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11화
위그 백작 부인은 자신의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로이엔느 대공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후, 조금 진정이 된 듯 자신의 허리에 양팔을 두른 채 말없이 안겨 있는 딸을 부축하며 아서와 그레이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 여식을 구해 주시고, 지금껏 돌봐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펠릭스 공작 각하, 펠릭스 공작 부인.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위그 백작 부인.”
“저희 가문의 힘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서신을 보내 주세요. 목숨을 걸고 협력하겠어요.”
“네. 부디 힘을 빌려주십시오.”
아서의 대답에 위그 백작 부인은 짧게 웃더니 쓰고 있던 검은 베일 달린 모자를 벗어 한 손에 쥐었다. 하나뿐인 딸이 돌아왔고, 딸의 불행에 대해 밝혀졌으니 더 이상 상복을 입으며 청승을 떨 필요가 없었다.
위그 백작 부인은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냉정한 표정으로 아서와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는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제 남편이 저택에서 제가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서요. 당장이라도 그이에게 돌아가 오늘 보고 들은 것들을 알려 주고 싶네요.”
“네. 그러십시오.”
“그럼, 다음에 뵙겠어요.”
“샐리, 위그 백작 부인을 배웅해 드려.”
“네, 마님.”
샐리에게 백작 부인의 배웅을 지시한 그레이스는 곧, 시선을 돌려 어느새 대치 중인 아서와 로이엔느 공작을 응시했다. 그러곤 조마조마하며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을 벌일 듯 험악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현재 두 사람은 말없이 복잡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아서였다.
“모든 걸 알게 된 지금도, 내가 원망스럽나?”
로이엔느 대공이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만약 네놈에게 그런 힘이 없었더라면, 엘리가 그놈들의 표적이 되지 않았을 테니.”
“……그런가.”
“하지만 네놈보다 더 원망스러운 건, 네놈을 향한 복수에 눈이 멀어 엘리를 해친 세력에게 협력한 나다.”
“……대공.”
“오빠라는 놈이 이리 어리석고 아집에 가득 찬 사내라, 불쌍한 엘리는 천국에 가서도 편히 쉬지 못했겠군.”
로이엔느 대공이 스스로를 비웃으며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응접실 문 쪽으로 걸어가 갑자기 아서의 앞에 멈춰 선 채 그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을 돕겠다. 제국의 황제와 앨버튼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일에 전면적으로 협력하지.”
“진심인가?”
“왜, 네놈을 배신하고 황제에게 오늘 들은 것을 전부 이야기해 버릴까 봐 두렵나? 걱정 마라. 엘리를 죽게 한 것도 모자라 그녀의 시신까지 능욕한 그놈들에게 협력할 일은 없으니.”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로이엔느 대공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응접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레이스는 불안한 시선으로 멀어지는 로이엔느 대공의 뒷모습과 문밖에 서 있다가 아서의 눈짓에 다급히 그의 뒤를 쫓는 올리버 경의 모습을 응시하며 말했다.
“……로이엔느 대공의 말, 믿어도 되겠죠?”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자입니다. 게다가 다른 일도 아니고 동생의 복수가 걸린 일이니, 그가 배신할 염려는 접어 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레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아서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지금까지 부인의 계획 중 실패한 것이 한 가지라도 있었습니까? 다 잘될 겁니다.”
“……그렇겠죠?”
“그럼요.”
그레이스는 다정한 목소리로 거듭 확신을 주는 아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그를 올려다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말대로 다 잘될 터였다.
시간도, 신도,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편이니까.
그레이스는 지금쯤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의 대가가 그들의 목을 조여 오는 것도 모른 채, 수도에서 벌어진 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앨버튼 공작과 황실을 떠올리며 차갑게 비웃었다.
* * *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집무실 창가 앞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는 앨버튼 공작의 굳은 얼굴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불과 이틀 전,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이 버려져 있던 앨버튼 공작가의 정문 앞 돌길이었다. 앨버튼 공작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그날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신원을 알애날 수 있을 만한 곳은 전부 훼손되어 사건의 조사를 위해 파견된 황실 근위군도 수도 방위군의 조사관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앨버튼 공작만은 그 시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자는 바로 펠릭스 성에 첩자로 파견되었다가 얼마 전, 황실과 앨버튼 저택을 오가는 연락책이 된 그의 심복 필비였다.
그리고 필비의 시신 옆에 흩뿌려져 있던 흰 올빼미 깃털까지. 그것은 앨버튼 공작에게 있어 이번 사건을 벌인 범인이 그에게 내리는 경고 혹은 도전장처럼 느껴졌다. ‘네가 꾸민 일을 모두 알고 있으며, 네 악행을 세상에 밝히겠다’는 그런 뜻 말이다.
“젠장…….”
앨버튼 공작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대체 이 일을 꾸민 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일을 꾸민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놈이 또다시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처단해야 했다.
앨버튼 공작은 손가락으로 창틀을 툭툭 두드리며 대체 이번 일을 꾸민 자가 누구일까 고민했다.
‘내 수족들을 하나둘 색출해 처리할 만큼 정보력과 군사력이 강하고, 수도 빈민가에 저주와 관련된 소문을 내는 그놈이 누굴까? 펠릭스 공작? 로이엔느 대공? ……설마, 황태자는 아니겠지?’
앨버튼 공작은 이번 일을 꾸밀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이 꾸민 일들의 진상에 다가설 법한 자들을 추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대체 누가 이따위 일을 꾸몄는지 짐작되지 않았다.
“칫.”
앨버튼 공작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대체 누가 ‘저주’의 진실에 이토록 가깝게 접근한 걸까.
‘가장 심증이 가는 놈은 펠릭스 공작, 그놈이야. 그놈은 엘렉트라 공녀의 죽음과 약혼녀들의 불행이 이어지자 막대한 재산을 들여 고대의 금지된 마법에 대한 기록들과 우리 가문의 비밀들이 적힌 금서들을 사 모았으니까.’
하지만, 그 기록들은 마법 언어를 읽을 수 없는 자들은 열람할 수 없다. 그리고 마법 언어를 배우고 해석할 수 있는 자들은 앨버튼 공작가의 피가 섞인 자들이거나, 혹은 앨버튼 공작가로부터 마법 교육을 받은 자들뿐이다.
앨버튼 공작은 순간 그레이스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곧 차갑게 비웃으며 부정했다.
‘그레이스, 그 쓸모없는 것이 그런 능력을 지녔을 있을 리가 만무하지.’
그 무능력한 것이 마법 능력이 있을 리 없다. 만약 그레이스가 배우지 못한 마법 언어를 읽고, 모든 진상을 알아낼 만큼 영특하고 저주에 밝았다면 펠릭스 공작과 결혼시켜 제물로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앨버튼 공작이 그렇게 생각하며, 그레이스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던 그때였다.
“각하! 안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대답해 주십시오!”
문밖에서 다급히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집사장, 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버튼 공작은 문 쪽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와! 들어와서 말해!”
그러자 벌컥 문이 열리더니, 다급한 표정을 한 톰이 들어왔다. 집무실 문을 채 닫을 새도 없이 달려 들어온 톰은 창가에 선 앨버튼 공작을 향해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 큰일 났습니다, 각하.”
“무슨 큰일?”
“다섯 번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톰의 말에 앨버튼 공작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뭐!? 이번에는 누가 희생되었지?”
“……폐하의 시종이신 앙리 시무르 남작입니다. 이전 희생자들처럼 가슴에 핏빛 독수리가 새겨진 채 수도의 외곽에 있는 폐하의 사냥용 별장 앞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톰의 보고를 들은 앨버튼 공작은 주먹으로 창틀을 내려치며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이번에도 자신이 심어 놓은 첩자가 희생되고 말았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자신이 황실과 유력 귀족 가문에 심어 놓은 첩자들만 귀신같이 골라내 그 목숨을 빼앗고 다니는 걸까.
‘대체 이 일을 벌이는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저택 내의 정보가 줄줄 새고 있다는 건 분명해. 대체 어떤 놈이 내 첩자들에 대한 정보를 흘린 거지?’
그 정보를 흘린 이가 누구이든, 절대 곱게 죽이지는 않겠다. 앨버튼 공작은 분노로 창틀을 내리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연신 자신의 눈치만 보고 있는 톰을 향해 소리쳤다.
“빌어먹을! 젠장할! 대체 어떤 놈이 겁도 없이 내 저택 내의 기밀들을 빼내 이따위 일을 저지르는 거야! 톰! 불과 며칠 전에 저택 내 사용인들과 드나드는 상인들을 모두 조사했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 그렇습니다. 각하.”
“그놈들 중 한 놈도 수상한 행적을 보이는 놈이 없었나?”
“……네. 그렇습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기밀들을 빼내 내가 심어 놓은 첩자들만 골라 해칠 수 있었던 거냐고!”
앨버튼 공작이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애꿎은 톰을 노려보며 거칠게 소리쳤다.
분명히 앨버튼 가의 저택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데, 그놈의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앨버튼 공작은 터질 것같이 답답한 마음이 들어 한 손으로 가슴을 쿵쿵 치며 집무실 창가 앞을 오갔다. 그 모습에 톰은 죄인처럼 눈치만 보며 시선을 떨굴 뿐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살짝 열린 집무실 문을 열어젖히며 화려한 외출용 드레스를 걸친 앨버튼 공작 부인과 마리안느 앨버튼이 시녀들을 대동한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은 잔뜩 일그러진 앨버튼 공작의 얼굴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