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115화 (115/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15화

아서가 그레이스를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세우며 그녀를 집무실 밖으로 이끌었다. 그레이스는 조금 전, 흰 올빼미를 보고 잠시나마 놀랐던 마음을 추스르며 자신을 이끄는 그에게 반쯤 몸을 기댄 채 별채를 향해 걸었다.

다정한 품에 안겨 조금 걷자, 놀랐던 마음이 사그라진 후 남은 감정은 쓰디쓴 경멸과 차디찬 냉소였다. 그레이스는 지금쯤 자신의 숙원을 방해하려는 세력이 누구인지 색출해 내기 위해 눈이 벌게져 있을 앨버튼 공작을 떠올리며 그를 마음껏 비웃었다.

‘복수는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조급해하면 어떡하나요. 앨버튼 공작 각하.’

이렇게 나올수록 더욱 불리해지는 것은 그쪽인 것을.

그레이스는 앞으로 자신이 꾸미고 실행할 일들을 떠올리며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 * *

동쪽 탑에서 나와 별채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자신을 데려다준 아서를 배웅한 후, 그의 당부에 따라 얌전히 침실에 머물렀다.

혹시 있을지 모를 첩자를 찾기 위해 수색 작업을 벌이느라 레온 또한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서 나오지 못하게 되었기에, 대신 그녀는 샐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져온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똑똑―.

그러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그레이스는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뗐고, 침실 구석에서 바느질하고 있던 샐 리가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시죠?”

“칼딘 경입니다, 샐리 부인. 실례가 안 된다면 공작 부인을 잠깐 뵐 수 있을까요?”

곧, 칼딘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샐리는 그레이스의 의사를 묻기 위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고, 그레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는 그러고 나서야 일어나 침실 문을 열어 칼딘 경을 맞이했다.

“들어오세요, 칼딘 경.”

“감사합니다.”

침실로 들어온 그가 샐리에게 짧게 목례한 후, 곧장 그레이스가 앉은 창가 앞 소파로 걸어가선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혹시, 교황청이나 로이엔느 공국에서 수상한 움직임이라도 포착된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요?”

“……그것이. 조금 전,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 부인을 뵙기 위해 펠릭스 성을 방문하셨습니다. 공작님의 동석 없이, 오로지 공작 부인만을 뵙고 싶다고 하셨다더군요.”

“네?”

“……어떡하시겠습니까, 부인.”

칼딘 경이 난처한 표정으로 전하는 말에 그레이스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왜 날 보고 싶다는 거지? 무슨 이유로? 설마, 수도에서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추궁하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그레이스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칼딘 경에게 물었다.

“뭔가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만나고 싶으신 이유라든가, 뭐 그런 거요.”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난처한 상황이고요.”

“……그래요?”

칼딘 경의 대답을 들은 그레이스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할 말이 남았다고 만나자는 건지, 그녀로서는 황태자의 속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껏 겪었던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의 원인이 그임을 생각하면 딱히 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태자를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불경죄로 아서가 불이익을 받을 것이 뻔했다.

이래저래 난처한 상황에 그레이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일에 대해, 공작님도 당연히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다든가, 그런 말씀은 안 하셨나요?”

“네. 그저 부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 하셨습니다. 전하를 만나셔도 좋고, 만나지 않으셔도 좋다고요.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모두 각하께서 지겠다고도 하셨습니다.”

“……정말 그 사람답네요.”

그레이스가 살포시 웃으며 칼딘 경에게 대답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전하를 뵙기는 해야겠지. 대체 어떤 목적으로 날 만나러 온 건지, 그리고 현재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황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것은 ‘어떻게’ 만나냐는 것에 대한 고민인데…….’

그레이스는 집중하느라 인상까지 쓰며 생각을 짜냈다. 어디에서 만나야 황태자에게서 자신이 알아내고 싶은 정보들을 모두 알아내고, 또 안전하게 그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헤어질 수 있을까.

‘……아!’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곧, 머릿속으로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그녀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칼딘 경을 향해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잠시, 전하를 어떻게 뵈어야 할까 고민 중이었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고심 끝에 내리신 결론이 어떤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레이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칼딘 경과 문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샐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 기꺼이 만남에 응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당장 전하를 별채의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아뇨. 그곳은 안 돼요.”

“……네? 그럼 어디로 전하를 안내하란 말씀이십니까?”

당황스러운 얼굴로 되묻는 칼딘 경에게 그레이스가 짓궂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분을 비밀 정원으로 안내해 주세요.”

“……비밀 정원이요?”

“그곳이 이 저택 내에서 가장 울창한 곳이잖아요? 곳곳에 기사들이 숨어 있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말이죠.”

이어진 그레이스의 말에 칼딘 경이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공작 부인의 말씀은 미리 저희를 비밀 정원 곳곳에 숨겨 둔 후, 그곳에서 황태자를 영접하시겠다는 뜻이로군요.”

“맞아요.”

“확실히, 공작 부인의 말씀대로 하면 혹여 황태자가 부인께 위해를 가하려 들어도 저희가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의견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칼딘 경에게 그레이스가 덧붙이듯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응접실에서 정식으로 접견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면, 아무래도 전하께선 자신의 말을 다른 누군가가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언행을 조심하게 되겠죠. 하지만, 비밀 정원에서 저와 단둘이 있다고 ‘착각’하게 되면 일순 경계심을 풀고 제가 유도하는 바에 따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을지도 몰라요. ……뭐, 예를 들면 현재 황실 근위군의 수사 사항에 관한 이야기 같은 거요.”

“그렇겠군요! 혜안이십니다, 공작 부인!”

이어지는 그레이스의 설명을 모두 들은 칼딘 경은 거듭 감탄하며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정중히 그레이스의 손등 위로 존경의 입맞춤을 한 후,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지금 당장 올리버 경을 비롯한 정예 기사들을 비밀 정원 곳곳에 매복시킨 후, 전하를 저택 내 비밀 정원으로 안내하라고 전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그레이스는 멀어지는 칼딘 경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이후 문이 닫히고, 고요해진 침실 안에서 그레이스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샐리에게 말했다.

“그럼, 전하를 맞을 준비를 해야겠네. 샐리, 드레스를 갈아입는 걸 도와주겠어?”

“물론이죠.”

샐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옷장으로 걸어가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화장대 앞으로 가 앉으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그러고는 희미한 긴장감으로 굳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볍게 쳤다. 별일 없을 거라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 * *

샐리의 도움을 받아 완벽하게 단장을 마친 그레이스는 곧장 비밀 정원으로 향했다.

그레이스는 몇 달 전 이곳에서 레온, 샐리와 함께 티타임을 가졌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곳의 풍경을 살피며 주변을 한 바퀴 걸었다.

그러던 그때,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로브를 걸친 황태자가 펠릭스 성의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왔다. 그레이스는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 끝을 쥔 채 무릎을 굽히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곳, 펠릭스 성까지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펠릭스 공작 부인.”

그러자 오웬이 얼굴을 반쯤 덮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그레이스의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짙게 가라앉은 녹색 눈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제 남편이 동석하지 않는 자리에서 저를 뵙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로 방문 목적을 묻는 그레이스의 목소리에는 지금 이 만남이 불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웬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꽤 노골적인 축객령이군요, 그레이스 펠릭스 공작 부인. 혹시, 제가 온 것이 불편하십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태어나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나에게 이 저택의 아름다움을 소개시켜 주지 않겠습니까?”

“……제게 저택 구경을 시켜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이어진 황태자의 요청에 그레이스는 굳어지려는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며 그에게 물었다.

사실 그와 이곳 비밀 정원에서만 이야기를 나누다 돌려보낼 생각이었기에 갑작스러운 제안이 당황스러웠다.

오웬은 그런 그레이스의 얼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

“……이 제국의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 모여 있는 황궁에서 나고 자라신 전하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정말 그런 이유에서입니까?”

“……네?”

“그 말이 내게는 ‘너에게 내줄 시간은 없다’라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아닙니까?”

날카롭게 핵심을 찌르는 말에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굳어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저 저는 전하께서 혹 펠릭스 저택을 보고 실망하진 않으실까 염려되어 한 말이랍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그레이스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원래 계획한 대로 비밀 정원 안에서만 모든 대화를 끝마치긴 어려워 보였다.

그레이스는 기사들이 자신들을 쫓기 쉬운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린 후, 황태자를 향해 말했다.

“그럼, 부족하게나마 제가 오늘 전하의 안내자가 되어 펠릭스 저택을 소개해 드릴게요.”

“좋습니다.”

오웬은 그제야 살짝 미소 지으며 그레이스의 옆에 와 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