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96화
“……다른 누군가?”
“[제물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저주받은 피를 이은 후손일 것. 두 번째, 저주받은 자처럼 신의 율법을 거스른 자일 것] ……음, 형수님. 이 밑부분은 단어가 어려워서 못 읽겠어요.”
“그래? 그럼 읽을 수 있는 부분만 읽어 줄 수 있어?”
“네. 알겠어요.”
그레이스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정을 부리는 레온을 달랬다. 그녀의 간절한 애원에 결국, 레온은 아랫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마저 읽어 내렸다.
“[초대 신의 저주를 풀 제물로 적합한 자, 그것은 ‘한 번 죽었다 되살아난 자’이다].”
“……뭐?”
“[제물의 심장을 찔러 저주받은 자가 그 피를 뒤집어쓰게 하라. 그 순간 제물의 피는 저주받은 이를 감시하는 신의 눈을 가릴 것이요, 저주받은 자는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생명을 되찾을지니. 제물은 저주받은 이의 업과 감히 죽음의 질서를 어지럽힌 것에 대한 벌을 모두 뒤집어쓰고 죽을 것이다. 이는……].”
“레, 레온! 그, 그만! 그만 읽어도 돼!”
그레이스는 이어지는 끔찍한 묘사에 다급히 레온의 행동을 막고자 소리쳤다.
그 후, 그녀는 눈썹을 파르르 떨며 조금 전 들은 기록들 속 숨겨진 비밀과 지금까지 자신이 밝혀낸 사실들을 조합해 보았다.
‘……진정해. 차분히 정리해 보자.’
그레이스는 길게 심호흡하며 머릿속에 떠도는 것들과 밝혀낸 사실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첫 번째로 황실에는 저주받은 피가 흐른다. 그 피가 짙어질수록 신의 저주는 강해져, 후손을 얻기 어렵고 얻은 후손도 단명하고 만다. 두 번째로 그 저주를 피하기 위해선 제물, ‘죽었다 살아난 자의 피’가 필요하다.
그레이스는 밝혀낸 사실들에 현재 이 모든 음모와 관련된 자들을 대입했다.
‘어렵게 얻은 황실의 후손. 이것은 아마도 황태자겠지? 실제로 황제 폐하께선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황태자를 보셨으니까. 그리고, 죽었다 되살아난 자는 나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이 일에 펠릭스 가문은 왜 휩쓸려 들어간 걸까?’
생각을 더듬던 그레이스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제물은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으리라는 것을.
왜냐하면.
‘……펠릭스 공작은 누군가를 되살릴 힘이 있으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레이스는 이 모든 일의 전모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황태자가 초대 신의 저주받은 피를 물려받은 거야. 그러니 내게 자신을 가리켜 괴물이라고 말했던 거겠지.’
생각을 이을수록 머릿속에 떠돌던 퍼즐 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설명하면 앨버튼 공작이 황실의 약점을 쥐었다고 적었던 일기의 내용도 이해가 돼. 황제 폐하의 후손은 황태자뿐이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하나뿐인 후계자를 지켜서 혈통을 잇고자 했을 테지. 그리고, 앨버튼 공작은 그 저주를 풀고자 방법을 알아보다가 선대 펠릭스 공작님과 에일린 황녀님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된 거야!’
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아서를 낳자마자 빈사 상태에 빠진 아내를 안고 탑을 올랐던 선대 펠릭스 공작, 그리고 3일 후 기적처럼 멀쩡히 살아 돌아온 그의 아내.
그 과정에서 선대 펠릭스 공작은 아서가 자신을 살렸던, ‘자신의 목숨으로 죽은 연인을 살리는 마법’을 썼을 터다.
그때는 그 비밀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추후 에일린 황녀가 레온을 낳다 목숨을 잃음으로써 펠릭스 공작가의 비밀이 드러났다. 그 일을 조사한 앨버튼 공작에 의해서.
그리고 그때, 앨버튼 공작은 한 줄기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황태자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권력을 손에 틀어쥘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그레이스는 지금껏 자신이 듣고, 찾아내고, 경험한 모든 사실이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는 것에 전율했다.
‘이 사실대로라면 지금껏 아서의 아내와 약혼녀들이 불행한 결말들을 맞았던 것도 납득이 돼. 앨버튼 공작과 황실은 아서가 선대 펠릭스 공작과 같은 힘을 지녔으리라 확신했고, 아서와 연을 맺은 이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게끔 만든 거야. 그래서 그가 그 마법을 사용해 그녀들을 되살리길 바랐던 거지. 그래야만 황태자의 저주를 풀 ‘제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그랬기에 그들은 저들의 목표를 위해서 아서와 연을 맺은 여인들이 모두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음에도 계속 다른 여인들을 찾아 그에게 붙여 주었고, 그러다 자신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그들의 계략에 자신은 아서와 결혼한 후, 사랑에 빠졌으며, 그들의 독살 시도에 ‘한 번 죽었다 되살아났다’.
‘……말도, 안 돼.’
그레이스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들의 뜻대로 이뤄지고 만 것이다. 마치, 예정된 것처럼.
그레이스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어떻게 이런…….”
“……왜 그러세요?”
그레이스는 충격에 빠져 사색이 된 채 두 팔로 온몸을 감싸안았고, 레온은 갑자기 몸을 떠는 그녀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며 다가왔다.
그레이스는 제 곁으로 다가온 레온에게 두 팔을 뻗어 그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처음부터 앨버튼 공작은 날 죽일 생각이었던 거야. ……나를 아서에게 보낸 그 순간부터, 날 제물로 삼을 생각이었던 거야.’
결국,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하든 가족의 손에 죽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공포와 배신감으로 온몸을 떨었다.
가족에게 더는 일말의 기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그들이 처음부터 자신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배제한 채 철저히 권력을 쥘 수단으로만 취급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레이스는 세게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레온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왜, 왜 그러세요? 혹시 또 아프신 거예요?”
레온은 숨이 막히도록 자신을 끌어안은 그레이스를 마주 안으며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대답 없이 조용히 흐느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레온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그림처럼 구불구불한 글자로 적힌 그 서책을 읽은 것 때문에 뭔가 문제가 생긴 듯했다.
레온은 자신을 끌어안은 그레이스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다. 밖으로 나가 샐리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부인. 조금 전에 샐리에게 들었습니다. 레온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셨다고요.”
그때, 조심스럽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성내 업무와 기사단 시찰까지 전부 마치고 돌아온 것인지 정복 차림인 그가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그 후, 다정하게 웃으며 그레이스를 찾던 아서는 레온을 끌어안은 채 울고 있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다급히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혀, 형님! 도와주세요. 어, 어떡해요. 어디 아프신가 봐요…….”
“부인, 왜 울고 계십니까! 혹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서가 단단한 팔로 그레이스를 끌어안으며 채근하듯 묻자, 그녀가 우느라 잔뜩 잠겨 버린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저, 다 알아냈어요. 선대 펠릭스 공작님의 죽음도, 황실이 숨기고 있던 비밀도. ……그리고, 그 비밀을 이용해 앨버튼 공작이 꾸미고 있던 음모도요.”
“……그게 정말입니까?”
아서가 굳은 표정으로 그레이스를 향해 되물었다. 그녀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아니, 그 사람과 가족들은 처음부터 날 살려 줄 생각이 없었어요. 내 삶도, 목숨도, 다 그들에겐 권력을 쥐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당신과 삶도 지옥으로 몰아넣었어요.”
“……그레이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그깟 권력이 뭔데, 그까짓 황실의 혈통이 뭔데……. 그것 때문에 어떻게 한두 사람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가 있어요? ……신이 부여한 생명 앞에 귀함과 천함이 따로 있고, 소중하고 하찮은 것이 따로 있나요? ……어떻게. 어떻게 한 사람을 살리자고 그렇게까지 하죠?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그레이스는 아서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연신 눈물을 쏟아 내며 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 냈다.
아서는 작게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서럽게 우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녀가 밝혀낸 사실은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그리고 레온에게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큰 파장을 불러올 성싶었다.
아서는 당장이라도 탈진할 것 것처럼 우는 그레이스를 다정히 토닥이며, 자신과 그녀 사이에 낀 채 덩달아 울상을 짓고 있는 레온에게 말했다.
“……레온. 이만 시간이 늦었으니 네 침실로 돌아가거라.”
“시, 싫어요. 형수님이 이렇게 울고 계신데……. 안 갈래요.”
레온이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자 아서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어느새 침실 안으로 들어와 이 상황을 안절부절못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샐리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레온을 별채까지 데려다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레온 님? 이만 절 따라오세요. 공작님께서 책임지고 마님을 슬프지 않게 해 주실 거예요.”
“……정말? 정말이에요?”
“그래. 그러니 걱정 말고 푹 자 두거라.”
그 말에 레온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아서의 품에 안긴 그레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 시선을 느낀 그레이스는 얼른 젖은 얼굴을 닦으며 레온에게 겨우 웃어 보인 후, 말했다.
“그래, 레온. 나는 걱정 말고 얼른 가서 자. 푹 자고, 내일 보자. 응?”
“……알겠어요. 샐리, 날 데려다줘.”
“네. 레온 님.”
레온은 시무룩하게 대답한 후, 얌전히 그레이스의 품속에서 빠져나와 샐리의 손을 잡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