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14화
한편,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소동의 원인인 펠릭스 성은 겉으로는 평소처럼 평온했다.
성에 거주하는 이들은 막바지에 접어든 겨울을 마무리하고 짧은 봄을 맞이하기 위해 눈이 녹기 시작한 도로를 정비하고, 언 밭을 갈았다.
성의 주인이 거주하는 펠릭스 저택의 시종들과 시녀들은 긴 겨울 내내 사용했던 벽난로와 굴뚝을 청소하고, 두꺼운 이불을 정리하고, 눈이 녹은 정원을 가꾸었다.
그렇게 평온한 풍경과는 달리, 그들은 물밑으로 차근차근 황실과 앨버튼 공작가의 목을 조르기 위한 계획들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펠릭스 기사단의 부단장들을 비롯한 핵심 인력들을 동쪽 탑으로 소집한 아서는 자신의 곁에 앉은 그레이스의 손을 꼭 잡으며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올리버 경, 현재 수도의 황족들과 귀족들의 여론은 어떤가?”
올리버 경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계속되는 불미스러운 사건에도 황실 근위군과 수도 방위군이 실마리조차 잡고 있지 못한 탓에, 저희가 퍼트린 소문이 황제에 비판적인 이들에겐 거의 기정사실화된 분위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친황제파들의 입장은 어떻지?”
“겉으로는 모두 낭설일 뿐이라 일축하고 있지만, 뒤에선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일 경우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계산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벌써부터 황제에게 보내던 지지를 거두고 다른 편에 힘을 싣겠다고 서신을 보내는 귀족들도 있었고요. 그런 분위기가 제대로 드러난 것은 얼마 전, 크로인 공작 부인의 파티에서였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파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도 될까요, 올리버 경?”
그레이스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묻자, 올리버 경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로인 공작 부인의 파티에 앨버튼 공작 부인과 마리안느 영애가 참석했는데, 그 파티를 주최한 크로인 공작 부인은 물론이고 자리한 모든 이가 겉으로는 그들을 친절히 맞이하면서 뒤로는 흉흉한 일들을 거론하며 안 좋은 소리를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잔뜩 화가 나 돌아갔다더군요.”
“그것참 자업자득이네요.”
그레이스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하는 올리버 경에게 발랄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마치 이미 그들에 대한 일말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가벼웠다.
아서가 그런 그레이스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죠. 부인께서 당한 일을 생각하면 고작 파티에서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것 정도로는 모자랍니다.”
“맞습니다, 공작 부인.”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레이스는 아서와 올리버 경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서는 생긋 웃고 있는 그녀에게 마주 웃어 준 후, 올리버 경의 옆에 앉은 토어 경을 향해 말했다.
“이 모든 일은 토어 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경의 공이 컸다.”
“아닙니다, 각하.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수도에는 ‘핏빛 독수리가 새겨진 시신이 버려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가?”
아서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토어 경이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아직 더 남았습니다. 생각보다 앨버튼 공작이 심어 놓은 쥐새끼들이 많더군요.”
“그 일들도 경이 직접 할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황실 근위군과 수도 방위군이 눈에 불을 켜고 범인 색출에 나서고 있어 쉽진 않을 텐데, 부디 조심하도록 해.”
“걱정 마십시오. 레이나 영애의 부친이신 위그 백작님과 비앙카 영애의 부친이신 스펜드라 후작님께서 도움을 주고 계시니 제 정체가 드러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군.”
“……다행이에요.”
토어 경의 대답에 아서와 그레이스는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자신들의 딸이 아서로 인해 인생을 망쳤다며 원망하던 그들은 수도원에서 구출해 낸 레이나 영애와 그레이스의 증언을 믿고 이젠 자신들의 편에서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들이 마음속 오랜 앙금을 떨치고 눈앞의 진실을 마주하며 자신들을 돕는 것에 고마워하는 한편, 그들과 자신의 인생을 망쳐 버린 황제와 앨버튼 공작에 대한 분노를 다시금 불태웠다.
‘당신이 저지른 악행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예요, 앨버튼 공작 각하.’
그레이스는 결의로 굳어진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쪽에 앉은 칼딘 경과 캐러독 경을 향해 말했다.
“아직까지 로이엔느 대공 쪽에서 도착한 서신은 없나요?”
“네. 아직 로이엔느 공국에서 온 서신은 없었습니다.”
“그럼, 교황청에서는요?”
“교황청에선 아직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인 듯합니다. 확실한 물증 없이 황태자를 검증하겠다고 나섰다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감당하게 될 역풍에 대해 두려워하는 듯했습니다.”
“……그렇군요.”
돌아온 대답에 그레이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는 맞잡은 그녀의 손을 다정히 토닥이며 칼딘 경과 캐러독 경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로이엔느 공작은 예전부터 나에게 뿌리 깊은 반감을 가진 자이고, 교황청은 자신들이 뭔가를 주도하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하는 입장이니까. ……이제 로이엔느 대공과 교황을 설득하는 서신을 보내는 것을 중단하는 대신, 계속 그들의 동향만 주시하도록 해. 혹여 그들이 수상한 정황을 보이면 당장이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예, 각하.”
“명심하겠습니다.”
아서의 명령에 칼딘 경과 캐러독 경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들을 향해 다정히 미소 짓다가 곧, 시선을 돌려 벽에 붙어 있는 괘종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난 것 같으니, 슬슬 별채로 돌아가 볼 생각에서였다.
그레이스는 이제 펠릭스 성 내부의 일들에 대한 의논을 시작하려는 듯 자신들의 옆에 쌓아 둔 양피지들을 정리하는 기사들과 그들이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리는 아서를 향해 말했다.
“황제나 앨버튼 공작과 관련된 이야기는 끝난 건가요?”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 봐도 될까요? 30분 뒤에 레온과 산책을 하기로 했거든요.”
“그렇다면 얼른 가 보셔야겠군요.”
아서는 그레이스의 손등 위에 짧게 입맞춤하며 그리 말했다. 그레이스는 손등에 와 닿은 간지러운 감촉에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양피지들을 정리하는 손길을 멈추고 자신에게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네기 위해 기다리는 기사들을 돌아보던 그때였다.
‘저건…….’
무심코 돌아본 동쪽 탑의 창 위로 흰 올빼미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것을 본 순간 단번에 저 올빼미가 앨버튼 공작이 보낸 것임을 눈치챘고, 재빨리 아서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서! 석궁! 당장 석궁을 가져다줘요!”
“부인? 석궁은 왜…….”
“석궁이 없다면 단검이든 뭐든, 저기 저 흰 올빼미를 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요! 급해요!”
그레이스의 채근에 아서는 곧장 자신의 집무실 벽 한쪽에 걸려 있던 석궁과 화살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곧장 창문을 열고, 집무실 안에 있던 이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도망치는 흰 올빼미의 날개를 조준하고는 활시위를 당겼다.
퍽―!
날아간 화살은 곧장 흰 올빼미의 오른쪽 날개 윗부분에 꽂혔고, 저택 밖으로 날아가던 올빼미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서는 열린 창가를 내다보며 조금 전 올빼미가 떨어진 풀숲의 위치를 확인하곤 기사들에게 말했다.
“누구든 당장 내려가서 화살에 맞은 올빼미를 수습해 데려와.”
“알겠습니다.”
그 명령에 응한 것은 올리버 경이었다. 그는 곧장 집무실 밖을 나가더니 잠시 후, 아서가 쏜 석궁에 오른쪽 날개가 관통된 흰 올빼미를 안고 돌아왔다.
그레이스는 얼른 올리버 경의 곁으로 다가가 화살에 맞아 푸드덕대는 올빼미를 확인하고서 아서와 다른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 흰 깃털도 그렇고, 발목에 희미하게 실선이 그어져 있는 것도 그렇고. 앨버튼 공작의 올빼미가 확실해요.”
“야행성인 올빼미를 이 시간에 돌아다니게 하다니. 딱 봐도 수상한 짓을 꾸밀 만큼, 지금 앨버튼 공작에겐 여유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겠죠?”
“덧붙이자면 앨버튼 공작이 요즘 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배후가 우리라고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화살을 맞고 골골거리는 흰 올빼미의 크고 노란 눈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레이스가 보고 단번에 앨버튼 공작의 소유임을 눈치챌 만큼, 올빼미의 생김새도, 눈도 보통의 올빼미들과는 다른 기괴한 구석이 있었다.
아서는 제 몸을 붙잡은 올리버 경과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부리를 뻐끔거리는 올빼미 위로 집무실에 걸려 있던 천을 덮어 버리며 말했다.
“일단, 이 녀석의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 치료한 후 자물쇠가 달린 새장에 가두고 감시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검은 천으로 눈도 가려 두도록 해. 만약 앨버튼 공작이 이 녀석이 우리에게 잡힐 것을 감안하고 보낸 거라면, 분명 이 녀석의 눈을 통해 우리 성의 기밀을 엿볼 수 있도록 어떤 마법을 걸어 놓았을 수도 있으니까.”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올리버 경은 조금 전 아서가 덮어 버린 천으로 올빼미를 칭칭 감아 보이지 않게 한 후, 그것을 안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아서는 멀어지는 올리버 경의 발소리를 들으며 집무실 안에 남아 있는 다른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성 내부의 안건에 대한 회의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경들은 지금 당장 저택과 성을 샅샅이 수색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것이 보이면 모조리 붙잡아 심문하도록 해. 그래서 앨버튼 공작과 조금이라도 연루가 된 것이 있다면 당장 끌고 내 앞으로 데려와.”
“예, 각하!”
대표로 아서의 말에 대답한 토어 경을 시작으로 다른 기사들이 차례로 아서에게 예를 표한 후, 곧장 집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레이스는 멀어지는 기사들의 뒷모습과 굳어진 아서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말했다.
“부인께서도 이만 별채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래야겠어요.”
그레이스가 파리한 얼굴을 한 채 힘없이 웃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아서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저택 안에 앨버튼 공작의 첩자가 숨어들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오늘은 레온과 산책 대신 별채에서 머무르시고요.”
“네, 그럴게요.”
“그럼 이제 그만 가죠. 제가 별채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