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22화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앨버튼 공작 부인이 격앙된 목소리로 그레이스를 향해 소리쳤다.
“닥쳐, 이 무능력하고 오만방자한 것! 어디 지금껏 키워 준 아버지와 가문을 그따위로 모욕해?”
그레이스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한 분노로 새파랗게 질린 앨버튼 공작 부인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하! 지금껏 키워 줬다? 그걸로 지금 생색을 내시는 건가요, 앨버튼 공작 부인?”
“생색? 너 지금 생색이라고 했니?”
“마법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갖은 눈치와 구박을 주며 키워 놓고는 이제 와서 가문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는데, 이게 생색이 아니면 뭐가 생색이죠? 하! 우스워라! 여태 그런 취급을 받으며 큰 저에게는 목숨을 내놓으라 하셨으니, 저보다 더 갖은 유세를 부리며 키운 마리안느 영애에겐 어떤 대가를 요구하실지 참으로 궁금하네요!”
“……저, 저, 저것이!”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마리안느 영애. 낳고 키워 준 값으로 목숨보다 더한 걸 내놓으려면 말이에요. 아, 이미 요구했나? 하긴, 죽는 것보다 자신을 사랑해 주지도 않는 사람과 평생 함께해야 하는 인형 같은 삶이 더 괴로울지도 모르겠네.”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키워 준 값을 운운하며 소리치는 앨버튼 공작 부인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 그 후, 그 곁에 찰싹 붙어 서 있는 마리안느에게로 화살을 돌려 노골적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앨버튼 공작 부인에게 더 큰 상처를 주려면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비난을 퍼붓는 것보다 그녀가 아끼고 사랑해 마지않는 마리안느를 조롱하는 것이 더 큰 상처가 될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스의 말에 마리안느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앨버튼 공작 부인은 그런 딸아이가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다 곧장 그레이스에게로 달려와 장갑을 벗어 얼굴에 집어 던졌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독살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는 앨버튼 공작 부인과 그녀가 던진 장갑을 번갈아 쏘아보며 피식거렸다. 역시 그녀에게 있어 자식은 저 마리안느뿐이라는 걸 다시금 자각하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앨버튼 공작 부인이 자신의 곁에 선 남편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재밌다는 듯 이 상황을 관망 중인 벨리알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대체 왜 이 망할 것이 오만방자하게 입을 놀리도록 가만히 놔두는 거예요? 당신은 분하지도 않아요?!”
앨버튼 공작은 화가 나 씩씩거리는 아내의 어깨를 다정히 토닥이며 말했다.
“진정해, 레지나. 몇 시간 뒤 죽을 제물 따위에게 화를 쏟아 내 봤자 당신만 손해야.”
“알아요! 아는데, 저 독살스럽고 미운 것이 입을 놀리는 것 좀 봐요! 나와 우리 마리안느에게 주제넘게 떠드는 것 좀 보라고요! 계속 듣고만 있지 말고 뭐라도 해요! 재우든 기절시키든 하란 말이에요!”
그러나, 남편의 다정한 위로에도 화를 삭이지 못한 앨버튼 공작 부인은 여전히 흥분을 진정하지 못하고 연신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그때, 조용히 웃고 있던 벨리알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런, 이런. 우리의 귀부인께서 제물의 마지막 발악에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이군. 목청이 아주 전장에서 울려 퍼지는 뿔피리 뺨치는걸? 이러다 부인의 목소리가 파티장까지 뚫고 들어가겠어.”
“……벨리알! 당신 지금 누구 편이에요!?”
“낄낄, 나는 당연히 인간 친구와 귀부인의 편이지. 걱정 마. 나도 마침 저 건방진 제물을 조용히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니까.”
벨리알은 앨버튼 공작부 인에게 능청스럽게 대꾸하더니 천천히 그레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레이스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그의 손을 피했지만, 손발이 묶인 탓에 몸부림만 치다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
그레이스는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는 벨리알의 행동에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벨리알의 주문이 이어지자 그녀는 날카롭던 경계심이 몽롱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의지로는 이길 수 없는 깊은 잠이 쏟아지고, 그레이스는 곧 몸을 가눌 힘마저 잃고 말았다.
쿵―.
그 후, 자신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쓰러지는 충격을 끝으로 그레이스의 의식은 끊어졌다.
아직 열려 있는 귀로 앨버튼 공작과 공작 부인, 그리고 벨리알과 마리안느가 파티, 연회장, 황태자를 언급하며 뭐라고 떠드는 것이 들렸지만 그 말은 그레이스의 기억 속에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 * *
제국 수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4관문.
그곳은 현재 황태자의 결혼으로 인해 수도를 방문하는 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1, 2, 3관문들과는 다르게 오가는 이도, 나오는 이도 없이 조용했다.
이유인즉 그곳이 사람이 지나는 관문이 아니라 수도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들의 시신이나 수도에서 처리할 수 없는 오물들이 나오는 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다른 관문들과는 달리 지키는 병사의 수도 적고 경계도 허술한 그 관문은 수도를 지키는 황실 근위군과 수도 방위군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좌천된 자들이 부임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로 평소보다 더 경계가 삼엄해진 다른 관문들과는 달리 그곳의 병사들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지루하고 심드렁한 얼굴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병사들은 한껏 나태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창을 땅에 꽂아 그 자루 부분에 몸을 기댄 채 하릴없이 수다나 떨었다.
“지금쯤 동쪽 관문 놈들은 오가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아마 그럴 걸세. 왜? 부러운가?”
“일이 바쁜 건 하나도 안 부럽네만, 그놈들이 받아 챙기는 뇌물은 부럽네. 상인들이 자신 먼저 관문을 통과시켜 달라고 내미는 뇌물들이 그리 쏠쏠하다지?”
“……젠장할. 그건 나도 부럽군. 지금 내가 버는 돈으로는 가족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그러게 말이네. ……어? 저게 뭐지?”
“응!?”
그렇게 그들이 한탄 섞인 수다를 떨고 있던 그때, 화려한 예복 차림을 한 기사를 태운 말이 4관문을 향해 달려왔다.
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한 후, 땅에 꽂혀 있던 창을 뽑아 관문 앞으로 달려온 기사에게 겨누며 소리쳤다.
“누구냐! 당장 말에서 내린 후 신분을 밝혀라!”
그러나, 말 위에 탄 기사는 그들의 위협에도 말 위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창을 더 가까이 말머리에 겨눈 채 고개를 들어 기사를 확인했다.
그러자, 생전 태어나 처음 보는 서늘한 인상의 잘생긴 기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 사람 같지 않은 기사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에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겉으로는 기세 좋게 소리쳤다.
“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이 창으로 네 말을 찌르겠다!”
“……내 말을 찌르겠다고?”
병사의 위협에 그 기사는 코웃음을 치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그러고는 단숨에 검을 휘둘러, 병사가 자신의 말을 향해 겨누고 있던 창을 베어 버렸다.
그러자 기사의 말을 겨누고 있던 창끝과 그를 이은 자루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 바닥으로 꽂혔다. 병사는 졸지에 자루만 남은 자신의 창을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뒷걸음질을 치며 제 곁에서 얼어 버린 동료에게 소리쳤다.
“자, 자네! 다, 당장 성안으로 들어가 단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아, 알겠네!”
그러자 그 병사 못지않게 당황한 이가 창을 버린 채 성안으로 뛰어들어 갔고, 남은 병사는 조금 전 안으로 뛰어들어 간 병사가 놓고 간 창을 쥐어 여전히 말 위에 앉아 자신을 여유롭게 비웃는 기사를 향해 겨누고는 다시 소리쳤다.
“고, 곧 성안에서 지원군이 올 거다! 그들에게 붙잡혀 개죽음을 당하기 전에 당장 말 위에서 내려와 투항하라!”
그런데 병사의 경고에도 기사는 픽 웃기만 했다.
삐이익―!
그러던 그때, 갑자기 긴 휘파람 소리 같은 새 울음소리가 나더니 창공을 가르며 크고 검은 날개를 가진 매 한 마리가 날아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저편에서 완전무장한 수백의 기사와 수백의 병사가 자욱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관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 이건…….”
그 모습에 병사는 무언가 알아챈 듯 경악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크고 검은 날개를 가진 매. 성을 향해 달려오는 완전무장한 기사들의 맨 앞을 달리는 선봉장이 든 검은 매의 깃발. 그 모든 것이 상징하는 단 하나의 세력, 그것은 북부의 펠릭스 공작과 그 휘하의 펠릭스 기사단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순간 병사는 들고 있던 창을 버리고 허리춤의 검을 빼들고는 성안에 있는 동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바, 반역! 반역이다――! 펠릭스 공작이 반역을 일으켰, 으악―――!”
그러나 목청 높여 소리치던 병사는 곧 자신과 대치하던 기사, 아서 펠릭스 공작이 휘두른 검에 가슴을 베여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서는 단칼에 절명한 병사의 몸에서 튀어 오른 피를 닦아 낸 후, 말 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더니 조금 전 동료를 불러오기 위해 안으로 뛰어들어 갔던 또 다른 병사의 시신을 틀어쥔 백발의 남자, 스펜드라 후작이 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나왔다.
스펜드라 후작은 조금 전 아서가 베어 버린 병사의 시신 위로 또 다른 병사의 시신을 던지며 아서를 향해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펠릭스 공작.”
“아닙니다.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앨버튼 공작에게서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까?”
“그들은 지금 내일 있을 결혼식을 위해 초대된 황족들과 귀족들을 접대하는 파티에 참석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스펜드라 후작에게 아서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황제와 황태자, 앨버튼 공작의 동향이었다. 만약 그들이 황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면 잡혀간 그레이스에게 위험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이 황궁에서 다른 사람들을 접대하고 있다는 소식에 아서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현재 수도를 수호하는 병력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황실 근위대는 전부 황궁을 수호하기 위해 그곳에 집결해 있어, 현재 수도의 성곽을 수호하는 병력은 전부 내 휘하에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나와 공작님의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시가지에서 칼부림이 날 일은 없겠다는 뜻이겠군요.”
“그렇습니다. 피바람이 부는 건 황궁만으로도 족하지요.”
이어지는 아서의 질문에 스펜드라 후작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서는 그 무뚝뚝하고 차가운 목소리에서 도저히 억눌러지지 않는 황실을 향한 반감과 억울한 죽음을 맞은 딸에 대한 복수심을 읽어 내고는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