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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저녁이 깊어졌다. 손님을 태운 마차가 저택 앞으로 하나둘씩 도착했다.
벨린의 얘기로는 수년 만에 여는 연회라고 했다. 율리아나가 실종되고부터 할머니께서 모두가 웃고 행복해하는 분위기를 즐기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 말을 들은 그리즈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렇게 연회까지 연 걸 보면 정말 율리아나가 돌아왔다고 믿기 시작하신 것 같았다. 훗날 진실을 알게 되면 얼만큼의 배신감을 느끼실까.
늦기 전에 사실을 고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그건 목숨을 버리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래 살아남으려면 영영 진실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연회용 치장을 마친 그리즈는 마지막으로 입술에 빨간색 꽃물을 들였다. 그런데 으깬 꽃잎을 얹는 벨린의 손이 벌벌 떨렸다. 왠지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수라도 해서 목이 달아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벨린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의아하게 고개를 튼 그리즈가 벨린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경기를 일으키듯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진 것은 무엇을 위한 건지 모를 칭찬이었다.
“피, 피부 결이 정말 좋으세요. 아이 피부 같으면서도 만개한 꽃처럼 윤이 흐르기도 하고….”
“…….”
“오, 오늘 오신 손님 중 혼기가 찬 나으리들은 모두 아가씨께 반하고 말 거예요.”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을 하는 것이니 계획적으로 아첨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의아해하는 사이 벨린이 화제를 돌리듯 흑경으로 얼굴을 비춰 줬다. 그리즈는 식은땀을 흘리는 이유를 물으려다가 무심코 흑경을 바라봤다.
큰 기대는 없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치장하는 건 왕실에서 충분히 해 봤고, 율리아나가 누려야 할 귀족의 삶을 대신 누리며 기뻐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마음이 무색하게도 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얼굴이 새카맣고 머리칼이 덩어리져 사내들조차 피하던 여인은 온데간데없었고 공들여 세공한 보석처럼 빛나는 여인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리즈는 고양이처럼 양옆으로 뾰족한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거울 속 여인도 눈을 감았다 뜨며 길고 풍성한 회색 속눈썹을 매혹적으로 드러냈다. 어깨까지 늘어트린 머리칼을 만지자 거울 속 여인이 그 행동을 우아하게 따라 했다.
신기해하던 그리즈는 꽃물을 들여 꽃잎처럼 빨개진 입술을 바라봤다. 벨린도 고혹적인 입술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피부와 머리색이 환하시고 입술은 붉으셔서 정말 고혹적이세요. 그리고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선명하셔 멀리서도 아가씨의 얼굴만 아름답게 빛날 거예요.”
“…….”
“지금까지는 대공 전하께서 유일하게 빛나셨지만 말이에요.”
혹시 치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긴장한 벨린을 무심코 보게 된 그리즈는 그제야 흑경에서 시선을 떼며 작게 감탄했다.
“재주가 좋구나, 벨린.”
벨린이 물러나는 순간 노크 소리가 울렸다. 스테판이 찾아온 걸까. 그리즈가 하얀 드레스의 치맛단을 살짝 올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들어오세요.”
살짝 열린 문 앞에는 하녀장 로렐이 서 있었다. 로렐은 한껏 아름답게 꾸민 그리즈를 보며 무방비하게 감탄했다.
“원… 원래 아름다우신 건 알았지만 하얀 드레스와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마님께서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즈가 꽃 자수 놓인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로렐은 진심으로 기쁜 듯 미소 지으며 방문을 활짝 열었다.
“아가씨, 이제 슬슬 연회장으로 가셔야 합니다. 연회장은 로비를 가로질러 맞은편 복도로 가면 나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즈는 로렐과 벨린을 데리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의 연회에 하인들이 힘을 준 모양이었다. 복도에 금 자수 카펫을 깔아 놨고 벽은 레이스로 고풍스럽게 장식해 놨다.
조금 걷다 보니 로비가 나왔다. 로비 양쪽에는 하인들이 일렬로 서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고, 모퉁이에서는 악사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중이었다.
그리즈가 연회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로렐이 뒤따라오며 부드럽게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먼저 도착해 계십니다. 전하께서도 아가씨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실 거예요.”
화려한 풍경에 들뜨려 했던 마음이 빠르게 굳어 버렸다. …대공 비아누트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텐데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연회장에 가까워지자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정면을 바라보자 활짝 열린 문 안으로 화려한 광경이 보였다.
무수히도 많은 촛불이 새벽하늘의 별똥별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가장 안쪽에는 단상이 자리했고, 단상 앞에는 손님용 식탁이 ‘ㄷ’ 자 모양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즈에게로 몰렸다. 그나마 의지가 됐던 벨린과 로렐은 연회장이 성역이라도 되는 듯 문 앞에 멈춰 서며 속삭였다.
“저희는 이곳에서 대기할 테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손짓해 주세요. 아, 그리고 왼쪽 테이블에 앉아 계신 여섯 분은 고모님들과 그 가족분들이신데 기억하시나요?”
그리즈는 왼쪽 테이블을 바라봤다. 고풍스러운 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잃어버렸던 조카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겠지.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삼킨 그리즈는 왕실에서 배운 예법대로 치맛단을 살짝 들고 무릎 굽혀 인사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단상 위에 서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던 스테판이 이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시야에 들어왔던 것은 스테판의 앞쪽 상석에 앉은 사람이었다.
비아누트, 이곳의 주인. 샤토 왕의 머리를 손수 잘라 온 사내. 국왕의 사납고 잘생긴 개….
멀리서 저 사내만 빛나 보였다는 벨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얼굴의 핏자국을 지운 그는 조각처럼 미끈하고 깨끗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의 흑발에서는 관능미가 묘하게 풍겨 나왔다.
그를 보고 경직된 그리즈는 한 걸음을 뻣뻣하게 내딛었다. 그는 형식적인 연회가 퍽 지루했는지 테이블을 주시하며 생각에 잠긴 채였다.
그런 그를 보며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두 걸음….
그때 테이블에 머물었던 그의 시선이 일순간 온몸에 확 꽂혔다.
차가운 바람에 휩쓸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디서 온 건지도 알 수 없고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바람 말이다. 그의 시야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가 차가워졌다.
무심코 목덜미를 매만졌다. 이상하게도 살결이 차가운 게 아니라 홧홧할 만큼 뜨거웠다.
그 순간 진주 귀걸이가 툭 빠져 바닥을 굴렀다. 손님 석에 앉아 귀걸이를 내려다보던 쿠엔틴이 귀걸이를 주워 그녀의 앞에 섰다.
“반갑습니다, 율리아나 아가씨. 호숫가 앞에서 뵀던 쿠엔틴입니다.”
멀찍이 서서 지켜보던 벨린이 빠르게 다가와 귀걸이를 걸어 줬다. 그리즈는 얼굴로 몰린 사람들의 시선에 긴장한 채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쿠엔틴 경.”
멀리서 조금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게 바이렌하그 대공의 시선이라는 걸 느낀 그리즈는 샹들리에만 꼿꼿이 올려다봤다.
왜인지 긴장해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여체를 탐하는 사내의 것과는 결이 다른 묘한 시선이 어깨와 목덜미를 훑었다. 여인을 모르는 자의 호기심 어린 시선, 지극히 본능적인 탐색 같았다.
그가 동정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여인을 모르지만 사람 죽이는 방법은 잘 안다. 정부를 줄줄이 두어 본처의 눈물을 뺄 일은 없지만 느닷없이 사람 머리통을 배어 간담 서늘하게 만들지도 몰랐다. 늘 욕정에 굶주려 있는 사내보다 더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흐릿해진 정신을 바로 잡은 그리즈는 벨린이 귀걸이를 끼워 주자마자 쿠엔틴에게 인사했다. 그러곤 조심스럽던 걸음걸이를 바꿔 빠르게 단상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명망 높은 대공가의 사내들이, 실종됐다가 돌아온 혈육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그들의 시선을 의식한 스테판은 더없이 상냥한 숙부가 되어 그리즈를 맞이했다. 이내 손등에 입술을 맞추며 그녀가 진짜 율리아나라는 입장을 명확히 못 박았다.
“내 조카 율리아나, 오늘 정말 아름답구나.”
그가 가로로 길쭉한 테이블을 가리켰다.
“할머니께서 곧 오실 거야. 일단 자리에 앉아 있으렴.”
테이블 앞에 황금색 의자 네 개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 대공은 두 번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즈는 대공과 그나마 떨어진 네 번째 의자에 앉으려 했다. 그에게 눈동자를 내보이기 불안했고 되도록 거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침체된 푸른 시선이 그리즈의 얼굴에서 맴돌았다. 붉은색 음영을 넣은 눈매와 꽃물 들인 입술이 서늘한 시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극도로 긴장한 그리즈는 치마를 정리하고 의자를 다시 끌어 앉았다. 짧은 사이 많은 행동을 했지만 정작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습게도 그가 뭘 하고 있는지는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성인이 되어 돌아온 여동생이 정말 친동생인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리즈의 오른쪽 뺨 중앙에 있는 작은 점을 의아하게 훑어보다가 쇄골 모양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놔두면 그녀가 율리아나가 아니라는 증거마저 찾아낼지도 몰랐다. 초조해진 그리즈는 치맛단을 주시하던 시선을 올려 그를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동공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색을 띠는 그 눈은 미지의 생명체처럼 신비로웠고 또 쓸쓸하게도 보였다.
문득 새하얀 설원에서 홀로 지내는 커다란 늑대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가 외로워 보이다니…. 전장에서 돌아온 그를 반기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고개 젓던 그리즈는 그의 서늘한 눈매를 훑어봤다. 어제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그는 속눈썹이 길었고 눈빛으로 사람을 끄는 힘을 가졌다. 매력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바이렌하그 가문과의 정혼을 거절하기 전에 봤다면 그를 남편으로 맞게 해 달라고 간청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됐다면 미래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했지만 구태여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오늘의 현실이 더 비참하게 느껴질 테니까.
그가 시선을 피할 때까지 계속 바라보려 했다. 그때 그가 짙은 동공으로 붉은 입술을 훑어보며 입술을 살짝 열었다.
“…율리아나.”
새벽처럼 어두운 목소리가 낯선 이름을 불렀다. 그가 자신을 불렀다는 걸 깨달은 그리즈가 뒤늦게 대답했다.
“네, …오라버니.”
그는 바로 옆 의자를 눈짓하고는 그녀를 응시했다.
“여기 앉아.”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거부할 자유는 없었다. 그리즈는 사색이 된 채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때마침 할머니가 검은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모두가 일어나 할머니를 반겼다. 그들에게 눈짓으로 인사한 할머니는 첫 번째 자리에 앉았다.
스테판까지 착석하자 문관이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손님 열다섯 명 정도가 참석한 소규모 연회였지만 분위기는 떠들썩했다.
하지만 그리즈는 좀처럼 그들과 동화되지 못했다. 연회가 끝날 무렵까지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크고 마디가 굵은 대공의 손과 의자 밖으로 한참 벗어난 그의 무릎이었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실수라도 할까 봐 그를 몹시 의식했던 탓이겠지.
두 시간 정도 먹고 마시는 분위기가 계속됐다. 느긋이 연회를 즐기시던 할머니가 대공에게 마지막 건배사를 제안하고는 전장에서 돌아온 소감을 물었다.
저마다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일제히 대공을 바라봤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포도주 잔을 들고 연회장을 둘러봤다.
무수히도 많은 촛불이 켜진 샹들리에, 반듯하게 시중드는 하인들, 풍성하게 차려진 만찬, 감성적인 선율을 연주하는 악사들 등. 그가 태어날 때부터 아주 당연히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소유물을 지키기 위한 출정이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간단한 소감을 밝혔다.
“이렇게 다시 보니 기쁩니다. 다음 연회에도 살아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의 말에 집중했던 손님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다만 한 사람만은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스테판, 그 뱀 같은 사내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포도주로 입을 축일 뿐이었다. 그의 생각이 궁금했지만 짐작할 수는 없었다.
다음 순서는 선물 증정식이었다. 가문으로 들어온 선물 중 쓰지 않을 물건들을 모아 나눠 주는 자리였다. 양피지가 아닌 종이 수첩과 장갑, 물 건너온 향수 등이 새로운 주인을 찾아갔다.
식을 진행하던 문관은 노르드발츠 국왕 폐하께서 조금 전 보내왔다는 선물을 단상 뒤에서 꺼냈다. 제법 큰 바구니였다.
바구니를 덮어 둔 천을 열자 하얀 짐승 두 마리가 머리를 쏙 내밀었다. 손님들이 구경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문관은 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왕실로 들어온 강아지입니다. 타국에도 몇 마리 없을 정도로 희귀한 품종이라고 해요. 사람을 잘 따르고 체온이 높아 추운 날씨에 손난로로 적격인 녀석이지요.”
시종일관 꼿꼿하게 앉아 있던 그리즈 역시 강아지를 바라봤다. 생김새가 신기했다. 얼굴과 몸 전체가 하얀 털로 뒤덮여 복슬복슬했으며 풍성한 털 깊숙이 까만 눈동자 두 개가 점처럼 있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를 흘렸다. 왕족만이 개를 소유할 수 있다 보니 구경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늘 사냥개만 봐 왔던 그리즈도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별별 신비로운 짐승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선물하시려거든 한 녀석은 직접 키우시고, 한 녀석만 선물하시는 게 어떠실지요? 국왕 폐하께서 내리신 선물이니 말이지요.”
강아지를 감흥 없이 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선물할 대상을 찾듯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가 선물한 강아지라면 왕실에 허락받지 않아도 키울 수 있을 것이었다. 오르투르 공작 부부와 바이안 부인, 대공가의 친척들 모두가 눈동자를 밝혔다. 강아지가 성가시다고 작게 말한 할머니는 들뜬 분위기를 오랜만에 즐기는 듯했다.
그때 그가 선물할 상대를 결정한 듯 바구니 속에서 한 녀석을 꺼내 들었다. 강아지가 허공에서 네발을 허우적거리며 난동을 부리자 커다란 손으로 흉통을 더 강하게 쥐었다.
강아지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게 두느니 죽이는 게 낫다는 생각을 읽었는지 강아지가 오히려 기를 꺾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저거였다. 그들은 상대의 생명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느냐, 아니냐를 중요하게 여길 뿐이다. 율리아나인 척하며 그를 기만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 손이 조이게 될 숨통은 그녀가 될 것이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 순간 무릎 위로 강아지가 내려앉았다. 옆을 올려다보자 미묘하게 웃는 그가 보였다.
“너와 잘 어울리는 동물이군.”
그의 낮은 음성이 허공에 번질 때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울렸다. 뒤따라 흐뭇하게 손뼉을 치던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대공. 율리아나와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당황한 그리즈는 강아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두 무릎을 오므리며 감사를 표했다. 얼굴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가 선물로 호의를 보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귀한 짐승을 선물한 이유는 무얼까. 서늘한 미소 속에 감춰 둔 이유가 있는 걸까.
생각이 많은 채로 연회가 끝났다. 손님을 배웅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즈는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방을 향해 걸었다. 연회장에 갈 때는 분명 혼자였는데 돌아오니 품 안에 강아지가 안겨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등 털을 헤집어 속살을 만지자 뜨끈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손난로로 쓴다는 문관의 얘기가 맞는 모양이었다. 얼어 있던 손끝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강아지를 침대에 내려 두고 생김새를 살펴보았다. 뒤따라 들어온 벨린 역시 강아지를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주 짧은 순간 강아지를 동정하는 눈빛을 보냈다. 손난로 신세가 가여운 걸까. 강아지보다 벨린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찰나 조심스러운 질문이 들려왔다.
“이름은… 정하셨나요?”
이름, 이름이라….
그가 주었지만 진짜 율리아나를 위한 선물이니 그리즈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름을 지어 줄 처지도 아니었다. 이름을 지어 준다는 건 주인이 되겠다는 의미이지 않나.
이 녀석의 먹이를 구해다 줄 수 없고 목숨을 지켜 줄 수도 없는 처지에 주인이라니…. 그리즈가 길게 한숨 쉬며 강아지에게 물었다.
“이름… 뭐였으면 좋겠니…?”
한낱 미물의 생각을 묻는 게 이상했는지 벨린이 두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럼에도 그리즈는 미물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뒤늦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쉬어야겠구나. 돌아가렴.”
벨린은 평안한 시간을 보내라는 얘기를 끝으로 방을 나갔다. 그리즈는 혼자만의 시간이 되면 늘 그랬듯 창가로 향했다.
낮에는 꽃과 나비가 어우러져 생동감이 넘치는 바이렌하그는 밤이 되면 악마들의 고혹적인 낙원으로 변모한다. 저 멀리 자리한 언덕은 새카만 그림자로 바뀌고, 꽃들은 오색의 꽃잎을 달빛 아래 빛내며 침침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리즈는 드넓은 대지로 침전한 달빛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늘 봐도 신기한 사실이 있었다. 아무리 새카만 어둠이 내려도, 폭우와 폭설이 쏟아져도 달빛은 늘 한결같이 대지를 비춰 생명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깊은 고난 속에서도 생명이 살아가길 바라는 게 신의 뜻이라면 죽음은 왜 있는 걸까. 신께서는 선택받은 자만 살아남기를 바라시는 걸까. 그렇다면 그리즈 베네딕트는 선택받은 자일까.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 신의 선택을 받았을 테지만 그래도 초조한 마음을 삼킬 수 없었다. 스테판과 할머니, 바이렌하그 대공 모두가 날카로운 이를 가진 맹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방심하는 즉시 목덜미를 물릴지 모르지….
이런 생각들로 하루 내내 긴장한 까닭에 목 뒤가 아려 왔다. 그리즈는 손으로 목 뒤를 주무르며 창문을 열었다.
꽃향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애써 노곤히 눈을 감은 그리즈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홉 살 때도 이렇게 노래를 부르곤 했었는데….
아마 공주 자리에서 폐위되고 외딴 탑에 감금되었을 때일 것이다. 아버지의 추종자들이 연합군을 만들어 타릴루치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리즈는 목이 터져라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며칠 뒤 연합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는 그날 쉰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안식의 자장가를 불렀었다.
그날 죽어 간 병사들은 지금쯤 천국에 있을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아버지께서도 천국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누리고 계실까.
하염없이 생각하던 그리즈는 피 흘리며 죽어 간 그들을 위해 안식의 자장가를 다시금 불러 보았다. 느린 바이올린 연주와 어울릴 법한 구슬픈 노래가 잇새로 번졌다.
“새들도 잠든 밤 그대의 요람에 씨앗을 품고
달콤한 찬양으로 꽃 피우리.
그대는 낙원을 거닐고 영원토록 안식하리라.
아아… 그대는 나의 노래를 듣지 못해도
그대는 나의 품에서 영원을 사네.”
한참이나 해묵은 서글픔을 곱씹다가 정원 옆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울타리 앞에 새카만 인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장신의 사내였다. 상체가 넓고, 허리 아래부터는 일자로 미끈하게 뻗은 몸이 인상적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내의 머리칼이었다. 달빛에 반사된 흑발. 연회 내내 곁눈으로 경계했던 어두운 머리색. 바이렌하그 대공의 것.
차라리 그가 낙원에 놀러 온 악마이길 바랐다. 악마라면 감언이설로 일탈하자고 꼬드길지언정 그녀를 단칼에 죽이지는 못할 테니까.
대공을 보고 겁먹은 그리즈는 황급히 창문을 닫고 커튼으로 몸을 숨겼다. 이내 창밖을 힐끗 바라봤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몸을 등진 채 고개만 틀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노랫소리를 들은 걸까. 고요해야 할 시간에 들리는 노래가 적잖게 거슬렸던 걸까.
한참을 그렇게 굳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되지 않았을 때쯤에야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릴 적 새벽마다 창가로 찾아왔던 늑대개의 발소리처럼 퍼석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