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12화
“여보! 내 말 좀 들어 봐요, 글쎄……!”
앨버튼 공작은 어째서인지 분노와 모멸감으로 빨개진 얼굴을 한 자신의 아내와 큰딸을 향해 검지를 입술 위로 갖다 대며 조용히 시켰다.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집사장 톰이 배신자일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들의 입을 다물게 한 앨버튼 공작은 구석에서 눈치만 보고 있는 톰을 향해 말했다.
“이만 나가 봐.”
“네, 각하.”
“그리고, 당장 저택 내의 사용인들과 저택을 드나드는 상인들의 뒤를 다시 캐서 그 결과를 내게 보고하도록 해.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있는 자들은 곧장 제압해서 내 앞으로 끌고 오도록 하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톰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도망치듯 응접실 밖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앨버튼 공작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따라 소파에 앉는 모녀를 향해 물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오늘 크로인 공작 부인의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넌지시 묻는 남편의 말에 앨버튼 공작 부인이 투실한 손으로 쥐고 있던 외출복 모자를 구기며 대답했다.
“말도 마요! 나와 마리안느가 그 저택에서 어떤 모욕을 당하고 온 줄 안다면, 아마 당신은 기사단을 동원해 그 티파티에 참석한 여자들을 전부 베어 버리고 싶은 심정일걸요?”
“모욕? 누가 감히 당신과 마리안느를 모욕했다는 거지?”
앨버튼 공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앨버튼 공작 부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굳은 표정의 마리안느가 대신 그의 말에 대답했다.
“딱히 누구라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예요, 아버지. 그 티파티에 참석한 여자들 전부가 나와 어머니를 놓고 앞에서는 동정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수군거리기 바빴으니까요.”
“그것들이 감히 너에 대해 뭐라고 떠들었느냐, 마리안느.”
“그야 당연히 근래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핏빛 독수리 저주 연쇄 살인’과 관련해서죠!”
마리안느가 양손으로 고급스러운 실크 드레스를 구기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티파티를 주최한 크로인 공작 부인은 물론이고 공작 부인의 말동무인 맥클라이스 백작 부인을 비롯해 그 자리에 모여 있던 황족과 귀부인들이 하나같이 제게 그 일이 관해 물었다고요!
황태자 전하에게서 무슨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냐는 둥, 혹시 최근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은 없었냐는 둥……. 앞에서는 절 걱정하는 듯하면서 뒤에선 제가 만진 잔을 시종을 시켜 깨 버리고 저와 드레스 끝도 닿지 않게 슬슬 피했단 말이에요!”
“…….”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뭔 줄 아세요, 아버지? 절 불쌍하게 취급하는 그들의 시선이었어요! 그들은 황태자 전하가 괴물이라는 걸 확신하는 듯했어요.
그래서 저를 ‘평생 괴물과 함께 살아야 할 여자’로 보면서 노골적으로 동정했다고요! 꼭 펠릭스 공작과 결혼이 결정된 후의 그레이스를 보듯 말이에요! ……내가, 이 내가 그따위 쓸모없는 것과 똑같은 취급을 받다니! 그 참담한 심정은 저 말고는 그 누구도 모를 거예요!”
참석했던 티파티에서 겪었던 일들을 나열하며 울분을 토해 내던 마리안느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작게 흐느꼈다.
그러자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앨버튼 공작 부인이 얼른 제 딸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자신의 남편에게 소리쳤다.
“여보! 이대로 그 망할 것들이 소문을 퍼트리며 우리의 명예를 더럽히는 꼴을 그냥 손 놓고 보고만 있을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레지나.”
“절대 그냥 둬서는 안 돼요! 황태자 전하의 비밀과 우리가 벌인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날엔 모든 게 다 끝장이라고요!
알죠? 벌써부터 황제 폐하의 권력을 지탱하고 있던 친황제파의 유력 귀족들이 사람을 풀고 있다고 해요. 겉으로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겠다는 핑계를 대면서, 실상은 그 소문의 진위를 조사하고 다닌다더군요. 그러다가 모두가 그 비밀에 대해 알게 되면 그, 그땐―!”
“빌어먹을! 알아! 나도 아니까 앓는 소리 좀 그만해, 레지나!”
“여보!”
이어지는 앨버튼 공작 부인의 징징거림에 앨버튼 공작이 거친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그 후, 그는 허공에 한 손을 뻗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벨리알! 당장 나와, 벨리알!”
그러자 앨버튼 공작이 앉은 응접실 소파 옆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그곳에서 온몸에 로브를 뒤집어쓴 차림의 벨리알이 나타났다.
벨리알은 로브에 달린 후드 아래 드러난 가로로 쭉 찢어진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더니 앨버튼 공작에게 말했다.
“……뭐야,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귀찮게 부르지 말고.”
“한가롭게 낮잠을 잘 시간은 있으면서, 내 부름은 귀찮다는 건가?”
“어쩔 수 없잖아. 초대 신이 피에 새긴 저주를 벗겨 내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앨버튼 공작의 힐난에 벨리알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깡마른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을 영 마뜩잖다는 듯 노려보던 앨버튼 공작이 혀를 차며 벨리알에게 말했다.
“쯧, 핑계도 좋군.”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야.”
“어찌 됐든 지금은 한시가 급해! 벌써 다섯 번째 사건이 터졌어! 범인에 대해 알아보고는 있는 건가?”
벨리알은 또다시 길게 하품을 늘어놓은 뒤, 대답했다.
“하암―. 일단, 그레고리를 풀어서 수도를 정찰하다가 수상한 놈이 있으면 보고해 두라고 일러뒀지만, 글쎄. 여태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그 녀석도 뭔갈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야.”
“그레고리가 물어 온 중요한 정보를 네가 게으름을 피우느라 놓친 건 아니고?”
앨버튼 공작이 날 선 목소리로 되묻자, 나른하게 하품하고 있던 벨리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건방진 언사는 뭐지? 감히 인간 주제에 내 능력을 의심하는 건가?”
진심으로 언짢은 모양인지, 벨리알이 등 뒤로 진녹색의 불꽃까지 피워 내며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앨버튼 공작 부인과 마리안느는 조용히 인상을 쓰며 시선을 피했고, 앨버튼 공작은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군. 내가 말실수를 했어. 아직 이 흉악무도한 짓을 벌인 자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는 이 상황이 답답해져서 그만 날카로워진 모양이야.”
“……흥! 말조심하라고.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초대 신만큼 인내심이 좋질 못해.”
그제야 벨리알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앨버튼 공작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화가 조금 누그러진 듯 벨리알의 등 뒤에서 피어오르던 진녹색의 불꽃은 사그라진 상태였다.
앨버튼 공작이 다시 슬슬 눈치를 보며 조금 전보다 공손한 태도로 벨리알에게 현재 자신의 심정에 대해 토로했다.
“답답해서 그러네, 답답해서! 대체 어떤 놈이기에 벨리알, 너의 감시망까지 피해 수도 내의 내 첩자들만 골라 해칠 수 있는 건지!”
“역시, 소홀하게 감시한 것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증거를 남기지 않을 수 있죠?”
마리안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앨버튼 공작의 말을 거들자, 벨리알이 혀를 차더니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대꾸했다.
“쯧, 소홀하지 않았다니까! 다만, 감시 범위를 좁힌 것뿐이야.”
“뭐?”
“어째서요? 이럴 때일수록 더욱 감시 범위를 늘려야죠!”
앨버튼 공작 부인이 답답하다는 듯 채근하자, 벨리알이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며 대답했다.
“멍청하긴. 잊었어? 지금껏 수년 동안 제물들에게 저주의 마법을 건 게 누구인지? 그리고, 그 저주를 성공시킨 건?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마력이 빠져나갔는지 잊었나?”
“그래서 내 제자들의 마력과 제물들의 영혼으로 충당해 줬지 않나. 그걸로는 모자랐다는 거야?”
“당연하지! 고작 그따위것들 좀 먹었다고 내 마력이 채워질 것 같아? 다른 일도 아니고 초대 신의 저주를 벗기는 일이 그리 간단하게 될 줄 알았어?”
벨리알은 씨근덕거리며 자신에게 따지는 앨버튼 공작과 그 식솔들에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맞받아치지 못하는 그들을 돌아보며 벨리알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쨌든, 지금 내가 가진 마력으로는 수도 전체를 내 손바닥처럼 매 순간 샅샅이 감시하는 건 무리야.”
“그레고리를 잘 활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건 안 된다, 마리안느. 안 그래도 발견된 시신들 위에 뿌려진 흰 올빼미 깃털 때문에 이번 일의 배후에 우리가 있다고 의심하는 판국인데 그레고리가 수도 위를 날아다니는 걸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의혹은 더욱 증폭될 거다.”
“그럼 이제 어떡해요!? 이대로 계속 입 가벼운 귀부인들과 천박한 시민들이 저와 우리 가문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걸 마냥 손 놓고 보고 계실 작정이세요?”
마리안느가 울분을 토해 내며 묻자, 앨버튼 공작은 인상을 쓰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대로 이대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지난 밤 황궁에서 온 서신에서도 ‘이 사태를 신속히 수습할 방법을 내놓으라’는 황제의 의중이 담겨 있었지 않았던가.
앨버튼 공작이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황제 같으니. 지금 이 상황이 누구 때문에 일어난 건데!’
자신이 아니었으면 진작 초대 신의 저주를 받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황태자를 지금껏 살려 놓았더니, 그 노고에 대해 고마워하진 못할 망정 더 성과를 내놓으라 재촉하는 황제와 황실이 정말이지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더 아쉬운 쪽은 자신이었으니까. 앨버튼 공작이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말했다.
“……당연히 아니지. 이대로 가다간 현 황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지닌 귀족들이 여론을 등에 업고 정말로 황태자가 초대 신의 저주를 받았는지에 대해 교황청에 검증해 보자고 할 텐데, 그랬다간 황제도 우리도 끝장이야! 젠장!”
“……교황청 전부를 매수할 순 없겠죠?”
“전부를 매수할 수 없을뿐더러, 매수 자체가 불가능해. 현 교황은 예전부터 황실이 그들의 신성력보다 우리 가문의 마법 능력을 더 높게 쳐 주고 중용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으니까. 그놈들은 이때다 싶어 우리 가문을 몰락시키고자 할 거야.”
“……그렇군요.”
“황태자가 교황청의 검증을 받는 일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혹시나 그랬다간 당장 교황청의 발표를 들은 이들이 저주받은 황태자를 폐위하고 다른 이로 황위 계승을 하자 주장할 테고, 그 이후엔 황태자를 살리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 우리를 살려 두려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마리안느를 황태자비로 만들어 그가 낳은 소생으로 장차 제국의 섭정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려던 자신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앨버튼 공작이 초조한 듯 손끝으로 소파의 팔걸이 부분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일단, 심증이 가는 놈들부터 감시망을 좁혀야겠어. 벨리알, 당장 오늘 그레고리를 펠릭스 공작가로 날려 보내. 들키지 않게 감시하다 보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지.”
“알겠어, 그러도록 하지.”
벨리알은 앨버튼 공작의 말에 대답하더니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이후, 그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