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17화
오웬은 두려움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아서가 길을 터놓은 곳으로 천천히 몸을 물렸다.
그렇게 황태자가 아서와 그의 기사들의 검이 닿을 수 없는 거리까지 물러났을 때, 아서는 또다시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좋은 판단이십니다, 전하. 한순간의 자존심보다는 그 귀중한 목숨을 지키는 것이 백번 옳은 선택이지요.”
“……빌어먹을 괴물 놈이. 지금 나를 비웃는 건가?”
“비웃다니요. 제가 어찌 감히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를 비웃겠습니까. 다만, 저는 2주 뒤 결혼식의 주인공인 새신랑을 염려했을 뿐입니다.”
“……뭐? 2주?”
“……그게 정말이에요?”
이어진 아서의 말에 황태자는 물론이고 그레이스 또한 놀라 되물었다. 그 반응에 아서는 그레이스에게 다정히 시선을 내린 후, 대답했다.
“네. 조금 전, 황궁에서 황제 폐하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전하기 위해 사신이 왔지 뭡니까.”
“……그랬군요.”
“예상보다 결혼식이 빨리 치러지는 것이 놀라워 사신에게 물으니, 요즘 수도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일들 때문이라고 말하더군요.”
그 말은 얼핏 들으면 그레이스에게만 향하는 것 같지만, 단순히 그녀만을 상대로 했다기엔 목소리가 제법 컸다.
그레이스는 일부러 황태자에게 들으라는 듯 말하는 아서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그녀의 눈에 비친 황태자는 새하얗게 질려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장 2주 뒤, 자신이 결혼하게 되리라는 소식은 그에게도 금시초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소문이 커지는 것을 막고, 황태자가 내게 가진 미련을 끊어 내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결혼식을 치르고 싶겠지.’
또한 경각에 달한 황태자의 목숨을 저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결혼을 진행하고자 했으리라.
그레이스는 뻔히 보이는 그들의 속셈에 슬쩍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어째서 황태자가 자신에게 도망치라고 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짐작이 갔다.
‘저주를 해결할 능력도 없으면서, 무작정 날 도망치게 하면 일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나 봐.’
그레이스는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황태자의 판단을 속으로 비웃었다. 그런다고 황제와 그 앨버튼 공작이 자신을 놓아줄 리가 만무한데 말이다.
‘그런 얕은수로는 날 구할 수도, 당신을 구할 수도 없어.’
그리고 황태자의 목숨 하나를 위해 희생된 이들의 인생과 그 가족들이 겪었던 불행도 구제할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황태자의 헛된 바람을 꺾어 버리고 싶었다. 하여 그레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넋을 놓은 황태자를 향해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전하께서는 2주 뒤면 저와 가족이 되시는군요.”
“……!”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그레이스는 어느새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황태자를 향해 더없이 다정하면서도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말에는 이제 더 이상 어리석은 미련을 버리라는 충고와 동시에 앞으로 자신과 아서가 벌이게 될 일들을 기대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녀의 ‘잘 부탁드린다’는 말보다 자신을 ‘가족’이라 칭한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황태자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레이스를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길을 터 준 아서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낸 후,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그레이스는 얼른 손을 뻗어 황태자가 치고 지나간 아서의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감히 황태자에게 검을 들이댄 대가치고 이 정도면 싼 편이죠.”
그레이스는 괜찮다고 웃는 아서를 여전히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손을 꼭 쥐며 다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어차피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의 권위에 져 주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네?”
“곧 저자보다 제가 더 높은 곳에 설 테니까요.”
“……아서.”
“그때, 몇 배로 돌려받도록 하겠습니다. 내 일도, 당신의 일도. 그리고 그들로 인해 인생을 망친 모두의 원한에 대한 대가도.”
그 말에 그레이스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네. 꼭 그래요, 우리.”
그 후, 그레이스는 자신을 안아 주는 아서의 품에 자신의 온몸을 맡겼다.
아서의 말대로 이제 남은 것은 복수의 실행과 그 이후 맞이할 또 다른 세상뿐이었다. 그레이스는 그 일이 반드시 성공할 것을 믿으며 그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았다.
10. 종막
현 황제의 하나뿐인 후손인 황태자의 결혼 소식이 전해지자, 제국은 겉으로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제국 내의 큰 도시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 독수리 깃발이 걸려 바람에 나부꼈고, 지방 귀족들은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드레스를 맞추고 바칠 선물들을 골랐으며, 시민들은 몇십 년 만에 벌어지는 세기의 결혼식에 온 이목을 집중하며 삼삼오오 떠들어 댔다.
그러나, 병사들이 순찰하는 낮이 지나고 사람들의 경계가 느슨해진 밤이 되면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귀족들은 몇 달 전 수도에서 벌어진 핏빛 독수리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떠들며 ‘범인이 잡히지 않은 것은 다 신의 저주 때문이다’라고 떠들어 댔고, 그 소문은 그들의 저택을 빠져나와 지방 귀족과 제국민들의 귀에도 흘러들었다.
그렇게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더욱 부풀려졌고, 내용은 크게 흉측해졌다.
마지막에는 사실 수도에서 벌어진 모든 불미스러운 일의 범인은 저주를 받아 미쳐 버린 황태자의 짓이며, 황실과 앨버튼 공작 가문은 그 사정을 모두 알고 있기에 앞에서는 병사들을 풀어 범인을 찾는 척하면서 뒤로는 그 일을 덮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정설처럼 퍼져 퍼져 나간 것이다.
제국민들은 신의 가호와 신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권위로 내세우며 천 년간 이어 온 황실이 저주받은 황태자가 미쳐서 벌인 살인 사건을 덮으려 한다는 소문에 분노했다. 그간 시민들이 그 살인 사건으로 희생된 희생자의 불행을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부풀려진 소문은 결국 교황청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교황청은 황태자의 결혼식 날에 정말 그가 ‘저주받지 않은 몸’인지 검증하자고 제안하는 서신을 황실로 보냈고, 그 서신을 받은 황제는 분통을 터트렸다.
“일이 이렇게 되도록 황실 근위대와 수도 방위군은 대체 뭘 한 건가!”
황제가 노성을 터트리며 제 앞에 서 있는 황실 근위대의 단장 트리스탄 경과 수도 방위군의 수장인 스펜드라 후작의 발아래로 서신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트리스탄 경이 황급히 몸을 낮추었다.
“……면목 없습니다, 폐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그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던 스펜드라 후작 또한 느릿느릿 허리를 굽히며 죄를 청했다.
황제는 그들을 매섭게 쏘아보다가 곧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편에 서 있는 앨버튼 공작에게 소리쳤다.
“앨버튼 공작, 아직도 범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짚이는 점이 없나? 마법을 썼을 가능성 같은 것 말이네!”
“그랬다면 그 범인 놈은 진즉에 잡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겠지요. 저 또한 혹시나 저희 가문 출신의 소행인가 싶어 하나하나 첩자를 붙이고 마법을 이용해 수도 근처를 백방으로 뒤졌지만, 그런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빌어먹을. 미칠 지경이로군.”
황제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탄식을 내뱉었다.
설마, 군대를 풀고 마법을 동원했는데도 이 흉측한 사건의 범인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퍼진 소문을 잠잠하게 만들려면 범인을 색출해 공개적으로 처형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수도의 인접한 지역을 수호하는 황실 직속군까지 전부 모아 수도에 배치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들을 수도에 체류시키는 비용도 비용이거나와, 만약 그렇게까지 하고도 범인을 잡지 못했을 때 벌어질 상황이 황제는 두려웠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황태자를 둘러싼 소문과 의혹은 확신이 되고 말 테니까.
황제가 제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듯 짧게 혀를 차며 다시 스펜드라 후작과 트리스탄 경에게 화살을 돌렸다.
“어떻게 정예 기사들만 모인 짐의 직속 근위대와 짐의 성을 지키는 수도의 군대가 그깟 흉악한 살인범 하나를 찾지 못할 수 있나! 솔직히 이쯤 되니 그토록 굳게 믿었던 자네들마저 의심스러울 지경이군.”
“……소,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그런 입에 발린 사과는 됐네! 짐에게 사죄를 청할 시간이 있으면, 당장 범인을 잡아다 황궁으로 압송해 와! 전력을 다하란 말이네!”
황제의 날 선 비난에 트리스탄 경은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연신 사죄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비굴한 사죄에도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언성을 높였다.
그때, 그 곁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스펜드라 후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와 제 수하들의 능력이 부족해 범인을 잡아내지 못한 것은 지극히 송구스럽고, 또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폐하, 저희 또한 만사를 다 제쳐 놓고 그 흉악한 살인범에게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 상황임을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뭣이라? 지금 제정신인가? 이 일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가!”
“……소신의 언사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점은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범인 하나를 잡자고 추가 병력을 동원하면 구축해 놓은 수도의 최종 방어선이 약해지고 맙니다. 만일 적국이 그 기회를 포착해 이곳으로 진군한다면 수도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고 말 겁니다.”
“……크흠. 그, 그럼 지금 수도에 상주하는 병력으로 더 샅샅이 뒤져 범인을 색출하면 될 것이 아닌가!”
“……지금 저희 군은 곧 있을 황태자 전하의 국혼으로 각국에서 오는 축하 사절단과 그들의 심복 중 혹여 숨어 있을 첩자를 가려내는 일만으로도 벅찬 지경입니다. 그런데, 지금보다 더 시간과 병력을 할애하라니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폐하.”
“……송구하오나 신 또한 스펜드라 후작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스펜드라 후작은 더 이상 이번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는 일에 추가 병력을 투입할 수 없다는 것을 덤덤한 목소리로 설파했고, 그 말에 줄곧 납작 엎드려 눈치만 보고 있던 트리스탄 경 또한 조심스럽게 후작의 의견에 동조했다.
황제는 그런 그들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범인이 잡히지 않아 귀족들도 교황청도 난리가 난 마당인데 감히 자신의 명령에 항명하니 그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때,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황제를 향해 스펜드라 후작이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한 마디 더 간언했다.
“……솔직한 제 의견으로는, 아직 실마리도 잡지 못한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이 이상 시간과 병력을 소모하는 것보다, 황태자 전하께서 교황청의 검증을 받으시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소문을 잠재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