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2)

***

그리즈는 따뜻한 목욕으로 몸을 녹였다. 목욕을 돕겠다는 하녀장과 벨린을 거절하느라 애먹었지만 이제는 그들도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목욕을 마쳤음에도 마음이 한결같이 심란했다. 어째서 그가 붉은색 눈을 지적했던 건지 모르겠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무거운 걸음으로 방에 도착했다. 조금 쉴 생각이었지만 방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며칠 전 후작 영지로 떠났던 스테판이었다.

그리즈는 그가 곧 돌아올 거라는 걸 이미 예상했었다. 대공이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을 테지. 가짜 율리아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즈가 어두컴컴한 얼굴로 고개 숙였다.

“돌아오셨군요, 후작 각하.”

그리즈의 뒤에 서 있던 하녀장이 스테판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벨린까지 허리 굽혀 인사했을 때 스테판이 창가를 내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리를 비켜 줘.”

그리즈의 표정은 더 경직되었다. 왠지 모르게 반란을 꾀하는 듯한 분위기 때문이다. 괜한 오해라도 샀다가는 샤토의 왕처럼 머리만 남을 수도 있는데….

하녀장과 벨린은 사람 속도 모르고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사색이 된 그리즈는 방문을 닫고 들어와서 초조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창유리로 비춰보며 스테판이 말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지난 며칠간 푹 잠을 잤으니 좋아질 만도 했다.

“…그곳보다는 좋으니까요.”

그리즈가 무겁게 대답했다. 잠시 고개를 삐뚜름하게 숙였던 그는 뒤로 돌아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앞으로 그곳에 갈 일은 없을 거야. 주인에게 네 몸값을 지불했어.”

그러니까 이곳에서 율리아나로 살며 그의 야망을 이뤄 달라는 뜻 같았다. 하지만 그리즈는 이용당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제 앞길을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바이렌하그 성당 구경만 할 수 있다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도 저는 괜찮습니다.”

그 말을 들은 스테판은 갓 목욕을 해 윤이 나는 얼굴을 시선으로 훑으며 말했다.

“율리아나를 잃은 후 어머니는 끼니를 자주 거르고 방에만 계셨어. 건강이 꾸준히 나빠졌지. 연로해지신 지금은 급격히 쇠약해져 돌아가시는 건 시간문제였고.”

“…….”

“그런데 네가 나타난 후로 조금이라도 음식을 입에 대시기 시작했어. 해야만 하는 일을 찾으신 거지. 네가 율리아나가 맞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맞다면 네 혼사처도 알아봐야 하니까.”

아무래도 그는 남을 속이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다 진실을 알게 되면 할머니는 두 배로 절망하실 것이다.

“저는 자신이 없….”

“나는 내 어머니인 그분이 건강을 되찾기를 바라고 있어. 그게 내게 가장 필요한 일이거든. 손녀를 잃고 지금까지 괴로워하신 어머니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

“…….”

“도와준다면 바이렌하그 성당에 데려다줄게.”

얘기를 듣던 그리즈는 초조하게 한숨 쉬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언제쯤 성당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 않나.

“…그럼 먼저 데려다주세요.”

고심 끝에 한 대답에 그는 차갑게 웃었다. 율리아나와 닮지 않았다면 후작과는 말도 못 섞어 봤을 불가촉천민이 조건을 내거는 게 우스운 눈치였다.

“재밌구나.”

그리즈는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면서 대공 전하를 뵈었어요.”

스테판이 창가 앞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얘기 들었어.”

대공과 그녀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대공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부터 얘기하고 싶었다.

“사람 목을 말에 건 채로 나타나셨어요. 갑옷과 얼굴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그리고 저를 반기지 않으시는 눈치였습니다.”

그건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스테판이 대답했다.

“머리는 국왕 폐하께 바치기 위해 가져온 거겠지. 폐하의 가장 사납고 잘생긴 개니까.”

“…….”

“알지? 개들은 원래 낯선 사람을 경계하잖아.”

가장 사납고 잘생긴 개라니. 자신이 대공으로 모시는 인물을 어째서 그렇게 표현하는 걸까.

그리즈가 젖은 머리칼을 초조하게 쓸어 넘겼다. 그러곤 스테판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저택의 사내들이 대부분 근육질인 반면 스테판은 검술과는 담을 쌓고 산 듯 몸이 미끈했다. 돋보기에 체인을 달아 옷에 연결해 놓은 걸 보면 책을 자주 보는 것 같았다.

그건 그가 책을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운동 신경이 없는 탓에 차선책으로 공부를 선택한 걸 수도 있었다. 후자이지 않을까. 그가 정말 책을 좋아했다면 지금도 책을 읽느라 바쁠 테니 말이다.

그를 살펴보던 그리즈는 아까 전 대공이 자신의 눈동자 색을 지적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물었다.

“대공께서 제 눈동자 색을 지적하셨어요. 율리아나의 눈 색…. 무슨 색인가요?”

스테판이 창밖을 내다보며 무심히 대답했다.

“갈색.”

그러다 그리즈를 설핏 보고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내 그리즈의 팔을 당겨 창가 앞에 서게 만들고는 햇빛에 비친 눈동자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다렸다는 듯 선명한 붉은색을 띠었다.

스테판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망할….”

“…….”

“어두운 곳에서는 갈색으로 보였는데.”

그러다 한참을 고심하더니 머리칼을 불안정하게 헝클어트렸다.

“괜찮아, 괜찮을 테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비아누트는 세 살 때 다른 영지로 보내져 대주교 밑에서 자랐어.”

“…….”

“율리아나와도 서먹한 사이였지. 율리아나와 남매처럼 자란 건 다름 아닌 나였고.”

그는 이내 팔짱을 낀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술은 합리화를 하느라 바빴다.

“그런 내가 보증하면 너를 의심할 수 없을 거야. 너는 비아누트를 잘 피하기만 하면 돼.”

결국 율리아나 행세를 하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곳의 주인을 대체 무슨 수로 피해 다닐 수 있을까. 그리즈의 얼굴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바이렌하그 영지 내에서 대공은 국왕과 다름없었다. 그가 부르면 만나러 가야 했고, 그가 눈동자 색을 보려 하면 저항 없이 보여 줘야 했다. 그는 개가 아니었다. 그를 제외한 이 영지의 모든 사람이 그의 개였다.

“제 마음대로 대공 전하를 피할 수는 없어요.”

스테판이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궁금해지는 순간 그의 입매가 매끄럽게 휘었다.

“나도 피할 수 없지 않아? 너는.”

그는 그녀가 가짜 율리아나로 살길 원하고 있고 그녀는 그걸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리즈는 초조해졌다. 어떻게 거절하든 스테판은 굽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끝내 거절한다면 화풀이로 그녀를 죽일지도 몰랐다. 마음에 드는 옷에 차를 엎었다며 하녀를 죽이는 귀족들이 판치는 마당에 지금까지 점잖게 요구했던 걸 고마워해야 했다.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리즈는 무겁게 침묵했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스테판이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이미 어머니께도 소개했으니 어쩔 수 없어. 이제부터 너는 오르투르 숲속 오두막에서 노파와 함께 산 율리아나야.”

그리즈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단지 잃어버린 손녀를 찾아 주어 어머니의 건강을 지키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는 찰나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하녀 벨린의 목소리 같았다.

“아가씨, 마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그리즈는 덜컥 겁을 내며 작게 속삭였다.

“마, 막아 주실 수 있나요?”

스테판은 왜 그래야 하냐고 묻듯 두 눈썹을 위로 올렸다. 심란해진 그녀는 문밖의 벨린에게 느리게 대답했다.

“금방 나갈게.”

옆에서 스테판의 속삭임이 울렸다.

“어설프게 연기하면 끝이야.”

“…….”

“너도, 나도.”

그리즈는 먼저 방을 나서는 스테판을 보다가 벨린을 따라나섰다.

1층 복도 끝 모퉁이를 돌자 바이렌하그 가문 문장이 고풍스럽게 새겨진 고동색 양 문이 나왔다. 양쪽 벽에서 번쩍이는 금 촛대를 살피던 그리즈가 벨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건강은 좀 괜찮으시니? 어쩐 일로 나를 부르신 건지는 알아?”

벨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노크하려다가 작게 대답했다.

“건강은 조금씩 걸을 정도로 좋아지셨어요. 몸이 괜찮아지니 아가씨가 보고 싶어지신 것 같아요. 아까 아가씨께서 물에 빠지셨다는 소식에 걱정하시기도 했거든요.”

그리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못 할 긴장감으로 온몸이 떨려 왔지만 피할 방법이 없지 않나.

그녀도 할머니의 묘했던 마지막 눈빛이 내심 신경 쓰였었다. 진심으로 손녀가 돌아왔다고 믿는 눈치가 아니었는데 어째서 내쫓지 않으셨던 걸까.

그때 벨린이 방문을 노크하고는 상냥하게 말했다.

“마님,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문안에서 기품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양 문을 연 벨린이 들어가라는 듯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즈는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창문으로 햇살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무 격자무늬의 커다란 창 앞에 검은 실루엣이 앉아 있었다.

그게 역광을 받은 할머니라는 걸 깨달은 그리즈는 양손으로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 굽혀 인사했다. 공주로 지낼 때 배운 귀족식 인사법이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잠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가 벨린에게 말했다.

“티타임을 가질 거야. 간식은 호두 파이면 좋겠구나.”

끼익. 벨린이 문을 닫고 나가자 할머니가 테이블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할머니를 마주 보고 앉은 그리즈는 창밖으로 향한 할머니의 시선을 좇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신비로운 석양이 푸르른 잔디를 주홍빛으로 물들였고, 일하는 하인들에게는 막간의 휴식을 선물했다.

그리즈는 문득 평화로운 이곳에 계속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용 가치가 있는 가짜 율리아나가 아니라 진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정원 끄트머리에 수호신처럼 존재하는 아름드리나무도 1년 내내 볼 수 있었을 텐데….

가슴속에서 서글픔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5년 가까이 방에서만 살았던 것 같구나. 한동안 침대에서만 지내다 보니 다리가 약해져 완전히 갇혀 버렸던 것이지만 말이다.”

나지막이 말한 할머니의 얼굴이 석양빛으로 물들었다. 얼핏 보면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워 보였지만 그림자가 진 피부의 주름은 칼날에 베인 상흔처럼 어둡고 깊었다.

“요새 들어 창밖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늘더구나.”

혼잣말하듯 말한 할머니가 헛헛한 미소를 드러냈다. 그리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든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어떤 건지 알고 있었다. 온몸이 밧줄에 꽁꽁 묶인 듯한 기분이 들 때면 그녀 또한 멀리 날아가고 싶었다. 새로운 세상으로, 새로운 사람들에게로.

그녀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며 그녀 또한 스스로를 잊고 싶었다. 가문의 복수, 상실의 슬픔 그런 것들을 그런 방식으로 날려 버리고 싶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리즈가 할머니를 바라봤다. 왠지 할머니도 창밖으로 날려 보내고 싶은 기억을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녀를 곁눈으로 바라본 할머니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 다 산 할미 마음을 이해하는 표정이구나. 오두막 생활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일 테지.”

다행히 할머니는 구태여 무엇이 어떻게 힘들었냐고 묻지 않았다. 잠시 긴장했던 그리즈는 어깨의 힘을 살짝 빼며 말했다.

“저는 그냥… 할머니의 건강을 걱정했을 뿐이에요.”

정말 그것뿐이냐는 듯 할머니가 깊은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다가 대답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견딜 만했어. 이 저택의 모든 곳에 내 눈과 귀가 있어 심심하지 않았거든.”

그리즈는 그 말을 곱씹었다. 이 저택의 모든 곳에 눈과 귀가 있다라…. 단지 저택 하인들이 저택의 일과를 알려 준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의미일까.

할머니의 속내를 헤아리려 초록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노인처럼 자연스레 빛나는 시선이 그녀를 반겼다.

왠지 할머니는 스테판의 계략을 조금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 점에 그리즈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이 할머니가 부드럽게 물었다.

“비아누트는 만났니?”

비아누트…. 일순간 새벽처럼 고요한 사내를 떠올린 그리즈는 심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잃어버린 여동생을 만난 대공의 반응이 궁금한 듯했다.

“너를 알아보던?”

“…아뇨.”

못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붉은 눈동자 색에 의구심을 가진 듯했다. 그가 폭탄을 쥐게 된 셈이다. 원한다면 언제든 불을 붙여 터트릴 수 있으니까. 그리즈가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저도 기억이 없는 까닭에 살갑게 맞아 드리지 못했어요.”

할머니는 고개를 의미 없이 끄덕거리고는 석양이 고즈넉이 밴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 저녁에 작은 연회를 열 예정이란다. 대공 전하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이지. 우리 가문의 친척도 참석할 거고, 오르투르 공작 부부와 바이안 후작 부부, 그 외의 손님들도 참석할 예정이야.”

“…….”

“너도 오라버니의 무사 귀환을 진심으로 축하해 줬으면 좋겠구나.”

대공의 눈에 띌수록 정체를 들킬 확률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지 않나. 그나마 저녁에는 눈동자가 갈색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라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네, 할머니.”

아직은 건강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으신 건지, 할머니는 호두 파이가 오기도 전에 피로함을 느끼셨다. 그리즈는 티타임을 다음으로 기약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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