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37화
나는 그녀의 다정한 말을 차갑게 밀어냈다.
“……굳이 나까지 챙기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축하받아야 할 날도 아니고요.”
“왜, 왜요?”
그런데, 그녀가 당황하며 되묻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물음에 꼴사납게도 화가 났다. 아마도 친절한 그녀는 선친의 불행한 죽음과 그 이후, 나를 따라다니는 잔인한 저주 때문에 단 한 번도 생일을 축하 받아 본 적이 없는 내 처지를 그저 순수한 마음에 동정해서 되물은 것뿐이리라.
하지만, 그런 동정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도 이루어져서도 안 되는 그녀를 향한 내 마음에 괜한 희망만을 품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헛된 희망에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이미 그 욕심의 대가가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정한 그녀를 향해 일부러 모진 말을 쏟아 냈다.
당신의 친절은 갈증으로 죽어 가는 자에게 바닷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당신에겐 별 의미 없는 호의일지라도 나는 태풍에 휘말린 나무처럼 휘청거리고 만다고. 그러다 내가 주제넘는 욕심에 눈앞이 흐려져서 당신이 죽든, 미치든,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면 어쩔 거냐고.
나는 그렇게 다정한 그녀를 향해 꼴사납게 화풀이를 했다. 그 후,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망토를 벗어 주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와 내가 별채를 나왔을 때부터 줄곧 뒤따르던 기사들이 조용히 나를 뒤쫓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나 대신 그녀를 지킬 것을 눈짓으로 명하며 곧장 동쪽 탑으로 향했다. 아마, 오늘도 잠을 이루기는 힘들 것 같았다.
* * *
그날 밤 이후,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녀를 보면,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욕심이 날 것 같아서였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하여 나는 일부러 더욱 집무실과 훈련장에만 틀어박혔고, 틈만 나면 영지 시찰을 핑계로 펠릭스 성을 나갔다.
그렇게 며칠을 피해 다녔을까.
그날도 변함없이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던 나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그녀와 레온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열어 둔 창가로 걸어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곳에는 올리버 경과 레온,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
그토록 피해 다녔건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무너져 버린 스스로를 비웃으며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을 홀린 듯 눈에 담았다.
그렇게 산책을 하며 다정히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 레온의 한마디가 내 귀에 날아와 꽂혔다.
“올리버, 나 형수님이랑 산책할 거니까 잠시 자리 좀 피해 줘.”
“네?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곁에서 볼게요.”
지금 레온, 저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는 호위도 없이 그녀와 단둘이서 산책을 하고 싶다고 조르는 레온과 기꺼이 아이의 고집을 들어 주는 그녀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기사들이 기척을 숨긴 채 성 곳곳에 숨어 있는 밤과는 달리, 지금은 낮이라 대다수의 기사는 훈련장이나 성곽에 나가 있었다.
그런데, 호위마저 무르고 둘이서만 산책하겠다니.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쩌려는 건지. 나는 레온의 고집과 그녀의 승낙에 순순히 물러나는 올리버 경을 노려보다 곧장 집무실 밖을 나왔다.
그러고는 그녀와 레온, 둘뿐인 정원으로 가서 몰래 두 사람을 호위할 생각으로 기척을 숨기려던 그때였다.
“앗, 형님!”
하필이면 채 기척을 숨기기도 전에 나를 발견한 레온이 반갑게 소리치고 말았다.
나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레온에게 어색하게 손을 한번 들어 올리며 슬쩍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 또한 나와 마주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는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입매를 굳히고 있다가 달려오는 레온의 모습에 표정을 풀었다.
“집무는 다 끝나신 거예요, 형님?”
“그래. 급한 건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
“그럼 저랑 형수님이랑 같이 산책해요, 형님!”
나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산책하자며 매달리는 레온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레온을 바라보느라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이어진 레온의 말에 어색하게 굳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뭐, 당연했다. 내가 그녀라도 열등감에 꽉 찬 모진 말을 퍼붓고 가 버린 괴물 따위와 나란히 산책은커녕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
나는 굳어 버린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레온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제안은 고맙지만, 레온…….”
“……안 되나요?”
“나는 괜찮지만, 부인께서 불편해하실 거다.”
내가 부드럽게 돌려 제안을 거절하자, 레온이 울상을 지었다.
하여, 나는 솔직하게 내 심정을 이야기했다. 안전을 위해 두 사람을 지켜볼 생각으로 내려온 것일 뿐, 그녀를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자 레온이 이번에는 그녀를 돌아보며 같이 산책을 하자고 졸랐다. 아이가 어리광을 피우며 보채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곧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야, 레온. 불편하지 않아.”
“그럼 형님이랑 형수님이랑 같이 산책할 수 있어요?”
“……응? 그, 그래. 하자. 산책.”
“우와! 감사합니다!”
그녀의 승낙에 레온은 방방 뛰며 기뻐했고, 그녀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다정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는 어색하게 서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레온의 채근에 별수 없이 그 곁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산책은 역시나 나와 그녀에게 한없는 어색함만을 안겨 주었다.
이런 나와 그녀의 기분을 알 리 없는 레온은 왼쪽에는 내 손을, 오른쪽에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마치 이 순간이 꿈만 같다고 소리쳤다.
나는 선친이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해맑게 웃는 그 모습에 줄곧 어색하게 굳어 있는 표정을 풀고 편안히 미소 지었다.
“으앗!”
“어머! 레온!”
그러던 그때, 신나게 걷던 레온이 갑자기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 순간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아이를 받고자 먼저 바닥으로 무너지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그 후, 나는 다급히 그녀와 레온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두 사람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도 나지 않았다.
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꺅!”
“……잠깐 그대로 계십시오. 버둥거리면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나는 내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는 그녀를 달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발이 안전하게 땅을 디딘 것을 확인한 후에야 팔에 힘을 풀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부인?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레온도,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네, 전 괜찮아요, 형님.”
내 물음에 레온은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명한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넘어지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가 난 건 아닐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의 행동에 많이 놀란 모양인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허둥지둥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어색하게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내가 끌어안았던 것이 그녀에게는 당혹스럽고 불쾌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내가 싫은 걸까.’
나는 쓴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함부로 제가 부인의 몸에 손을 댄 것 때문에 놀라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어쩔 수 없었잖아요.”
나의 사과에 그녀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믿긴 어려웠다.
“…….”
나는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쓴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다물었고, 그녀 또한 더 이상 나에게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정원 반대편에서 나를 찾는 올리버 경과 그녀를 찾는 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올리버 경을 보자마자 호위를 수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무섭게 질책한 후, 샐리에게 그녀를 찾은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샐리, 무슨 일로 부인을 찾은 거지? 이 사람에게만 전해야 할 말이 있는 거라면, 난 이만 자리를 피하도록 하지.”
“아뇨. 아닙니다. 이번에 마님께 고하고자 하는 것은 공작님께서도 아셔야 하는 일이랍니다.”
내 물음에 샐리는 붉은 비단에 쌓인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성혼 축하 파티, 라.
‘빌어먹을.’
나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지금껏 나와 연을 맺은 영애들이 성혼 축하 파티에 다녀온 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면서 또 이따위 파티를 주최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물론, 앨버튼 공작의 축복 마법은 효과가 무척이나 강력해서 그가 축복을 내린 부부는 모두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단 한 사람, 나만 제외하고.
나는 결혼식을 마친 지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 굳이 시간과 돈을 들이면서까지 내게는 아무 소용 없는 축복을 내려 주겠다며 파티를 열겠다는 황제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아 빈정거렸다.
“……부인과의 결혼식 이후 벌써 일주일이 넘게 지났다. 그런데 이제 와서 축하 파티라니, 폐하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군.”
“폐하께 각하는 각별한 신하이자 친척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 결혼도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축복이라. 과연 진심으로 내 결혼을 축복하고자 하는 자리인지 의문이로군. 분명 그곳에 참석한 황족과 귀족들은 나와 부인을 두고 뒤에서 신나게 떠들어 댈 텐데 말이지. 과연 앨버튼 경의 축복 주문이 이길까, 아니면 내 저주가 이길까 하면서.”
“가, 각하! 그, 그런 말씀은!”
내 말에 올리버 경은 사색이 되었지만, 나는 도저히 삐딱해진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축복? 축하 파티?
말만 그럴듯하지 결국은 나와 내 아내 된 자를 그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노골적인 조롱과 값싼 가십으로 소비하라고 던져 주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에서의 공훈으로 제국 내 세력을 넓힌 내가 감히 황제의 권력을 넘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짓밟아 두려는 황제의 정치적 계산 또한 숨어 있었다.
나는 혹여 이 저택에 황제의 첩자가 숨어 있어서, 조금 전 내 발언을 듣고 나를 불경죄로 황제에게 밀고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올리버 경을 향해 덧붙이듯 말했다.
“농담이라네, 올리버 경. 나 또한 폐하께서 이 불쌍한 신하이자 외사촌을 조롱하기 위해 그런 자리를 만드실 리 없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