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32)

공유금지, 개인 소장 부탁드립니다.

-배경/분야: 가상시대물, 서양풍

-작품 키워드: 가상시대물, 서양풍, 왕족/귀족, 오해, 첫사랑, 신분차이, 갑을관계, 소유욕/독점욕/질투, 운명적사랑, 집착남, 상처남, 순정남, 동정남, 냉정남, 오만남, 동정녀, 상처녀, 애잔물, 고수위

-남자주인공: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 - 바이렌하그 대공. 열두 살, 연모하던 소녀를 잃고 동정을 지켜 온 인물. 신을 섬기는 자. 언제나 신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상처 입어 위태로운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자주인공: 그리즈 베네딕트 - 반란으로 폐위되어 매음굴로 팔려 간 공주. 우연한 사건으로 바이렌하그 저택에 오게 된다. 맹수들의 우리에 갇힌 듯한 나날. 그중 유독 새파란 시선을 느낄 때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보세요: 한 편의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에 몰입하고 싶을 때

-공감 글귀: “이미 망치고 있어. 더러운 네가. 나를.”

폐위된 공주, 매음굴 잡역부. 그리즈 베네딕트.

그리즈는 운 좋게 매음굴을 빠져나왔다. 조건은 바이렌하그 가문의 영애로 사는 것.

살기 위해 그리하기로 했다. 보름 정도는 살 만했다.

가짜 오라버니인 바이렌하그 대공에게서 작고 귀여운 동물을 선물 받았다.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인 줄 알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더 큰 선물을 가져다줬다.

마침내 그가 그 자신을 주려 했을 때, 그리즈는 이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리란 걸 예감했다.

***

“저를 괴롭히는 게 즐거우신가요. 그래서 어제도 그렇게….”

혀를 야하게 굴리며 나른한 신음을 내던 사내가 지금도 입술에 남아 있다. 그가 불가촉천민의 무력함을 조롱한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설레는 스스로가 싫다.

“저도 영향받을 수밖에 없어요. 이러다 디르크와의 혼사를 망칠지도 모릅니다.”

“그거 괜찮겠네.”

나지막이 말한 그가 모호하게 미소 지었다.

“그냥 내가 가질까. 이렇게 피 말리느니.”

그리즈는 그대로 호흡을 멈췄다. 가지다니… 대체 무엇을.

“무엇을요?”

그의 시선은 거침없었다. 파란 눈이 목 부근을 훑었다.

바이렌하그 대공령, 오르파담 매음굴 근처의 숲속.

그리즈 베네딕트는 사력을 다해 달아나는 중이었다. 매음굴에서 평생 사내들을 상대하다가 죽거나 밤 시중 노예로 팔려 가지 않으려면 반드시 도망쳐야 했다. 다행히 보름달이 환한 덕에 숲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다만 그리즈는 그랑디아의 공주였었고 바이렌하그 숲의 지리를 알지 못했다.

더구나 매음굴 밖으로 나온 게 11년 만에 처음이라 어느 쪽으로 달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숲 주변에 절벽이 있다고 들었다. 어느 쪽에 있는 걸까.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마을과 이어진 길을 찾아야만 하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똑같이 생긴 나무들이 새카맣게 자리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마음이 다급했지만 방향 감각이 망가진 탓에 섣불리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하아, 하아, 제, 제발.”

그리즈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추격자들이 급박하게 따라붙었다. 자그마한 여인을 잡으려 혈안이 된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가까이에서 들렸다.

“저기 있다! 왼쪽! 잡아!”

사내들이 쥔 횃불이 유령처럼 닥쳐오고 있었다. 어디, 어디로 가야 하지? 그리즈는 혼비백산하며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횃불 옆으로 새카만 얼굴이 튀어나왔다.

“겁대가리 없는 년!”

매음굴 주인 빌튼이었다. 그의 악 받힌 목소리가 숲에 쩌렁쩌렁 울렸다.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를 이따위로 갚아?”

일순간 뺨으로 따귀 세례가 날아들었다. 그리즈는 나무에 뒤통수를 부딪히며 옆으로 쓰러졌다.

“아흣!”

귓속에서 삑 하는 이명이 들렸다. 뺨과 뒤통수는 찢어질 듯 쓰라렸다.

이게 폭행의 시작일 것이다. 평소보다 더 무자비하게 구타당할 것 같은 예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마 죽을 때까지 맞더라도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할 것이다. 매음굴에서 실컷 소모되다가 죽는 여인이 흔하게 널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리즈는 눈가가 뜨거워질 정도로 서글퍼졌다. 그녀를 보는 빌튼의 눈은 짜증스럽게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따라와, 이 망할 계집!”

우악스러운 손길에 목덜미를 잡힌 채 정신없이 끌려갔다. 수풀 가지에 종아리를 긁혀 피 흘리고 흐느끼다 보니 매음굴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즈는 철옹성 같은 4층짜리 건물을 끔찍하게 바라봤다. 안에서는 이미 교성이 난무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으로 다시 끌려 들어가 갇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때 갓 도착한 마차에서 귀족 사내가 내렸다. 그는 먼지 한 톨 없는 로브를 입고 있었으며 무도회용 가면으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사내의 큰 키를 훑어보던 빌튼이 화들짝 놀랐다. 사내가 더러운 꼴로 주저앉아 울고 있는 그리즈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여인들이 모두 저 꼴이라고 오해라도 한다면 낭패를 볼 것이었다.

빌튼이 얼른 꺼지라는 듯 그리즈의 종아리를 발로 툭툭 쳤다. 그리즈도 되도록 사내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복도 양옆으로 횃불이 띄엄띄엄 있었고, 그 앞으로 경비 용병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방랑 악사들이 연주하는 류트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소리에 여인들의 교성이 섞여 들리자 그리즈는 진저리치며 창고로 몸을 숨겼다.

역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간 직후였다. 축복받았으므로 살아남은 건지 저주받았기에 죽지 못한 건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10분 후,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조금 전 앞마당에서 마주쳤던 귀족 사내가 그리즈의 하룻밤을 샀다는 것이다.

퍽 만족스러운 돈을 받은 건지 빌튼이 새 드레스를 던져 줬다. 그 후 여인들을 붙여 강제로 목욕을 시키고 드레스를 입혔다.

반항해 봤자 빌튼의 화만 산다는 걸 깨달은 그리즈는 허공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그런 그리즈를 세 명의 여인이 치장해 주고 있었지만 방 안은 공실처럼 조용했다. 그중 가장 속상해하던 마리가 한숨 지었다.

“그러니 평소에 잘 먹어 뒀어야지. 그 가는 다리로 어떻게 달아나겠다고….”

그리즈는 애초에 물을 길으러 나간 게 화근이었다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경비가 느슨하게 느껴졌었다. 탈출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물 양동이를 냅다 내던지고 달리게 됐던 것이었다.

그냥 조용히 물을 길어 왔다면 이렇게 날벼락을 맞지는 않았을 텐데…. 하염없이 후회해 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즈가 눈을 질끈 감으며 자책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앞으로 경비가 더 삼엄해질지도 몰라.”

말을 아끼던 클라렌의 탄식이 들려 왔다.

“앞으로는 탈출이 더 힘들어질 테니 차라리 오늘 만날 나으리한테 잘 보이는 게 나을 거야. 딱한 사정을 얘기하면 데리고 나가 줄 수도 있잖아. 처음이라고 얘기하면서 매달려 봐, 응?”

그 말을 잠자코 듣던 아드리안은 상처 치료 연고를 검지로 푹 뜨며 미간을 좁혔다.

“여기서 나간다고 해서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니.”

조금 시끄러워지려던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즈는 고개를 힘없이 숙였다.

이곳의 여인들은 몰락한 하급 귀족이나, 빚지고 팔려 온 과부였다. 중죄를 짓고 이곳으로 오게 된 농노도 있었다. 이곳에서 나간다고 해도 사람대접받기는 힘들 것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온 아드리안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내의 도움으로 빠져나가기보다, 이곳의 사내들을 모두 죽이고 나가기를 늘 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앞뜰에 있는 하얀 꽃만 있었어도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얘기를 들은 마리가 의아하게 물었다.

“하얀 꽃?”

아드리안은 종아리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목화처럼 생긴 그 하얀 꽃이랑 투구꽃 뿌리를 럼주에 오래 끓이면 독이 되거든. 내장을 녹이고 피를 토하다 죽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 말이야.”

아드리안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허구한 날 내게 발길질을 해 댔던 남편도 그렇게 죽였어.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됐지만.”

“…….”

“독 만드는 방법은 비밀로 해 줘. 연금술사였던 어머니가 알려 준 거거든. 언젠가는 그 독으로 이곳의 사내들을 모두 죽이고 달아날 생각이니까.”

그리즈는 그렇게 되길 바라면서도 섣불리 동조하지 못했다. 행운이 따라 준다면 탈출할 수 있겠지만 행운이란 건 늘 그렇듯 선택받은 자의 몫이었다. 불행의 선택을 받았기에 이곳에 온 사람은 감히 엄두 낼 수 없는 것이다. 내내 무기력했던 그리즈가 회색빛 긴 속눈썹을 눈물로 적신 채 길게 한숨 쉬었다.

아드리안은 동백유를 허벅지까지 발라 주다 문득 그리즈의 얼굴을 살펴봤다. 이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꾸며 놓으니 참 아름답구나. 가엾게도.”

그리즈는 가엾다는 단어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여인은 인기 많은 장난감 처지였다. 욕정을 해소하러 온 사내들이 줄을 설 거고 그들에게 쉴 새 없이 시달리겠지. 운이 따라 준다면 1년 안에 죽을 것이고 아니면 늙을 때까지 매음굴을 전전하다가 죽게 될 것이다.

그리즈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없었다.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만나서 희망을 얻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깨닫고 싶었다.

어느덧 새카맣게 덩어리져 있던 그리즈의 머리칼이 고운 결을 되찾았다. 그리즈는 가벼워진 머리칼이 어색했다. 방패처럼 몸에 덧발랐던 흙먼지가 사라져 불안하기도 했다.

그때 나무문이 활짝 열리고 여인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안으로 빌튼이 들어왔다. 빌튼은 손수건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닦고는 검지로 문밖을 가리켰다.

“다 나가. 마리아는 남고.”

빌튼이 지칭한 마리아는 그리즈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매음굴로 팔려 왔던 날이 마리아 축일이었던 까닭이었다.

여인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빌튼은 인형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리즈를 보다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하얀 목덜미를 쥐었다.

“잘 들어. 오늘 너와 밤을 보내기로 한 사내가 어디의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했어. 만약 불쾌하게 만든다면 혀를 자를 거다.”

그리즈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끈하고 축축한 손바닥이 무섭도록 숨통을 압박했다.

“으흑!”

피가 갇힌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르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질척한 목소리가 귓속을 불쾌하게 간질였다.

“사실 혀를 자르기 전에 내 가랑이부터 달랠 생각이야. 뭔 말인지 알지? 곧 방으로 들어올 나으리를 실망시키면 처참한 꼴을 당할 거라는 얘기다.”

그리즈는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 쳤다.

“으읍, 놔, 놔 주세요.”

입맛을 다시던 빌튼은 자비라도 내리는 듯 목을 조르던 손을 풀었다.

“사내랑 아무리 비벼 대도 임신하지 않도록 손 써 준 걸 고맙게 생각하라고.”

몸서리친 그리즈는 1년 가까이 피임 차를 먹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빌튼이 임신할 위험 없는 성노예를 만들어 비싼 값에 팔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반년 전부터 월경이 끊겼고 이제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걸 고맙게 생각하라니. 입 안에서 서러운 호흡이 터져 나왔다.

빌튼을 쏘아봤지만 그는 가소롭다는 듯 그리즈의 뺨을 툭툭 치고는 방을 나섰다. 그리즈가 뻐근한 목덜미를 매만지며 심호흡하는데 나무 문이 삐거덕거리며 다시 열렸다.

혼미한 시야에 들어온 것은 20대 초반의 사내였다. 그는 군살 없이 마른 체형으로 키가 컸고 얼굴이 작았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상처 하나 없는 손을 보고 그가 고귀한 귀족이라는 걸 여실히 느꼈다.

아까 매음굴 앞마당에서 울고 있었을 때 마주쳤던 사내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혹시 거지꼴인 여인에게 성욕을 느끼는 이상 취향을 가진 자인 걸까….

어쩌면 여인의 울음소리에 반응한 걸지도 몰랐다. 폭력적인 성관계를 암암리에 즐기는 귀족이 아니라면 이곳을 찾을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두려움에 손발이 차갑게 식었다. 저자의 목적이 뭘까. 그리즈가 두려움으로 후들후들 입술을 열었다.

“만나 뵈어 기쁩니다, 나으리….”

가면을 벗은 사내가 방을 둘러봤다. 방에는 침대와 이인용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작은 창문을 나무판자로 막은 까닭에 빛이라고는 촛불 하나가 전부였다.

누추한 이곳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은 듯 사내가 테이블 앞 의자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았다. 움찔한 그리즈는 아닌 척하며 그를 곁눈질했다.

갈색 머리칼을 가진 사내였다. 눈썹의 결이 고왔고 눈꼬리가 살짝 아래로 처져 다정한 이미지가 풍겨 왔다.

다만 그의 눈빛은 행복한 귀족의 삶을 살았다고 보기 힘들 만큼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배고픈 이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계의 고삐를 다잡는데 사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좀 사람처럼 보이는구나.”

듣기 좋은 미성이 방 안에 울렸다. 사내를 상대해 본 적 없는 그리즈는 인형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그 모습이 적잖게 이상했는지 한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사내의 질문이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십 여분 후였다.

“머리색이 회색인가? 눈 색은?”

그리즈는 지금까지 아드리안이나 마리의 경험담을 들어왔다. 사내가 다짜고짜 달려드는 통에 온몸이 멍투성이가 됐다든지, 시체처럼 소리 없이 누워 있으라고 시키는 까닭에 소름이 끼치더라는 등의 얘기들이었다.

하지만 사내가 잠자리에 앞서 눈 색과 머리색을 확인했다더라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막연한 공포심이 커지는데 또 다른 질문이 날아들었다.

“이곳에는 언제 들어왔니.”

대답이 없자 불쾌하게 좁혀진 사내의 미간을 보고 그가 인내심이 크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긴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상대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즈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답했다.

“아홉 살… 때요.”

작은 말소리를 들은 사내가 뒤늦게 미간을 풀었다.

“다행히 말할 줄 아는구나.”

그리즈는 의아했다. 모든 걸 다 가진 귀족 사내가 미천한 여인과 말을 섞기 위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지 않을까.

그러니 다른 용건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때 고급스러운 귀족 억양이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어디서 살았지?”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런 걸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지, 월경 기간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내는 확실히 특이했다. 낯선 질문을 받은 그리즈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저, 저는….”

지금은 매음굴에 갇혀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아홉 살 때까지는 그랑디아의 공주로 살았었다. 부모님은 왕과 왕비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둘째 공주였던 그리즈는 할머니와 별궁에서 지내며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종교적인 문제를 빌미로 반란이 일어나 부모님이 이교도로 몰려 처형됐다. 언니와 남동생은 탑에 갇혀 굶어 죽었고 조부모, 친척, 사촌도 한날 갖가지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나이가 어린 그리즈는 탑에 유폐되었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참수형을 명받고 죽기 위해 그랑디아 왕궁으로 돌아갔다.

그 후 며칠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게 되었다. 목적지는 지금까지 알 수 없었다. 이동하는 도중 도적들의 습격을 받아 마차가 불타 버렸으니 말이다.

아수라장이 된 틈을 타 그리즈는 간신히 탈출했지만 한쪽 눈이 없는 도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는 울지 않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고 매음굴에 그녀를 파는 것으로 약속을 지켰다. 그 일로 하여금 그리즈는 약속할 때에는 구체적인 조건을 달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다행히 매음굴 전 주인은 마침 그곳을 깨끗이 관리할 잡역부를 구하고 있었다. 어린 그리즈는 밥을 이틀에 한 끼만 먹었고 종일 청소하며 잡역부의 빈자리를 채웠다.

매음굴 주인이 아플 때면 간병까지 자처하며 궂은일을 도맡은 덕분에 사내들을 상대하지 않을 수 있었다. 1년 전 주인이 빌튼으로 바뀌며 그 하찮은 삶조차도 바랄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저는….”

지난 11년간의 삶을 더듬어 보던 그리즈가 잠시 입술을 닫았다. 그랑디아의 공주였다는 정체를 고스란히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 그랑디아는 반란을 일으킨 타릴루치 가문이 통치하고 있었다. 전 왕의 둘째 공주가 살아 있다는 소문을 그들이 듣는다면 눈에 불을 켜고 죽이러 올 것이다. 가까스로 지키고 있는 목숨을 빼앗길까 봐 그리즈는 두려웠다.

“이곳에 오기 전의 기억은 잘 나지 않아요. 아마 머리를 크게 다쳐 기억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리즈가 이마 위쪽 머리칼 사이에 난 상처를 내보였다. 무언가에 찍힌 상처를 가만히 보던 그가 차분하게 물었다.

“가족도 기억나지 않아?”

그리즈가 서글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친이 참수되던 날 할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언니와 동생은 각각 다른 탑에 갇혀 굶어 죽었다.

“네…. 모두 죽은 것 같아요. 한 명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저를 찾으러 왔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사내는 왜인지 다행이라는 듯한 미소를 보였다. 그가 배고픈 이리가 아니라 음흉한 속내를 감춘 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처녀라며 웃돈을 받던데. 사실인가?”

돈 벌기 위해 혈안인 빌튼이라면 웃돈을 받고도 남았을 테니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그리즈는 지금껏 지문이 사라지도록 일한 덕에 지킬 수 있었던 처녀성이 그자의 배를 불리는 데에 이용됐다는 사실이 심히 분했다.

그리즈의 긴 한숨이 방 안에 아스라이 맴돌았다. 한숨 소리를 부정으로 이해한 사내가 테이블에 턱을 괴며 웃었다.

“하긴 이런 곳에 처녀가 있을 리 없을 텐데 괜한 질문을 했구나. 그럼 그동안 몇 명의 사내를 상대했지?”

“…….”

“뭐, 이젠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니… 그게 무슨 얘기일까. 허공을 맴돌던 그리즈의 시선이 사내의 얼굴에 멈췄다. 그 눈을 빤히 마주한 사내는 별안간 본론을 꺼냈다.

“내겐 조카가 있었어. 율리아나라는 아이인데 바이렌하그 대공령 숲속에서 행방불명됐지.”

“…….”

“그 후부터 지금까지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만나지 못했어. 죽었을 거라고 짐작하던 참이었는데.”

잠시 말을 멈췄던 사내가 그리즈의 회색 머리칼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널 보는 순간 내 이름을 부르며 쫓아다니던 율리아나가 떠오르더구나. 나이 차이가 세 살밖에 나지 않아서 늘 함께 시간을 보냈었거든.”

그래서 처음 보자마자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물었구나….

그가 조카를 찾으러 왔다는 걸 깨달은 그리즈가 안도감을 느꼈다. 아마 그는 조카를 닮은 여인과 잠자리하려 하지 않을 테지. 원하지 않는 첫 경험이 조금 미뤄졌을 뿐이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뒤따라오는 것은 조금의 서글픔이었다. 사내가 찾는 율리아나로 태어났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이 생활도 끝일 텐데….

불현듯 율리아나인 척해서라도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율리아나란 소녀도 어디선가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초조하게 치맛단을 쥐어짜던 그리즈가 고개 들어 사내를 바라봤다.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가족을 잃은 자의 눈을 똑바로 보며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나으리께서 찾으시는 율리아나가 아닐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 찼을 것이다. 11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멀리 떨쳐 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사내가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어째서?”

기억을 잃었는데 어째서 율리아나가 아니라고 확신하냐 묻는 것 같았다. 사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괴로울 정도로 생생하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숨 부지를 위해 꾹 삼키며 말했다.

“저는 나으리의 얼굴이 낯설거든요. 오늘 처음 본 사람처럼요.”

그 말을 들은 사내가 재밌다는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스테판 반 바이렌하그. 내 이름도 기억나지 않아?”

그리즈는 잠시 숨을 멈췄다. 바이렌하그, 바이렌하그라….

바이렌하그는 이곳에서 일하다 보면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이름이었다. 이 근방의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가문의 이름이니 말이다.

사람들은 노르드발츠의 왕가이자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인 바이렌하그가를 늘 찬양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입으로만 전해 듣던 가문의 일원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신기했다. 그리즈가 차마 고개 들지 못하고 입술을 움직였다.

“나, 나으리의 존함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설처럼 전해 들었습니다. 다만 저는 나으리의 성함이 낯설뿐더러, 완전히 처음 듣는 느낌이 들어요.”

그를 불쾌하게 만든다면 지금보다 더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몰랐다. 행여나 말실수라도 할까 봐 긴장한 탓에 눈앞이 새카매지는데 그가 원했던 답이 아니라는 듯 미간을 좁혔다.

“너는 율리아나가 맞아. 내가 보기에는.”

어쩐 일인지 그는 눈앞의 여인이 조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가문의 사람이든 그리즈의 대답은 하나였다.

“안타깝게도 저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아요. 그건 아마 제가 율리아나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왜인지 사내가 남모르는 속내를 감춘 듯 미소 지었다. 조카 찾아 헤맨다고 해서 무조건 슬픈 얼굴일 필요는 없지만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였다.

“이런 데서 일하면서도 정직할 수 있다는 게 놀랍군.”

그는 귀족 영애 자리를 탐내지 않은 여인의 정직함부터 칭찬했다. 그리즈는 긴장한 까닭에 연신 쥐고 있었던 치맛단을 더 꽉 쥐며 대답했다.

“…아니라서 아니라고 대답했을 뿐입니다.”

탐색전 하듯 묘하게 날 선 눈빛으로 지켜보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생각인 걸까. 정말 조카를 찾고 있었던 건가. 의문이 들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제대로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군. 이곳을 나가서.”

“…….”

“할머니께서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곱게 데려다줄게.”

끼익. 방문이 스산하게 울고 나서 사내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토록 바라 왔던 외출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그로부터 10분 후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리즈는 마차 타는 걸 싫어했다.

첫째로는 비좁은 공간이 답답했고, 비 오는 날이면 나무 냄새가 진하게 올라오는 게 싫었다. 마차가 사정없이 흔들릴 때는 작은 상자 속에 갇혀 뚜드려 맞는 느낌이 들어 불쾌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도적 떼에게 습격당했던 마지막 기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차 안으로 불화살이 날아들고 창문 밖의 시커먼 괴한을 보며 벌벌 떠는 꿈을 꾸곤 한다. 그래서 스테판이라는 사내와 마차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막연한 두려움으로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었다.

하지만 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런 공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보름달 아래의 반짝이는 들판, 꽃들, 나무가 너무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했다. 공주로 지냈을 때는 너무 당연해서 지나쳐 버린 풍경들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운이 나빴던 게 아니라 행운이 가득한 날이었던 것 같다. 멸문당해 매음굴에 갇혀 살았던 주제에 행운을 운운하는 게 우습겠지만….

그리즈는 율리아나가 아니라는 게 판명 나서 매음굴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는 못 볼 풍경이라는 걸 알기에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스테판이 그녀의 시선 끝을 주시하며 물었다.

“신기한가?”

그는 절경이라도 감상하듯 넋 놓은 여인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런 경치에 파묻혀 살아왔다면 당연히 그럴 테지. 머쓱해하던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 길으려 앞마당에 나온 적은 있어도 이렇게 오래도록 경치 구경한 적은 없었거든요.”

스테판은 눈썹을 살짝 가리는 자신의 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곤 하얗고 귀티 나는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말했다.

“집으로 가는 길인데 기분이 어떠니?”

부드럽게 물은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목구비가 흡사 천사 같았지만 아까 전 그의 미소 속에서 꺼림칙한 어둠을 본 그리즈는 순순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저 앵무새처럼 모르겠다고만 대답하고 있었다. 스테판은 달빛에 밝아진 갈색 눈동자로 그녀를 살피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할머니가 너를 알아본다면 집에서 계속 지낼 수 있을 거야.”

집…. 오랜만에 들어 보는 단어라 퍽 낯설었다. 반란군에 의해 멸문당하며 집을 잃게 된 후로 집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이 세상 어디에도 그리즈 베네딕트를 위한 집은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그녀는 집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원하는 건 단 하나뿐.

“저…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기를 쓰고 매음굴을 탈출하려 했던 이유가 있었다. 매음굴에서 지낸 지 3년째 됐을 무렵 한 사내에게서 희망적인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흔 살쯤의 류트 연주자였던 그는 그랑디아의 왕실에서 연주한 적이 있다고 말했었다. 이내 그녀가 그랑디아의 둘째 공주라는 걸 알아보고는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소문이 퍼질까 봐 두려웠던 그리즈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는 자신의 기억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곤 볼품없는 신세로 전락한 그녀를 가여워하며 바이렌하그에 떠도는 소문을 알려 줬다.

요하네스라는 사내가 3년 전부터 그리즈 베네딕트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좀처럼 그녀를 찾을 수 없자 여기저기 수소문해 그녀의 초상화를 비싼 값에 샀다고 했다. 초상화를 구해 준 예술품 상점이 바이렌하그 성당 옆에 있으니 찾아가 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즈의 기억 속에 요하네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는 없었다. 그렇지만 전쟁통에서 살아남은 친척이나 아버지의 추종자가 요하네스라는 가명을 썼던 건지도 모른다며 희망을 가졌다.

요하네스란 사내를 찾아 살아 있다는 소식을 알리고 그랑디아의 정세를 묻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에… 바이렌하그 성당에 들르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부탁이지만 조심스러웠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왼쪽 눈꺼풀을 검지로 긁으며 물었다.

“성당에는 왜?”

그리즈는 다시 창밖을 보며 자연스레 둘러댔다.

“그곳의 경치가 좋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귓가에서 픽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어.”

“…….”

“장담하지.”

그 후로 조금 더 달렸다. 노란 달빛을 받아 금물결처럼 출렁이는 풍경이 익숙해질 무렵 마차가 멈췄다.

창문으로 밖을 살짝 내다보자 드높은 철문이 앞을 가로막은 게 보였다. 옆에는 경비병의 초소가 있었다. 마부가 무어라 얘기하자 경비병이 마차 안의 스테판을 보고는 문을 열라고 손짓했다.

묵직한 굉음과 함께 집채만 한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이내 마차가 안으로 들어섰다.

철문 앞에는 마구간이 있었다. 그 앞에서는 말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돌길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담소를 나누며 걸어 다니는 중이었다. 그들을 훑어보던 그리즈는 네모난 구역마다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밭을 보다가 풍경 전체를 둘러봤다.

수백 평이 족히 넘는 평지에 터 잡은 나무와 꽃이 아름다운 향취를 풍겼다. 고풍스러운 대저택은 곳곳에 크고 작게 자리 잡고서 저마다의 운치를 뽐내고 있었다. 저택 너머에는 달빛을 받은 호수가 금물처럼 넘실거리는 중이었다.

그리즈는 경치를 구경하러 바이렌하그 성당까지 갈 필요 없다고 스테판이 장담한 이유를 깨달았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과 금물결 같은 호수 그리고 꽃밭이 어우러진 이 저택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이곳은….”

마차가 대저택 앞에 다다랐을 때쯤에야 경치에 홀렸던 정신을 차렸다. 스테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바이렌하그 대공저에 온 걸 환영해.”

연신 흔들리던 마차가 멈췄고 문이 열렸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집사와 하녀가 다소곳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

“돌아오셨군요, 탈스바그 후작 각하.”

스테판이 검은 로브를 벗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내 계단을 쉽게 내려올 수 있도록 그리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흡사 귀족 여인을 대하듯이.

“내려오거라.”

당황하던 그리즈는 스테판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뱀처럼 차가운 손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때였다.

“다들 그만 물러가.”

먼저 저택으로 들어간 그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 로비 옆쪽 복도 끝 방에 도착했다.

“율리아나가 쓰던 방이야. 할머니께 말씀드리고 올 테니 편히 쉬고 있거라.”

그는 방문을 선뜻 열어준 후에 다시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그리즈는 방을 조심스레 둘러봤다. 열 살 남짓한 소녀가 썼던 것 같았다. 침대맡에는 봉제 인형 두 개가 놓여 있었고, 창가 앞 테이블에는 자수 판이 있었다. 창틀에는 이름 모를 하얀 꽃이 크리스털 꽃병에 꽂혀 있었다.

“와.”

아득하고 깨끗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 그동안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곳에 와 있었다.

하지만 스테판이 말한 할머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랑디아 공주로 지냈을 시절의 기억이 맞다면 그 할머니는 바이렌하그의 큰 어른인 파올라 바이렌하그일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힘없는 여인을 자처하지만 일찍이 전장에서 사망한 남편을 대신해 명석한 두뇌로 가문의 명성을 지킨 인물. 그런 인물을 속이고 어떻게 손녀 행세를 할 수 있을까. 어차피 바라지 않는 일이니 다행인 걸까.

그리즈는 창가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벌레들의 울음이 듣기 좋게 번졌다.

새벽마다 난무하던 교성에 묻혀 잊고 살아온 소리였다. 어떻게든 연명하다 보니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에 다시 와 보게 되는구나…. 어쩌면 신께서 작은 선물을 주신 걸지도 몰랐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스테판이 들어왔다. 그는 마차를 타고 오래 이동한 까닭에 꽤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할머니께서 막 잠자리에 드셨다더군.”

“…….”

“오늘은 이곳에서 자도록 해.”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침대를 흘끗 본 그리즈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에 보름달이 신비롭게 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봄꽃으로 풍요로운 정원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고, 정원 앞 나무 단상도 그윽한 운치를 풍기고 있었다.

단상 양옆에는 건장한 성기사들이 갑옷 입은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을 살피던 그리즈는 단상 위에서 성서를 들고 서 있는 주교를 바라봤다. 그리즈의 뒤에 서 있던 스테판이 상황을 부드럽게 설명해 줬다.

“출정식을 준비 중이야. 기사단이 샤토로 출정하거든. 오늘.”

마침 젊은 사내가 순백색의 로브를 걸치고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머리는 진한 흑발이었고 피부는 창백했다. 팔다리가 긴 덕분인지 걸음걸이가 미끈했다.

오랫동안 매음굴에서 천태만상을 겪어온 그리즈는 외모만 보고도 사내들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신께서 공들여 조각한 듯한 느낌을 주는 사내를 본 건 처음이라 비교해 볼 정보가 없었다. 옆에서 그를 소개하는 말에 귀 기울일 뿐이었다.

“비아누트가 나왔구나. 곧 네 오라버니가 될 사내지.”

“…….”

“네 운이 따라준다면.”

그리즈는 무어라 반응하지 못하고 흑발 사내만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나긋나긋한 미성이 이어졌다.

“세상 모든 여인이 원하는 사내기이기도 하지. 이 대공령의 주인인 바이렌하그 대공이거든.”

그리즈는 티 나지 않게 숨을 멈췄다. 바이렌하그 대공. 바이렌하그 대공 비아누트….

그랑디아의 공주로 지냈을 때 그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었다. 언제였었지…. 회상하려는 순간, 단상 양옆에 서 있던 성기사들이 존경을 표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바이렌하그 대공이 그들을 지나쳐 고결하게 단상에 올랐다. 기다리고 있던 사제가 대공의 순백색 로브를 벗겼다.

그러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사내의 육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쇠갑옷의 무게를 거뜬히 버틸 수 있도록 발달한 몸이 보였다. 큼직한 가슴 근육을 확인한 그리즈의 동공은 갈 곳을 잃었다.

가슴이 이유를 알 수 없이 두근거린다. 갈증이 닥친 것처럼 입안이 바싹 마르기도 했다. 대공의 반라를 보는 게 벅차, 창유리로 시선을 돌렸다.

“어때, 뭐 기억나는 건 없어?”

창유리에 비친 스테판의 얼굴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마치 그녀가 기억을 떠올리고는 율리아나라고 주장해 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리즈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딱히 그럴 만한 이유가 없지 않나.

수상한 느낌이 드는 때 비아누트라는 사내가 사제 앞에 무릎 꿇었다. 이내 두 손을 펴서 손바닥을 내보이자 사제가 성수로 그의 손을 씻겨 주기 시작했다.

비아누트라는 사내는 겸허히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깨끗하고 선명하기 때문인지 달빛을 받은 옆얼굴이 너무나도 근사하게 느껴졌다.

홀린 듯이 그를 보던 그리즈는 매음굴에서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바이렌하그 대공은 막강한 권력을 갖췄고 결점 없는 외모를 타고났지만 이상하게도 여인을 멀리한다고 한다.

추측은 두 가지였다. 그가 유일신의 독실한 신자라서 부인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순결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거나, 여인을 안는 게 불가능하거나.

매음굴에서 뒷담화를 즐기던 천박한 사내들은 대공이 후자에 속하기를 바라는 속내를 보였다. 그 바람이 이뤄진 건지, 항간에는 바이렌하그 대공이 성숙한 육체에서 갈구하는 욕구를 전장에서 살인으로 푼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그리즈는 소문의 진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저렇게 막강한 권력을 가졌고 건장한 사내가 종교 때문에 순결을 지키고 있을 리 만무하지 않나. 정말 불능이 아니라면 남모르게 여색을 탐해 왔겠지. 지금껏 겪어온 매음굴의 사내들처럼.

모르는 사이 경치보다 사내에게 관심을 쓰고 있었다. 그리즈는 젊은 대공의 외모가 지나치게 우월한 까닭이라고 생각하며 스테판의 말에 집중했다.

“어렸을 때 바이렌하그에 역병이 돌았어. 어머니는 후계자로 거론되던 나를 이곳에서 키웠고 비아누트는 대주교에게 맡겼지.”

과거를 떠올리는 스테판은 오래 묵은 적대감을 풍겼다.

“웃기게도 나는 별 볼일 없이 자랐고 비아누트는 대주교의 신뢰를 얻었어. 그 덕분에 주교회와 성기사단의 신임까지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대공이 되었지.”

스테판이 비아누트라는 사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아누트라는 사내가 대공이 된 걸 견제하는 건가.

그리즈가 창에 비친 스테판의 얼굴을 살폈다. 불만스러울 줄 알았던 그의 얼굴에 왜인지 새카만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지금은 기사들에게 존경받는 지휘관이자 군주로 자리매김했어. 노력한다면 네게도 큰 힘이 되어 줄 테지.”

왠지 대단한 가문의 딸인 율리아나로 살아 보는 건 어떻냐고 유혹하는 듯했다. 진심인 걸까? 대체 왜? 그리즈가 망설이던 끝에 물었다.

“무얼 노력하면요?”

스테판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리듯 입김을 길게 불어 넣으며 대답했다.

“율리아나가 되려고 노력하면.”

먼지 한 톨 없던 유리창에 하얀 김이 서렸다. 그리즈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정면을 내다보려고 노력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율리아나가 필요하신 건가요?”

스테판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뿌옇던 유리창이 서서히 투명해졌다. 사방이 꽉 막힌 상자 속에 갇힌 느낌이 사라지며 정원의 전경이 훤히 드러났다.

그 순간 바닥에 닿아 있던 비아누트의 시선이 그리즈의 얼굴을 주시했다. 동틀 무렵의 새벽처럼 새파란 눈동자였다. 새벽의 고요함과 성스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덕분에 그리즈는 까맣게 잊었던 새벽의 풍경을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풀벌레의 노랫소리, 주인을 그리워했던 늑대개, 달빛을 머금은 새들의 날갯짓이 기억을 거슬러 올라왔다.

지난 11년간 죽은 것 같았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과거의 향수에 젖었기 때문인지, 사내의 특별한 눈동자에 반응한 건지.

사내는 금세 흥미를 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사제가 순백색 로브를 그의 몸에 걸쳐 주고는 손에 묻은 성수를 닦아 줬다. 그가 하얀 면포만 하반신에 두른 탓에 큼직한 복근이 스멀거리는 광경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리즈는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모르는 사이 허벅지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그동안 남녀가 뒤엉켜 난교를 벌이는 걸 봐도 담담했었는데 뭐가 다른 걸까. 신을 모신다는 사내의 몸이 필요치 않게 관능적인 까닭에 놀랐을 뿐일까.

당황하는 찰나 등 뒤에서 재밌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뒤늦게 스테판의 존재를 깨달은 그리즈가 나무 바닥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는 단지… 돌아가는 길에 바이렌하그 성당에 들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리즈는 지난 8년 가까이 요하네스라는 사내를 만나는 순간을 그리며 살아왔다. 가짜 율리아나가 되어 이 저택의 아름다운 풍경과 정원 그리고 젊은 대공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저는… 율리아나가 아니니까요.”

스테판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 속에서 무언가가 풍겨 왔다. 매음굴에서 몸을 파는 주제에 진실을 지키려 하는 여인에 대한 우스움, 그 고고함을 꺾고 싶은 욕구 같은 것들. 애초에 그는 매음굴 창녀가 율리아나일 리 없다고 확신했던 눈치였다.

그렇다면 혹시 다른 속내를 숨기고 있는 걸까. 그리즈는 찐득하고 촘촘한 거미줄에 걸린 듯한 착각을 느끼며 스테판을 주시했다. 그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방을 나섰다.

“바이렌하그 성당에 데려다줄게. 네가 율리아나가 아니라는 것만 확실하게 확인하고서.”

“…….”

“잘 자렴.”

끼익. 늘 그랬듯 문은 밖에서 닫혔다.

한참을 서 있던 그리즈는 11년 만에 침대 위에 올라앉았다. 편히 잠을 청할 수는 없었다. 율리아나의 봉제 인형들이 구석을 차지하고 있어 침대가 좁았고, 한쪽 눈이 터진 토끼 인형의 모습이 괴이하기도 했다.

누운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철문이 육중하게 열렸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리즈의 눈동자에는 말 탄 기사들이 대열을 맞춰 나가는 광경이 맺혔다.

스테판의 얘기로는 오늘 사내들이 출정한다고 했다. 그러니 저들은 지금 적군을 죽이러 가거나, 혹은 죽으러 가는 중일 것이다. 그들의 갑옷 어깨에 각인된 십자가에서 신의 눈물이 흐르고 있지 않을까. 아마도.

상념에 빠져 있을 무렵 검은 말을 탄 사내가 기사들과 합류했다. 새벽처럼 검은 머리색을 보고 그가 바이렌하그 대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수백 명 가까운 사내 중에서 유독 그만 보였다. 남들보다 작은 얼굴과 넓은 상체를 살피던 그리즈가 심장 부근을 매만졌다.

소문으로 전해 들은 그는 육체관계를 성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그러니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지금껏 아래에 딱딱하게 뭉친 욕정을 풀기 위해 혈안인 사내들만 봐 왔으니까.

무엇보다도 어렸을 적 그와 인연이 있었기에 비아누트라는 이름이 익숙했다. 그랑디아에서 그리즈의 정혼자를 구했던 시기에 바이렌하그 가문이 정혼 의사를 밝혀 왔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군사력과 재력을 두루 갖춘 명문가의 구혼을 반가워하면서도 생각이 많았다. 만약 왕위를 물려받을 그리즈의 남동생이 죽는다면 그랑디아가 바이렌하그 가문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심하던 아버지는 바이렌하그 가문이 그랑디아를 탐내는 거라고 결론 내리고 내심 불쾌해하셨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친서를 쓰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즈 베네딕트는 자상하고 가정적인 사내와 혼인하고 싶어 하니 과묵하기로 유명한 바이렌하그의 장남과는 혼인시킬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리즈는 속상해하며 어머니에게 항의했다. 바이렌하그의 장남이 친서의 내용을 알게 되면 슬퍼할 것 같았다. 서로가 정혼할 수 없는 이유가 그의 과묵한 성격 탓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친서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니 미안해할 것 없다고 대처했다. 그러곤 그리즈에게만큼은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고 싶다며 가능한 한 연애결혼을 시키고 싶어 하셨다. 사랑하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데일 듯 뜨겁고 닳는 것처럼 아린 감각을 느껴 봤으면 좋겠다면서.

하지만 그리즈는 다른 사람을 상처 주고서 사랑을 꿈꿀 수 없었다. 바이렌하그의 장남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몇 날 며칠을 앓았다.

물론 지금은 그때의 미안했던 마음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바이렌하그의 비아누트는 그때의 일을 모두 잊었고 지금은 아주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정작 가여운 사람은 그리즈 베네딕트 아닌가. 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나 바이렌하그의 장남 못지않은 권세를 누렸지만 지금은 천민 신분으로 추락해 버렸지 않나. 그랑디아의 콧대 높은 공주가 창녀 낙인을 달고 나타났다는 걸 알면 그는 어떤 얼굴로 비웃을까….

그가 철문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리즈는 침대에 누웠다.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기에 오래도록 뒤척였다. 새벽이 저 멀리 떠나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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