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05화
그 대답을 들은 순간, 그레이스는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 위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레이스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 그놈들이 그랬어. 지, 진정한 제물이 나타나기 전까진 이렇게 해야 한다고! 피, 피가 필요하다고! 그,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아니에요, 레이나 영애. 진정해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
“으아아아악――! 시, 싫어――! 싫다고―!”
레이나가 또다시 공포에 휩싸여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울더니, 깡마른 손으로 제가 걸친 낡은 옷을 찢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와 샐리는 얼른 레이나의 양손과 다리를 붙잡았다. 올리버 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히 레이나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뒷덜미를 가볍게 내리쳤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버둥거리던 레이나의 몸이 그레이스의 앞으로 무너졌다.
“……!”
그리고 그 순간, 그레이스는 낡고 헤진 드레스 사이로 보이는 레이나의 몸에 또다시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드레스로 교묘하게 가려진 몸 곳곳에 남아 있는 긴 상흔은 나았다가 다시 찢어지기를 반복한 것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레이스는 다급히 이불로 레이나의 몸을 가리며 자신에게서 그녀를 떼어 내려는 듯 손을 뻗는 올리버 경을 향해 소리쳤다.
“올리버 경! 등 돌려요, 얼른!”
“……아, 알겠습니다.”
올리버 경은 그레이스의 비명과도 같은 명령에 흠칫 몸을 굳히더니, 곧 그녀의 말대로 등을 돌렸다.
그레이스는 이불로 몸을 가린 레이나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힌 후, 침대의 기둥에 매달린 휘장을 내렸다. 그러곤 놀라 굳어 버린 샐리에게 말했다.
“샐리, 지금 당장 내 옷장에서 레이나 영애가 입을 만한 드레스를 찾아서 가져와 줘.”
“……네!”
샐리가 허둥지둥 휘장이 내려진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레이스는 기절한 레이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앨버튼 공작과 배후에 있는 황실이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벌였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진실을 파악했을 때, 그때 치솟아 올랐던 분노가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실제로 그들에 의해 인생을 인생이 망가진 사람을 직접 보게 되고, 어쩌면 자신 또한 레이나와 똑같은 상황에 닥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 자신의 마음속에서 타올랐던 분노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그들을 향한 분노와 역겨움으로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앞이 새빨갛게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뻗어 빗자루처럼 뻣뻣한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레이나 영애. 나의 빌어먹을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과할게요. 그리고, 반드시 복수해 줄게요.’
그까짓 죽으면 사라져 버릴 권력과 그것을 갖겠다는 욕심 때문에 이토록 잔인하게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쳐 놓은 그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그레이스는 이를 갈며 또다시 다짐했다.
다른 이의 눈을 다치게 한 자에게는 그 눈을,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은 자에게는 그 재물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망쳐 놓은 자들에겐 그들의 인생이 망가지는 경험을.
그렇다면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짓밟아 자신이 가진 힘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그들이 가장 괴로워할 복수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간단했다.
‘그들이 쥐고 있는, 모래성 위에 쌓아 올린 성 같은 권력을 빼앗는 거겠지.’
그레이스는 그들을 떠올리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쯤 모든 일이 자신들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기고만장할 그들을 사방에서 천천히 옥죄어 가장 방심한 그 순간에 목을 베어 주겠다. 그레이스는 분노로 뜨거워진 마음과는 반대로 차갑게 돌아가는 머리로 다시 한번 복수 계획을 더듬었다.
그러던 그때,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몇 명의 발소리가 들려와 그레이스는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각하.”
“칼딘 경에게 들었다. 무사히 레이나 영애를 구출해 왔다지?”
“네, 그렇습니다.”
“지금 부인과 레이나 영애는 어디 있나?”
올리버 경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것은 아서의 목소리였다.
그레이스는 곧장 휘장을 젖히고 침대 밖으로 나와 칼딘 경과 샐리, 왕진 가방을 든 의사와 함께 서 있는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아서!”
그레이스는 양팔을 벌려 아서를 꽉 끌어안았다. 아서는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품에 매달리듯 안긴 그레이스의 몸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조금 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칼딘 경의 짐작이 모두 맞았어요. 그자들이 황태자의 목숨을 잇기 위해 당신의 약혼녀들과 전 펠릭스 공작 부인을 이용한 거예요.”
“……그랬습니까?”
“네. 조금 전, 레이나 영애의 입을 통해 전부 들었어요.”
그레이스가 분노로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하자, 아서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레이나 영애는 침대 위에 있는 겁니까?”
“네. 지금은 기절한 상태예요. ……조금 전에 내가 영애에게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을 묻자, 갑자기 난동을 부려서 올리버 경이 그녀를 제압했거든요.”
아서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그레이스를 살피더니 물었다.
“부인께선 괜찮으십니까? 혹시, 그 과정에서 레이나 영애가 다치게 한 것은 아니고요?”
“네. 저는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레이나 영애가 걱정이에요. 안 그래도 몸과 정신이 쇠약한 사람에게 내가 사실을 밝힌답시고 추궁을 한 데다, 제압까지 당해서…….”
“걱정 마세요. 영애께선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아서는 안심하라는 표정으로 살짝 미소 지은 후,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칼딘 경과 중년의 의사를 향해 말했다.
“하이옌. 지금 당장 레이나 영애의 상태를 살피도록 해. 샐리는 하이옌을 도와 간호를 도맡고, 칼딘 경과 올리버 경은 잠시 문밖에서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공작님.”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네. 공작님. ……아, 잠시만요. 닥터 하이옌! 제가 먼저 레이나 영애를 살필 테니 잠시 후에 들어오세요!”
그의 명령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서와 그레이스는 가장 먼저 샐리가 침대에 내려진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 레이나의 드레스를 갈아입힌 후, 중년의 의사 하이옌이 그녀를 진료하는 모습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았다.
잠시 후, 중년의 의사 하이옌이 왕진 가방 안에서 약초와 그것을 태울 화로를 꺼내자 그레이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나 영애의 상태는 어떤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썩 좋은 상태는 아니십니다. 대체 수도원에서 무슨 일을 겪으셨는지는 몰라도, 언제 잘못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 계세요.”
“그럼 어떡하면 좋죠?”
“일단 지금 레이나 영애께선 몸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강제로 깨워서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고 좋은 약을 먹게 하는 것보다, 우선 깊은 수면을 취하게 해 지친 몸부터 회복시킬 참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지금부터 수면 향을 피울 겁니다. 죄송하지만,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는 이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하이옌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서와 그레이스에게 침실 밖으로 나갈 것을 권유했다.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레이스는 여전히 미련이 남은 얼굴로 머뭇거리며 침대 위에 누운 레이나를 흘금거렸다.
그러자 그 시선을 눈치챈 샐리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닥터 하이옌 곁에서 레이나 영애의 간호를 도맡을게요.”
“정말? 그래 주면 안심이야.”
“네. 그러니 마음 놓고 나가 보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마님께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알았어. 정말 고마워, 샐리.”
“천만에요.”
샐리의 말에 겨우 마음을 놓은 그레이스는 아서와 함께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올리버 경과 칼딘 경이 두 사람을 맞았다. 아서는 자신에게 예를 표하는 그들의 모습과 굳게 닫힌 침실 문틈으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수면 향 연기를 번갈아 바라보며 자신의 곁에 선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잠시 마음을 안정시킬 겸, 별채 응접실에서 차라도 한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좋아요.”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서는 가볍게 미소 지은 후, 올리버 경과 칼딘 경을 향해 말했다.
“칼딘 경, 올리버 경. 응접실로 차와 다과를 준비해 올려 주게.”
“명 받들겠습니다. 칼딘 경, 가지.”
“그럼 각하, 공작 부인.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올리버 경과 칼딘 경이 예를 표한 후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가자, 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 그레이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부인.”
그레이스는 말없이 아서가 내민 손을 붙잡았고, 두 사람은 느릿느릿 걸어 응접실로 향했다.
아서는 그레이스의 표정을 살피며 몇 마디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가볍게 웃거나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일로 크게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여 마음이 쓰였다. 아서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응접실로 이끌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 도착하자, 아서는 그레이스를 푹신한 소파 위에 앉힌 후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혹시, 조금 전 일로 충격이 크셨습니까?”
“아뇨.”
“그럼 왜 줄곧 말씀이 없으십니까?”
“……아서.”
그레이스는 자신의 무릎에 두 손을 올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서와 시선을 맞추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아서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네. 부인.”
그레이스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진 아서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그러더니 마치 마음속 고민이 끝났다는 듯 결연한 시선으로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할게요.”
“네, 말씀하세요.”
그레이스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계획을 앞당겨야 할 것 같아요. 아니, 계획을 앞당겨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