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00화
“하아…….”
그레이스는 분노와 슬픔으로 눈물이 고일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아서가 그런 그녀를 위로하듯 헐겁게 맞잡은 손을 깍지껴 잡으며 칼딘 경에게 말했다.
“경의 추정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나?”
“네. 탐욕에 눈이 먼 수도사들을 구워삶는 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니까요.”
“그럼, 그 부분은 경에게 맡기도록 하지.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아. 어떻게든 그들을 매수해서 입을 열게 해. 그게 안 된다면 기사들을 동원해도 좋다. 그녀들에게 군사를 보낸 이가 누구인지, 그들이 그녀들을 어디로 끌고 가서 무슨 짓을 벌이는지를 알아내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맡겨 주십시오.”
아서의 명령에 칼딘 경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회의실 안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레이스에 의해 윤곽이 드러나고, 칼딘 경의 증언으로 어느 정도 쐐기가 박힌 사실들에 기사들은 저마다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중,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것은 올리버 경이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아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각하.”
“글세. 그렇게 말하는 올리버 경이야말로 어떻게 하고 싶지?”
아서가 그의 속내를 떠보듯 물었다. 그러자 올리버 경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곧, 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저는 각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명에 따를 뿐입니다.”
“나와 내 아내의 복수를 위해 앨버튼 공작의 목을 치고, 황제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싶다고 해도 말인가?”
그 말에 올리버 경은 물론이고 그의 곁에서 듣고 있던 그레이스 또한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막연히 이 모든 일을 꾸민 앨버튼 공작과 그 일을 도운 황제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 반역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레이스가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서! 설마, 반역을 일으키겠다는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세상에, 너무 위험해요! 당신도 알잖아요. 황제를 따르는 세력이 얼마나 강대한지! 자칫 잘못하면 우리 모두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텐데…….”
“하지만, 현 황제를 끌어내리지 않으면 당신은 계속 목숨을 위협 받겠죠. 그들은 황태자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당신을 죽일 기회만 엿볼 겁니다. ……나는 당신이 다치거나 아파하는 게 싫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상상만 해도 싫어요.”
“……아서.”
“그리고 나 또한 더는 괴물 공작이라는 오명을 쓴 채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어린 레온이 뒤집어쓴 오명도 벗겨 주고 싶고요.”
그때, 아서가 쓰고 있던 검은 가면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그의 서늘한 얼굴이 드러났다.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고, 그레이스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서는 그런 그들을 한 명 한 명 돌아보며 모양 좋은 입술을 살짝 위로 끌어 올리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지금껏 나와 내 가족을 기만했습니다. 펠릭스 가문의 힘을 이용해 황태자의 목숨을 살리려 했고, 그를 위해서 많은 목숨을 해쳤죠. 그 때문에 펠릭스 가문은 부당한 오명을 뒤집어썼으며, ‘괴물 공작’이라는 오명을 빌미 삼아 ‘네가 이 제국에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하라’며 나와 기사들을 끊임없이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잃어서는 안 될 동료들의 목숨도 수없이 잃고 말았죠.”
“……각하.”
“그뿐 아니라 무고한 여인들의 목숨 또한 마치 소모품처럼 쓰다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당신마저 죽음으로 내몰고자 칼을 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참아야만 합니까? 내 목숨이 아깝다는 이유로?”
아서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으나, 그 속에는 강렬하고도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기사들은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고, 그레이스 또한 눈으로 푸르고 붉게 타오르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서는 먼저 자신의 기사들을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그레이스의 푸른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경들과 부인께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반대한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아서.”
“그러니 먼저 부인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나와 같이 그들에 의해 괴롭게 산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아서의 물음에 그레이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그저 막연히 복수심에 불탔다. 자신의 인생을 망친 그들이 미웠고, 자신이 느낀 괴로움을 되돌려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불탔다.
하지만 막상 아서가 구체적으로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덜컥 겁이 났다. 성공한다면 모를까, 실패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펠릭스 성의 사람들 또한 죽고 만다.
‘어떻게 해야 해? 어떤 결정이 맞는 걸까?’
반역, 혹은 또 다른 방법.
그 둘 중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곧 어렵지 않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아서를 향해 대답했다.
“……저는 당신의 뜻에 따르겠어요. 어차피 다른 방법이라고 해 봐야 평생을 그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 말곤 없어 보이니까요. 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레이스.”
“하지만 여기 계신 기사분들과 레온, 성 사람들이 마음에 걸려요. 내 결정에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을 걸어 버린 것 같아서…….”
막상 결정을 내리고서도 망설이던 그레이스가 머뭇거리며 말을 잇던 그때였다.
“혹시, 제 목숨을 걱정하신 거라면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 부인.”
“……올리버 경.”
올리버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서와 그레이스가 앉은 상석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두 사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저는 각하와 공작 부인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토어 경과 저도 그렇습니다.”
“저 또한 그들을 치지 않으면 계속 그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각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나머지 기사들 또한 아서와 그레이스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아서와 그레이스는 감격에 가득 찬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자신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이 계획에 동참해 주겠다는 그들의 결심이 고마웠다.
아서가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충성을 표하는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한 맹세는 경들뿐만 아니라 경들 휘하에 있는 다른 기사들의 목숨 또한 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도 괜찮겠나?”
“네. 괜찮습니다. 그 녀석들 또한 각하를 꺼내쓰기 편한 칼처럼 다루는 황제에게 꽤나 반감이 쌓인 상태거든요.”
“이번 플라이엔 성 전투가 황제의 음모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제 휘하의 기사들은 곧장 각하의 뜻에 따를 겁니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제 휘하의 기사들이니까요.”
“성내 사람들 또한 두 분의 결정에 이견이 없을 겁니다. 지금껏 저주받은 공작 휘하의 시민들이라는 명목으로 갖은 차별을 받아 오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진실이 알려지면 그들이 먼저 황제를 내쫓는 데 군사를 일으키자고 주장할 겁니다.”
이어지는 기사들의 대답에 아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보란 듯 그레이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치 이젠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듯 말이다.
그 시선에 그레이스는 마음속에 남은 일말의 망설임을 거둘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목숨을 걸겠어.’
이 한목숨을 바쳐 지금껏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벼랑 끝에 내몬 그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결심하며 막연히 머릿속으로만 떠올렸던 계획들을 순서대로 배열하기 시작했다. 어떤 방법이 그들에게 가장 치명적일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자신과 아서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지.
그레이스는 짧은 순간, 자신이 가진 지혜와 지금껏 아서의 저주를 풀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하며 내렸던 결론들을 총동원했다.
그러던 끝에, 현재 실행 가능한 계획 몇 가지를 떠올린 그레이스는 눈을 빛내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아서와 다른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저도 망설이지 않겠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공작 부인.”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제 머릿속에 몇 가지 좋은 계획이 떠올랐는데 말이에요. 들어 보고 괜찮다면, 제게 힘을 빌려주지 않겠어요?”
“계획이라니, 무엇이죠?”
아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레이스는 그에게 대답하는 대신 한쪽 무릎을 꿇은 기사들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그 전에, 자리에 돌아가 편히 앉도록 해요. 이야기는 그때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들었나? 다들 이만 일어나 자리에 앉게.”
아서의 지시에 기사들은 모두 몸을 일으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레이스는 그들이 자리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길 기다렸다가, 이어 그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걸 보곤 조용히 웃으며 속삭이듯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레이스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아서와 기사들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이윽고 그녀가 자신이 이야기한 계획 중 당장 실행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추리는 것으로 말을 마쳤을 때, 그들은 감탄하듯 말했다.
“과연 공작 부인께서는 수도의 귀족답게 그들의 생태에 대해 밝으시군요.”
“이거야, 웬만한 기사단의 참모보다 더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아뇨, 뭘요. 그렇지 않아요.”
그들의 칭찬에 그레이스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아서는 곧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부인께서 혜안도 내 주셨으니 지금 당장 그 계획들을 실행에 옮겨야겠군. 모두, 각자 맡은 임무가 어떤 것인지는 제대로 숙지했나?”
“물론입니다. 각하.”
아서의 말에 올리버 경이 대표로 대답하며 옆에 앉은 기사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아서는 기사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맞춘 후, 마지막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다정히 미소 지었다. 걱정 말라는 듯, 안심시키는 그 미소에 그레이스는 마주 웃으며 그의 어깨에 살짝 몸을 기댔다.
‘그래,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다 잘될 거니까.’
그레이스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자 불안과 기대로 들뜨는 마음을 억누르고자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