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40화
나는 빠르게 그녀를 쫓다가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멈춰 서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았다.
나는 모른 척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딜 가십니까, 부인.”
그러나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에 모든 것을 눈치챈 듯, 그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봤어요?”
“……미안합니다.”
나는 대화를 엿들은 것과 그 싸움에 제때 끼어들어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순순히 사과했다. 이미 모든 것을 간파한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내게 왜 사과를 하는 거냐고 되물으며 가볍게 웃더니, 곧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그런 거 아니에요. 이제 와서 새삼 언니의 그런 말에 상처받지 않아요. ……그리고.”
“……?”
“봤잖아요? 결국은 내가 이겼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 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개선장군 같기도, 또 장난꾸러기 요정 같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또다시 반하고 말았다. 그저 요정이나 천사처럼 청순하게만 보였던 그녀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그녀를 홀린 눈으로 바라보며 마주 웃은 채 말했다.
“맞아요. 부인께서 이기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 말입니다.”
“……!”
“대단하십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달싹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멋쩍게 입꼬리를 내렸다.
아무래도 순수하게 그녀를 칭찬하고 싶었던 마음이 잘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말주변이 부족해 그렇게밖에 칭찬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시지요!”
그렇게 어색한 공기가 감돌던 그때, 황제가 앨버튼 공작과 다른 가신들을 이끌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황족들과 귀족들을 돌아보며 짧은 인사말을 건네는 황제의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살폈다. 모여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는 것이, 아무래도 나와 그녀를 찾는 듯 보였다.
“그건 그렇고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펠릭스 공작과 그의 새 신부는 어디에 있지?”
역시나 나와 그녀를 찾는 말에 나는 그녀와 함께 황제의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긴장한 듯 보이는 그녀와 함께 황제에게로 나아가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황제는 그런 우리를 내려다보더니 그녀에게 고개를 들라고 명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황제의 모습에 나는 슬며시 인상을 썼다. 지금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그녀를 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황제의 웃음기 가득한 말에 슬쩍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서, 아무래도 이번 신부는 부끄럼을 많이 타는 듯하군.”
“예, 그러니 너무 짓궂은 말은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
“하하! 아직 정식으로 축복 선언도 받기 전인데, 벌써부터 그리 살뜰히 챙기는 것인가? 아무래도 이번에는 짐이 중매를 잘 선 모양이군.”
그러자 황제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이젠 숨기지도 않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황제의 시선에 덜덜 떨며 내 팔을 꼭 쥐는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하하하! 이리 열렬한 두 사람에게 한시라도 빨리 축복을 내려 줘야 할 것 같군. 앨버튼 공작! 어서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게! 이왕이면 얼른 후계자가 생기는 축복도 내려 주면 좋을 듯하네!”
“알겠습니다, 폐하. 당장 거행하겠습니다.”
다행히 황제는 곧 그녀를 향한 집요한 시선을 거두었고, 제 곁에 서 있던 앨버튼 공작에게 ‘축복의 주문’을 내릴 것을 명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축복의 주문을 받고 한 번의 춤을 추고 나면 드디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나는 천천히 단상을 내려와 나와 그녀의 앞에 선 앨버튼 공작을 무심히 응시했다.
“아서 펠릭스 공작, 그리고 그레이스 펠릭스 공작 부인은 축복의 성서 위에 손을 올리시오.”
나는 별 효과도 없는 빌어먹을 주문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앨버튼 공작의 말에 따라 그녀와 함께 성서 위로 손을 돌렸다.
그러자 경건하게 두 손을 올린 앨버튼 공작이 좌중들을 향해 선언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
그런데 주문이 이어질수록 내 옆에 있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나는 연신 곁눈질로 그녀와 앨버튼 공작을 살폈다. 뭔가 일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황제의 명령 아래 치러지는 의식을 함부로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주문이 이어질수록 점점 더 사색이 된 채 온몸을 떠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빠르게 고민을 멈추었다.
그녀가 저렇게 괴로워하는데, 황제의 명령이고 신성한 주문이고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내 손 아래 포개진 그녀의 손을 붙잡아 성서에서 떼어 내며 앨버튼 공작을 향해 말했다.
“멈춰 주십시오, 앨버튼 공작.”
“……!”
동시에 사색이 된 채 떨고 있던 그녀가 평정을 되찾았다. 다행히 주문이 멈추자 조금은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내가 한시름 마음을 놓은 그때, 앨버튼 공작이 노성을 터트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펠릭스 공작! 축복의 의식을 멈추다니요.”
나는 앨버튼 공작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앨버튼 공작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제 안사람이 이리 떨고 있잖습니까.”
그 후, 나는 땀에 젖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는 놀란 듯 내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나는 이번만은 놓아주지 않았다. 혹여 나의 저주가 그녀를 향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보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지탱해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나는 높은 단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황제를 향해 말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아무래도 축복의 의식은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어째서?”
의식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는 나에게, 황제는 그 이유를 물었다.
나는 혹시나 황제가 이번 파티에 레온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추궁하면 대응하고자 준비했던 거짓말을 술술 털어놓았다. 지금 레온과 그녀가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는, 흔하고도 검증하기 어려운 핑계를 말이다.
다행히 그녀가 내 거짓말에 순순히 맞춰 준 덕분에 황제는 그 거짓말을 믿는 듯했다. 나는 황제가 그만 물러나도 좋다는 말을 꺼내기를 기대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군. 확실히 짐이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는 않아 보이는군. 펠릭스 공작, 당장 황의를 데려오도록 할까?”
“황의를 부를 정도는 아닙니다. 회복약을 먹이고 좀 쉬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다행이로군. 짐은 또 이 파티의 당사자가 첫 번째 춤도 추지 않고 돌아가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건 아닐까 염려했지 뭔가.”
그런데 내 기대와 달리, 황제는 첫 번째 춤을 언급하며 나와 그녀를 붙잡았다.
‘빌어먹을.’
아무리 파티의 주인공이 첫 번째 춤도 추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 큰 무례라지만, 설마 아프다는 그녀에게 춤을 요구할 줄은 몰랐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일단 안심시킨 후, 또다시 황제에게 그럴듯한 거짓말을 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일은 힘들겠지만, 첫 번째 춤을 추지 못할 만큼 위중하진 않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그럼 의식은 이쯤에서 중지하도록 하지.”
“배려 감사합니다, 폐하.”
첫 번째 춤은 출 수 있다고 대답하자, 다행히 이번에는 황제가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나는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파티를 즐기라고 소리치며 분위기를 전환하는 황제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다시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의 말소리로 소란스러워진 연회장을 뒤로한 채 그녀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그녀를 편안한 곳에 앉힌 후, 땀을 닦으려 손을 뻗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또다시 말을 맞춰 줘서 고맙습니다. 나는 부인의 앞에서 늘 거짓말만 하게 되는군요.”
“천만에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절 신경 써서 그렇게 거짓말하신 거잖아요.”
“몸은 좀 어떻습니까? 식은땀이 멈추지 않는 것 같은데……. 아직도 많이 아픈 거라면 첫 번째 춤도 추지 않는 게…….”
나는 여전히 안색이 창백한 그녀를 살피며 그리 물었다. 만약 그녀가 춤을 출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결례를 무릅쓰더라도 이대로 그녀를 마차에 태울 생각이었다.
어차피 저주를 부르는 괴물 공작이라 불리는 내게 더 지킬 평판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나중에 황제가 지금의 결례를 문제 삼는다면 그때 가서 내가 처벌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묻는 내게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죠. 황제께서 친히 베푸시는 파티에서 멋대로 축복의 의식을 중단한 것도 큰 무례인데, 첫 번째 춤마저 추지 않겠다 할 수는 없잖아요.”
“정말 괜찮습니까? 역시 진찰을 받아보는 게…….”
“아니요. 전 정말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나는 연신 괜찮다는 듯 웃으며 나를 안심시키는 그녀의 모습에 몰래 짧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 혹시 무리하는 건 아닐까. 만약 내 입장 때문에 그녀가 무리하는 거라면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고집스러운 그녀의 표정에 나는 더 이상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계속 곁에서 지켜보다가 힘들어 보이면 그때 끼어들면 되니까.’
그때의 나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상비약을 가져오고자 몸을 일으켰다.
* * *
다행히 약을 먹고 잠깐 쉬자 그녀는 금방 기력을 되찾았다. 나는 집정관을 시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악단에게 신호를 보내는 황제의 모습을 멀리서 확인했다.
그 후,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감히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부인.”
지금 내 목소리는 그녀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혹시, 듣기 싫게 떨리진 않았을까.
나는 정중히 손을 뻗어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기를 주저했다.
아, 역시 나와 춤추는 것이 싫은 걸까.
하긴, 괴물이라 불리는 나와 춤을 추어야 하는 게 그녀에게 기꺼울 리가 없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꼴사납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그때, 그녀가 마치 큰 결심을 한 듯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더니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저기, 공작님. 미리 사과드릴게요.”
“네? 그게 무슨…….”
“사실 저, 무도회에 참석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서요. ……게, 게다가 왈츠는 언니가 배울 때 몰래 곁눈질로 배워서 스텝이 엉망일 거예요.”
“그래서요?”
“……발 조심하시라고요. 아마 제가 수없이 공작님 발을 밟아 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