 말실수했어요.”
그런 벨린을 달래듯 그리즈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어릴 적의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잖니. 정말 기억이 안 나서 묻는 거야, 벨린. 왜 그렇게 겁먹은 거니?”
“저….”
벨린은 중죄를 지은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살피던 그리즈가 어르듯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예전의 내가 어땠는지 알려 줬으면 좋겠어. 안 그래도 처음에 네가 나를 무서워했던 이유가 궁금했었거든.”
정말 순수히 궁금할 뿐이라는 표정을 본 벨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상황을 둥글게 무마하는 걸 포기한 것 같았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는 듯 크게 한숨 쉬고는 말했다.
“어, 어릴 적의 아가씨께서는 사냥으로 동물 죽이는 걸 좋아하셨어요. 손수 구해 온 강아지들을 모두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시기도 했고…. 이건 소문이지만 하녀도 우물로 미셔서 죽게 만들…. 분명 사고였겠지만요.”
“…….”
“하인들은 아가씨께서 모친을 일찍이 폐렴으로 잃으시고 방황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었대요.”
벨린은 더 말하고 싶은 기색을 보이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아마 아가씨가 갑자기 돌변해 불호령을 내리는 걸 걱정한 듯했다. 그리즈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는 대로 모두 얘기해 줘.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벨린의 입술이 퍼레져서는 덜덜 떨렸다.
“실수로 창고에 불도 붙이셨나 봐요. 그래서 그 안에서 잠자던 집사들 다섯 명도 죽었고….”
“…….”
“물론 저희 하인들은 모든 사건을 사고로 믿고 있어요.”
벨린의 말을 듣고 그리즈는 기함을 금치 못했다. 어린 율리아나가 강아지를 몽둥이로 때려죽였다니? 하녀를 우물로 밀어 죽였고, 창고에 불을 내어 하인들을 몰살시켰다니….
믿고 싶지 않은 얘기였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처음 만났을 때 벨린이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 그랬구나.”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르는 사건이라 의미 없는 소리만 흘리고 있었다. 내내 딱딱히 굳어 있던 벨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티아도 이렇게 예쁘게 키우고 계시는데 제가 괜한 말을 꺼냈어요.”
부쩍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기 시작한 티아가 침대 아래서 나와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즈는 한 줌도 안 되는 티아를 멍하게 바라봤다.
지금껏 티아를 볼 때마다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모든 귀족이 원했을 만큼 귀한 강아지를 그가 정체 모를 여인에게 선물한 이유 말이다.
호의로 준 건 아닌 눈치이니, 그가 직접 티아를 헤쳐 가짜 여동생을 모함하려는 거라는 의심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게 너무 이상했었다.
“아… 이제 알 것 같아.”
이제 알 것 같았다. 대공이 티아를 선물한 이유, 그건 실종되었다 돌아온 여동생이 티아를 해치는지 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만약 수일 내에 티아를 해치고 율리아나 흉내를 낸다면 대공은 의심을 지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떻게 진짜 율리아나인 척 꾸미자고 생명을 죽일까…. 그리즈는 토끼처럼 팔랑거리며 뛰어오는 티아의 머리를 슥슥 긁어 주며 길게 한숨 쉬었다.
“앞으로는 실수로라도 내가 누구를 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벨린이 그 말을 신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어두운 그리즈의 표정을 살피다가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아가씨… 제가 괜한 얘기를 꺼냈어요. 정말 송구합니다.”
그리즈는 오히려 좋은 정보를 준 벨린에게 고마웠다. 다만 티아로 하여금 대공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할 뿐이었다.
“아냐…. 그냥 생각이 좀 많아지는구나.”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 지었지만 복잡한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었다. 벨린이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자책하던 벨린이 무언가를 떠올리며 말했다.
“저… 생각하시기 편하게끔 조용한 곳으로 모셔 드릴까요? 기분 전환도 하실 수 있게요.”
“조용한 곳?”
“저희 같은 하인들은 절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 있거든요. 혹여나 실수로 석고상을 훼손하기라도 한다면 엄벌에 처해질 테니까요.”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발 들이기도 부담스러울 것이다. 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다만 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면 인적이 뜸하지 않을까. 어쩌면 정체를 들켜 쫓기는 상황에서 숨을 만한 곳이 될지도 몰랐다. 고심하던 그리즈가 조심스레 물었다.
“거기가 어딘데?”
울적했던 목소리에 생기가 깃들자 벨린이 화색을 보였다. 이내 문을 살짝 열여 복도를 보고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밖으로 나가며 속삭였다.
“바이렌하그 가문의 일원을 모셔 둔 석고상실이에요. 국왕이셨던 선친도 계시고, 전 대공 전하와 할머님의 석고상도 있는 곳이지요.”
선친의 석고상을 모셔 둔 곳이라면 하인들의 출입을 금할 만했다. 집사장이나 하녀장 같은 관리인을 지정해 두고 신경 써서 돌보도록 하겠지.
조금 걸으니 로비가 나왔다. 두리번거리던 벨린은 조심스레 로비 계단 뒤쪽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면에 장엄한 양 문이 보였다. 문 앞까지 데려다준 벨린은 함께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끝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리즈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석고상에 선친의 영혼이 깃들어 있을 것 같아 두려웠지만 불상사를 대비해 저택 곳곳을 파악해 두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드높고 새하얀 공간이 그리즈를 반겼다. 창문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덕분인 오색의 햇살이 쏟아지는 광경이 더없이 신비로웠다.
공간은 복층 구조였고, 계단과 바닥 곳곳에 석고상이 놓여 있었다. 사람의 전신을 그대로 본 따 만든 크기라 뒤쪽에 잘만 숨으면 며칠도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즈는 와 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또 다른 좋은 점이 있었다. 하인들의 소리가 늘 들리는 자신의 방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고요했다.
마치 오랜만에 새벽에 깨어 고요한 풍경을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불순물처럼 머릿속을 떠돌던 잡념이 서서히 가라앉자 모든 문제에서 해방된 듯 나른해졌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느리게 마셨다. 마치 어머니의 배 속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자 어릴 적에 자주 들었던 자장가가 절로 잇새에서 흘렀다.
“새들도 잠든 밤 그대의 요람에 씨앗을 품고
달콤한 찬양으로 꽃피우리
그대는 낙원을 거닐고 영원토록 안식하리라
아아… 그대는 나의 노래를 듣지 못해도
그대는 나의 품에서 영원을 사네.”
정말로 아이를 재우려는 듯 부드럽게 소곤거렸다. 그러며 창가를 향해 조용히 걸어가며 옆을 슬쩍 바라봤다.
그런데 하얀 석고상 사이로 어두운 인영이 보였다. 그리즈는 네모난 석고 의자에 앉은 대공을 보고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세 발자국 남짓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잠자리에서나 보일 법한 나른한 얼굴을 했다.
그리즈는 그의 은밀한 모습을 엿본 것처럼 귀가 뜨거웠다. 말도 안 되는 짐작이겠지만 왠지 그가 자장가에 반응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끝내 티 나게 당황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대, 대공 전하….”
반면 그는 표정을 신경 쓸 겨를도 없는지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이내 핏줄이 불거진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쥐었다가 느슨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너일 것 같았어.”
너일 것 같았다니,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면 속삭이는 듯한 자장가의 주인이…? 그의 말을 이해하려면 설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원하는 걸 말했다.
“다시 불러 봐. 방금 그거.”
새파란 눈동자가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베네딕트의 자장가를 어디서 배웠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고, 아주 가까이에서 불러 달라 명하는 듯했다.
그 모습으로 하여금 느낄 수 있었다. 베네딕트의 자장가가 그에게 의미 있는 노래라는 것을.
문득 그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저 사내와 공유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자장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묻고 고향 그랑디아에 대한 얘기를 느긋하게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지 않나. 까딱 잘못하면 그랑디아의 공주라는 정체까지 들켜 버릴 것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차갑게 대답한 그리즈가 황급히 문으로 걸어 나갔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 등으로 엄습했다. 데일 듯 뜨겁고 닳는 것처럼 아린. 그의 앞에 계속 서 있었더라면 그 감각이 심장으로 파고들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