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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127화 (127/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27화

앨버튼 공작이 조급함과 광기가 서린 형형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잡아끌며 벨리알에게 소리쳤다.

“벨리알! 다시 기척 차단 마법을 걸어!”

“당장은 안 돼! 의식을 치르고자 본체의 마력까지 긁어서 써 버렸다고!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린단 말이야!”

“빌어먹을! 여태 받아먹은 게 얼마인데 쓸모가 하나 없잖아!”

벨리알의 말에 앨버튼 공작은 욕설을 내뱉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기척 차단 마법이 끊어진 것은 고작 몇 분이었는데, 그사이 펠릭스 공작이 자신들을 발견할 줄 미처 몰랐다.

‘젠장, 젠장――!’

앨버튼 공작은 속으로 온갖 저속한 욕설을 내뱉으며 다급히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했다.

저 영악 무도한 펠릭스 공작 놈과 그의 기사들을 상대하기엔 자신과 벨리알, 마리안느의 마력이 부족하고 무력 또한 형편없었다. 게다가 이쪽에는 도움은커녕 짐만 되는 늙은 황제와 황후까지 딸려 있었다.

‘저 쓸모없는 늙은이들 대신 로쉬 백작이나 트리스탄 경이 있었더라면 한층 도망치기 수월했을 텐데! ……아니지, 애초에 황태자 놈이 재빨리 제물의 심장을 찌르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그랬다면 그 즉시 황태자는 저주에서 벗어났을 테고, 그레이스와 목숨이 연결된 펠릭스 공작마저 죽어 버렸을 테니 지금처럼 자신들이 쫓길 일도 없었을 터였다.

앨버튼 공작은 자신의 완벽한 계획을 망쳐 버린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러던 앨버튼 공작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악한 묘안이 떠올랐다.

‘그래, 그러면 돼!’

앨버튼 공작이 벨리알을 향해 물었다.

“벨리알, 굳이 황태자가 직접 제물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어야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해 보니 방법이야 어떻든 황태자의 몸에 제물의 피만 쏟아지게 하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뭐, 그렇지.”

“그럼, 내가 제물의 심장을 찔러도 된다는 소리로군?”

앨버튼 공작의 말에 오웬과 그레이스를 제외한 모두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앨버튼 공작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 딸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폐하, 황후님! 황태자 전하를 제물의 앞에 바짝 붙여 세우십시오! 그리고 레지나, 마리안느! 두 사람은 제물의 팔을 붙잡아!”

“알겠네!”

“알겠어요,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지시에 황제와 황후, 앨버튼 공작 부인과 마리안느는 재빨리 그가 말한 대로 움직였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강하게 붙드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곧 등에 서늘하게 닿는 칼날의 감촉에 그만 몸을 굳히고 말았다.

그레이스는 황태자를 붙잡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자신을 붙잡은 어머니와 언니를 차례로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자신의 등에 검을 겨누고 있는 앨버튼 공작을 향해 말했다.

“날 죽인들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요? 이미 수도는 내 남편이 점령했고, 황제파 귀족들 또한 내 남편의 기사단에게 참패해 복속된 상태이니 황태자가 저주를 벗게 되더라도 다시 예전과 같은 권력을 누릴 순 없을 거라고요!”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뭐라고요?”

그레이스의 일갈에 앨버튼 공작은 사악하게 낄낄거리며 대꾸했다.

“네가 죽는 순간, 그 저주받은 공작 놈도 함께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되면 지휘관을 잃은 군대는 일순간 혼란에 빠지겠지? 그럼, 그사이 나와 벨리알은 마법사들을 동원해 이 제국을 장악하면 돼.”

“……이 끔찍한! 그렇게까지 해서 얻은 권력에 무슨 의미가 있죠?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신이, 당신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당신을 용서할 것 같아요? 이제 모두가 당신의 악행을 다 알게 되었다고요!”

“킬킬, 상관없어. 감히 내게 반항하는 것들은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너처럼!”

그레이스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마지막까지 앨버튼 공작에게 외쳤지만, 지금껏 자신이 꾸민 모든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반쯤 정신을 놓아 버린 앨버튼 공작에게 그 설득이 먹힐 리 만무했다.

그레이스는 사악한 앨버튼 공작의 웃음소리와 자신에게 바싹 다가와 붙는 그의 발소리, 그리고 체념한 듯 눈을 감은 황태자와 기대감에 찬 이들의 얼굴을 전부 보고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싫어.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이미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때에도 이렇게 간절히 살고 싶다고 빌었다.

하나, 여기 있는 모두를 죽여도 좋으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제 목숨은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아서, 그 사람을 허무하게 죽게 할 순 없어! 신이시여, 제발……!’

그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아서 펠릭스를 살려 주시기를. 독으로 죽어 가는 자신을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내놓았던, 그 다정한 사람을 부디 너그러운 자애로 보살펴 주시기를.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그 사람, 아서만은 살려 주시기를.

그레이스는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지금 이렇게 죽는 편이, 너에겐 더 나을지도 몰라.]

‘……!’

[그런데도 꼭 살아야겠어? 그 괴물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거야? 운명의 수레바퀴에 떨어져서,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순간, 온 세상의 시간이 정지했다.

조금 전까지 온 숲을 울리던 말발굽 소리도, 그레이스를 둘러싼 사람들도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 버린 듯 멈춰 버렸다. 그러더니 그레이스의 귓가로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매었을 때 만났던, 그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그레이스는 ‘목소리’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살고 싶어.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

[이번 생의 행복을 위해, 다음 생에서 네가 누릴 삶과 행복을 전부 희생하게 된다고 해도?]

‘그래. 나에게는 미래의 행복보다, 현재 아서의 곁에 있는 행복이 더 소중하니까.’

‘목소리’는 거듭 그레이스를 설득하듯 물었지만, 그녀의 대답은 확고했다. 결국 ‘목소리’는 설득하기를 것을 포기한 듯,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 그래, 알겠어. 네 선택이 그러하다면 내 모든 힘을 다해 널 도울게.]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멈춰 있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다시 그레이스를 찾는 아서와 펠릭스 기사단의 말발굽 소리가 숲을 울렸으며, 조금 전까지 석상처럼 굳어 있던 앨버튼 공작의 검을 쥔 팔이 그대로 그레이스의 왼쪽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어 앨버튼 공작의 칼날이 그레이스의 여린 살갗에 닿으려던 그때였다.

쾅―!

“으악!”

“꺄아악!”

순식간에 그레이스의 주변을 보호하듯 단단한 결계가 생겨나더니 강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을 몇 발짝 밖으로 튕겨 낸 것이다.

그레이스를 붙잡고 있던 앨버튼 공작 부인과 마리안느는 물론이고 그 앞에 서 있던 황태자와 황제 부부, 그리고 앨버튼 공작 또한 결계가 만들어 낸 바람에 근처에 있던 나무줄기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구속하고 있던 밧줄마저 전부 끊어져 버렸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그레이스는 앨버튼 공작을 비롯해 자신을 막고 있던 그들이 쓰러지자 곧장 몸을 돌려 점점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도망쳤다.

“젠장! 저 망할 계집이 끝까지! 벨리알! 빨리 저 계집을 붙잡아!”

앨버튼 공작이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으며 벨리알을 찾았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벨리알이 떠 있던 곳에는 거대한 나무줄기에 부딪힌 흰 올빼미만이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앨버튼 공작은 또다시 욕설을 내뱉으며 점점 빠르게 도망치는 그레이스의 뒷모습을 광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대체 저 계집이 무슨 수를 써서 이토록 강력한 방어와 기절 마법을 시전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지금 벨리알은 그 충격으로 본체인 올빼미로 돌아가 버렸고, 다른 이들 또한 기절한 상태라 그레이스를 쫓아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물론, 자신도 그러했고 말이었다.

만약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마력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쓰러진 그들처럼 기절해 있었을 터였다.

앨버튼 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놓칠 것 같아?’

그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닥을 더듬어 조금 전, 자신이 놓쳐 버린 단검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된 것, 이판사판이었다. 황태자의 몸에 깃든 저주를 풀지도 못했고, 그 때문에 마리안느가 낳은 황실의 핏줄을 이용해 장차 섭정이 되고자 했던 평생의 꿈이 무산되어 버린 지금 그에게 남은 건 일을 망친 아서 펠릭스 공작과 그레이스를 향한 지독한 증오와 살기뿐이었다.

앨버튼 공작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검을 집어 들고는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피를 묻힌 후, 온 힘을 짜내 주문을 외웠다.

“저기 저 젊은 계집을 쫓아가, 목숨을 빼앗아라!”

흉측한 마법이 깃든 검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라 숲 반대편으로 뛰어가는 그레이스의 등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

그러나, 그레이스의 등으로 빠르게 날아가던 검은 그녀의 몸에 닿기도 전에 튕겨져 나왔다. 마치 단단한 철벽에 막혀 버린 것처럼 큰 굉음을 내며 튕겨져 나온 검은 곧장 반대편으로 날아가 나무에 상체를 기댄 채 쓰러져 있는 마리안느의 가슴으로 날아가 꽂혔다.

“커헉!”

“마, 마리안느!”

그레이스의 ‘힘’에 의해 튕겨져 갈 곳을 잃어버린 저주의 칼날이 또 다른 ‘젊은 계집’인 마리안느를 향한 것이다.

앨버튼 공작은 붉은 피를 쏟아 내는 마리안느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연신 치유 마법을 퍼부었다. 그러나, 조금 전 저주를 거느라 바닥까지 소진해 버린 마력이 금세 돌아올 리 만무했다.

앨버튼 공작은 점점 생명의 빛이 꺼져 가는 마리안느의 눈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아, 안 돼! 이대로 죽으면 안 된다! 마리안느!”

이대로 허무하게 마리안느를 잃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껏 꾸며 온 모든 계획은 다 마리안느가 없다면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없다면 지금껏 자신과 가문이 벌인 모든 일이 다 허사가 되고 만다. 앨버튼 공작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져 절규했다.

“……여, 여보? 마리안느?”

그 끔찍한 절규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마리안느의 근처에 기절해 있던 앨버튼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자마자 목도한 참상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두 사람의 곁으로 기어갔다.

“마, 마리안느? 애야…….”

앨버튼 공작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딸아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다정히 뺨을 만지다 보면 멍하니 죽은 눈으로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딸이 전처럼 자신을 돌아봐 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생명이 꺼져 버린 마리안느의 두 눈은 아득한 숲의 어둠만을 향할 뿐이었다.

“안 돼―! 내, 내 딸! 어떡해! 마리! 내 아가――!”

그 인형 같은 모습에서 마리안느의 죽음을 확인한 앨버튼 공작 부인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가는 딸아이의 몸을 끌어안고 비명과도 같은 절규를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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