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10화
위그 백작 부인은 쓰고 있던 모자에서 내려온 길고 검은 베일을 걷으며 애원하듯 자신의 앞에 앉은 그레이스와 시선을 맞췄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응시하는 위그 백작 부인의 슬픈 눈과 여전히 적개심과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살피는 로이엔느 공작을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들어 주세요.”
그레이스는 그들을 따라 소파에 앉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얼마 전, 펠릭스 기사단에게 털어놓았던 이야기와 그 이후 벌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겪었던 두렵고 무서운 환상과 앨버튼 공작에게 독살을 당할 뻔했던 때처럼 힘들었던 이야기를 꺼낼 때면 잠깐 말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곁에서 다정히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아서 덕분에 그녀는 무사히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두 분을 이곳에 모신 거예요.”
이윽고 모든 이야기를 끝마친 그레이스는 어느새 표정이 어두워진 위그 백작 부인과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로이엔느 대공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세상에, 그럴 수가. 내 딸 레이나에게 그런 일이…….”
그레이스가 꺼낸 이야기에 위그 백작 부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로이엔느 대공은 그런 위그 백작 부인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더니, 곧 험악한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믿지?”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전부 사실이랍니다.”
“사실이니 무작정 그 말을 믿어 달란 건가? 하! 웃기는군.”
담담하게 전부 사실이라고 대답하는 그레이스를 향해 로이엔느 대공이 빈정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에 그레이스는 연신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로이엔느 대공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대공께서는 제 말이 믿기지 않으시는 건가요, 아니면 믿고 싶지 않으신 건가요?”
“……뭐라고?”
로이엔느 대공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레이스를 노려보며 되물었다. 그러자, 지금껏 그레이스의 곁에서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던 아서가 말문을 열었다.
“태도를 보아하니 믿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대공, 혹시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가? 단 하나뿐인 동생을 해친 진짜 범인의 농간에 놀아나서 공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을 일으킨 자신이 어리석어서 못 참겠나?”
“빌어먹을! 펠릭스 공작, 네 이놈! 날 겁쟁이 취급하지 마라!”
아서의 싸늘한 일침에 로이엔느 대공이 흥분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서가 그런 그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못 믿겠다는 건 그렇다 치지. 하지만, 지금 자네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진실조차 외면하려고 들지 않나. 더한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을 텐데.”
“하, 웃기는군. 누가 뭘 외면해? 대체 뭘 내 눈으로 확인했다는…….”
“내 서신을 받고 곧장 확인했을 것 아닌가. ……그 눈으로 직접, 엘렉트라 공녀의 시신에 남아 있던 흉터들을.”
“……!”
“만약 내가 보낸 서신에 적힌 내용을 전부 낭설이라 여겼을 뿐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테지.”
아서의 말에 로이엔느 대공은 물론 그레이스와 위그 백작 부인마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아서의 말은 마치 자꾸만 사실을 외면하는 로이엔느 대공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쐐기를 박는 듯했다.
그레이스는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은 로이엔느 대공과 그런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하는 아서, 그리고 착잡한 표정으로 눈물에 젖은 얼굴을 닦는 위그 백작 부인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 후, 그레이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로이엔느 대공에게 말했다.
“……그 마음, 잘 알아요. 설령 자신의 눈으로 보고 사실을 확인했다고 해도, 그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이 신뢰가 가지 않는다면 당연히 믿고 싶지 않겠죠.”
“그래, 맞아. 난 아직도 못 믿겠어. 더 솔직히 말할까? 어쩌면 엘리의 몸에 남은 그 상흔들도 저 펠릭스 공작 놈이 해 놓고 황제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것처럼 느껴져.”
그레이스는 연신 삐딱한 태도로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로이엔느 대공의 태도에도 별 동요 없이 고요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로이엔느 대공에게, 그레이스는 곧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저와 공작님 말고 다른 피해자의 증언이 있다면,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하실 건가요?”
“……뭐?”
그레이스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응접실 옆에 딸린 별실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
“샐리, 레이나 영애를 이리로 모시고 와 줘.”
“네, 마님.”
이내 별실 문이 열리고, 샐리가 레이나를 부축한 채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애플튼 수도원을 빠져나와 처음 펠릭스 성에 왔을 때보다는 살이 조금 더 붙고 혈색이 돌아온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광증으로 인해 그녀의 눈은 초점 없이 멍하기만 했다.
그런 레이나의 모습에 로이엔느 대공은 인상을 찌푸렸고, 위그 백작 부인은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레이나! 아가!”
위그 백작 부인은 비명을 지르듯 제 딸의 이름을 부르며 애틋한 손길로 레이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레이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눈으로 어머니, 위그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그 백작 부인은 또다시 흐느껴 울며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 레이나를 향해 애원하듯 말했다.
“레이나, 날 알아보지 못하겠니? 네 어미란다!”
“……어머니?”
“그래, 아가. 어미란다, 못난 어미야…….”
“……어떻게?”
절박한 애원이 레이나의 혼곤한 정신을 깨운 것일까. 레이나는 자신을 연신 어루만지며 우는 어머니, 위그 백작 부인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되묻기까지 했다.
위그 백작 부인이 레이나의 깡마른 두 손을 꼭 잡으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펠릭스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널 애플튼 수도원에서 구출한 뒤, 이곳 펠릭스 성에서 널 돌보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단다.”
“……펠릭스 공작? 애플튼 수도원?”
그런데, 위그 백작 부인의 대답을 들은 레이나의 멍한 눈이 갑자기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자신을 붙잡은 손을 거칠게 뿌리치더니 빗자루처럼 푸석푸석한 제 금발을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레, 레이나!”
“레이나 님!”
“레이나 영애!”
그 모습에 위그 백작 부인은 물론이고 레이나를 부축하고 있던 샐리와 아서, 그레이스, 그리고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관망하고 있던 로이엔느 대공까지 전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레이나가 자신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샐리는 다급히 두 팔로 레이나를 끌어안았고, 위그 백작 부인은 그녀가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손톱을 세워 자신의 몸을 해치지 않도록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레이나는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거칠게 몸부림치며 절규했다.
“싫어!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이 빌어먹을 앨버튼 놈들아! 날 다시 펠릭스 공작가로 보내 줘!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고, 그 남자가 있는 곳으로 보내 달란 말이야!”
“레이나 님, 여기가 바로 펠릭스 공작가랍니다! 그리고, 이곳에선 그 누구도 레이나 님을 괴롭히지 않아요!”
“……거짓말 마! 대신할 제물이 생길 때까지 날 놓아주지 않을 거잖아!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날 놔주지 않을 거잖아! 엘렉트라 공녀처럼, 그리고 다른 여자들처럼 말이야!”
레이나는 결국 자신을 붙잡는 사람들의 손을 모두 뿌리친 후, 응접실 구석으로 도망가 몸을 웅크렸다.
다시 고통스러웠던 기억에 빠져 정신을 놓아 버린 레이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 어떤 말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두려움으로 가득한 얼굴로 온몸을 덜덜 떨었다.
로이엔느 대공은 조금 전, 레이나가 언급한 엘렉트라 공녀의 일을 듣고 넋이 나간 얼굴로 벌벌 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그 백작 부인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두려움에 덜덜 떠는 레이나의 몸을 끌어안은 채, 그녀의 귓가에 다정히 속삭였다.
“……레이나, 걱정 말렴. 이제 네게 그런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을 거야. 그 누구도 다시는 널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네 아버지와 나, 그리고 위그 가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
그 후, 위그 백작 부인은 눈물 젖은 눈으로 아서와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해요. 그리고, 내 딸의 광증의 이유를 알려 주시고 그 끔찍한 놈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한 것이 없습니다. 진상을 알아낸 것도, 백작 부인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고 먼저 말한 것도 모두 부인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천만에요.”
아서와 그레이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위그 백작 부인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특히, 아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황실과 앨버튼 공작이 벌인 이 음모의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이런 일들을 벌이게 한 원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만약 자신이 사람을 되살릴 수 있는 힘을 가지지 않았거나, 그들이 그 힘을 몰랐다면 레이나가 저렇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입맛이 썼다.
그레이스는 그런 아서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조용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서는 그녀를 향해 힘없이 웃어 보인 후, 응접실 구석으로 걸어가 레이나를 꼭 끌어안고 있는 위그 백작 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닥이 차갑습니다. 레이나 영애는 제가 부축할 테니, 그만 일어나세요.”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하지만, 사양하겠어요.”
위그 백작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아서가 내민 손을 거절했다.
그 후, 떨고 있는 레이나를 마치 갓난아기처럼 안고서 몸을 일으킨 위그 백작 부인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이엔느 대공을 향해 말했다.
“대공 각하, 심정은 알겠지만 더 이상 눈앞에 놓인 진실을 부정하지 마세요.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위그 백작 부인.”
“저 또한 솔직히 펠릭스 공작 각하에 대한 원망을 전부 다 거두진 못했어요. 아마도 대공 각하께선 저보다 더 큰 원망을 지니셨을 테죠. 저라도 제 딸이 목숨을 잃었는데, 지금껏 그 죽음의 원인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 이 모든 일을 꾸민 진짜 범인은 다른 사람’이라고 알려 준들 순순히 그것을 믿지 못했을 테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범인은 그대로 두고 지금껏 범인이라고 오해한 사람에 대한 원망만을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으니, 전 제 딸을 이 꼴로 만든 그자들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내 딸을 이리 만든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겠어요.”
로이엔느 대공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 같은 위그 백작 부인의 말에는 감출 수 없는 분노와 살기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