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30화
“……그래서 그들은 내 아내를 납치했고, 또다시 흉측한 살인을 저지르고자 했소. 나는 진짜 ‘괴물’로부터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고 싶었고, 허망하게 목숨을 잃어버린 이들의 억울함을 알리고 복수하고 싶었지. 그게, 내가 군사를 일으킨 가장 큰 이유라오!”
“……그렇다는 건, 지금껏 펠릭스 공작가에서 일어난 모든 불미스러운 일이 전부 황제 폐하와 앨버튼 공작의 꾸민 일이라는 것입니까?”
이윽고 아서가 말을 끝맺었을 때, 줄곧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하던 펜드라 후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물음에 아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펜드라 후작.”
“……믿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그런……. 아무리 황태자 전하를 위해서라고 해도 그렇지, 어찌 충성스런 신하의 자식들을 희생시키고 그 일을 공작님께 뒤집어씌웠단 말입니까!
……사실 폐하께서 펠릭스 공작 부인을 사로잡은 것도, 공작 부인께서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것 아닙니까? 지금껏 모두에게 공명정대하셨던 폐하께서 그런 짓을 벌이셨다니, 저는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
펜드라 후작의 말에 황족들과 귀족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아서의 해명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레이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해요. 저도 공작님과 결혼하기 전엔 펠릭스 공작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펠릭스 가문에 내려오는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말은, 펠릭스 공작과 결혼한 후엔 그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셨단 말입니까?”
“네. 그래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황제와 앨버튼 공작이 날 저주하고 살해하려 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레이스는 천천히, 그들에게 자신이 그동안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물론, 자신이 회귀한 일과 아서가 가진 힘, 그리고 자신이 황제와 앨버튼 공작을 따돌리고 목숨을 건진 일에 대해선 적당히 함구한 채 결혼식에서 저주를 받은 일과 그 후에 겪은 이상한 일들, 아서가 성을 비운 사이 독에 당한 일에 대해서 자세히 털어놓았다.
“마, 말도 안 돼…….”
그러자 황족과 귀족들이 더욱 시끄럽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인즉 그레이스가 털어놓은 이야기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목격했던 이전 펠릭스 공작 부인과 그의 약혼녀들이 보였던 증상과 비슷했고, 또 그들로선 납득할 수 없었던 이상 증상에 대해 그레이스가 납득할 만큼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씩 그레이스의 설명에 설득된 이들이 하나둘 늘어날 때쯤, 그녀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믿을 수 없다면, 직접 확인하게 해 주겠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펜드라 후작의 물음에 그레이스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은 후, 아서를 돌아보았다. 저들을 설득하던 중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아서의 옆으로 다가가 뭐라고 귓속말을 건넸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녀가 말하기 쉽도록 상체를 숙인 채 이야기를 듣던 아서의 얼굴에도 그녀와 똑같이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서는 귓속말을 끝내고 기대 있던 몸을 떼는 그레이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황족들과 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 아침, 예정대로 황태자 전하를 위해 교황청에서 준비했던 ‘검증’을 진행하겠어요. 또한, ‘저주’라는 명목으로 무고한 영애들의 목숨을 앗아 갔던 황실과 앨버튼 공작의 재판 또한 진행할 거예요.”
“……그러니까, 종교 재판을 열겠다는 겁니까?”
“맞아요. 이미 이번 일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교황청 소속의 신관들과 서쪽 탑의 마법사들이 앨버튼 공작을 조사 중이에요. 아마도 내일, 늦어도 사흘 안엔 모든 진상이 드러나게 되겠죠.”
그레이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 모두 저택과 영지로의 귀환을 며칠 더 늦춰 주길 부탁드릴게요.”
그 말에 모두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황궁을 점령한 펠릭스 공작의 뜻에 감히 반기를 들 수 없는 분위기도 있었겠으나, 그보다는 진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더 큰 듯했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본 후, 자신만을 다정히 내려다보고 있는 아서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내가 너무 일을 크게 벌인 건 아니죠? 좀 전엔 정말 묘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을 꺼내 놓고 보니 괜히 일을 크게 키운 건 아닌가 싶어요.”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모든 걸 투명하게 공개하는 편이 저들의 의혹을 더 빨리 잠재울 수 있겠죠. 또한, 다시는 황제와 앨버튼 공작의 후손들이 복위하지 못하게 쐐기를 박아 둘 수도 있고요.”
“……그런가요?”
“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그럼 다행이고요.”
근심 어린 얼굴로 걱정을 쏟아 내던 그레이스는 아서의 격려에 조금 마음을 놓았다. 아서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숙여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야말로 다행입니다. 이리 현명하신 분이 제 부인이셔서요.”
“……무,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늘 언제나 내가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 고려하고, 한 수 앞을 내다보는 부인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아서.”
“그러니, 언제든 좋은 생각이 나면 그게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선하고 올바르며 현명한 당신의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앞으론 의견을 제시할때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애정과 신뢰로 가득한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는 양 볼을 붉히며 괜히 투덜거렸다. 이렇게 말해 주는 그가 고맙기도 했고, 또 쑥스럽기도 해서 그랬다.
아서는 그레이스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그녀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현명한, 그리고 완벽한 이 사람이 조금 더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 *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후, 다음 날 새벽.
황궁의 북쪽에 위치한 신전 예배당에서 펠릭스 공작의 주도 하에 황태자에 대한 ‘신의 검증’과 ‘마법사 재판’이 열렸다.
전날, 펠릭스 공작의 서신을 받고 입궁한 교황과 대신관 두 명의 배석 하에 치뤄진 그 재판의 방청석에는 그레이스의 제안으로 그간 수도에 머문 황족들과 귀족들이 가득했다.
방청석의 가장 앞 열에는 이 검증과 재판을 주도한 아서 펠릭스 공작과 그의 아내, 그레이스 펠릭스 공작 부인이 자리했다.
“위대한 초대 신의 이름으로 재판을 거행하겠소.”
교황이 엄숙히 개정할 것을 선언하자 예배당의 왼편에서 신관들과 마법사들이, 오른편에서는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황제와 황태자, 앨버튼 공작이 걸어 나왔다.
교황은 그들을 차례차례 돌아본 뒤, 먼저 예배당 왼편에 선 신관들과 마법사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전 황제 알렉센드르 클라이브와 황태자 에우제니우스 클라이브, 그리고 피츠제럴드 앨버튼에 대해 조사한 것에 대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분명하고 또 자세히 고하시오.”
“예, 교황님.”
“명심하겠습니다.”
교황의 지시에 흰 예복을 입은 신관과 회색 로브를 쓴 마법사가 증언을 시작했다.
그들은 펠릭스 공작의 주장대로, 펠릭스 공작가에서 벌어진 모든 불미스러운 일이 다 황태자의 피에 흐르는 ‘초대 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황제와 앨버튼 공작이 꾸민 거대한 음모임을 담담히 증언해 냈다.
또한, 그들은 앨버튼 공작이 그 과정에서 악마의 힘을 빌렸으며 황실은 지금껏 그것을 묵인해 왔다는 것까지 밝혔다.
회색 로브를 쓴 마법사이자 피츠제럴드 앨버튼 공작의 6촌인 대마법사, 메이라 스뮈르나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증언을 이어 나갔다.
“전 황태자 에우제니우스 클라이브 님의 몸에 깃든 것은 초대 신의 저주로, 그 저주를 벗는 것은 평범한 마법과 신성력으로는 불가합니다. 즉, 신의 ‘힘’에 속하는 마법과 신성력으로는 그 저주를 풀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랬기에 피츠제럴드 앨버튼은 본인의 마법력을 이용해 신에게 대적한 자인 ‘악마’와 계약하였고, 그로 인해 해법을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앨버튼 공작의 목에 새겨진 저 마법진입니다.”
“……메, 메이라! 네가 감히, 은혜도 모르고!”
“정숙하시오, 피츠제럴드 앨버튼!”
그녀의 증언에 앨버튼 공작이 벌컥 성을 내며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 행동은 펠릭스 기사단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교황은 그런 앨버튼 공작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본 후, 다시 메이라를 향해 물었다.
“그럼 증인은 전 황제 알렉센드르 클라이브와 그 아내 마리아 클라이브, 그리고 황태자 에우제니우스 클라이브 또한 그 모든 사실을 알고 묵인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메이라의 대답에 재판장 안은 순식간에 수군거림으로 소란스러워졌다. 교황은 의장봉을 두드리며 소란을 멈춘 후, 다시 메이라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피츠제럴드 앨버튼 전 공작이 악마에게 ‘저주’를 푸는 대가로 지급하기로 한 것이 무엇인지도 아는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전 앨버튼 공작의 목에 새겨진 마법진의 문양을 유추해 보자면……. 아마도 그 대가는 인신 공양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대답에 교황이 겨우 진정시켰던 재판장 내 분위기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황족들과 귀족들은 헛숨을 들이켜며 예배당 오른쪽에 앉은 세 사람을 노려보며 수군거렸다. 교황 또한 적잖이 놀란 모양인지 굳은 얼굴로 그 세 사람을 노려보았고, 황제와는 그 시선에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또한, 재판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이번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아서와 그레이스 역시 메이라의 증언에 놀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저주를 걸고, 진작 죽었어야 할 황태자의 목숨을 이어지게 한 그 강한 힘이 그런 흉측한 대가로 얻은 것일 줄은 몰랐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돌려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판장에서 유일하게 뻔뻔한 표정을 한 채 메이라를 쏘아보는 앨버튼 공작을 노려보았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어.’
그리고, 어떻게 저리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레이스는 자신이 저런 사람의 피를 이었다는 것에, 그리고 저런 사람에게 사랑 받기를 원하다 비참하게 죽었던 첫 번째 생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저절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국, 분노와 슬픔을 참을 수 없어진 그레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당을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