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99화
“……빌어먹을.”
잠시 후 정적을 깬 것은 이야기에 가장 경악하고, 또 경청하던 올리버 경이었다.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더니 경멸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인즉 지금껏 각하의 거절에도 폐하가 계속해서 신부를 맞을 것을 강요했던 게 그녀를 각하께서 가진 힘으로 되살린 후, 다시 죽여서 황태자의 저주를 벗기기 위해서였다는 겁니까?”
“맞아요, 올리버 경.”
“잠시만요. 그렇게 되면 신부와 목숨과 이어진 각하의 목숨 또한 그 신부가 죽는 순간, 동시에 잃게 되는 겁니까? 선대 공작님처럼?”
“……네.”
“……하, 빌어먹을.”
올리버 경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나직하게 제 생각을 정리해 소리 내어 읊었다.
“폐하께서 각하를 중용한 것조차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군요. 각하께서 지니신 명예와 재산이 많아야, ‘각하의 신부가 되면 1년 안에 죽거나 미친다’는 소문이 돌아도 탐욕스런 자들은 개의치 않고 각하께 자식을 시집보낼 테니까요.
또한, 각하의 저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그들에게 증오할 빌미를 제공해, 언제 각하가 목숨을 잃어도 배후를 밝히기 어려울 상황도 조성할 수 있고요.”
올리버 경이 꽉 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자 그 곁에 있던 캐러독 경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받았다.
“그뿐입니까? 아마도 폐하는 황태자의 저주를 벗기자마자 자신이 하사했던 것들은 물론, 펠릭스 가문이 일군 재산마저 전부 제게 귀속시키려 들 겁니다. 레온 님의 목 하나쯤 비트는 것쯤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겠죠.”
“아니, 레온 님은 살려 두실 거야. 그분 또한 각하와 같은 오드아이니까.”
“……그래.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군.”
올리버 경이 싸늘하게 자신의 생각을 보탰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그레이스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맞아요. 그리고, 앨버튼 공작은 소망을 이룬 황제에게 그 소름 끼치는 계획을 성공시킨 것에 대한 대가를 요구했겠죠.”
“……정말이지,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획이군요. 펠릭스 성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의 원인은 각하께 돌리고, 그들은 황태자의 목숨과 권력을 나눠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 그들에게 있어 나는 참으로 손쉽게 이용하기 좋은 희생양으로 보였을 테지.”
그녀의 주장에 동의하며 말을 보태는 올리버 경의 말에 아서가 쓴웃음을 지으며 동조했다.
그 말에 회의실 안은 잠시 불편한 침묵에 빠졌다. 그레이스는 눈초리를 축 내리며 아서의 옆얼굴을 응시했고, 아서는 그런 그녀를 향해 괜찮다는 듯 다정히 잡은 손을 한 번 꼭 쥐었다 놓았다.
그러던 중 지금껏 이어지는 대화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두 기사 중 한 사람, 불과 얼마 전까지 플라이엔 성에 남아 전황을 수습하고 돌아온 기사단의 부단장 토어 경이 수심에 잠긴 얼굴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런데, 각하.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이 말씀을 드리기 전, 저는 공작 부인께서 밝혀낸 진실에 대해 의심하는 취지에서 드리는 말이 아님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그래, 알겠다.”
토어 경은 마른 입술을 잠시 혀로 축이곤 말을 이어 나갔다.
“조금 전, 공작 부인의 말씀대로라면 황태자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황태자는 스물셋입니다. 진즉에 저주로 죽었어야 할 그가 대체 어떻게 3년을 더 살 수 있었던 걸까요?”
“……과연. 경의 말대로 그 부분은 좀 이상하군.”
아서와 그레이스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토어 경의 말대로 그 부분은 좀 이상해. 대체 어떻게 황태자의 죽음을 지연시킨 거지?’
유감스럽게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레이스가 앨버튼 공작의 서재에서 빼돌린 수첩에도, 동쪽 탑에 보관되어 있던 기록에도 그것과 관련된 내용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의실 안은 또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 어떻게 황태자가 예정된 죽음에서 3년을 더 생존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
그러던 그때, 지금까지 한마디도 거들지 않은 채 듣고만 있던 나머지 한 사람, 앳된 얼굴의 기사 칼딘 경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칼딘 경의 곁에 앉아 있던 토어 경이 그를 슬며시 노려보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킬딘 경. 설마, 존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제가 그 비밀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에요?”
그레이스가 다급히 칼딘 경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가 수줍은 듯 귀 끝을 붉히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네.”
“실례가 안 된다면, 경의 생각을 말해 줄 수 있어요?”
“……그게. 공작 부인께서 들으시기엔 조금 거북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감히 말씀드리자면……. 사실, 저는 각하의 명을 받고 각하의 ‘저주’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미쳐 버린 영애들이 요양 중인 수도원에 후원금을 보내고, 그분들의 소식을 각하와 그분들의 가문에 전해 왔습니다.”
“……그랬어요?”
그레이스가 아서를 돌아보며 물었고, 그는 대답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칼딘 경의 말을 듣고 그녀가 혹여 불편해하진 않을까 염려하는 듯 보였다. 아마 그러한 염려 때문에 지금껏 비밀로 한 모양이고 말이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불편하긴커녕 그런 아서의 모습이 더 좋게 느껴졌다. 그가 그녀들을 해친 것이 아님에도 자신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그녀들을 어떻게든 책임지려는 의지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조금 전 그가 그래 주었듯 잡은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놓는 것으로 위로하며 이어지는 칼딘 경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간이 날 때면 가끔 수도원에 들러 묘지나 그분들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고는 했습니다. 혹여 의사소통할 수 있을 만큼 광증이 나아진다면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거든요.”
“……그녀들의 광증에 차도는 좀 있었나요?”
“그게 말입니다. 그분들을 뵈러 갈 때마다 수도원에 있는 자들이 말로만 ‘그분들께서는 잘 계신다’고 전할 뿐, 그분들을 만나게 해 주지 않았습니다.”
“네? 왜죠? 저주 때문에 안 된다고 하던가요?”
그레이스의 물음에 칼딘 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광증에 미친 그분들이 절 해칠지도 모른다며 면회를 거절하시더군요.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같은 기사가 광증에 휩싸인 숙녀분조차 제압하지 못할까 싶어 면회를 허락할 수 없다니요.”
“……그건 그러네요.”
“네, 납득하기 어럽죠. 그래서 그들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몰래 수도사 한 명을 매수했고, 그자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칼딘 경이 마른침을 한번 삼키곤 대답했다.
“수도원 내 고위 수도사들이 이따금 야심한 시각에 병사들을 끌고 병동에 들이닥쳐서는 그분들을 어딘가로 데려갔다가 다시 독방으로 돌려놓곤 한다더군요.”
“……대체 그 사람들을 어디로 데려간 거죠? 그리고, 그 병사들은 누구고요?”
“공작 부인의 말을 듣고서 생각해 보니, 그 병사들이 황실 근위군 소속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라고요?”
그레이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아서 또한 놀란 눈으로 칼딘 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고위 수도사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황제와 비견할 만한 권력을 가진 교황이 존재하고, 교황은 그들의 권위를 든든히 지켜 주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을 움직여 그녀들을 빼돌린 자들이 황족일 것이다?”
“네. 동시에 그분들의 광증의 원인인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죠.”
칼딘 경이 앳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이지적인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그분들을 빼돌려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공작 부인의 말씀을 듣고 나니 어렵지 않게 배후가 예상되더군요. 그도 그럴 게, 그분들을 몰래 데려가 무슨 짓을 벌인 것이 앨버튼 공작과 황제 폐하라면 모든 것이 설명되니까요. 그들은 그분들을 미치게 한 저주의 진상을 잘 알고 있고, 남들 몰래 그 일을 실행할 권력도 갖고 있죠.”
“……세상에. 그렇다는 건, 황실이 황태자 전하의 수명을 잇기 위해 그분들을 이용했다는 건가요?”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추정이라고밖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제 직감은 그렇습니다.”
칼딘 경이 굳은 표정으로 그레이스의 물음에 대답했다.
“어, 어떻게…….”
그레이스는 경악으로 벌어지는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다. 지금껏 앨버튼 공작과 황실은 괴물 공작인 아서에게 신부를 들일 때마다 그녀들을 향해 축복을 빙자한 ‘수상한 마법’을 걸지 않았던가.
‘……만약 그때, 앨버튼 공작이 ‘그녀들이 되살아나지 못할 가능성’마저 염두에 두고 주문을 건 거라면, 그리고 그 피를 이용할 가능성까지 고려한 거라면 충분히 신빙성 있는 가정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레이스는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멀쩡한 영애들에게 저주를 걸어 미치게 한 것만으로 모자라 그녀들을 이용해 황태자의 목숨을 연장하고, 그 대가로 황제에게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어 냈을 앨버튼 공작과 제 아들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그 모든 악행을 모른 척 눈감아 온 황제를 떠올리니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며 잘못 씌워진 오명을 그간 당연한 양 짊어져 온 아서가 안타깝고 안쓰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