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2)

***

인기척에 놀라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어질러진 나무 테이블을 정리하고 간밤에 죽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할 시간이었다.

그전에 판자로 막은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한 줄기 빛을 보며 눈을 떠야 했지만 오늘은 새삼 다른 풍경이 다가와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듯 푸르른 정원이 창문으로 보였다. 태양 아래서 춤추는 꽃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동안 어두컴컴한 부엌 구석에 처박혀 퍽퍽한 빵을 먹은 대가로 신께서 작은 선물을 주신 것 같았다. 그리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한동안 경치를 감상했다.

시간이 흘렀을 때쯤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대답할 겨를 없이 스테판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향수를 뿌린 건지 관능적인 허브 향이 방에 은은하게 퍼졌다.

매음굴에서 얻은 경험에 의하면 향수를 쓰는 사내들은 대부분 타인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긴다. 외모도 화려하게 가꾸고 말투도 기품 있는 사내들이 많았다.

그리즈는 그들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열등감, 나약함, 혹은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가진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치장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 짐작이 맞다면 스테판은 어떤 본모습을 숨기려 하는 것일까. 그게 궁금해지는 순간 스테판이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꿈 꿨니.”

밝은 햇빛 아래서 본 그는 꽤 화려한 느낌이 강했다. 가슴에는 파란 보석 브로치를 달고 있었고 목에는 작은 회중시계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무표정이어도 웃는 것처럼 보이는 이목구비가 화려함을 더했다.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바이렌하그 대공과 비슷한 또래 같았다. 다만 바이렌하그 대공을 조카라고 표현했으니 그의 숙부일 것이다. 이 가문의 큰 어른인 파올라 바이렌하그가 늦둥이를 본 걸까.

그리즈는 창문으로 향했던 몸을 돌려 작게 고개 숙였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스테판이 시선으로 그녀의 눈가를 훑으며 말했다.

“밝은 데서 보니 더 아름답군.”

뜨거운 숨을 짧게 내쉬는 그를 보고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멸문당한 귀족인 그리즈에게는 아름답다는 말이 저주와도 같았다. 그랑디아의 공주였을 때는 아름답다며 경의를 표하던 사내들이 먹이사슬의 최하위로 떨어지자 빠짐없이 육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매음굴에서 지내며 얼굴과 머리칼에 흙먼지를 발랐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후로 아름답다는 말을 잠자리하고 싶다는 말과 동일시해 온 그리즈는 어깨를 움츠렸다. 스테판은 그녀의 반응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사내들에게 무척 사랑받았겠어.”

“…….”

“그런 여인은 어디서든 가치가 있지. 일이 잘될 거라는 의미 같군.”

그리즈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동안 사내들에게 사랑받길 원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로 가치를 뽐내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바이렌하그 성당 근처에 가고 싶을 뿐인데 그는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저는 단지 바이렌하그 성당에 가고 싶을 뿐….”

어렵사리 원하는 걸 말하는 찰나였다. 스테판이 기대감에 찬 듯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할머니가 일어나셨어. 너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구나.”

그 순간 존재했는지도 몰랐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쩌면 요하네스가 들렀다던 예술품 상점에 가 보기도 전에 감옥에 갇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리아나의 할머니일 파올라 바이렌하그를 속이려 들어도 죽을 것이고, 스테판을 불쾌하게 만들어도 죽을 것이다.

차라리 그 전에 도망이라도 쳐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지는 순간 그가 그리즈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고는 작게 귓속말했다.

“나는 네가 율리아나이길 바라.”

그리즈는 불안정하게 떨리기 시작한 시선을 바닥에 떨궜다.

잠시 뒤에 앳되어 보이는 빨간 머리 하녀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벨린이라고 했다. 치장을 도와주겠다며 드레스 세 벌을 가져왔다.

스테판의 얘기로는 율리아나가 노란색을 좋아했다고 했다. 그러곤 색상이 다른 드레스 중에 노란색 드레스를 골라 입게끔 유도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행동할 여인인지 떠보는 듯했다.

그는 노란 머리끈을 만지고 있었지만 그리즈의 눈에는 칼을 쥔 듯 섬뜩하게 비쳤다. 이내 그녀는 도망쳐야겠다는 의지를 잃고 노란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드레스 앞섶보다 가슴이 컸던 탓이다.

그리즈는 늘 그랬던 것처럼 가슴을 면포로 칭칭 감고 싶었지만 벨린에게 저지당했다. 다행히 처절한 노력 끝에 드레스에 가슴을 가둘 수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답답했지만 이리저리 흔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나았다. 앞으로는 드레스의 가슴을 한 치수 넓히겠다는 벨린의 계획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치장을 마치고 그를 따라나섰다. 먼지 하나 없는 고동색 나무 바닥 위를 얼마나 걸었을까. 1층 복도 끝 방에 선 스테판이 방문을 노크했다.

“율리아나를 데려왔어요, 어머니.”

천장이 높이 있는 까닭에 노크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긴장한 그리즈가 치맛단을 초조하게 쥐었을 때 문 안에서 고상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옆에서 대기 중이던 집사가 방문을 열었다. 말가죽 카펫이 바닥에 깔린 게 보였다. 레이스 캐노피로 장식된 호화로운 침대가 그 위에 있었다.

캐노피의 하얀 레이스 사이로 깡마른 실루엣이 보였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건지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댄 채로 앉아 있는 할머니였다.

스테판을 따라 방으로 들어온 그리즈는 두 손 공손히 모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창밖에서는 일하는 하인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복도도 부산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이 방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묵직한 정적이 정수리를 짓눌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때 지병으로 노쇠해진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건드렸다.

“율리아나를 찾았다라…. 어디서 찾았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물음. 하루하루 감정을 새카맣게 태워 버려서 결국 재만 남은 듯 버석버석했다.

스테판은 그게 익숙한지 물 흐르듯 대답했다.

“에스투르 공작령 오두막에서 찾았어요. 율리아나가 실종된 바이렌하그 숲의 옆 지역입니다.”

“…그래?”

“어머니도 기쁘시지요?”

주변이 또다시 고요해졌다. 눈치를 살피던 스테판이 정적을 메우려는 듯 말을 이었다.

“오두막에 살던 노파가 율리아나를 주워 지금껏 키워 줬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노파는 3년 전에 죽었고 제가 발견했을 때는 율리아나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리즈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만난 장소, 그녀를 데리고 있던 사람, 지내던 곳 모두 거짓이지 않나. 너무 뻔뻔한 거짓말인 까닭에 그녀조차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스테판이 미묘하게 웃었다. 너 따위가 진실을 알아봤자 뭐 어쩌겠냐고 묻는 것 같았다.

일순간 그리즈는 깊고 어두운 구덩이 속에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까마득히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화려한 독뱀이 스멀스멀 흙벽을 타고 내려오는 것 같았다.

다급히 구조 요청을 하고 싶었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독뱀에 물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할머니의 질문이 들려왔다.

“네가 율리아나가 맞니?”

우웅. 밖에서 바람 소리가 울렸다. 흙먼지라도 좋으니 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고 싶었다.

정적만 이어지자 스테판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러나 목구멍에서는 긍정이 나오지 않았고 기다리다 못한 스테판이 대신 변명했다.

“가엽게도 절벽에서 떨어져 기억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점점 기억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귓가에서 스테판의 협박이 울렸다. 나는 네가 율리아나이길 바라. 나는 네가 율리아나이길 바라….

그 뜻에 따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매음굴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앙갚음당해 비좁은 방에 갇혀 하루 종일 사내들에게 겁탈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면 죽을 때까지 고문당하는 신세가 되거나…. 비참한 최후를 상상할수록 손발이 차갑게 식어 갔다. 머지않아 얼굴까지 하얗게 질려 버렸다.

할머니는 스테판에게 대화를 방해받는 게 불쾌했는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의자에 걸쳐진 담요를 어깨에 두르며 고상하게 말했다.

“스테판은 나가 있거라.”

스테판이 당황한 몸짓을 보였다. 편찮은 할머니가 직접 나서서 율리아나와 대화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목덜미가 빨개질 정도로 당황한 건 그리즈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바이렌하그였다. 언제나 풍작이 이어지는 천혜의 땅을 끝없는 전쟁으로 지켜 낸 가문. 그 주축인 파올라 바이렌하그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긴장됐다.

“하지만 어머니….”

스테판은 일이 꼬여서 퍽 예민해진 듯 미간을 좁혔다. 할머니 역시 흐리게 인상을 썼다.

“나가 있거라.”

별수 없던 스테판은 용기를 주듯 그리즈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할머니께 잘 말씀드리렴.”

어차피 그녀가 율리아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상대가 책략가 파올라 바이렌하그이지 않나. 그리즈는 정체가 빨리 밝혀져 돌아가길 바라며 고개를 숙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스테판은 방을 나갔고 할머니는 이인용 창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테이블 위 꽃병을 창틀에 올려놓는 소리가 고막을 무겁게 건드렸다.

움찔하는 순간 할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깨끗한 드레스를 입고 귀족 어른 앞에 서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던 그리즈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심호흡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테이블의 나뭇결을 매만지던 할머니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희한하구나. 율리아나와 분위기가 많이 닮았네.”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어렸을 적의 율리아나와 닮았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율리아나가 아닌데도 닮아서 희한하다는 의미일까.

할머니의 표정을 보면 답이 나올 것 같았지만 허락 없이 고개를 들 수 없어서 답답했다. 불안한 강아지처럼 움찔거리는 모습을 쭉 지켜보던 할머니는 뒤늦게 움직임을 허락했다.

“가까이 와 보거라.”

방문 앞에서부터 테이블까지의 거리임에도 무려 열 발자국이 넘었다. 몹시 긴장한 그리즈는 휘청거리며 걸어서 할머니 앞에 섰다.

고동색 테이블에 시선을 두자 할머니의 턱이 곁눈으로 보였다. 주름진 턱이었다. 노화로 주름졌다기보다는 음식을 먹지 않아서 탄력을 잃은 것 같았다. 어쩌면 손녀를 잃은 슬픔이 할머니의 주름 하나하나에 깊게 배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내 눈을 봐 보거라.”

처음보다 인자해진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리즈는 서서히 시선을 올렸다. 핏기 없이 창백한 입술과 오뚝한 코, 쌍까풀이 담백하게 진 눈매가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이는 육십 정도 되어 보였고 헤어스타일은 백발의 단발이었다. 어두운 장미색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인지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 조금 안타까웠던 건 쇄골이 훤히 보일 정도로 야윈 몸이었다.

가족 잃은 슬픔은 신분을 막론하고 같을 것이다. 그녀가 밤마다 친할머니의 얼굴을 그리며 슬픔에 젖었던 것처럼.

울적해진 그리즈는 할머니와 비슷하게 메마른 손으로 치맛단을 쥐었다. 그 광경을 하염없이 보던 할머니가 나지막이 물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뭐니?”

아마도 할머니는 기억 속의 율리아나가 좋아했던 음식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리즈는 차마 그 음식을 맞추려 노력하며 할머니를 기만할 수 없었다. 단지 어릴 적 친할머니와 함께 먹었던 호두 파이의 고소한 맛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호두 파이를 좋아해요.”

할머니는 원했던 답을 들었다는 듯 묘하게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호두 파이?”

문득 귀족들의 흔한 간식인 호두 파이는 누구든지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율리아나도 좋아했던 걸까.

“…네.”

호두 파이에 얽힌 손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지 한동안 생각하던 할머니가 물었다.

“몸에 내가 알아볼 만한 상처가 있니?”

율리아나가 아니기에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스테판이 알게 되면 해코지할지도 몰랐다. 고민하던 그리즈는 에둘러 대답했다.

“그런 상처는 없어요.”

뒤이어 입술 대신 눈동자로 진실을 전했다. 자신은 율리아나가 아니라는 사실과 당신의 아들이 모략을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파올라 바이렌하그가 소문처럼 대단한 책략가라면 분명히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

진실이 담긴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어진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이었다.

“재밌는 아이로구나.”

그리즈는 궁금했다. 재밌는 아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정말 재밌다는 뜻은 아닐 테고… 이상하다거나 특이하다는 뜻일까. 잔뜩 긴장하는 찰나 할머니가 주름진 뺨을 매만지다가 헛헛하게 웃었다.

“사실 이제는 너무 오래돼서 나도 잘 모르겠구나. 애초에 율리아나에게 그런 상처가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아.”

“…….”

“헷갈리기도 해. 정말 율리아나가 실종된 건지. 맞다면 왜 하필 이제야 나타난 건지.”

그리즈의 눈에 비친 것은 대단한 책략가가 아니라 정신이 흐릿한 할머니였다. 어쩌면 파올라 바이렌하그의 명성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퍼트린 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할머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스르륵 빠졌다.

“네가 율리아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하지만 지켜봐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 또한 신의 뜻일 테니.”

시종일관 흐릿했던 할머니의 초록 눈이 처음으로 비밀스럽게 빛났다.

“그럼 건강부터 회복하거라.”

일주일 동안 율리아나의 방에 갇혀 있다시피 살았다. 매음굴에서 얻은 피부병을 조용히 치료하려면 활동을 줄여야 하기도 했고, 아사 직전인 건강 상태 때문에 쭉 잠을 잔 이유도 있었다.

의관의 얘기로는 피부병이 건조한 환경과 곰팡이 때문에 생긴 거라고 했다. 종아리와 팔뚝 등 치료 범위가 넓지만 솔잎을 다려 만든 연고를 꾸준히 바르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

배에도 피부병이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리지는 못했다. 왼쪽 배에 창녀 표식이 찍혀 있었다. 나뭇가지 모양의 쇠를 달궈 지진 자국인데, 사내들에게 몸을 팔던 여인이 달아나 평범하게 혼인하고 사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즈는 궁금했다. 돈과 시간을 들여 여인을 찾는 건 사내들이지 않나. 어째서 여인들이 창녀로 낙인찍히고 혼인할 권리마저 빼앗기게 되는 걸까. 왜 그들은 여인을 원하면서도 증오할까.

의문을 가질수록 손발이 차가워졌다. 창녀 낙인이 사내들의 증오처럼 느껴졌다. 배에 타인의 증오를 달고 다니면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 행복이라. 주제넘게….

며칠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다 보니 욕심이 커지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욕심내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바이렌하그 성당 근처 예술품 상점에 가야 하는데….

스테판은 후작령에 문제가 생겼다며 며칠 전 급하게 떠났다. 할머니에게는 율리아나가 전염성 피부병에 걸렸다고 말해 두었으니 당분간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곤 맑은 공기를 자주 접하면 피부병이 빨리 나을 거라고 의관이 조언했다며 산책을 허락했다.

그리즈는 기회를 봐서 달아나려 했지만 헛된 꿈이라는 걸 알았다. 저택의 출입구가 단 두 개뿐이었고 그 앞에는 경비 초소가 있었다. 외출하려면 행정관에게 발급 받은 출입증을 제시해야 했다.

어떻게 요하네스를 찾으러 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하루가 또 흘렀다. 그리즈는 해가 뜨자마자 하녀 벨린을 따라가 목욕을 마치고 돌아왔다. 목욕을 돕겠다고 나선 벨린을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왼쪽 배에 새겨진 표식을 들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하나 다행인 것은 벨린이 이것저것 묻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10년 만에 돌아온 율리아나에 대해서 궁금한 건 많은 듯했지만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오늘도 몸치장하는 내내 고요했다. 일상용 노란 드레스를 입은 그리즈는 창가 앞 의자에 앉아 머리 손질을 받고 있었다. 몸은 편하지 않았다. 벨린에게 부탁해 젖가슴이 두드러지지 않게 옥죈 까닭이었다.

하지만 가슴으로 떨어지는 사내들의 시선을 줄일 수 있기에 마음은 편했다. 따사로운 햇살을 얼굴로 받으며 눈 감고 있으니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하녀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와 언니의 콧노래가 귓가에 아득히 차올랐다. 까무룩 잠이 들 것만 같았을 때였다.

“오늘도 산책… 하실 거죠?”

벨린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들려왔다. 그리즈가 눈을 살며시 뜨며 대답했다.

“응.”

벨린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반 묶음 하려던 머리칼을 쥔 채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대공 전하께서 오늘 귀환하신다는 전령이 들어왔다고 해요.”

대공 전하…. 바이렌하그의 장남,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

빛줄기가 선명한 눈앞으로 며칠 전 봤던 흑발 사내가 떠올랐다. 그리즈는 평화롭게 부유하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끼며 퍼석하게 물었다.

“…오늘?”

벨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네, 무사히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대공으로 즉위하자마자 출정하시고도 매번 무사히 돌아오셨거든요.”

그리즈가 불안정하게 호흡하며 물었다.

“언제 즉위하셨는데…?”

벨린이 손에 쥔 머리칼을 겹쳐 곱게 묶어 주며 대답했다.

“아마도 7년 전쯤일 거예요. 전 대공 전하께서 그때 전사하셨으니까요.”

7년 전쯤이라….

그의 나이가 지금 20대 초반일 테니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대공으로 즉위한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검을 다루고 적군을 베어 온 걸까. 소문대로 정말 그는 성적인 욕구를 살인으로 풀고 있는 걸까.

생각에 잠긴 찰나 무심코 흑경을 보았다. 그 안에서 벨린이 그리즈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왠지 기분이 어떤지 주시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그리즈는 율리아나의 아버지인 전 대공 전하의 전사 소식을 듣고도 슬퍼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감정을 억지로 꺼낼 수 없었기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변명하는 것보다는 화제를 돌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번엔 어디로 출정하신 거니?”

뒤늦게 벨린이 반 묶음 한 머리를 땋아 내리며 대답했다.

“바닷가 쪽 샤토요. 저번 달부터 그놈들이 바이렌하그가 자신들의 땅이라며 떼로 몰려와서는 우리 영지 여인을 겁탈했거든요. 일주일 만에 함락시키셨대요. 조금 무섭지만… 샤토 왕의 목도 손수 참수하셨다고 해요.”

말을 마친 벨린은 갑자기 화들짝 놀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아, 소, 송구합니다. 무서운 게 아니라 기쁩니다. 말이 헛나갔어요.”

벨린은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사람처럼 손을 후들후들 떨었다. 그리즈는 그런 벨린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냥 겁 많은 성격인 걸까. 아니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걸까.

“괜찮아, 벨린.”

“…….”

“나도 참수는 무섭거든.”

그렇게 치장을 마친 후 버섯 수프로 간단히 허기를 달랬다. 딱히 한 일도 없는데 벌써 정오가 가까워져 있었다.

여름이 따로 없이 늘 서늘한 이 대륙은 낮이 짧고 밤이 길었다. 해가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던 그리즈는 황급히 산책에 나섰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얼음이 꽁꽁 얼던 날씨가 이제 무척 따뜻해졌다. 어깨에 걸친 망토가 필요 없어져 손에 쥐었다.

그대로 고개를 들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신비로운 색감을 뽐내는 게 보였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렇게 하늘을 마음껏 감상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이름 모를 들꽃 향기를 머금은 바람을 느끼는 건 또 얼마 만이고….

그리즈는 정원의 벤치를 보수하는 하인을 지나쳐 언덕배기를 내려갔다. 평평한 돌로 만들어진 삼거리가 나왔다. 정면에는 호수가 있었고 왼쪽에는 대공저 정문이 있었다.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보던 그리즈가 뒤를 흘끗 돌아봤다. 하녀 벨린이 멀찍이 거리 둔 채 음침한 사냥꾼처럼 뒤따라오고 있었다. 조용한 줄로만 알았는데 재밌는 구석이 있는 아이구나. 어쩌면 스테판에게서 율리아나를 잘 지켜보라고 명령받은 건지도 모르지.

저 멀리 있는 정문으로 달려 나가는 걸 상상하던 그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에서 달아난다면 벨린의 목숨도 위험해지겠지? 차분히 경치나 감상하며 계획을 짜는 게 이로울 테지.

이내 돌길 끄트머리로 가 호숫가를 내다봤다. 화창한 날씨 덕분에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물길이 눈부셨다.

그리즈는 발밑을 내려다봤다. 발밑에는 나무 계단이 있는데, 자갈밭이 호수 옆에 반도처럼 나 있었다. 하인들을 위한 쉼터 같았다.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그리즈는 나른한 행복감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가 돌의자에 앉았다.

초봄 같은 날씨였다. 눈을 살며시 뜬 채 호수 내음을 마시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비가 날아왔다. 검은색 나비였고 날개에 아무런 무늬가 없었다. 깊은 새벽처럼 그저 새카맸다.

검은 나비가 문득 가여워졌다. 나비는 화려한 날개를 가져야 하지 않나. 그래야 꽃이나 나무로 위장해 몸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온통 까만색이라면 적들의 눈에 띄어 잡아먹힐 것이다. 하염없이 안타까워하던 그리즈가 검은 나비를 보며 혼잣말했다.

“나랑 비슷하구나, 너.”

번번이 사내들의 눈에 띄어 여기까지 온 나나, 단번에 사람 눈에 띈 너나.

“꼭 오래 살면 좋겠다. 잡히지 말고 잡아먹히지도 말고, 너도.”

나비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을 위한 말인지 그런 건 알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묵직한 쇳소리가 울렸다. 저 멀리 있는 대공저 철문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열렸다.

뒤이어 바이렌하그 가문의 깃발을 든 기수가 말을 탄 채 번개같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마 대공 전하가 조금 뒤에 도착할 거라는 소식을 전하러 온 걸 것이다. 똑같은 짐작을 했는지, 언덕 위 하인들이 기수의 깃발을 보고 황급히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즈도 방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치맛단을 양옆으로 쥐고 살짝 들며 계단을 올랐다.

그때 모퉁이를 돌던 말 뒷발에서 흙덩이가 떨어져 나왔다. 하필 숨을 깊게 마시는 찰나 얼굴을 덮쳐 왔다.

“흣!”

그리즈는 뒷걸음질 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흙이 코로 들어와 골이 띵했다. 눈물과 기침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자갈길을 밟은 신발에서 낯선 느낌이 났다. 바닥 반이 뚝 끊겨 있었다. 뒤꿈치가 허전한 게 아닌가.

다급하게 뒤돌아봤을 땐 새카만 호숫물이 보였다. 더 이상 뒷걸음질 칠 길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몸이 균형을 잃고 호수로 처박히고 있었다.

“으읍!”

첨벙! 그리즈는 차가운 물속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박혔다. 숨이 멎고 귓속이 웅웅 울렸다. 저 멀리 뭍에서 벨린의 다급한 부름이 들려왔다.

“아가씨! 율리아나 아가씨!”

버겁게 뜬 시야로 출렁거리는 수면이 보였다. 올라가려 기를 쓰고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허사였다. 아래는 온통 새카매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한 치의 빛도 없는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두려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그리즈는 온몸이 시커먼 지옥의 사자가 다가오는 광경을 상상하며 발버둥 쳤다. 호숫물이 코와 입으로 사정없이 들어왔다.

“으흡, 읏, 으윽, 우욱!”

그 순간 무언가가 묵직한 몸을 덮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것의 손에 이끌려 뭍으로 나와 있었다.

“으흡, 흣, 하아, 하아, 하아!”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비틀거리던 그리즈는 쉴 새 없이 기침해 댔다.

“아가씨, 아가씨, 괜찮으세요? 이를 어째!”

벨린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고는 등을 강하게 두드려 줬다. 숨넘어갈 듯 컥컥거리던 그리즈는 노랗던 하늘이 서서히 파란색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눈앞에는 흠뻑 젖은 갈색 옷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바닥에는 그가 벗어 던진 듯한 갑옷이 나뒹굴고 있었다.

“휴우, 정말 다행입니다. 괜찮으신가요?”

그의 갈색 머리칼 끝에서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물에서 건져 준 은인 같았다. 그리즈가 가슴께에 손을 얹고서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하아, 하아, 괘, 괜찮습니다.”

한숨 돌린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성 요하네스 기사단 1단장 쿠엔틴입니다.”

그리즈는 뺨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 내고는 호흡을 정리하며 말했다.

“하아,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쿠엔틴의 옆에는 더 큰 체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피가 검붉게 말라붙은 갑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까만 장갑을 끼고 있었다.

키가 어찌나 큰지, 바로 보니 그의 가슴팍 아래까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즈가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다. 머리 한 개 정도의 높이를 올려다보자 가까스로 흑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사내는 흘러내리다 말라붙은 피를 오른쪽 뺨에도 묻히고 있었다. 피 때문인지, 사나운 눈매 때문인지 사냥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새카만 늑대처럼 느껴졌다.

흠칫 놀라며 한 발 물러난 그리즈는 사내의 가슴팍을 바라봤다. 갑옷에 성녀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다섯 개의 검이 둥그렇게 땅에 꽂혀 있었는데, 그중 첫 번째 검이 크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가 노르드발츠 왕국을 지키는 다섯 가문 중 첫 번째 가문인 바이렌하그의 대공이라는 의미였다.

그를 스쳐 온 바람에서 싸한 피 냄새가 났다. 피 냄새라…. 술 냄새 나는 사내에게서는 도망치라고 배웠는데, 피 냄새 나는 사내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쩔 줄을 모르던 그리즈가 뒤늦게 고개 숙였다.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호숫물에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가 물에 빠진 이유나 건강 상태 등을 그는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주 낮고 굵은 목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다가왔다.

“이름.”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치던 그리즈는 화들짝 놀랐다. 이곳은 바이렌하그의 영지였다. 이곳의 저택, 정원, 호수와 바람, 사람조차 모두 그의 소유였다. 주인을 마주치면 인사하거나 이름을 밝히는 게 당연한 예의였다.

그러나 새로운 이름이 낯설어 입 안에서 겉돌았다. 그리즈는 피 냄새 나는 사내와 그의 수하들의 시선을 낯설어하며 토하듯이 말했다.

“유, 율리아나입니다.”

기사들이 낮게 웅성거렸다. 율리아나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장에서 전해 들었기 때문일 터.

그리즈는 차마 그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애먼 호수만 주시했다. 그가 일단 돌아가라고 말해 주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온몸을 흠뻑 적신 여인이 바람에 흠칫흠칫 떠는 모습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마치 감별하는 중 같았다. 눈앞의 여인이 친동생 율리아나가 맞는지, 아니면 그의 권력과 재력에 기생하러 들어온 가짜인지. 사실 그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리즈는 이유야 어쨌든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그가 장갑 끝을 이로 물어 당겼다. 이내 사람 얼굴만 한 하얀 손이 그녀의 턱 끝을 올려 위로 들게 했다. 깊은 눈동자가 얼굴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흣….”

그리즈는 새파란 하늘 중점에 있는 그를 마주 봤다. 역광을 받아 어두워진 그의 얼굴에서 더없이 서늘한 기운이 몰려왔다. 반면 얼굴로 떨어지는 뜨거운 숨이 생각을 교란시켰다.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뒤섞인다. 그는 서늘하고 뜨겁다. 그리고 신을 섬기며 성전에 따라 혼전순결을 지키지만 신의 이름으로 살인을 자행한다. 몸에서는 술 냄새도 향수 냄새도 아닌 피 냄새를 풍겼다.

그는 선한 사람일까, 피해야 마땅한 악인일까. 정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데 그가 아주 느리게 이름을 불렀다.

“…율리아나.”

온몸의 털이 뜨끈하게 곤두설 만큼 낮은 목소리가 귓불을 건드렸다. 그리즈는 차갑게 젖은 손으로 귓가를 매만지며 그의 눈을 마주 봤다. 까만 속눈썹이 촘촘히 자리한 눈이 보였다. 가로로 길쭉해 샤프한 눈매에서 권태로운 눈빛이 그윽하게 풍겨 왔다.

한 5초 정도 그의 눈을 봤을 것이다.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목덜미가 뜨뜻해지고 심장이 뛰었다. 신이 빚은 역작 같은 사내의 얼굴에 본능적으로 홀린 것 같았다.

아마 그가 얼굴의 반을 피로 가리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항하지 못하고 반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장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매음굴 아드리안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대에 걸리는 시간은 단 10초라고 한다. 그 10초 안에 상대의 외모, 목소리, 향기를 파악하고 내 결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지 느끼는 것이다.

그 말이 맞다면 지금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피 냄새 때문이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이 사내라면 그녀에게서 그랑디아를 빼앗은 타릴루치 가문도 멸문시켜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또 3초가 지났다. 완전히 홀려 버리기 전에 그를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때 그의 어깨로 까만 나비가 내려앉았다. 나비 뒤편으로 그의 흑마가 있었는데, 말의 가죽 인장 아래로 사람의 머리통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왕관이 거꾸로 씌워져 두피에 박혀 있는 걸 보면 샤토의 왕일 것이다. 눈을 감은 채 피눈물을 흘리는 푸르죽죽한 얼굴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땡. 10초가 흘렀을 때쯤에야 그에게 홀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그는 샤토 왕의 머리를 손수 참수했을 정도로 잔혹하지 않나.

게다가 그는 말 한마디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즈는 그에게 정체를 들켜 목숨을 잃기 전에 피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때 멀리서 호들갑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그머니나! 율리아나 아가씨!”

멀리서 하녀장과 문관이 달려오고 있었다. 율리아나가 호숫가에서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벌써 들은 건지 손에는 커다란 담요를 든 채였다.

그제야 그가 턱 끝을 받치고 있던 검지를 쓱 내렸다. 그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아주 신기한 광경이라도 본 듯 그녀의 눈동자에 닿아 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즈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하녀장이 피범벅인 대공을 뒤늦게 보고는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 서 있던 문관은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무사히 귀환하시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대공 전하.”

그는 더 이상 볼 일은 없다는 듯 그리즈를 등졌다. 흥미를 잃었으니 이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그리즈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치맛단을 손으로 들고서 하녀장에게 다가갔다. 사색이 된 하녀장이 그녀의 어깨를 담요로 감싸 주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그리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방으로 돌아가야겠어.”

이내 먼저 발을 떼자 하녀장이 그에게 인사하고는 뒤에서 따라왔다. 벨린도 함께였다.

그리즈는 등을 훑는 낯선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이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름답게 자라셨군요.”

그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 조만간 각지에서 청혼이 밀려 들어올 겁니다.”

쿠엔틴이라는 사내가 하는 말 같았다. 그 말에 대답하지 않던 대공은 뒤늦게 다른 생각을 꺼냈다.

“눈동자가 붉은색이더군.”

대화 소리는 점점 희미해졌지만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붉은색 눈동자가 왜…. 혹시 율라아나의 눈동자 색과 다른 걸까.

숨죽이는 순간 쿠엔틴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예. 정말 매혹적이시더군요.”

뒤이어 픽 하는 소리가 나직이 흘렀다. 대공의 웃음소리였는지 바람 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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