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34화
“신랑, 아서 그레이엄 펠릭스 경은 그레이스 마리 앨버튼을 신부로 맞아 평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이어 교황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혼인 서약문을 읽을 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혼인 서약을 거부하고 그녀를 놓아주어야 할까? 그래서 이 천사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지켜 주어야 할까?
그러나 나의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본 순간, 내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악마 같은 욕심이 내게 속삭였다.
지금 내가 혼인 서약을 거부한다고 해도, 이 결혼이 무산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놓아준다고 해도, 황제는 지금껏 그래 왔듯 또다시 다른 영애를 신부로 삼으라며 내게 들이밀 것이다.
또한, 이미 나와 예물을 주고받고 결혼식장까지 온 그녀 또한 최악의 경우, 영영 다른 혼처를 찾지 못해 수도원에 감금되듯 보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굳이 거부해야 할까?
그 마음속 악마의 속삭임에, 결국 나는 굴복하고 말았다.
“……네.”
“그렇다면 신부 그레이스 마리 앨버튼 양은 신랑, 이서 그레이엄 펠릭스를 신랑으로 맞아 평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한 후, 나는 곧 그녀에게도 혼인 서약을 묻는 주교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했다. 조금 전, 나를 보고 두려워했던 그녀였다. 혹시 서약을 거부하고 결혼식장을 뛰쳐나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에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나올 대답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그때, 그녀가 짧게 심호흡을 내뱉더니 곧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선언하듯 대답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나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도망치지 않겠다’는 그녀의 눈빛이, 이 순간부터 ‘괴물 공작’인 내 신부가 되겠다는 그 목소리에 내 마음속 악마가 다시 고개를 들어 간교하게 혀를 놀려 댔다.
이제 저 아름다운 사람이 네 아내라고.
그러니, 욕심을 내 보라고.
하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 누가 자신을 죽거나 미치게 할 사람을 진심으로 아껴 줄까. 그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자꾸만 치솟아 오르는 악마 같은 욕심을 잔인하게 짓밟고, 또 짓밟았다.
* * *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나와 그녀는 곧장 펠릭스 성으로 갈 채비를 했다.
원래대로라면 신부 측 가문에서 하루 머물고 갈 것을 권했을 테고 신부 또한 그러겠다 했겠지만, 그녀와 앨버튼 공작가 모두 그럴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는 분주히 그녀의 짐을 옮기는 앨버튼 공작가의 시종들과 시녀들을 무심한 눈으로 살피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던 그때, 웨딩드레스를 벗고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걸어 나왔다. 나는 성당 벽에 줄곧 삐딱하게 기대 있던 몸을 황급히 떼어 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놀란 듯 말했다.
“……미안해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짧게 대답한 후, 몸을 돌렸다.
원래라면 그녀를 에스코트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나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나를 보기만 해도 그토록 놀라고 두려워했던 그녀에게 내 손을 만지는 일이란 아마 벌레가 얼굴에 달라붙은 것만큼이나 불쾌한 일일 테니 말이다. 또한, 그런 나와 함께 한 마차를 타고 가는 것도 그녀에겐 끔찍하게 싫은 일이리라.
그래서 나는 나와 그녀를 위해 준비된 마차 대신 그녀와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타고 온 내 마차에 올라탔다.
이후, 나는 그녀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자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 * *
나와 그녀를 태운 마차는 꼬박 반나절을 달려 펠릭스 성에 도착했다. 내 마차는 그녀를 태운 마차보다 먼저 도착했고, 나는 마차에서 내려 그녀의 마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내가 곁에 다가서는 것도 싫을 테지만, 그렇다고 마차에 내리는 부인을 에스코트도 하지 않을 만큼 예를 모르는 무뢰배 남편으로 그녀에게 기억되고 싶진 않아서였다.
이윽고, 그녀를 태운 마차가 내 성에 도착했다. 나는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마차로 다가가는 마부를 제지하고 그녀의 마차로 다가갔다.
잠시 후 마차 문이 열리고, 나는 내가 자신의 마차 앞에 서 있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눈을 한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부디, 손을.”
그러자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선뜻 내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에 놀란 것은 나였다. 분명 결혼식장에서 나를 보고 괴물을 마주한 양 두려워하던 그녀가 선뜻 내 손을 잡아 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매정하다 싶을 만큼 그녀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 그리고,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나의 행동에 기분이 상한 모양인지 그녀의 아름다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는 무심코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네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차라리 이런 오해가 쌓이고 쌓여서 자연스레 나와 멀어지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나와 가까워지면 내 저주는 또다시 그녀를 향할 테고, 그녀에게 결국 불행을 안겨 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자꾸만 그녀를 신경 쓰고, 그녀에게 뭔가 말을 붙이고 싶은 마음을 무시하고 또 무시하며 천천히 그녀를 별채로 안내했다.
잠시 후, 그녀를 위해 준비한 침실 앞에 멈춰 선 나는 그 문을 열고 손짓했다.
“……여기가 바로 앞으로 부인께서 기거하게 될 침실입니다.”
“……어머나.”
그러자 나를 따라오던 내내 어색한 표정이던 그녀가 침실 안에 들어서곤 놀라움이 번진 표정으로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수도에서 살던 그녀가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하고자 최대한 유행을 따라 침실을 꾸몄는데,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해 줄지 모르겠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 네.”
내 물음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꼭 썩 마음에 들지 않는데 내 눈치를 보느라 억지로 대답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샐리에게 맡길 게 아니라, 수도에서 사람을 불러올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그만 머쓱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뭐, 침실이야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꾸며 줄 수 있으니 그건 됐다. 나는 침실을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확인한 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제 나의 역할은 다했다. 즉, 그녀를 위해 저주받은 괴물은 이만 그녀의 침실을 떠나야 했다. 아니, 앞으로 영영 멀어져야 했다. 그래야만 그녀가 내 인생을 좀먹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녀가 궁금해할 법한 것들을 사무적으로 물은 후에 그녀를 향해 말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부인이 상상하는 그런 일은 아마 절대로 없을 겁니다.”
“……네? 제가 상상하는 일이라뇨?”
“오늘 밤도, 내일도, 앞으로도 영원히. 괴물과의 끔찍한 첫날밤 같은 것은 평생 없을 거라는 소리입니다.”
“……네?”
“즉, 내게 달라붙은 저주가 부인께 향할 일은 없다는 소리죠.”
그래. 내 저주가 당신을 향할 일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부터 당신과 손끝 하나라도 닿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므로.
나는 할 말을 잃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이 아름다운 얼굴을, 기꺼이 나와 눈을 맞춰 주는 녹색 눈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니까.
나는 자꾸만 마주 보고 싶어지는 그녀의 눈에서 애써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펠릭스 영지의 내정에 대한 간섭, 그리고 내 동생 레온에 대한 부당한 학대. 이 두 가지 말고는 부인께선 이 성 안에서 무엇이든 해도 좋습니다.”
“……무엇이든지요?”
“어차피 사랑 없이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에 서로 부부의 의무 같은 것을 강요할 마음, 내겐 없습니다. 연인이든, 사치든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가 나 때문에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물며 그것이 이 은빛 요정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로 인해 평범한 부부가 누리는 안식과 행복을 평생 누리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런 것은 괴물인 나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니까.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다 했습니다. 그럼 이제 마음 편히 쉬세요.”
그 후, 나는 그녀를 두고 침실을 나왔다.
내 뒷모습을 좇는 그녀의 조금은 멍하게 느껴진 시선에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면서 말이다.
* * *
다음 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동쪽 탑에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고 일어난 나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그간 결혼을 준비하느라 돌보지 못한 성내 집무가 산더미였다. 나는 기사들에게 회의는 오후로 미룰 것을 지시한 후, 홀로 집무실에 틀어박혀 양피지 서류들을 하나하나 읽고 결재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줄곧 서류만 보고 있느라 답답해진 나는 집무실 옆 큰 창문 앞으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집무실 안의 훈훈한 공기를 단숨에 식힐 만큼 차가운 바람이 한가득 쏟아졌다.
나는 창가에 기대 눈으로 온통 새하얗게 덮인 비밀 정원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복잡해진 머리를 식혔다.
“…….”
그러던 그때, 누군가 비밀 정원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곧바로 그들이 샐리와 바로 어제 나와 결혼식을 올린 그녀, 그레이스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두꺼운 코트를 입고 뽀얀 숨을 내뱉는 그녀를 눈으로 좇았다.
그녀는 발목을 덮을 만큼 많이 내린 눈과 뽀얗게 흩어지는 입김이 신기한 모양인지 연신 호호 입김을 불며 눈이 높게 쌓인 정원에 발자국을 찍듯 걸어 다녔다.
그 모습이 꼭 태어나 눈을 처음 본 토끼 같아서, 나도 모르게 슬쩍 웃으며 창가에 대놓고 턱을 괸 채 기댔다.
머릿속으로 안 된다고, 얼른 창문을 닫고 밀린 집무를 해결하러 가라고 소리쳤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마음속 악마가 나에게 속삭였기 때문이다.
곁에 머무르며 말을 섞는 것은 못 해도 이리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큼은 괜찮지 않냐고, 보는 것뿐인데 저주가 걸리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악마는 나를 유혹했다. 그리고 어리석고 욕심 많은 나는 간단히 그 설득에 넘어갔다.
그렇게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창가에서 그녀를 관찰했다.
나는 추위를 타는 그녀를 위해 차를 내오려는 모양인지 별채 쪽으로 뛰어가는 샐리와 그로 인해 혼자 남은 그녀를 눈으로 지켰다.
만에 하나 북쪽 숲의 마물이 비밀 정원으로 들어와 그녀를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핑계 아닌 핑계를 늘어놓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