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32화
제국 수도의 북쪽 끝에 있는 3관문. 수도의 젖줄인 아이엔 강과 나루터를 끼고 있어 수도와 제국 각 지방 사이에서 물자가 오가는 요충지이기도 한 그곳은 언제나 상인들과 시민들로 북적였다.
그 분주한 사람들 사이, 수수한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걸친 금발의 남자가 어깨에 작은 짐을 짊어진 채 관문을 걸어 나왔다. 터덜터덜, 힘없이 걸으며 연신 성안을 돌아보는 그의 처연한 모습에 관문을 지나는 젊은 처녀들이 그를 흘끔거리며 수줍은 얼굴로 작게 소곤거렸다.
그러던 그때, 3관문 안에서 그처럼 낡은 옷을 걸친 중년의 사내가 그에게 달려왔다. 그러더니 다급히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전하!”
“로쉬 백작.”
그 남자, 오웬은 자신을 붙잡은 로쉬 백작을 향해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자 로쉬 백작이 안쓰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 거칠어진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
“글쎄. 지금은 어디든 괜찮겠다는 생각뿐이야. ……나를 살려 주는 대가로 황위 계승권까지 헌납한 부황을 생각해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지.”
“……전하.”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말게. 나는 이제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니까. 하물며, 귀족도 아니지.”
오웬은 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로쉬 백작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회한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아득히 높은 수도의 3관문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죽을 때까지 돌아올 수 없는 수도의 풍경을 마지막까지 눈에 담아 가고 싶어서였다.
‘사실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이제 그녀는 자신이 감히 바라볼 수조차 수 없을 만큼 높고 고귀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는 죽음은 점점 그의 젊은 몸과 영혼을 좀먹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만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숨 쉬듯 자연스럽게 누렸던 부와 권력도, 끝까지 비겁했던 자신의 마음과 앙금처럼 남은 미련도, 모두 다.
오웬은 쓴웃음을 지으며 로쉬 백작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제 그만 돌아가게. 해가 지기 전에 국경을 넘어야 해서, 한시가 급해.”
“……부디, 마지막까지 건강히 지내십시오.”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리하겠네.”
오웬은 로쉬 백작을 향해 그렇게 말하곤 천천히 수도를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로쉬 백작은 혹시 그가 다시 뒤돌아보며 눈인사라도 건네지 않을까, 너무 멀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하지만, 오웬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긴 겨울이 지나고 조금씩 언 땅이 녹고 새싹이 돋아나는 봄. 몇 달간 주인이 자리를 비운 펠릭스 성에 드디어 공작 부부가 돌아온다는 서신이 전해졌다.
무사히 모반에 성공한 후, 괴물 공작이라는 오명마저 벗어던진 성의 주인을 맞기 위해 펠릭스 성의 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축제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성안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눈을 쓸거나 천으로 만든 색색의 꽃으로 집을 장식했고, 펠릭스 저택에 딸린 시종들과 시녀들은 음식을 만드는 등 저택을 단장하기 바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펠릭스 공작 부부가 돌아오는 날 아침. 펠릭스 영지는 그들을 위해 성도의 곳곳에 펠릭스 가문을 상징하는 검은 매가 그려진 장식을 달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수도에서 출발해 무사히 펠릭스 영지로 접어든 화려한 마차 안에 타고 있던 그레이스는 살짝 열어 놓은 창밖으로 보이는 검은 매 장식에 감탄하며 아서에게 물었다.
“이게 전부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시민들이 만든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게다가 눈도 보이지 않고……. 신기해요. 처음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여기까지 흰 눈이 가득 쌓여 있었던 데다 길조차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황량했는데 말이에요. 뭐랄까, 전에는 요새 같았다면 이젠 사람 사는 곳 같아졌어요.”
그레이스는 창문에 매달린 채, 바뀐 성의 모습에 대한 감상을 연신 늘어놓았다. 아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다정히 바라보다 곧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옆에 앉히며 말했다.
“앞으로 더 많이 발전할 겁니다. 이전의 펠릭스 성은 괴물 공작의 성이었지만, 지금은 제국 황제의 고향이 되지 되었으니까요.”
“그러게요. ……그렇겠네요.”
그 말에 그레이스는 살포시 웃으며 자신을 안아 주는 아서의 어깨에 기대, 창밖으로 지나가는 펠릭스 성의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빠르게 성도를 통과한 마차는 펠릭스 성의 중심부에 있는 저택에 도착했다. 그레이스는 눈에 익은 저택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반가움에 벅차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리고 잠시 후.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그 곁으로 집사장, 로버츠가 다가와 마차의 문을 개방하더니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긴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기쁩니다. 각하. 마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저택에 별일은 없었나?”
“물론입니다.”
아서는 자신의 앞에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로버츠를 향해 간단히 펠릭스 성의 근황을 물으며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 후, 아서는 도열한 자신의 기사들을 잠시 돌아보곤 마차 안에 있는 그레이스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내 손을 잡고 내려오세요.”
“고마워요.”
그레이스는 기꺼이 아서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가장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샐리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각하. 어서 오세요, 마님. 그동안 수도에서 고생 많으셨죠?”
“오랜만이군, 샐리.”
“샐리. 잘 지냈어?”
“저는 더없이 잘 지냈답니다. 마님께서 계시지 않아, 할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 여유도 오늘로 끝이야. 앞으로 아주 바빠질 예정이거든.”
“어머. 기대할게요, 마님.”
그레이스는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샐리와 몇 마디 실없는 농담을 나누며 즐겁게 웃었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아서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별채 쪽에서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아서는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여전히 샐리와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는 그레이스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부인.”
“네?”
“저기 좀 보세요.”
“네? 뭘요? ……어머!”
별채 쪽을 가리키는 아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그레이스는 곧 그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그곳에는 한껏 다급한 얼굴로 기사들에게 뭐라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레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레이스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다. 이대로 그냥 모른 척 기다릴까? 아니면, 먼저 아이에게 달려가 볼까.
짧은 고민을 끝낸 그레이스는 저 멀리서 달려오는 레온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레온! 여기야!”
“형수님! 형님!”
그러자 그레이스의 목소리를 들은 레온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더 빨리 두 사람의 앞으로 달려왔다. 이어 꼭 붙어 서 있는 아서와 그레이스의 다리를 두 팔로 꽉 끌어안으며 매달려 왔다.
아서는 애교 많은 강아지처럼 자신들에게 달라붙은 레온을 번쩍 안아 시선을 맞추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냈니, 레온?”
“네, 형님! 형님께서도 잘 지내셨어요?”
“그래. 난 변함 없이 잘 지냈다만, 너는 좀 달라졌구나. 못 본 사이에 키가 많이 큰 것 같은데?”
“와, 어떻게 아셨어요? 그동안 3센티나 컸어요!”
아서는 자신의 품에 안겨 발랄하게 대답하는 레온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던 그레이스는 슬쩍 손을 뻗어 아이의 맨얼굴을 쓰다듬었다.
“정말 많이 컸다, 레온. 이러다 몇 년 후엔 공작님보다 더 커지겠는걸?”
“진짜요?”
“그럼! 앞으로 잘 자고, 잘 먹고, 선생님들 말씀 잘 들으면 충분히 가능해!”
“……글쎄요. 레온은 몸을 움직이는 것도, 검술 훈련을 받는 것도 싫어해서, 나보다 더 커지긴 어렵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형님! 아, 앞으로 검술 연습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
“네! 저도 형님처럼 북쪽 숲의 마물 토벌에도 나가고 싶으니까, 이제부터 열심히 훈련에 매진할 거예요! 토어 경도 그러라고 했어요!”
레온은 작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호언장담했다.
그런 레온의 말을 들은 아서와 그레이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색해졌다. 두 사람은 마치 짠 듯이 곤란한 시선을 교환했다.
마치 말을 고르는 듯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는 아서의 품에 안긴 레온과 시선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레온. 아무래도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아.”
“네? 왜요? ……제가 약해서요? 훈련 받는 걸 싫어해서요?”
“그게 아니라, 이제 앞으로 우린 수도에서 살게 될 거거든. 그래서 마물을 토벌하는 건 이제 다른 기사님이 하게 될 거야.”
“……수도요?”
자신이 약해서 안 된다는 줄 알고 순간 울상을 짓던 레온은 이어진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레이스는 그런 아이의 뺨을 양손으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래. 모두 함께 수도에서 살게 될 거야.”
“……음.”
“……레온은 싫어?”
그레이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레온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물론이고 말없이 레온을 안고 있던 아서의 표정 또한 심각해지려던 찰나, 레온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다 함께 살 수 있으면 어디든 좋아요.”
“몇 년 후, 마물 토벌에 나갈 수 없게 되어도 말이냐?”
“네. 저는 사실 마물을 토벌하고 키가 형님만큼 커지는 것보다, 두 분과 함께 있는 게 더 좋아요.”
“……그렇게 대답해 줘서 고마워, 레온.”
레온의 대답에 감동을 받은 그레이스는 아서의 품에 안겨 있는 레온을 덮듯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갑작스레 아서와 그레이스의 사이에 마치 샌드위치처럼 끼인 신세가 된 레온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레이스는 몸을 들썩이며 웃는 아이의 머리에 얼굴을 기댄 채, 마주 웃으며 자신을 다정히 내려다보는 아서와 시선을 교환했다.
아직 이번 반란을 도왔던 귀족들과 로이엔느 공작과 공과를 배분하는 문제를 포함해 골치 아픈 일들이 수도 없이 남았다. 그뿐인가. 수도로 가면 또 어떤 골치 아픈 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일들을 겪으면서 어느 날은 깔깔거리며 웃고 싶을 만큼 즐겁고, 어느 날은 가슴을 치고 울고 싶어질 만큼 슬픈 날이 수없이 찾아올 터다. 아니, 어쩌면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되짚어 보아야 할 만큼 힘든 날들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을 목숨 걸고 지켜 주는 사랑하는 남편 아서와 귀여운 레온이 자신의 가족이었기에.
그 어떤 일들이 찾아와도 얼마든지 극복해 낼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진심으로 생각하며 아서와 레온의 가면을 쓰지 않은 볼 위로 각각 가벼운 입맞춤을 내렸다.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