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08화
그는 앨버튼 공작가가 위치한 수도 중심부의 돌길을 빠져나와 자연스럽게 번화한 시장으로 섞여들었다.
그 후, 사람들이 밀집한 상점가를 벗어나 으슥한 빈민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한구석의 후미진 골목 안으로 접어들더니 벽 한 귀퉁이에 몸을 기대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 안으로 회색 드레스를 입고 한 손에는 낡은 바구니를 든 노인이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이 서 있는 벽 귀퉁이 앞에 멈춰 선 노인을 향해 말했다.
“현재 수도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그의 물음에 노인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황실 모독죄가 무서워 대놓고 떠들진 않습니다만, 입 가벼운 자들은 하나같이 근래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과 황실에 관한 이야기뿐이에요.”
“앨버튼 공작과 친황제파 귀족들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앨버튼 공작은 소문에 대해 상대할 가치가 없는 일이라 일축했고 친황제파 귀족들도 이전까진 그 말에 납득했으나 이번 사건은 그리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앨버튼 저택 앞에서 발견된 그자가 공작가와 황실을 오가던 연락책이라는 건 친황제파 귀족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이번 일로 인해 친황제파 귀족들은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아직까지는 황제와 황실에 대한 충성이 굳건하니 대놓고 황제에게 소문의 진상에 대해 해명하라고 하진 않겠죠. 하지만, 앨버튼 공작에겐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라고 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 일로 소문의 당사자가 되었으니 말이에요.”
노인이 서늘한 눈초리를 치켜올리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는 노인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장갑 낀 손 위로 정중히 입맞춤하며 말했다.
“그렇군요. 지난번에 소문을 퍼트려 주신 일도 그렇고, 이리 직접 나와 그들의 소식까지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맥클라이스 부인.”
“천만에요. 에일린 황녀님과 그분이 남기신 두 아드님의 명예를 망가뜨린 그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면 소문 몇 마디 퍼 나르는 것쯤 일도 아니죠.”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내 걱정은 마요. 토어 경이야말로 들키지 않게 조심해요. 수도 곳곳에 황실 근위군과 앨버튼 공작의 사병들이 깔려 있으니까요.”
서로 안부를 주고받은 후, 노인, 맥클라이스 부인은 손에 든 바구니를 고쳐 쥔 후 골목 밖으로 빠져나갔다.
토어 경은 그녀가 무사히 골목을 빠져나가는지, 혹시 그녀의 뒤를 쫓는 사람이 없는지를 확인하며 그녀의 뒤를 살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골목에서 조금 떨어진 길 위에 세워진 마차 위에 올라타는 걸 보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토어 경은 후미진 빈민가의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사람들로 가득한 번화가에 섞여들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수도에서 벌어진 네 번의 불미스러운 사건의 주동자이자, 곧이어 일어날 다섯 번째 사건의 주동자는 평화로운 수도 시민들에게 섞여 또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 * *
레이나를 애플턴 수도원에서 탈출시킨 지 일주일째. 펠릭스 성의 시간은 겉으로는 별다른 사건 없이 고요하게 흘러갔다.
그레이스는 다시 별채의 시종들을 업무에 복귀시켰고, 아서는 늘 그렇듯 군사 훈련과 펠릭스 성을 다스리는 일로 바빴다.
그러나 수면 위를 떠다니는 백조가 그러하듯 겉보기에는 평온한 펠릭스 성의 내밀한 곳에서는 수 없이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레온, 조심해! 그러다 넘어져!”
“네, 알겠어요! 샐리! 나 잡아 봐라!”
“아이고, 레온 님! 그리 빨리 뛰시면 제가 어떻게 잡아요!”
늘 평소와 같은 시각에 일어나 단장을 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그레이스는 곧장 가정 교사와 공부를 끝내고 나온 레온과 산책을 했다.
그레이스는 최근 기온이 따뜻해져 눈이 녹은 정원 위를 뛰어다니는 레온과 그 뒤를 뒤쫓는 샐리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때, 동쪽 탑 쪽에서 올리버 경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나왔다. 그러더니 레온을 눈으로 좇고 있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공작 부인, 여기 계셨습니까.”
“네, 레온과 산책 중이었죠. 올리버 경은 이 시각에 무슨 일이죠? 혹시, 날 찾았나요?”
“네. 지금 각하께서 공작 부인을 찾으십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지금 가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여전히 술래잡기 중인 샐리와 레온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샐리를 피해 뛰어다니던 레온이 곧장 방향을 틀어 그레이스에게로 달려와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매달렸다.
그레이스는 그런 레온의 등을 다정히 쓸어내린 후,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추고는 말했다.
“미안한데, 레온. 오늘 산책은 여기까지 하자.”
“네? 왜요?”
“공작님께서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 봐. 그래서 지금 동쪽 탑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래요?”
“미안. 대신, 오늘 저녁 식사는 같이하자. 주방장에게 특별히 레온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만들라고 일러둘게.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엔 샐리와 함께 다 같이 카드놀이를 하자. 어때?”
“음, 좋아요!”
레온은 평소보다 일찍 끝나 버린 산책 시간이 아쉬운 듯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그레이스가 달래자 곧 표정을 풀었다.
그레이스는 배시시 웃는 레온의 흐트러진 머리를 다정히 쓸어 넘기며 샐리를 향해 말했다.
“샐리, 난 올리버 경과 함께 잠시 동쪽 탑에 다녀올게. 레온을 부탁해.”
“걱정 마세요.”
돌아온 샐리의 대답에 그레이스는 안심하며 두 발짝쯤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올리버 경과 함께 동쪽 탑으로 향했다.
잠시 후, 아서의 집무실 문 앞에 선 그레이스는 자신보다 한 발 앞에 멈춰 서서 문을 두드리는 올리버 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똑똑―.
“각하, 공작 부인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
노크 소리와 함께 올리버 경이 도착을 알리자 문 안에서 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스는 집무실 문을 열어 주는 올리버 경에게 살짝 고갯짓으로 감사를 표한 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양피지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인 책상에서 일어난 아서가 다가와 그레이스를 맞았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향해 다정히 웃으며 맞아 주는 아서에게 마주 웃어 주며 말했다.
“어쩐 일이에요? 오늘은 많이 바빠서 저녁 식사도 함께하기 어려울 것 같다더니.”
“꼭 알려 드려야 할 것이 있어서요. ……칼딘 경.”
“네, 각하.”
아서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칼딘 경을 불렀다.
그러자 칼딘 경이 다가와 그레이스에게 곱게 접힌 두 통의 서신을 내밀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서신들을 받아 들었다가 곧 뭔가 짐작한 듯 아서를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레이나 영애의 아버님이신 위그 백작과 로이엔느 공국으로부터 답신이 도착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레이스는 눈을 빛내며 손에 쥔 두 통의 서신을 차례로 펴 보았다. 이어 두 통의 서신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더니, 곧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신을 갈무리해 칼딘 경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그레이스는 아서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행히 위그 백작이 우리 말을 믿는 눈치네요. 사실 좀 걱정했었는데 말이에요.”
“전 위그 백작보다 로이엔느 공작의 반응이 더 의외였습니다. 대공의 성격상 이 서신을 받자마자 내게 암살자를 보낼 거라 생각했거든요.”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마요, 아서. 잊었어요? 당신 목숨이 곧 내 목숨인 거.”
아서의 농담에 그레이스는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며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오른쪽 손을 잡고 손등 위로 짧게 키스하며 사과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내 생각이 짧았어요.”
“네. 앞으로는 그러지 마요. ……그건 그렇고, 막상 답신을 받으니 걱정이 되네요. 설마, 우리에게 서신을 받았다는 걸 앨버튼 공작에게 누설하거나 그러진 않겠죠?”
“그러진 않을 겁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별일 없을 겁니다. 지금 앨버튼 공작은 느긋하게 서신이나 훑어보고 있을 상황이 아닐 테니까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혹시, 앨버튼 공작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그레이스가 궁금해하며 묻자 아서는 가볍게 웃으며 뒤에 선 칼딘 경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더니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내가 저번에 ‘기사들을 시켜 손을 썼다’고 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아, 네. 기억나요.”
“그 손을 쓴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해요. 뭔데요?”
그레이스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자 아서는 귀엽다는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그들이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소문을 만들었습니다.”
“소문이요?”
“네. 먼저, 앨버튼 공작과 황실이 펠릭스 성에 심어 두었던 첩자들과 암살자들을 찾아 처형했습니다. 사실 처형까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들이 빼돌린 펠릭스 성의 정보 때문에 불리한 전황에 처해 목숨을 잃었던 기사들과 얼마 전 부인께서 독살당할 뻔한 것을 생각하니 용서할 수가 없더군요.”
“……잘했어요. 그런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봤자 돌아오는 건 배신뿐일 테죠.”
“네. 그래서 그들을 수도로 끌고 가 처형했습니다. 그 후, 그 시신들에 황실을 상징하는 독수리를 새겨 며칠 간격으로 로열 스트리트에 던져 놓았죠. 그리고 은근슬쩍 빈민가에 소문을 흘렸습니다. 저들이 ‘황실에 내려진 저주’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말입니다.”
이어진 아서의 대답에 그레이스는 놀란 눈을 한 채 되물었다.
“……정말요? 사람들이 그 말을 믿었나요?”
“첫 번째로 시신이 발견되었을 땐 반신반의했지만, 그런 사건들이 계속되고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황실 근위군이 범인을 색출해 내지 못하자 차츰 소문을 믿기 시작하더군요.”
“……세상에.”
“지금 수도에서 이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토어 경의 서신에 따르면 그 소문은 황족들과 귀족들에게도 퍼져서 황제를 지지하는 친황제파 귀족들조차도 앨버튼 공작에게 소문이 사실이냐고 추궁을 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당신이 지금 앨버튼 공작에게 여유가 없다고 말했던 거군요.”
그레이스는 감탄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