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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95화 (95/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95화

“아니야! 분명 내가 손을 잡아 주면 좋아하실 거야. 산책할 때도 늘 손잡고 걷자고 하셨단 말이야!”

“……레온 님, 제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리 오세요! 마님의 침실에 들여보내 달라고 떼쓰지 않는 대신 별채에만 들어오게 해 달라는 약속을 어기셨으니, 저 또한 레온 님과 한 약속을 어기겠어요!”

“싫어! 안 갈래! 으아아앙!”

그레이스는 레온이 우는 소리에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세게 깨물며 훌쩍였다.

그까짓 계획이 뭐라고, 비밀을 지키는 것이 뭐가 중요하다고 저 작은 아이의 눈에서 서러운 눈물을 흘리게 만든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레이스는 문 앞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곤 그 위로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러다 레온의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잠시 후, 샐리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눈가가 조금 젖은 채 착잡한 표정을 짓는 샐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어쩌다 레온 님이 알게 되신 건지, 원. 집사장님께 입을 가벼이 놀린 이들을 찾아내 벌을 주라고 해야겠어요.”

“샐리. 아무래도 나,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봐.”

“……마님.”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선 당연히 레온에게도 숨기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말이야. ……막상 레온이 저렇게 우니까 미칠 것 같아.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

그레이스는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 잠긴 목소리로 넋두리하듯 말했다.

이 모든 일을 꾸민 앨버튼 공작과 그 배후에 있는 황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어떻게든 그들이 쥔 비밀을 알아내서 그들의 계획을 망치고 보란 듯이 앙갚음하고자 했다.

그리고 아서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복수 때문에 자신이 다쳐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리라는 생각도 했다. 본디 상대를 파멸로 이끌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목숨을 걸어야 했기에.

그런데, 그 과정에서 레온이 저렇게 상처받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레온이 모르게만 한다면, 혹은 레온이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 전에 자신이 모든 비밀을 밝혀내고 잘 설명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예상과 달리 레온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고, 아이는 그로 인해 또다시 큰 상처를 받았다.

그레이스는 또다시 피가 나는 입술을 짓이겼다.

복수와 사랑하는 이의 아픔, 둘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순간,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그레이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피는 샐리에게 말했다.

“……샐리.”

“네, 말씀하세요.”

“오늘 밤, 모두가 잠든 시각에 몰래 레온을 데리고 와 줘요.”

“……네? 괜찮으시겠어요? 그러다 혹여 말이 새어 나가면……!”

“조심히 부탁할게요.”

“……마님.”

“그래 줄 수 있죠?”

그레이스가 굳은 표정으로 샐리에게 물었다. 그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던 샐리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할 수 있어요. 저만 믿으세요.”

“부탁할게요.”

그레이스가 샐리에게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샐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웃으며 여전히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레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레이스는 기꺼이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일이 이렇게 되어 자신이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 새어 나갈 가능성이 더 커졌으니, 한시라도 빨리 그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레이스는 젖은 눈가를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 * *

또다시 펠릭스 성에 깊은 밤이 찾아왔다.

짙은 커튼이 쳐진 침실 안에서 먼지와 곰팡내 가득한 서책들과 씨름하던 그레이스는 곧,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마법 언어로 적히지 않은 기록들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모호했고, 마법 언어로 적힌 기록들은 읽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 겪은 경험처럼 글자들이 움직여 주길 기대하며 서책을 뚫어져라 응시했지만, ‘더 이상 힘을 빌려주지 않겠다’ 선언한 목소리의 말 때문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이전에 자신이 알아낸 사실과 읽을 수 있는 서책들에서 알게 된 사실들을 양피지에 적어 놓은 후, 그 기록을 바라보며 밝혀내지 못한 비밀들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으, 모르겠어. 그녀들이 죽거나 미친 일의 배후에 황실과 앨버튼 공작이 있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는 건 뭐지? 그리고, 왜 황태자를 진짜 괴물이라고 칭하는 거지?”

이렇게 진전이 없을 줄 알았으면 그냥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밝히고 앨버튼 공작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살피는 편이 더 나았을까, 하는 무모한 생각마저 들던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그레이스는 얼른 걷어 놓았던 침대의 휘장을 걷곤 문밖의 상대가 정체를 밝히길 기다렸다. 그러자 문밖의 상대가 또다시 문을 노크했다.

똑―. 똑똑―. 똑―.

그것은 조금 전, 레온을 데려오겠다며 나가는 샐리에게 그레이스가 ‘암호’로 알려 준 노크였다.

그레이스는 반색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작은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린 레온을 품에 안은 샐리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샐리는 애틋한 눈길로 레온을 바라보는 그레이스에게 살포시 웃어 보이며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를 향해 말했다.

“레온 님. 이제 눈을 가린 손을 떼 보세요.”

“……그래도 돼?”

“네.”

그러자 레온이 작은 손을 쑥 내린 후, 검은 가면 아래 드러난 예쁜 오드아이를 깜빡였다. 줄곧 눈을 가리고 있던 탓에 명순응을 하는 듯했다.

이윽고 레온의 눈이 자신의 앞에 선 그레이스에게 향했다. 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작게 입을 벌리며 그레이스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 곧 입술을 부리처럼 삐죽거리며 발을 버둥거렸다.

그 모습에 샐리는 기다렸다는 듯 레온을 놓아주었고, 아이는 곧장 그레이스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얼른 몸을 굽혀 아이를 안아 주었다.

“레온.”

“……흑.”

그레이스가 제 품에 답삭 안긴 레온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자, 레온은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침실에 오기 전에 샐리에게서 간단히 사정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그레이스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게 우는 어린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미안해. 레온에게 거짓말해서.”

“……흑, 아니에요.”

“용서해 주지 않아도 돼.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줘. 절대 레온을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알아요. 저는 무사하신 것만으로도 기뻐요.”

“……고마워, 레온.”

돌아온 대답에 그레이스는 또다시 터지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레온은 짧고 가느다란 팔로 그레이스를 더 꼭 끌어안았고, 그레이스는 작은 레온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토해 냈다.

* * *

한동안 레온을 꼭 끌어안고 있던 그레이스는 잠시 후, 배고프다며 애교를 부리는 레온의 말에 작게 웃으며 꼭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어 주었다.

그레이스는 샐리에게 레온을 위한 간식을 부탁했고, 샐리는 기꺼이 주방에서 쿠키와 달콤한 밀크티를 몰래 공수해 와 두 사람에게 건넸다.

샐리는 얼른 그것을 받아 들고 허기를 채우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럼, 전 문 앞을 지키고 있을게요. 혹시 수상한 사람이 침실 안을 엿보려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응!”

“부탁할게, 샐리.”

“제게 명하실 것이 있으면 언제든 안에서 문을 두들겨 주세요.”

짧은 당부를 남긴 샐리가 침실 밖으로 나간 후, 그레이스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양손에 쿠키를 들고 야금야금 베어 먹는 레온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후, 그녀는 레온의 빈 찻잔에 밀크티를 부어 주곤 침대에 쌓아 두었던 서책을 들고 돌아왔다. 그러자 쿠키를 먹고 있던 레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레이스를 향해 물었다.

“형수님, 그건 뭐예요?”

“응? 이거 말이야?”

“네.”

“음, 뭐라고 할까? 중요한 비밀을 밝히기 위해 봐야 할 책이야.”

“……그렇구나.”

돌아온 대답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는 그런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후, 지난번 자신의 눈앞에서 춤추듯 글자가 움직였던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안의 목소리가 힘을 빌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던 그때, 책에 집중한 그레이스와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레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으음. 그런데요.”

“왜, 레온?”

“[초대 신의 저주는 황가의 피에서 피로 전해 내려온다]가 무슨 뜻이에요?”

“―뭐!?”

그 말에 그레이스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레온이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레이스는 레온에게 미안하다며 두 손을 모으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마, 레온이 이 책을 읽은 걸까?’

그레이스는 반신반의하며 레온을 향해 물었다.

“레온. 혹시, 이 책을 읽고 한 말이야?”

“……음, 네.”

“그, 그렇다면! 이, 이 부분도 좀 읽어 봐 줄래?”

그레이스는 자신이 보고 있던 서책을 레온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레온은 갑자기 자신에게 책을 읽어 달라 권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순순히 그녀가 가리킨 부분을 더듬더듬 읽어 내려갔다.

“[피가 짙어질수록 초대 신을 기만하여 얻은 능력은 강해질지 모르나, 저주 또한 그만큼 강해진다. 더불어 저주받은 피가 짙을수록 후손을 가지기 어렵다. 초대 신이 그가 창조한 세상에 그 저주받은 피가 흐르지 않길 원했기에].”

“……레온. 계속 읽어 줄래?.”

“네. 음……. [그뿐만이 아니다. 초대 신은 혹여 그 저주받은 피의 주인이 어렵게 후손을 얻어도, 그 후손이 오래 살지 못하게끔 저주를 내렸다. 그 피에 흐르는 신의 저주가 주인의 생명을 좀먹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즉, 어렵게 얻은 후손조차 스무 번째 생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계속 읽어요?”

“응, 미안하지만, 부탁해.”

작은 손에 서책을 꼭 쥔 채 열심히 읽던 레온이 고개를 돌려 묻자, 그레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이 다시 서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저주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허락한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저주받은 자’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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