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20화
설마,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화살을 피한 걸까. 아서는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활을 조준했다.
그러자 레온의 마차 지붕 위에 매달려 있던 괴생물체가 구부려 있던 몸을 쭉 펴고는 기괴한 목소리로 낄낄거리며 말했다.
“킥킥. 고작 그따위 화살이나 검으로 날 어떻게 해 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 높았고, 또 기괴했다.
‘이, 이 목소리는…….’
마차 안에 숨어 바깥 상황에 귀를 기울이던 그레이스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이 목소리는 그녀의 환상 속에서 앨버튼 공작과 수상한 대화를 주고받던 ‘그 사람’이었다.
[괴물을 ―――하기 위해서는 ‘신부’의 피를 뒤집어써야 합니다.]
‘틀림없어! 그 목소리야!’
“마님! 안 됩니다!”
그레이스는 샐리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급히 몸을 일으킨 후,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때, 레온이 탄 마차의 지붕 위에 있던 ‘괴물’이 칼날 같은 손톱이 박힌 손으로 마차의 지붕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곧장 마차의 지붕을 뜯어 버렸다.
“꺄아아악!”
“괴, 괴물이다――!”
“빌어먹을! 당장 마차 위로 올라가! 저 괴물을 붙잡아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종과 시녀들은 비명을 질렀고, 그레이스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아서는 욕설을 내뱉으며 기사들에게 지시한 후, 자신 또한 말을 몰아 레온을 태운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조금 전 자신이 뜯어낸 지붕을 마치 종이장처럼 구겨 숲속으로 던져 버린 괴물은 곧장 마차 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다 소용없는 짓이래도!”
“레온!”
“으아앙! 형님! 형수님!”
아서는 곧장 활을 던지고 검을 뽑아 든 후, 마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괴물은 아서가 마차로 뛰어드는 그 잠깐 사이에 레온을 보호하고 있던 시녀의 목숨을 빼앗고는 한 팔로 레온을 붙잡았다.
괴물은 온몸을 덮은 로브 밑으로 드러난, 쭉 찢어진 입으로 비죽비죽 웃으며 날카로운 손톱을 레온의 목에 겨누었다. 그러고는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며 검을 겨눈 아서를 향해 빈정거렸다.
“이런, 한발 늦었군그래.”
“레온을 놔줘!”
“안 된다. 지금부터 내가 벌일 협상에 이 꼬마가 필요하거든.”
“……뭐라고?”
“그러니, 동생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당장 비켜라.”
괴물은 빙글거리며 슬쩍 레온의 목에 겨눈 손톱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두려움에 덜덜 떠는 아이의 목의 여린 살갗이 살짝 베이며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 레온은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그만 기절해 버렸다.
‘젠장……!’
그 모습에 아서는 분함과 안타까움으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 레온을 구하고 싶었지만, 조금 전처럼 검이 저 몸을 통과해 버린다면 그땐 별 소득 없이 레온만 위험하게 될 수 있었다.
“낄낄. 그래, 그래야지.”
아서는 괴물의 지시대로 천천히 뒷걸음질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에 괴물은 이 상황이 즐거워죽겠다는 듯 웃으며 아서를 따라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 후, 괴물은 자신에게 검과 화살을 겨눈 기사들과 아서, 숲속에 숨어 있던 시종과 시녀들을 일일이 눈으로 살피더니 말했다.
“그런데, 지금 ‘제물’은 어디 숨어 있나?”
“……!”
곧장 괴물의 말뜻을 알아들은 아서는 무심코 자신의 시선이 그레이스의 마차를 돌아보지 않을까 조심하며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괴물에게 말했다.
“……글쎄, 네가 찾는 건 지금 여기 없는 것 같은데.”
“아니, 있어. 내 마법의 흔적이 느껴지거든.”
괴물은 아서의 말을 비웃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기사들이 그를 가로막으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괴물이 레온의 목숨을 위협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길을 터 주어야 했다.
괴물은 기사들이 터 준 길을 지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괴물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그레이스를 발견한 후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찾았다, 제물.”
그레이스는 공포와 분노로 어지럽게 뒤섞인 눈으로 괴물과 괴물의 품에 안겨 있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괴물이 더욱 가까이 그레이스의 앞으로 다가서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나, 기억나?”
“……원하는 게 뭐야, 당신.”
“이런, 못 보는 사이 꽤 성격이 급해졌군그래.”
그레이스가 매섭게 노려보며 묻자, 괴물은 재밌다는 듯 낄낄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멈추곤 레온의 목에 겨누고 있던 손을 들어 그레이스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지금 내가 바라는 건 너를 ‘인간 친구’에게로 데려가는 것, 그것 하나야.”
“그럼 처음부터 날 노릴 것이지, 왜 레온을 붙잡은 거야.”
“글쎄, 재미있으니까? 나는 내게 약점이 잡힌 인간이 나에게 쩔쩔매는 꼴을 보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
“……악마 같은 놈.”
“뭐, 좋을 대로 떠들어. 그래 봤자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레이스는 괴물을 향해 이를 갈며 비난을 퍼부었고, 괴물은 연신 킬킬거리며 그녀를 조롱했다. 그러더니 괴물은 뱀처럼 길게 뻗은 혀로 쭉 찢어진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자, 선택해. 이 꼬마의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순순히 날 따라와. 그렇지 않으면 이 꼬마를 해치겠어.”
“……윽.”
“혹시나 괴물 공작과 기사들이 널 구해 줄 거라는 착각은 버리는 게 좋을걸. 지금의 내 몸은 인간의 무기로는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거든.”
괴물은 손가락을 까닥였고, 그레이스는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괴물과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 중 한 사람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젠장할! 개소리 마라, 이 괴물 놈!”
“아, 시끄러워. 좀 닥쳐 줄래?”
괴물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조금 전 자신에게 검을 휘두른 기사를 향해 손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기사를 보호하고 있던 갑옷이 단숨에 반쪽으로 갈라지며 드러난 셔츠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악!”
기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 주변에 있던 다른 기사들은 쓰러지는 그를 붙잡으며 괴물을 노려보았다.
괴물은 손을 한번 꽉 쥐었다 펴곤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말했다.
“젠장할. 본체가 없어서 그런가, 저따위 파리 새끼 같은 인간 목숨 하나 빼앗는 것도 힘들군.”
“…….”
“……아. 이참에 힘도 보충할 겸, 저놈들의 기도 꺾어 놓을 겸, 몇 놈 더 죽여 볼까?”
“그, 그만해!”
기사들을 돌아보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괴물의 말에, 그레이스는 크게 소리치며 마차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괴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레이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괴물을 증오 섞인 시선으로 괴물을 노려보며 말했다.
“알겠어. 내가 갈게. 그러니까, 레온을 놔줘. 그리고 더 이상 그 누구도 해치지 마!”
“뭐, 알았어. 그렇게 하지.”
이후, 괴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치 에스코트를 하듯 마차에 서 있는 그레이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레이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깡마른 괴물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아서는 그런 그녀를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안 됩니다, 부인!”
“공작님! 물러나십시오, 위험합니다!”
“……아서!”
아서는 곧장 그레이스와 괴물이 서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 행동은 아서를 막아 세우는 기사들에 의해 저지됐다.
괴물은 마땅찮은 듯 혀를 차며 품에 안겨 있던 레온을 내팽개치듯 바닥에 내려놓은 후, 그레이스의 손을 확 잡아끌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짜증 나는데 죽일 수는 없고. 그냥 확 저 괴물 공작 놈의 팔이나 다리라도 하나 끊어 버려?”
“……그건 안 돼! 그랬다간 당장 죽어 버릴 거야!”
“아, 알아. 안다고. 네가 그럴까 봐 참고 있잖아, 젠장.”
괴물은 버둥거리는 그레이스를 향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한 팔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 후, 괴물은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괴물과 그 품에 안겨 있는 그레이스의 모습이 발끝부터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서는 마치 바람에 흩어지는 잿가루처럼 옅어지는 괴물과 그레이스를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부인!”
“……!”
그레이스는 애달픈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서가 채 그녀의 손을 잡기도 전에 그레이스의 손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얼굴밖에 남지 않은 그레이스는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아서와 시선을 맞추며 입을 벙긋거렸다.
‘당신이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날 찾을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을 테니, 날 구하러 와 줘요.’
그 말을 끝으로 그레이스와 그녀를 안은 악마는 사라져 버렸다.
아서는 조금 전까지 그레이스가 서 있던 흔적조차 남지 않은 마차 앞에 주저앉으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곤 소리쳤다.
“젠장! 빌어먹을!”
지금껏 수없이 많은 전장을 돌며 전투를 벌였지만, 이토록 무력한 패배감을 맛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자신과 기사들이 수도에서 벌인 일로 인해 황태자가 곤란해졌다고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납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서는 안이했던 자신의 생각과 자신이 가진 힘으로 충분히 그레이스를 지킬 수 있다고 과신했던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는 자신의 온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각하.”
절망한 아서의 곁으로 쓰러진 레온을 안고 온 토어 경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서는 일그러진 토어 경의 얼굴과 목에 피딱지가 앉은 채 정신을 잃은 레온의 얼굴을 힘없이 바라보고는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참담한 얼굴을 한 기사들과 샐리를 비롯한 시종, 시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그래, 아직은 무너질 수 없어. 그녀가 지켜 낸 레온과 다른 이들의 목숨을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그레이스를 무사히 구해 내기 위해서라도.
아서는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키며 토어 경을 향해 말했다.
“……토어 경.”
“명령하십시오, 각하.”
“지금 당장 키프란 산맥에 있는 펠릭스 기사단에게 곧장 수도로 진격하라는 뜻을 담은 서신을 보내라.”
“예, 각하!”
“또한, 스펜드라 후작과 로이엔느 대공, 위그 백작에게 우리 군의 진격 사실을 알리고 약속한 지원을 요청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토어 경, 그대는 레온과 시녀들을 데리고 곧장 펠릭스 성으로 귀환하도록. 물론, 선물을 실은 수레도 전부 성으로 돌려보내라.”
“……예? 그럼 어떻게 수도 관문을 통과하실 작정이십니까? 황태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기에는 단출한 모습을 보면, 수도의 문지기가 의심할 텐데요.”
토어 경이 난색을 표하며 묻자, 아서가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상관없다. 나는 초대받은 자가 아니라, 반역자로서 수도의 관문을 통과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