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염없이 뒤척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날이 밝아 있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벨린이 목욕을 준비해 줬고, 치장을 도왔다.
밤새 끌어안고 잔 덕분에 부쩍 친해진 강아지가 발밑에서 빙빙 맴돌았다. 그리즈는 오늘 가죽 구두를 신은 발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강아지와 놀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벨린이 물었다.
“이 녀석,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아, 이름….”
이름을 지어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어제와 같았지만 편의상 이름을 붙여 놓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이름이 좋을까. 포근한 녀석이니 그런 느낌의 이름을 붙여 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그리즈는 부드럽고 연약하다는 뜻의 단어를 말했다. 아직 새끼인 녀석을 하인들도 아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티아(Teer).”
그 이름을 들은 벨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곧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게 넋을 놓았다가 입술에 붙은 붉은 머리칼을 떼며 말했다.
“많이 변하셨네요, 아가씨.”
느닷없이 나온 말의 의미가 모호했다. 무엇이 변했다는 뜻일까. 혹시 율리아나와 다른 점을 찾아낸 걸까? 그리즈가 철렁 내려앉은 심장께를 손바닥을 꾹 누르며 물었다.
“변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니?”
정신을 번쩍 차린 벨린은 손에 쥐고 있었던 빗을 당황한 기색으로 툭 놓쳤다.
“아닙, 아닙니다. 무,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고개를 숙이는 벨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흡사 엄청난 말실수라도 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리즈는 폭정을 일삼는 귀부인의 하녀들이 저런 얼굴을 하는 걸 본 적 있었다. 의아해지는 찰나 벨린이 바닥을 불안정하게 주시하며 말했다.
“곧 하녀장님이 오실 거예요. 아가씨께서 건강을 조금 회복하셨으니 저택을 정식으로 소개해 주라고 마님께서 명하셨거든요.”
마침 하녀장 로렐이 노크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갈색 눈과 머리칼을 가진 30대쯤의 여인인 로렐은 활기찬 표정과 상냥한 목소리가 특징이었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아가씨.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벨린의 표정을 살피던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살피던 로렐은 가져온 수건을 장식장 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저택을 구경하고 내일 아침부터는 가정 교사에게 교육받으시게 될 거예요. 교양, 예절, 교리 수업 등 아가씨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지요.”
안절부절못하던 벨린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치장을 마친 그리즈는 석연찮은 기분으로 로렐을 따라나섰다.
로비로 향하는 계단 벽에 초상화 두 개가 걸려 있었다. 로렐은 첫 번째 초상화가 전 대공인 발데마르 바이렌하그이며, 그 옆에 있는 건 비아누트라고 설명했다.
그리즈는 두 사내의 초상화를 번갈아 바라봤다. 틀에 찍어 놓은 듯 닮은 외모가 신기하게 느껴졌을 때였다. 로렐이 계단을 올라가며 말을 이었다.
“1층 별채에는 바이렌하그 일가를 본떠 만든 석고상실이 있어요. 현재 대공 전하의 옆자리가 비어 있는데 머지않아 아가씨의 석고상이 자리하게 되겠지요.”
자신의 석고상이 율리아나의 자리에 들어가는 광경을 상상하자 감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때 2층에 도착한 하녀장이 금색 난간을 손으로 짚으며 입을 열었다.
“2층은 대공 전하께서 사용하고 계세요. 복도 가장 안쪽 방이 전하의 방이고, 그 옆에는 창고가 있습니다.”
대공의 위엄에 맞게 풍경이 화려했다. 벽에는 왕실 화가가 그린 듯한 천사의 모습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금색 자수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리즈가 자수의 문양을 살피는 사이 로렐은 차마 대공의 영역에 발 들이지 못하고 안쪽을 손짓했다.
“창고도 전하께서 쓰고 계십니다. 수집벽이 있으시거든요.”
그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니 의아한 점이 있었다. 그가 수집벽이 있다니…. 그렇다면 어제는 왜 진귀한 물건을 모으지 않고 나눠 줬던 걸까. 그리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수집벽?”
로렐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드러냈다.
“주로 전장에서 가져온 전리품이나 의미 있는 물건들을 모으시는 것 같아요. 창고의 문은 늘 잠가 두실 테니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전하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의미 있는 물건이라…. 왠지 그 사내라면 처음으로 사냥한 동물의 머리나 사람의 뼈에 의미를 둘 것 같았다. 아니면 기도상을 모아 두었거나.
그를 잘 피해 다니려면 무엇이든 알아두는 게 좋겠지…. 고심하던 그리즈가 속삭이듯 물었다.
“안에 들어가 본 적 있어?”
로렐은 난간에 묻은 지문이 신경 쓰이는지 유심히 주시하며 대답했다.
“아뇨, 전하께서 직접 관리하시고 누구도 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만큼 안에 소중한 것을 수집해 뒀다는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하는데 로렐이 3층 계단에 발 들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 같은 평민은 전하를 마주칠 일이 없으니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저택에서 20년 가까이 일했지만 목소리조차 잘 모르는걸요.”
아무래도 대공의 사적인 생활을 말하기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리즈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살피던 로렐은 작은 정보라도 주고 싶었는지 고민 끝에 대답했다.
“…그림 그리는 취미가 있으신 것 같기는 해요. 하인들이 전하께 드릴 물감을 배합하거나 붓을 만드는 걸 본 적 있어요.”
“그림…?”
그 말을 들은 그리즈는 차분히 앉아 그림 그리는 그를 떠올려 보았다. 보통의 캔버스보다 넓은 상체를 숙여 가며 집중하는 모습이었는데, 역시나 내로라하는 체격의 기사들을 압도하며 나타났던 그의 첫인상 때문에 상상이 힘들었다.
이후 손님실인 삼사 층을 구경하고는 1층으로 돌아와 방문을 열었다. 벨린이 깨끗이 치우고 간 방에 신발 자국이 나 있었다. 신발 자국을 시선으로 따라가자 스테판이 창가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는 게 보였다. 챙이 둥글고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의 주변만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즈는 굳은 표정으로 로렐을 돌려보내고는 스테판에게 다가섰다. 그때 창틀에 강아지 티아를 올려놓고는 구경하던 스테판의 미성이 울렸다.
“귀엽군. 이름은 지었나?”
그녀를 본 티아가 나무 창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꼬리를 흔들었다. 다가가 티아를 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스테판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건 왠지 꺼려졌다. 그리즈가 침대 옆에 불안정하게 서서 대답했다.
“티아요.”
스테판은 빠르게 흔들리는 티아의 꼬리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왕왕 짖는 티아의 눈을 응시하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녕, 티아.”
강아지가 인사에 대답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스테판에게서 풍겨 나오는 묘한 살기를 느끼자 짖는 걸 멈췄다. 스테판은 티아의 목 뒤를 주무르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티아, 무서운 일이 일어났어.”
“…….”
“비아누트가 여동생의 정체를 의심해서 사람을 붙였대. 그날 나를 모셨던 마부를 찾고 있다던데.”
그러곤 살짝 고개 돌려 그리즈를 주시했다.
“네게 이름 붙여 준 여인의 목이 달아나가게 생겼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부드러운 속삭임을 듣던 그리즈는 침대 봉을 잡은 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대공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니…. 어제 연회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렸던 건가. 그렇다면 정체를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이지 않나.
“그, 그게 정말입….”
일순간 불지옥에 처박힌 듯 눈앞이 새카매졌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는 것처럼 숨도 막혔다.
무사히 빠져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랐었다. 그 기회도 얻지 못하고 대공의 손에 사지가 찢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이미 시체가 된 듯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손이 침대 봉에서 미끄러졌다. 휘청한 그녀가 사색이 되어 이마를 짚는 사이 스테판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 말했다.
“피부가 더 하얘졌군.”
그가 한가로이 피부색이나 평가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되묻지 않았다. 의뭉스러운 그의 말, 표정, 생각에 휘둘릴 게 뻔하지 않나.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가 검지로 그녀의 턱선을 쓱 쓸며 말을 이었다.
“아름다워. 아마 어떤 사내든 그렇게 생각하겠지.”
살아오며 무수히도 많은 사내에게서 들은 얘기였지만 이자의 말은 유독 불쾌했다. 음침한 속내를 숨기려 최소한 노력했던 그들과는 달리 이자는 그걸 숨기지 않는 탓이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 그리즈가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그는 비웃듯 한쪽 입매를 올리고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비아누트를 사로잡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 하긴 그건… 성서에 나오는 성녀 정도나 돼야 가능하겠군.”
스테판의 말에는 바이렌하그 대공이 신적인 존재 외에 어느 것에도 현혹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박혀 있었다. 어차피 그리즈는 그렇게 차가운 사내를 유혹할 능력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이렇게 들킬 바에는 차라리 제, 제가 머물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큰 사달을 겪은 것처럼 울렁이는 심장이 마음의 불안을 부추겼다. 대공이 보낸 사신이 자신을 잡으러 오는 상상으로 신경이 바싹 곤두서는 순간이었다.
“돌려보내 줘도 찾아내 죽일 테지. 대공께서 친히.”
“…….”
“산 채로 사지를 갈가리 찢어서 짐승의 먹이로 줄지도 몰라.”
스테판은 그리즈가 가장 두려워하는 얘기만을 골라서 했다. 왠지 좌절하는 여인의 표정을 보며 가학심을 즐기는 듯했다.
그리즈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그의 행태에 머리가 뜨거웠다.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무고한 사람 목숨을 하루살이로 만들어 놓고 어찌 저리 여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그 이유는 짐작 가능했다. 일이 터지면 모든 죄를 가짜 율리아나에게 덮어 씌워 놓고 발을 뗄 생각이니 걸려도 그만이겠지.
대공의 손에 죽어 가는 광경을 스테판이 흥미롭게 지켜볼 거라고 생각하자 긴장으로 꽉 물었었던 치가 덜덜 떨렸다. 어떡하면 좋을까.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안절부절못하는데 그가 진정하라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어.”
넋이 나간 듯했던 그리즈가 뒤늦게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다, 다행? 대체 무엇이요?”
목숨이 걸린 까닭에 말투가 몹시 날카로웠다. 그게 고작 하룻강아지의 발악처럼 들렸는지 스테판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너를 매음굴에서 이곳까지 데려왔던 마부는 배 태워 보냈어. 바다 건너 저 멀리.”
“…….”
“네가 나타난 후 어머니가 병상에서 일어나셨지. 비아누트에게도 잘된 일일 거야. 사내가 하는 정치도 중요하지만 현명한 안주인도 필요하거든.”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던 그리즈는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심호흡했다. 한 번, 두 번… 열 번이 되자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듯 크게 뛰던 심장이 조금이나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 그래서 무얼 어쩌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스테판이 원망스러웠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게 가슴 미어지도록 서러웠다. 타릴루치 가문만 아니었어도 저렇게 불한당 같은 사내와 엮이지 않았을 텐데. 증오심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이었다.
“너는 그냥 잘 버티면서 할머니가 건강하길 기도하면 돼. 비아누트도 할머니가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스테판은 할머니의 건강을 담보로 그리즈를 이곳에 두려는 계획을 내보였다. 그제야 화르르 불타던 이성을 반쯤 되찾은 그리즈가 가까스로 생각에 잠겼다.
아마 스테판의 얘기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저택에는 안주인이 필요했다. 누군가는 그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담소나 즐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보를 교환하고, 나라의 정세를 읽기도 한다.
그런 그들의 속을 훤히 들여다볼 만큼 노련한 할머니가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건 누구라도 바라지 않을 터. 할머니를 잘 모시면 대공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가 상황을 이해했다는 걸 느낀 스테판이 그녀의 턱을 검지로 쓱 긁으며 귀여워하듯 물었다.
“잘할 수 있지?”
이 저택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인 그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재밌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꼭 대답할 필요는 없어.”
“…….”
“낌새가 이상하다고 달아난다면 네 목이 잘릴 거라는 것만 명심하렴. 너와 살 맞대고 살던 매음굴 여인들도 괜한 화를 입을 테지.”
지금껏 그래 왔듯 대화는 일방적으로 끝났다.
***
몸살이 온 것 같았다. 스테판이 떠난 후 몇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스테판의 탁한 기운이 방 안에 남은 건지 머리가 아파 왔다. 계속 누워 있다가는 몸속이 새카맣게 타 버릴 것 같아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저택의 담벼락은 철옹성처럼 높았고, 정문과 후문의 경비는 삼엄했다. 탈출을 시도했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스테판의 손이나 대공의 손에 죽게 되겠지.
내내 곁에서 잠자던 티아가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러곤 침대 밑으로 내려가 카펫과 장식장의 냄새를 맡으며 놀더니 문을 긁기 시작했다. 한창 호기심이 많을 때라 밖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내친김에 산책이라도 다녀오는 게 나을 것 같아 방을 나섰다. 뒤따라 나온 티아는 붉은 카펫이 신기한 건지 킁킁거리며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문득 대공이 티아를 선물해 준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가 티아를 선물하며 지었던 미소가 왠지 새카맣게 와닿았었는데….
생각에 잠긴 채 복도를 지나자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로비가 나왔다. 티아가 조금 낯설어하다가 밖으로 쫄래쫄래 달려 나갔다.
상쾌한 흙과 풀냄새를 맡으니 기분이 들뜨는지, 귀를 뒤로 젖히고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혹여나 꽃밭을 망치지는 않을까. 사색이 된 그리즈가 로비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얘, 티아! 티아?”
햇살이 따사로운 정오, 이르게 개화한 들꽃이 폐부를 달콤하게 녹였다. 그러나 그리즈는 꽃들을 감상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며 티아를 찾았다.
이름 모를 꽃들이 울타리마다 구획을 갖춰 피어 있었다. 울타리 밖에는 돌길이 있었고, 곳곳에 잎사귀가 가는 나무들이 푸르른 향취를 뽐내고 있었다.
티아는 정면에 있는 나무 아래 벤치를 서성이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티아의 코앞에는 다리를 꼬고 앉은 사내의 하반신이 자리했다.
티아에게로 달려가던 그리즈는 멈칫하며 멈췄다. 저렇게 제대로 뻗기 불편해 보일 정도로 긴 다리를 어제도 본 적이 있었다. 연회 내내 식은땀을 흘리게 했던 바이렌하그 대공의 것.
“티아….”
티아를 부르는 음성이 끝으로 갈수록 작아졌다. 그 목소리가 제발 벤치까지 닿지 않길 바랐지만 그건 바람일 뿐.
대공의 시선이 얼굴을 와락 덮쳤다. 대공의 앞에 서 있던 쿠엔틴도 그녀를 돌아봤다.
“율리아나 아가씨?”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얇은 치맛단을 들어 올려 무릎을 내보이게 했다. 여밀 경황은 없었다. 이대로 훨훨 날아가고 싶은 충동에 온몸을 지배당했던 탓이다.
아가씨께서도 산책 나오셨군요. 어쩐지 이 녀석이 보이더라니.”
이렇게 마주친 이상 멋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리즈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대공의 앞까지 다가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휴식하고 계셨군요. 저도 방에만 있기 답답하여 나왔습니다.”
티아는 들꽃에 날아든 하얀 나비를 보고는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즈는 복슬복슬한 털을 폴폴 휘날리며 달리는 티아만 주시하며 대공이 보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듯 허벅지에 놓고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러곤 한 손을 길게 뻗어 벤치 등받이에 걸치며 느슨하게 기대었다.
“안녕.”
의외의 말이었다. 그에게서 한가로운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리즈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떨렸다. 그는 하얗고 서늘한 얼굴에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조개가 있는 건지 한쪽 뺨이 희미하게 들어가 있었다.
갓 성인을 맞은 소년처럼 싱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어쩌면 그건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한 계략인지도 몰랐다. 이미 그가 여동생의 정체를 의심하고 마부를 찾는 중이라지 않나. 저 미소 속에 음험한 속내가 담겨 있을 터였다. 그리즈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
그와의 사이에는 쌩한 바람만이 오갔다. 치마 밑단이 느리게 펄럭이자 그의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밑으로 내려갔다.
평상복인 홑겹 드레스를 입은 까닭에 때때로 무릎이 훤히 드러났다. 무릎 아래에 생긴 피부병을 유심히 주시하던 그가 미간을 살짝 좁혔을 때였다. 냉랭한 분위기를 읽고 안절부절못하던 쿠엔틴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때로는 쌀쌀한데 춥지 않으십니까?”
그리즈의 얇은 드레스 차림을 걱정한 것이었다. 대공의 따가운 시선에 추운지도 몰랐던 그리즈는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느끼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전하께서 선물해 주신 강아지 덕분에 춥지 않았습니다.”
티아는 조금만 금 가도 깨질 듯한 분위기를 모르고 사방팔방 날뛰고 있었다. 하얀 나비가 티아를 약 올리듯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그리즈는 초조한 기색을 숨긴 채 나비를 응시했다. 쿠엔틴이 그 모습에 관심을 가졌다.
“저번에도 나비를 유심히 보시더니…. 혹 나비를 좋아하십니까?”
아마 호숫가에서 만났을 때 대공의 어깨에 앉은 검은 나비를 봤던 걸 기억했던 것 같았다. 그리즈가 뒤늦게 대답했다.
“네.”
쿠엔틴은 스스로의 통찰력에 감탄한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역시 혈육이군요. 전하께서도 나비를 좋아하시거든요.”
나비를 바라보던 그리즈는 대공을 곁눈질했다. 예상외의 사실이었다. 그가 나비를 좋아한다니….
생각해 보면 지금껏 그에 대한 예상은 계속 빗나갔다. 진귀한 선물을 나눠 주는 그는 수집벽이 있었고, 길쭉하고 근육질인 팔로 세심하게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리고 전장에서 적들을 죽여 온 습성과는 다르게 작은 생명인 나비를 좋아한다고 한다.
어쩌면 살기 가득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인간적인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가 불가피하게 죽인 적의 영혼을 위로해 주기 위해 독실한 유일신 신자가 되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리즈는 조금 안도했다. 그에게 정체를 들켜도 무작정 목이 잘리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든 덕분이었다.
그 순간 계속 그리즈를 관찰하던 대공이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쓸어 넘겼다. 입매가 나른히 휘어있었다. 기분 좋은 음성이 이어졌다.
“율리아나.”
웬일인지 그의 두둑한 가슴팍부터 보였다. 이내 그리즈가 질끈 눈을 감고 고개 숙였다.
“예, 전하.”
눈매를 가늘게 좁힌 그는 벤치 옆자리를 눈짓했다.
“앉아.”
그러곤 벤치에 벗어 두었던 회색 늑대 털 망토를 쿠엔틴에게 주었다.
커다란 사내 몸이 이미 벤치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제처럼 극도로 긴장한 그리즈가 나무 끝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았다.
사실 앉은 것도 아니었고, 앉지 않은 것도 아닌 불편한 자세였다. 그는 달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건 그의 목적이 상대를 벤치에 앉히는 게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그걸 깨달은 온몸이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그 순간 그가 벤치 등받이에 얹었던 손으로 그리즈의 턱을 잡고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생각보다 차가운 체온에 흠칫 놀라던 그리즈는 그의 무릎으로 시선을 떨궜다.
그가 햇빛에 비친 눈동자 색을 살피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어쩌지, 당황해 자리를 박차고 달아나면 더 큰 의심을 살 것이 뻔한데!
그녀는 눈부신 척 눈을 반쯤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제발 율리아나처럼 갈색 눈동자로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태양 아래 바다처럼 새파란 눈에 관찰당하기 시작했다. 목적이 명백한 시선이 눈매와 눈동자를 느리게 훑었다.
그간 마주쳤던 사내들의 시선에 정욕이 담겨 있었다면 대공의 시선에는 경계심과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간 사내들에게 겁탈당할까 봐 두려웠었지만 이 사내에게는 무슨 짓이든 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의 손을 뿌리쳐서라도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피어났다. 그때 그의 짧은 소감이 머릿속을 격렬히 찔렀다.
“눈 색이 아름답군.”
심장이 멀쩡할 새 없이 미친 듯 뛰었다. 뭐라 변명해야 할까. 아니, 변명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모든 죄를 고하고 살려 달라고 빌어 볼까. 하지만 그러면 스테판이 죽이러 올 텐데.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간 듯 어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쿠엔틴이 여인을 얼굴을 거칠게 잡고 물건처럼 살피는 대공의 무심함에 안절부절못하다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저,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진귀한 보석처럼 아름답습니다.”
대공은 흥미를 잃은 듯 손을 풀어 내리며 낮게 말했다.
“그래, 수집해 두고 싶을 만큼.”
수집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소름 끼치는 광경이 상상됐다. 어두컴컴한 그의 수집 방 장식장에 자리한 붉은 눈동자 두 개….
상상할수록 벌써 눈이 뽑힌 것처럼 시큰거렸다. 스스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는데 그의 말이 이어졌다.
“두려운 눈이네.”
“…….”
“죄진 게 있는 것처럼.”
그리즈는 속내를 훤히 읽힌 듯한 느낌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능수능란한 짐승의 식탁 위에 올려진 기분이었다. 맛있는 먹이로 탈바꿈하기 위해 서서히 손질되는 착각이 들었다.
“저, 저는….”
그의 의심을 끊어 내야 했다. 하지만 어떤 변명으로…. 차라리 몸이 좋지 않다며 자리를 피해 버릴까.
흐릿해진 눈 초점을 맞춰 가며 이성을 차리려 애썼다.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듯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널찍한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는 턱을 받치며 말했다.
“어제 노래를 부르던데.”
그게 무슨 노래인지 설명하라는 투였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그랑디아 왕가에서만 알려진 노래였으므로. 그리즈의 반반한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티아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 나비에게 부아를 내며 왕왕 짖었다. 그러다 솜뭉치 같은 하얀 꽃을 물어뜯으며 분풀이하기 시작했다.
티아를 핑계로 벗어날 궁리하던 그리즈의 시야에 하얀 꽃이 들어왔다. 그랑디아의 공주로 지냈을 적 남부를 여행하며 봤던 목화와 비슷하게 생긴 꽃이었다. 매음굴의 아드리안이 했던 얘기가 문득 뇌리를 스쳤다.
“앞뜰에 있는 하얀 꽃만 있었어도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하얀 꽃?”
“응. 목화처럼 생긴 그 하얀 꽃이랑 투구꽃 뿌리를 럼주에 오래 끓이면 독이 되거든. 내장을 녹이고 피를 토하다 죽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 말이야.”
아드리안이 말했던 하얀 꽃이 저 꽃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티아가 먹고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그리즈는 급히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티아 때문에 가야겠어요. 결례를 끼쳐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
그가 노래에 대한 질문을 더 할까 봐서 황급히 돌아섰다. 시야에서 그가 없어지자 비로소 제대로 된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그때 등 뒤에서 대공의 짧은 물음이 울렸다.
“티아?”
뒤이어 쿠엔틴의 대답이 들려왔다.
“강아지 이름 같습니다.”
그는 강아지에게 티아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무심히 정정했다.
“손난로.”
단지, 손난로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