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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98화 (98/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98화

샐리는 아서를 배웅하곤 침실 벽에 붙은 큰 괘종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약 2시간 뒤면 아서가 이끄는 펠릭스 기사단의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샐리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레이스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동쪽 탑에서 뵙자는 말씀은……. 혹시, 동쪽 탑에서 열리는 기사단 회의에 참석하시려고요?”

“응, 맞아. 오늘 그곳에서 아서와 함께 전해야 할 말이 있거든.”

그레이스거 고개를 끄덕이며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덩달아 비장해진 샐리는 화장대 앞에 앉은 그레이스의 긴 머리카락을 풀어 엉킨 부분을 빗어 내리며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공들여 꾸며 드려야겠네요.”

“샐리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무서운데? 너무 화려하게 꾸밀 필요까지는 없고, 내가 무사히 살아났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면 돼.”

“네, 네. 걱정 말고 제게 다 맡겨 주세요!”

“……믿어도 되는 거지?”

“그럼요!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더운물을 깜빡했네! 마님, 잠시면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어? 으응…….”

샐리가 그레이스의 머리를 빗다 말고 몸을 돌려 침실 옆에 딸린 욕실로 뛰어갔다.

잠시 후, 욕실 문을 열고 나온 샐리는 희뿌연 김과 그윽한 장미 향으로 가득 찬 욕실 안으로 그레이스를 이끌었다.

그레이스는 장미 꽃잎으로 가득한 욕조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샐리의 시중을 받았다.

* * *

그로부터 약 1시간 후, 단장을 마친 그레이스는 샐리와 함께 침실 밖으로 나왔다. 서신에 발려 있던 독에 당해 쓰러진 그날로부터 3일 만이었다.

그레이스는 오랜만에 보는 침실 밖 풍경을 살피다, 그 벽에 붙은 창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곤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높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장식하는 붉은 장미와 큰 루비가 박힌 티아라, 그리고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진홍색 드레스까지. 회의에 참석한다기보단 파티에 어울릴 법한 차림에 그레이스가 살짝 볼멘소리를 했다.

“……내 차림 말인데, 너무 과하지 않아?”

“이 정도는 입으셔야 성안에 숨어 있는 쥐새끼 같은 첩자 놈이 단번에 마님을 알아보고 놀라 나자빠질 것 아니겠어요? 전 그 빌어먹을 놈이 아주 티 나게 놀라 빠져서 제 정체를 들키고 감옥으로 끌려갔으면 좋겠네요!”

“……뭘 또 그렇게까지.”

“그리고, 기왕이면 오늘 처음으로 마님을 가까이에서 뵙는 기사분들께 마님께서 이리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분이라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저주받은 공작의 부인이 아니라요.”

“……샐리.”

“그러니, 좀 과하다 싶으셔도 오늘만큼은 참으세요. 사실 좀 더 화려한 드레스랑 머리 장식을 쓰고 싶었는데, 마님께서 싫다고 하셔서 맞춰 드린 거라고요.”

그레이스의 입장에선 충분히 차고 넘치건만, 샐리는 드레스의 폭이라든가 머리 장식이 조금 아쉽다며 연신 곁눈질했다.

그런 샐리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투덜거리던 것을 멈추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별채의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별채 안을 분주히 오가던 시녀들과 시종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구머니나! 마, 마님?”

“지금쯤 누워 계셔야 할 분이 어떻게!?”

그레이스는 그런 그들을 향해 보란 듯 웃어 주었다. 그제야 놀란 정신을 수습한 사용인들은 다급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그레이스와 샐리는 보란 듯이 그들을 지나쳤다.

그러자마자 사용인들이 뒤에서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이를 들은 샐리가 짧게 혀를 찼다.

“저 정신 빠진 것들 좀 보라지. 감히 마님께서 들으시는 앞에서 뒷말을 해? 내 저것들 얼굴을 기억해 뒀으니, 잠시 후에 돌아와서 아주 혼쭐을 내 줘야겠어요!”

“그러지 마. 저 사람들도 내가 살아 돌아온 게 얼마나 신기하겠어? 나도 아직 안 믿기는데.”

그레이스는 가볍게 웃어넘기며 샐리와 함께 별채를 나와 동쪽 탑으로 가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러는 동안 저택 안에 있는 사람들의 경악과 호기심 어린 시선이 전부 그레이스에게 쏟아졌다. 그레이스는 그 시선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동쪽 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미리 아서의 명을 받고 문 앞에 대기해 있던 집사장이 그레이스와 샐리를 맞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님. 이리 무사하셔서 이 집사장 로버츠, 뭐라 표현하기 힘들 만큼 기쁩니다.”

“고마워, 집사장.”

“지금 공작님께선 어디 계시죠?”

“1층 회의실에서 기사들과 함께 계신다네.”

“그럼, 저와 마님을 그곳으로 안내해 주세요.”

“알겠네.”

그레이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 샐리가 눈치 빠르게 아서의 현재 위치를 묻자 집사장은 1층의 회의실을 가리킨 후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레이스는 샐리와 함께 집사장의 뒤를 따라 1층 복도를 걸었다. 잠시 후, 큰 문 앞에 선 그가 그레이스와 샐리를 향해 말했다.

“이곳입니다, 마님. 드시지요.”

“고마워. 아, 샐리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하고.”

“네. 언제든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레이스는 샐리를 문밖에 세워 둔 후, 집사장이 열어 준 회의실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연회장에 놓인 것처럼 길고 넓은 테이블, 정복을 입은 몇 명의 기사들과 가장 등받이가 높고 화려한 의자에 앉은 아서의 모습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상석에 앉아 있다가 자신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반갑게 다가오는 아서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아서가 자연스레 그레이스의 손끝을 잡고 손등 위로 입을 맞추며 다정히 말했다.

“부인께서는 진홍색도 아주 잘 어울리시는군요. 아름답습니다.”

“고마워요. 내가 많이 늦은 건 아니죠?”

“늦기는요. 나의 기사들 또한 이제 막 모인 참입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레이스는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끄는 아서를 따라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그레이스가 들어온 순간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걸어오는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레이스는 그들 중 안면이 있는 올리버 경과 캐러독 경에게 살짝 눈인사하곤 아서의 옆자리에 섰다.

아서는 그런 그녀를 위해 정중히 의자를 빼 준 후, 그녀가 자리에 앉자 자신 또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 부인께서 오셨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지.”

“이야기라니……, 어떤?”

“혹시, 공작 부인께서 무사히 깨어나신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질문을 던진 자는 캐러독 경이었고, 날카롭게 질문을 던진 자는 이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올리버 경이었다.

아서는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그래. 부인께 감히 독살을 시도한 자들과 지금껏 나에게 괴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운 자들을 밝히고, 그들에게 정당한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 경들을 소집했다. 두 사건 모두 그대들의 협조 없인 불가능한 일이거든.”

“그놈들에게 대해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대체 그자들이 누굽니까!”

아서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이번 일로 가장 마음고생이 심했던 캐러독 경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험악하게 이를 갈며 물었다.

그에 아서가 서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앨버튼 공작과 황제 폐하이시다.”

“……예!?”

“그, 그럴 수가! 그분들은 각각 공작 부인의 부친과 각하의 사촌이 아니십니까?”

“어떻게 그런! 백번 양보해서 앨버튼 공작까진 그렇다 쳐도, 폐하께서는 지금껏 각하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던 분이 아니십니까?”

기사들이 저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아서는 그런 그들을 묵묵히 바라보다 곧, 시선을 돌려 그레이스의 손을 꼭 잡고는 말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다. 앨버튼 공작은 제국의 권력을 틀어쥐기 위해 황제 폐하를 이용했고, 황제 폐하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앨버튼 공작이 꾸민 흉계를 적극 수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괴물 공작’이 된 나이고 이 사람의 독살 사건이지.”

“대체 황제 폐하의 소망이 무엇이기에…….”

“그것은…….”

“아서, 그 부분에 대해선 내가 설명할게요.”

캐러독 경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아서를 막은 것은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는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서를 향해 살포시 웃어 보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의 걱정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가족의 악행을 고발하고 그들을 처단하자고 말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자신이 해야 했다. 그들이 이 이상 아서와 자신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도록 둘 순 없었다.

그레이스는 마음을 가다듬듯 짧게 심호흡한 후, 말을 꺼냈다.

“……모든 것은 앨버튼 공작이 어떤 계기로 ‘황실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면서 시작됐어요.”

이어 그레이스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가의 피를 타고 흐르는 초대 신의 저주, 그 저주가 황태자에게 미친 영향, 그리고 앨버튼 공작이 그 저주를 풀기 위해 은밀히 조사한 끝에 알아낸 펠릭스 공작의 비밀까지.

그레이스는 자신이 가족들에 의해 죽임당했다가 살아난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기사들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이 말들을 기사들이 믿어 줄 것인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혹여 이들 중 첩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그레이스는 중간중간 말을 멈추고 아서를 바라보았다. 그럴 때마다 다정한 시선으로 자신을 안심시키는 아서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무사히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앨버튼 공작은 펠릭스 공작가의 후손들이 지닌 힘을 이용해서 황태자, 나아가 황실의 저주를 벗기려고 했어요.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날 선택했고, 반쯤 성공했죠. 어찌 됐든 내가 이렇게 되살아났으니까요.”

그레이스는 그렇게 말을 맺으며 자신의 말을 경청하던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생각보다 더 오래, 그리고 깊숙이 뿌리내린 황실과 앨버튼 공작의 음모에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서와 그레이스는 기사들이 이 진실들을 충분히 받아들일 시간을 주기 위해 먼저 그들이 말을 꺼낼 때까지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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