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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116화 (116/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16화

그레이스는 슬쩍 비밀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며 곳곳에 숨어 있을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그 후, 그녀는 황태자와 함께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아름답게 물이 쏟아지는 흰 분수대와 유리 조각, 얼음으로 만들어진 울타리 등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곳은 사계절 중 겨울이 가장 긴 펠릭스 지방에서 유일하게 1년 내내 물이 흐르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녀에게 저택을 구경시켜 달라며 고집스레 요구했던 것과는 달리 황태자는 펠릭스 저택의 풍경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레이스는 그 모습이 영 미심쩍었지만, 대놓고 지적하진 못한 채 계속해서 그와 함께 저택 안을 산책했다.

그렇게 비밀 정원을 지나, 동쪽 탑에서 서쪽의 온실로 향하는 이어진 오솔길로 올 때까지 그레이스만 떠들고, 황태자는 침묵한 채 그녀의 얼굴만을 보며 걷는 기괴한 산책이 이어졌다.

그렇게 넓은 펠릭스 저택을 한 바퀴 크게 돈 그레이스와 황태자는 저택에서 숲으로 향하는 쪽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젠 더 이상 그에게 보여 줄 것도, 할 말도 없었다. 그레이스는 관리하는 이가 없어 오래 방치되어 살풍경한 그곳을 바라보다 등을 돌려 황태자와 시선을 맞추곤 말했다.

“……이제 전하께 보여 드릴 수 있는 펠릭스 저택의 풍경은 다 보여 드렸답니다.”

“…….”

이번에도 황태자는 대꾸 없이 그레이스의 얼굴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답답함을 느꼈다. 아까부터 자꾸만 자신의 얼굴만 보는 걸 보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이는데, 속 시원히 말은 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만 내려다보는 그가 불편하고 답답했다.

그레이스가 재촉하듯 황태자를 불렀다.

“……황태자 전하?”

“그레이스 공작 부인. 아서 펠릭스를 사랑하는 그 마음은 변함없으십니까?”

그때였다. 줄곧 말없이 그레이스의 얼굴만 바라보던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레이스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질문이라면 전에도 대답해 드렸을 텐데요. ……저는 제 남편을 사랑합니다.”

“그 때문에 당신이 죽는다 해도?”

그 질문 또한 전과 똑같았다. 그레이스는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상관없어요.”

그 대답을 들은 황태자의 표정이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그레이스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걸치고 있던 로브가 더러워지는 것도, 황태자인 자신의 권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 태도에 그레이스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다, 당장 일어나세요! 전하! 어찌 무릎을 꿇으십니까!”

“……제발 도망쳐, 그레이스.”

“……네?”

“그대의 아버지인 앨버튼 공작과 내 아버님이신 황제 폐하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제발, 어디로든 도망쳐. 도망치는 과정에서 필요한 건 전부 내가 마련할 테니, 그러니 제발…….”

“싫습니다, 전하. 제가 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도망쳐야 하죠?”

그레이스는 황태자의 간청을 단칼에 거절하며 매달리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냉정하고도 단호한 거절에 황태자는 슬픈 표정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곧 답답하다는 듯 격하게 소리쳤다.

“……왜 도망쳐야 하냐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죽게 되니까!”

“……죽는다고요? 제가요?”

“그래! 나는……. 나는, 그대가 죽는 걸 원하지 않아. 설령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대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제가 왜 죽는데요?”

“……!”

거듭 이어지는 애원을 듣고 있던 그레이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황태자를 향해 그녀는 보란 듯 코웃음치며 물었다.

“제가 왜 죽는다고 확신하시나요, 전하.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라도 있으신가요?”

“……그, 그건…….”

“그건?”

“……페, 펠릭스 공작의 저주! 맞아! 그 저주 때문에…….”

“제가 죽는 이유가, 정말 그것 때문인가요?”

황태자는 더듬거리며 이유를 늘어놓았고, 그 이유를 들은 그레이스의 표정은 더욱 싸늘해졌다.

불과 몇달 전 아서의 저주에 얽힌 비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 조금 전 황태자의 말은 우습다 못해 역겨웠다.

‘정말 날 걱정했다면, 내 질문에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았어야지.’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의 저주를 고백하며 도망치라 애원했다면, 그의 애원이 이렇게까지 같잖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리라.

그레이스는 자신의 거듭된 추궁에 말문이 막혀 버린 황태자를 잠시 노려본 후, 그에게서 한 발짝 몸을 물렸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었다. 보아하니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자신과 아서를 의심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여서, 굳이 그를 더 상대하며 말을 섞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차가우면서도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양쪽 드레스 끝자락을 잡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

“결혼 준비로 바쁜 와중에 이곳까지 걸음해 주시고 제 신변을 진심으로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전 남편의 곁을 떠날 생각도, 이 제국에서 도망칠 생각도 없습니다.”

“……그레이스, 제발!”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저택 밖으로 나가는 문은 저쪽이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레이스는 황태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그가 단숨에 멀어지는 그레이스의 뒤를 따라잡으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레이스! 잠깐만!”

“놓아주세요.”

“……젠장! 왜 믿지 않는 거지? 이대로 있으면 정말 그대가 죽게 된다고!”

그가 답답한지 울분을 토해 내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레이스는 아프게 자신의 손목을 틀어쥐는 황태자의 손을 뿌리치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녀를 단단히 붙잡은 그의 손은 떨어질 줄을 몰라서 그레이스가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때였다.

“제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그녀의 귓가에 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레이스는 자신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 황태자의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제 머리를 다정하게 감싸안아 품으로 끌어당기는 아서의 손길을 느꼈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포근하게 끌어안는 아서의 품에 매달리듯 안기며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맨 얼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서!”

“조금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서는 놀란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레이스를 향해 다정히 웃더니, 곧 싸늘한 시선으로 황태자를 노려보며 검을 겨누었다. 그러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는 그를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께 검을 겨누는 것은 명백한 불충인 줄 알지만, 그렇다고 기사가 되어서 제 아내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자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미쳤군, 공작. 감히 내 앞에서 그 저주받은 얼굴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검까지 들이대다니. 당장 불경죄로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다는 걸 모르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아서에게 은근한 협박을 가하는 황태자의 말에 아서는 낮게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저주가 깃들었다는 소문이 날 만큼 서늘하게 잘생긴 얼굴에 떠오른 그 비웃음은 언제라도 자신의 위협을 간단히 무시하고 자신의 목을 베어 버릴 수 있다는 듯 여유로웠다.

황태자는 그 미소에 위압감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마치 사냥감을 쫓는 맹수처럼 그를 눈으로 좇던 아서가 말했다.

“그럼 불경죄로 목이 달아나기 전에 내 아내를 놀라게 한 대가를 먼저 받아도 되겠습니까?”

“……뭐?”

그 말에 황태자가 당황한 얼굴로 되묻던 그때였다. 후원의 수풀 속에 숨어 있던 펠릭스 기사단의 기사들이 뛰쳐나오더니 그를 둘러쌌다.

황태자는 순식간에 자신을 포위한 아서와 그의 기사들을 둘러보며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설마, 비밀 정원에서부터 나와 그레이스 영애를 따라온 건가?”

“아내에게 삿된 마음을 품은 남자와 사랑하는 아내를 아무런 보호 없이 단둘이 만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어쩐지 순순히 만남을 허락한다 싶었더니만, 괴물 놈답게 간교하기 짝이 없군그래.”

황태자는 자신에게 비아냥거리는 아서에게 대꾸하며 그의 품에 반쯤 안겨 있는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마치 그녀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냐는 듯 묻는 듯했다.

“하…….”

그 배신감 섞인 시선에 그레이스는 당황하며 짧게 헛웃음을 터트리다 곧 시선을 피해 버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황태자가 자신에게 ‘배신감’ 같은 걸 운운할 권리는 없었다.

황태자는 그런 그레이스의 모습에 상처 입은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서가 걸치고 있던 망토로 그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그레이스를 가리며 말했다.

“앞으로 저는 더욱 간교하고 영악해질 생각입니다. 다시는 누구도 지난번처럼 감히 이 사람을 다치게 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

“……그러니, 전하.”

일부러 황태자를 부르며 살짝 말끝을 흐린 아서가 그레이스를 안은 채, 마치 그에게 길을 터 주듯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더니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인 시선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더 이상 개수작은 그만 부리고, 이만 내 성에서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하! 뭐!?”

격렬하게 화를 쏟아 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웃는 얼굴로 싸늘하게 내뱉는 아서의 말은 제국의 황태자를 향해 내뱉은 말이라고는 보기 힘들 만큼 불손했다.

그 모습에 황태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되묻자, 아서가 손에 쥔 검을 가볍게 허공으로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순순히 나가지 못하시겠다면, 강제로 끌어내 드리죠.”

“……네가 감히, 나를?”

“제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황태자가 당황과 분노에 떨며 묻자, 아서가 다시 검 끝을 그에게 겨누며 눈짓했다. 그러자 황태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펠릭스 기사들이 한 발짝 거리를 좁혔다.

그 모습은 뜻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그 검들이 목을 찌르게 될 것이라는 무언의 위협이었다. 그 모습에 얌전히 아서에게 기대 있던 그레이스가 깜짝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직 반역 준비가 완료되지 않은 지금, 황태자를 해치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그런 그레이스의 염려를 안다는 듯 아서는 잠시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시선을 보낸 후, 다시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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