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36화
어느덧 해가 지고, 펠릭스 성에는 긴 밤이 찾아왔다.
나는 그녀와 헤어진 후, 곧장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선물 받은 목걸이를 자랑하러 온 레온과 시간을 보내고는 다시 훈련장과 집무실을 오가며 일에 매진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급한 일을 끝낸 나는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나는 잠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저택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순찰하기로 마음먹고 집무실을 나왔다.
먼저 동쪽 별관을 한 바퀴 돈 나는, 곧장 그녀가 지내는 별채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레온이 지내는 곳으로 갔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그쪽으로 발이 움직였다.
나는 어둠이 내려앉은 별채 주변을 돌다가 슬쩍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별채를 지키는 기사와 눈이 마주쳐서 그에게 조용히할 것을 지시한 뒤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는지 살폈다.
그러던 그때, 위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혹시 수상한 자가 별채에 침입한 것은 아닐까 싶어 신경을 곤두세우며 기둥 뒤에 숨어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잠시 후, 계단을 내려온 사람은 수상한 사람이 아닌 그녀였다.
두꺼운 코트에 부츠까지, 완전히 외출 준비를 끝마치고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와 닫힌 문을 미는 그녀에게 다가가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부인.”
“……꺅!”
그러자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꼭 눈밭에서 놀다가 어미에게 들키고 만 아기 토끼 같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나의 시선이 불편했던 모양인지 미간을 찌푸리곤 날카롭게 물었다.
“……혹시 절 감시하고 계셨던 건가요?”
그 물음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솔직하게 순찰 중이었다고 말하자니 역시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냐며 그녀가 벌컥 화를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잠깐 고민한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 핑계를 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집무를 보던 중 발소리가 나서 나와 봤을 뿐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해 놓고도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동쪽 탑에서 별채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어떻게 집무를 보는 중에 그녀의 인기척을 듣고 올 수 있었겠는가.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면 그녀는 이미 별채 밖으로 나간 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또한 많이 당황한 모양인지 나의 거짓말을 있는 그대로 믿고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건넸다. 그러더니 어색하게 웃고는 별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순간, 나는 그 모습이 꼭 그녀가 이 저택에서 도망치려는 건 아닐까 싶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급히 그녀를 추궁했다.
“조금 전 내 물음에는 답해 주지 않는 겁니까?”
“네?”
“분명 나는 조금 전 이 시간에 어딜 가시는 거냐고 물었을 텐데요.”
“……아. 잠이 안 와서 산책이나 좀 하다 들어가려고요.”
산책? 이 시간에?
나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 늦은 시간에 심지어 혼자, 샐리나 몸을 지켜 줄 기사도 없이 눈 내리는 정원을 산책하겠다니.
하여 나는 짧게 한숨을 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혼자 산책할 수 있다고, 따라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나로서는 그 모습에 더 의구심을 품게 됐다. 펠릭스 성의 정원이 수도의 야시장처럼 볼 것이 많거나 사람이 많은 곳도 아닌데, 굳이 혼자 가겠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 정말로 이 저택을 떠나 도망칠 생각인 걸까? 나는 그녀 몰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 마음이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그녀를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핑계를 댔다.
“수도와 달리 펠릭스 성은 밤만 되면 온갖 맹수들과 마물들이 출몰하는 곳입니다. ”
“……네?”
“특히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면 먹이가 부족해진 그들이 밤이 되길 기다렸다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잦죠. 물론, 내 저택 안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내 정원에서 깨진 비석들과 망가진 수풀들을 보셨을 텐데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그 핑계는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밤만 되면 온갖 맹수들과 마물이 출몰하는 것은 맞지만, 마물과 맹수는 매일 밤 불침번을 서는 펠릭스 기사들에 의해 안전하게 퇴치되고 있었다. 즉, 그녀 혼자 산책을 나가도 별문제는 없을 거란 소리다.
하지만 어쩐지 그녀가 이대로 도망쳐 버릴 것 같다는 정체 모를 불안감과 그녀와 함께 산책하며 오늘 낮에 보았던 레온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욕심으로 나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내 의도와는 달리 그녀는 낭패라는 듯 인상을 찡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냥 안 나갈게요.”
그때, 나에게 있어 그녀의 말은 명백히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다.
괴물인 나와는 산책은커녕 잠깐 눈을 맞추는 것도, 몇 마디 말을 섞는 것도 싫다는 것처럼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 나는 다소 삐딱한 말로 그녀에게 비아냥거렸다.
끝까지 혼자 나가겠다는 그녀와 몇 마디 실랑이를 나누다 결국 먼저 포기한 내가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겠다고 하자, 그녀는 이번에도 기겁하며 나를 말렸다. 그러더니 내 망토 끝을 붙잡으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됐어요. 다른 사람들까지 전부 깨우는 건 싫으니까요. ……같이 가 주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가면 아래 가려진 눈을 부드럽게 휘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그녀의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자꾸만 들뜨는 기분을 억누르며 그녀보다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 * *
그 후, 나는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을 그녀와 거닐었다. 그녀는 줄곧 아무런 말이 없었고, 나 또한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기에 그녀와 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나는 혹여 그녀가 내 시선을 느끼고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몰래 그녀를 바라보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닿을 때면 눈을 피하길 반복했다. 정말이지, 막 기사가 된 십 대 소년이 그때의 나보다는 능숙하게 숙녀를 대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와 나 사이에 감도는 불편한 침묵을 즐기면서도, 또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조금 안달이 났다. 이대로 아무 말 없이 함께 걷는 것도 좋았지만, 기왕이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전쟁터에 섰을 때보다 더욱 긴장한 채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오늘 낮에, 레온에게 생일 선물을 주셨다고요.”
내 말에 그녀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어떻게 안 거냐고 물었고, 나는 작게 웃으며 은근슬쩍 말을 돌리다 곧 솔직히 고백했다. 내가 동쪽 탑 창문에서 줄곧 지켜보았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자 그녀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그녀의 긴 은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레온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친절히 대해 줘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네?”
“부인으로부터 목걸이를 받았다고, 내 집무실로 달려와서 자랑하며 웃는데……. 그렇게 기뻐하는 얼굴은 처음 봤습니다. 그 아이에게 그런 미소를 짓게 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때의 나는 어떤 목소리로 말을 했더라.
아마도 아주 꼴사납게 떨리고 있었으리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금 멍한 표정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별말 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미숙한 소년처럼 귀 끝을 붉히며 또다시 주절주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집무실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가 부인인 것을 알고 나온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 감사의 인사는 내 입으로 직접 전하고 싶어서요.”
“…….”
“……부인?”
그렇게 나는 두서없는 말을 내뱉으며 오롯이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혹시 그녀가 내 거짓말을 간파한 것은 아닐까, 혼자 찔려서 여전히 멍한 그녀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양 뺨을 붉게 물들이며 후다닥 뒷걸음질을 치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니요. 레온이 가진 그 레드 다이아몬드에 비하면……. 벼, 별것도 아닌걸요.”
“그 녀석에겐 그 레드 다이아몬드만큼 부인께서 주신 그 목걸이도 똑같이 소중할 겁니다.”
“아, 하하. 그, 그런가요? 그것참 기쁜 일이네요. ……내, 내년에는 더 좋은 걸로 선물해 줘야겠네요.”
“……내년에도 말입니까?”
“네, 내년에도요. 아, 그 전에 공작님의 생일은 언제죠? 혹시 공작님의 생일도 레온 공자처럼 겨울인가요?”
나는 이어진 그녀의 다정한 말에 마치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내년, 그리고 나의 생일.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 두 단어를 언급한 순간, 나는 지금껏 들떠 한껏 부풀어 오른 내 마음에 누군가 바늘을 꽂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과연 그녀가 내년까지도 무사히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을까. 그때도 이렇게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내게 말을 걸어 줄까. 그리고, 레온에게 그러했듯 내게도 다정한 목소리로 생일을 축하해 줄까.
그때의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꿈속의 꿈같은 행복한 미래를 언급하며 웃는 그녀에게 나는 가슴이 아릴 만큼 기뻤고, 딱 그만큼 마음이 아팠다.
나는 온 마음이 꽉 차오르는 그 모순뿐인 감정의 정체를 그때 자각했다.
이렇게 기쁘고 또 아픈 마음의 이름.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나로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미래를 나도 모르게 그리며 설레고, 끝끝내 그 미래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자각하며 아파하는 이 마음의 이름.
처음 본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모습과 나와 꼭 빼닮은 레온을 보듬는 다정한 모습을 또 보고 싶어서, 감히 찾아갈 용기는 내지 못한 채 그녀가 정원으로 산책을 나오길 기다리며 틈날 때마다 창밖을 내다보게 되는 한심한 마음.
그 모든 것이 그녀를 향한 사랑이었음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그 마음을 접어야만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다가가면, 이 아름다운 사람은 내 저주에 의해 죽거나 미치고 말 테니까.
그 잔인한 진실은 내가 그녀를 향한 감정을 자각한 순간 찾아와, 이미 뿌리를 내린 그녀를 향한 사랑을 모질게 짓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