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04화
깊은 밤, 펠릭스 저택의 후문으로 두 명의 기사를 태운 말이 달려왔다.
저택에 당도하자마자 말에서 내린 올리버 경과 칼딘 경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종자에게 말을 건넨 후, 여전히 기절한 듯 잠든 레이나를 안아 들곤 별채로 향했다.
별채의 입구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그레이스와 샐리가 그들을 맞았다. 그레이스는 재빠르게 눈으로 올리버 경과 칼딘 경, 그리고 올리버 경에게 안겨 있는 레이나를 살피며 말했다.
“어서 와요. 오는 동안 별일은 없었죠? 들키진 않았고요?”
“물론입니다.”
“얼른 들어오세요, 기사님들. 레이나 영애님을 위해 1층에 있는 침실을 정리해 두었어요.”
짧은 인사를 나눈 후, 그레이스와 샐리가 먼저 별채 안으로 들어가며 손짓하자 두 기사는 그들을 뒤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인기척 하나 없는 복도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걸어갔다.
혹여 말이 새어 나갈세라 별채에 기거하는 시종들과 시녀들을 저택 내 다른 곳으로 보내 두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경계심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적막한 복도를 지나 무사히 침실에 도달하고, 올리버 경은 양팔에 안고 있던 레이나를 무사히 침대에 눕히고 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레이나의 움푹 파인 볼과 까맣게 내려앉은 눈 밑 그늘, 그리고 깡마른 팔다리를 살피며 말했다.
“……레이나 영애의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여요.”
“그러게요. 펠릭스 성에서 떠나실 때만 해도 이렇게 깡마른 모습은 아니셨는데…….”
샐리는 그레이스의 말에 착잡한 듯 대꾸하며 깡마른 레이나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레이스는 잠깐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두 기사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치료가 필요할 것 같은데, 펠릭스 저택을 드나드는 의사 중 비밀을 지켜 줄 믿을 만한 사람이 없을까요?”
“선대 공작님께서 살아 계실 때부터 펠릭스 가의 사람들을 진찰해 온 의사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연락을 취할까요?”
“네. 부탁할게요.”
그레이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올리버 경의 말에 대답한 후, 다시 침대 위에 누운 레이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으…….”
그러던 그때,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레이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번뜩 눈을 떴다. 그레이스는 시체처럼 생기 없이 까맣기만 한 레이나의 눈을 바라보며 다정히 물었다.
“레이나 영애, 정신이 드―.”
“꺄아아악――! 다,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런데 그레이스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레이나가 갑자기 양손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지르더니, 온몸을 비틀며 자신을 붙잡은 샐리를 쥐어뜯고 그 곁에 선 그레이스에게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레이나 영애의 모습에 그레이스가 깜짝 놀라 굳어 버리자, 기사들이 얼른 그녀를 둘러싸듯 보호하며 검을 빼 들었다.
그레이스가 얼른 그들을 제지하며 소리쳤다.
“안 돼요! 검을 거둬요!”
“공작 부인, 하지만!”
“어서요! 샐리, 레이나 영애께 이곳은 안전하다고 말해 주며 진정시켜 주세요! 그리고, 칼딘 경은 지금 당장 아서와 조금 전 올리버 경이 말한 그 의사분을 데리고 이곳으로 와 줘요!”
“……알겠습니다!”
그레이스는 다급히 기사들을 향해 거듭 검을 거둘 것을 명했다.
광증에 휩싸여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채 비명을 지르는 레이나의 모습이 섬뜩하고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녀를 해쳐야 할 만큼 위협적인 상황도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재빨리 샐리와 칼딘 경에게 지시를 내린 후, 자신을 보호하듯 막아선 올리버 경의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녀의 명령에 칼딘 경이 다급히 방을 나갔고, 샐리는 연신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버둥거리는 레이나를 투실투실한 두 팔로 꽉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레이나 님! 진정하세요!”
“꺼져! 사라져! 내, 내게 다가오지 마! 다 죽어 버려! 으아아악!”
“레이나 님!”
“……이젠 싫어! 다 싫단 말이야! 또 날 그 어둡고 음산한 곳으로 끌고 가서 찌, 찌를 거잖아!”
“아닙니다, 레이나 님! 이제 누구도 레이나 님을 해치지 못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거짓말 마! 그런 말로 날 속이고 또 가둘 거잖아! 칼로 찌르고, 피를 뽑을 거잖아! ……이 살인자들, 저 끔찍한 놈들에게서 도, 도망쳐야 해! 지금 당장!”
샐리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진정시키려 해도 공포에 질린 레이나의 비명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레이스는 연신 비명을 지르면서도 눈으로는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듯 두리번거리는 레이나를 안쓰러움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그때, 광기로 번들거리던 레이나의 눈이 기어코 올리버 경의 뒤에 서 있던 그레이스를 찾아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또다시 증오가 타올랐다.
레이나가 섬뜩한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똑바로 노려보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저 계집! 저 빌어먹을 앨버튼의 마리안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저 계집이 여기 있단 건, 여기 그 괴물 놈과 앨버튼 공작 놈도 있다는 거잖아!”
“아닙니다, 이곳에는 그분들이 계시지 않아요! 저분은 마리안느 영애가 아니라, 그레이스 공작 부인이에요!”
“닥쳐! 또 내게 환각 마법을 사용한 거지? 누가 모를 줄 알아? 또 날 속여서 사지를 묶어 놓고, 그 괴물 놈이 손에 쥔 칼로 내 살을 칼로 찢고, 그 위에 내 피를 들이부을 거잖아――! 그 괴물 놈의 목숨을 잇기 위해 내 피를 제물로 바치는 걸 누가 모를 줄 알아!? ……그, 그러다 다, 다른 ‘대체물’이 생기면 날 죽일 거잖아? 아냐!?”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악을 쓰는 레이나의 모습에 그녀를 붙잡고 있던 샐리는 물론이고 그레이스와 올리버 경 또한 경악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얼마 전까지는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었던, ‘황태자가 스무 살을 넘겨 살아 있는 이유’에 대한 해답이 레이나의 말로 인해 한층 확실해진 기분이었다.
그레이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앞을 막아선 올리버 경을 향해 말했다.
“……칼딘 경의 말이 사실이었어요.”
“아직 확신하기는 이릅니다, 부인. 지금 레이나 영애께선 제정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뇨,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 말엔 신빙성이 있어요. 아마, 그녀의 말은 전부 다 사실일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라도 있으십니까?”
“왜냐하면, 내가 보았던 ‘환상’ 속에서 그녀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아주 유사한 장면이 있었거든요.”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레이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때 자신이 보았던 환상을 떠올렸다.
자신의 온몸을 밧줄로 꽁꽁 묶은 채 어디론가 끌고 가던 병사들,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웃고 있던 앨버튼 공작,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자신을 향해 잔인하게 검을 휘두른 ‘누군가’.
레이나의 절규 섞인 목소리가 토해 낸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하는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음을, 그리고 자신 또한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런 운명에 휩쓸릴 예정이었다는 것을.
어쩌면 레이나가 말한 그 일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자신이 처했으리라는 걸 새삼스레 절감한 그레이스는 앨버튼 공작을 향한 두려움과 분노로 이를 악물었다.
‘……잔인하고, 또 잔인한 사람. 본인의 권세를 위해 다른 사람의 아픔 따위 아무렇지 않게 짓밟을 수 있는 괴물 같은 사람.’
더 이상 그의 욕망을 위해 희생되는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다짐하며 자신을 가로막은 올리버 경을 살짝 밀어냈다. 그러고는 연신 자신을 놓아 달라 비명을 지르며 샐리를 공격하는 레이나 영애의 앞으로 다가갔다.
“뭐, 뭐야?”
그러자, 조금 전까지 자신을 놓아달라 소리치며 절규하던 레이나 영애가 갑자기 두려움에 찬 얼굴로 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앞에 선 그레이스를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다가오지 마! 제발, 제발 그만해!”
“……레이나 영애.”
“이, 이렇게 빌게! 이제 그만, 그만 날 이곳에서 꺼내 줘! ……아, 알잖아?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나, 난 미치지 않았어! 미치지 않았다고! 그러니 제발 앨버튼 공작에게 날 보내지 마, 응!? 이렇게 부탁할게…….”
그레이스는 어느새 흐느껴 울며 비는 레이나의 모습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는 울고 있는 레이나와 다정히 시선을 맞추며 그녀가 조금이나마 진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윽고 울고 있던 레이나 영애의 눈에서 눈물이 멎고, 까맣게 죽어 있던 그녀의 눈이 그레이스의 푸른 눈을 향하자, 그레이스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다시는 그곳으로 보내지 않을게요. 약속할게요.”
“……정말?”
“네. 그리고 더는 영애께서 그런 힘든 일을 겪지 않도록, 제가 영애를 이렇게 만든 그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
“……그, 그게 정말이야?”
“네. 약속할게요.”
그레이스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레이나의 깡마른 손을 꼭 붙잡으며 굳게 다짐했다. 그러자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레이나의 멍한 눈에 아주 잠깐이나마 이채가 깃들었다.
자신의 진심이 받아들여진 것일까? 마음속에 살짝 희망이 피어오른 그때, 레이나가 다시금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그레이스의 손을 뿌리치고 소리쳤다.
“거, 거짓말! 다, 다 거짓말이야! 너, 너는 그러지 못해. 그놈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치밀한 놈들인데!”
“……레이나 영애!”
“그, 그놈들은 다른 제물이 생기기 전까진 날 놓아주지 않을 거야. 아니? 내가 주, 죽어서도 날 놓아주지 않을 거야! ……나, 나 이전의 그 여자, 그 여자도 그랬으니까!”
“……그 여자라뇨? 무슨 소리예요?”
레이나의 영문 모를 말에 그레이스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자 레이나가 깡마른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더니 겁에 질린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 나는 봤어. 그, 그놈들이 에, 엘렉트라의 시신, 그 여자의 죽은 몸에서 피를 뽑아내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