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24화
그레이스는 너무 아파 짧은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생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려 찬 바닥에 어깨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벨리알은 연신 즐겁다는 듯 킬킬거리며 그녀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관람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극심한 고통에 그레이스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 때쯤, 벨리알이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온몸을 지배하던 끔찍한 고통이 깨끗이 사라졌다.
“하아, 하…….”
그레이스는 어깨를 들썩일 만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벨리알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그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약 올리는 것처럼 말했다.
“이제 좀 알겠어?”
“……그래. 너무 잘 알게 되어서 그만 혀를 깨물 뻔했지 뭐야.”
“킬킬, 끝까지 입만 살았군. 건방지긴. 또 고통을 맛보고 싶나 보지?”
그레이스가 고통을 참느라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노려보며 목숨을 걸고 협박하자, 벨리알이 싸늘한 시선으로 다시 깡마른 손을 그녀의 어깨에 뻗던 그때였다.
지하실의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여러 명의 발소리가 공간을 울리며 들려왔다. 그 소리에 그레이스는 어깨를 떨며 몸을 움츠렸고, 벨리알은 킬킬거리며 허공 위로 떠오르더니 말했다.
“드디어 행차하신 모양이군!”
그레이스는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오기 전에 손발이라도 자유롭게 만든 후 목숨을 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 했건만, 그들은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움직였고 아서와 펠릭스군의 진격은 생각보다 늦어졌다.
그레이스는 절망으로 눈앞이 까맣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냐, 아직 포기하지 마. 늦지 않았어. 어떻게든 버텨야 해.’
그렇게 암시를 걸며 스스로를 좀먹는 절망에서 벗어나려 하던 그때였다. 지하실 문이 열리고 황제와 황후, 앨버튼 공작 부부와 마리안느, 마지막으로 황태자 오웬과 몇몇 군사들이 차례로 지하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화려한 예복과 드레스를 걸친 채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그들을 증오스러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가장 먼저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녹색 눈이 연민과 채 비워 내지 못한 미련으로 흔들리는 것을 발견한 그레이스는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황태자의 눈이 또다시 격렬하게 일렁이던 그때, 바닥에 쓰러진 그레이스를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가 앨버튼 공작을 향해 말했다.
“모든 준비는 끝난 거겠지?”
앨버튼 공작은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황태자 전하께서 제물의 심장에 칼을 찔러, 그 심장에서 쏟아지는 피를 뒤집어쓰는 일뿐입니다.”
“그렇군. 그럼, 당장 시행하지.”
“알겠습니다. ……당장 제물을 일으켜 세워서 이 앞으로 끌고 와라!”
“예, 각하!”
앨버튼 공작의 대답을 들은 황제가 명령하자, 앨버튼 공작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병사들에게 그레이스를 끌고 올 것을 명했다.
그러자 그들을 따라 지하실로 들어온 병사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진 그레이스를 둘러싸곤 우악스럽게 그녀를 일으켜 세운 후, 그들의 앞으로 끌고 갔다.
“이, 이거 놔! 놓으라고!”
그레이스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여러 병사의 힘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앞으로 끌려간 그레이스는 자신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그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그러자 앨버튼 공작이 한껏 독이 오른 그녀를 보며 짧게 비웃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긴 검을 빼냈다.
그러고는 여전히 일렁이는 눈빛으로 멍하니 그레이스를 바라보는 황태자에게 검을 내밀며 말했다.
“자, 전하. 이 검으로 저 제물의 심장을 찌르시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
“어서요!”
“……알겠습니다. 그 전에 잠깐,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제물의 피가 튀어 비싼 예복과 드레스를 망치는 것은 나로도 족하니까.”
“그러지요.”
앨버튼 공작의 채근에 오웬은 별수 없이 검을 받아 들었다. 그 후 그는 사람들에게 뒤로 물러날 것을 청했고, 그 말에 주위에서 서 있던 모두가 뒤편의 높은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오웬은 천천히 그레이스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황태자를 죽일 듯 노려보다가, 그가 멈춰 서자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빈정거렸다.
“……하. 이래서 그날 제게 찾아와 도망치라고 하셨던 거군요. 황태자 전하.”
오웬은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미련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그레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그레이스는 속으로 한껏 비웃어 주었다. 자신을 사랑한다더니, 도망치라고 하더니, 그 마음은 자신의 목숨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던 듯했다.
그레이스는 감히 아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황태자의 얕은 사랑을 비웃으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회피해 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어떡하면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 수 있을까.
그렇게 고심하던 그레이스는 자신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을 보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황태자는 내게서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 ……좀 비겁하지만, 그 마음을 이용해 보자.’
그레이스는 길게 한숨을 쉬며 처연한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그가 눈에 띄게 몸을 흠칫 떨었다.
그 몸짓에서 희망을 발견한 그레이스는 애달픈 눈으로 검을 든 황태자를 바라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정말, 그 검으로 저를 찌르실 건가요?”
“…….”
그러자 황태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에서 그레이스는 황태자가 자신을 해쳐야 본인이 살아남는다는 이성적인 생각과 차마 자신을 찌를 수 없다는 마음에 갈등하고 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심장을 겨눈 황태자의 날카로운 검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오웬이 차마 그레이스의 심장을 찌르지 못하고 있던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리안느가 그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뭐 하시는 거예요, 전하! 당장 저것의 심장을 찌르세요! 이제 더는 시간이 없단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당장 그 제물의 심장을 찌르십시오!”
“황태자! 어서!”
“이번이 네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마라!”
마리안느의 채근을 시작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이들의 동조가 이어졌다. 그 소리에 오웬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리며 떨리는 손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그레이스는 조금 전, 자신의 말로 약간 멀어졌던 검 끝이 다시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저 검이 자신의 심장에 박힌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아서의 삶도 끝나리라 생각하니 끔찍할 만큼 괴로웠다.
그레이스는 엄습해 오는 죽음의 공포로 두려움에 떨며 속으로 끊임없이 아서의 이름을 불렀다.
‘아서!’
그렇게 오웬의 검 끝이 그레이스의 드레스 자락에 닿은 그때였다.
“폐, 폐하! 크, 큰일 났습니다!”
갑자기 지하실 문이 열리더니 완전무장한 트리스탄 경이 다급히 소리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오웬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레이스는 긴장이 풀려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단상 위에서 줄곧 오웬과 그레이스를 지켜보고 있던 황제는 감히 의식을 방해한 트리스탄 경을 향해 진노하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수, 수도 안으로 펠릭스 공작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이미 수도의 시가지가 그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트리스탄 경의 보고에 황제는 조금 전 진노했던 것도 잊고 경악하며 되물었다.
“스펜드라 후작과 수도 방위군은 지금 어디에 있나? 대체 뭘 어떻게 처신했기에 그놈들이 수도에 진군하도록 둔 거냔 말이다!”
“아, 아무래도 스펜드라 후작과 수도 방위군이 그들의 편에 선 것 같습니다!”
“……뭐라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수도의 후방을 수호하는 토스란 후작령과 카노샤 공작령 또한 로이엔느 공국군과 위그 백작 연합군에 가로막혀 지원군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기세라면 펠릭스 공작군이 황궁을 침공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트리스탄 경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단상 앞에 선 황제와 황후, 앨버튼 공작 일가에게 현재 수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그의 보고가 이어질수록 황제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북방의 가장 큰 군벌이자 영주인 펠릭스 공작이 일으킨 내란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황실 권력 기반을 지탱하는 주요 세력인 수도 방위군이 돌아선 것도 모자라, 심복인 토스란 후작과 카노샤 공작에게마저 지원을 받을 수 없다니.
이것은 황제에게 있어 권력의 기반이 통째로 흔들릴 만큼의 큰 위기이자 목숨이 걸린 상황이었다. 황제는 어느새 두려움에 떨며 자신에게 매달리는 황후를 한 팔로 안곤 다급히 물었다.
“화, 황실 근위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규모는 2천 정도이고, 그중 대부분이 지금 펠릭스 공작과 스펜드라 후작의 반군이 황궁까지는 진격하지 못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지, 지금 당장 지원 병력을 보낼 수 있는 황족이나 귀족은 없나?”
“안 그래도 펠릭스 공작군이 수도를 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연회장에 계신 펜드라 후작님과 로일롯 백작님께 당장 군대를 본성으로 보내라는 서신을 보낼 것을 부탁드렸습니다만……. 이미 수도 곳곳을 점령하며 황궁으로 진격해 오는 역도들이 수도 외부로 전하려는 사신들과 전서구들을 전부 베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 천하의 빌어먹을 놈들이 다 있나!”
황제는 차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해 발을 굴렀다. 이 빌어먹을 괴물 놈이 설마 이토록 철저히 반역을 준비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쓸 만한 무력을 지녔다고 중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지금 이 순간, 그레이스를 납치했을 때 펠릭스 공작의 직위를 박탈하고 그를 암살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며 화를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