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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94화 (94/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94화

아서는 닫힌 침실 문 쪽으로 걸어가며 때마침 바닥 청소를 마친 샐리에게 말했다.

“그녀가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도록 보살펴 줘.”

“네. 공작님. 걱정 마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샐리에게 당부를 마친 아서는 다시 그레이스가 앉아 있는 침대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레이스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아서를 향해 대답 대신 살짝 손을 흔들었다. 혹여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사이, 누군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까 걱정되어서였다.

이윽고 침실 문이 닫힌 후, 그레이스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샐리에게 말했다.

“샐리, 나 부탁이 있는데.”

“예. 하문하셔요.”

그레이스는 자신의 말에 마치 전장에 나가는 기사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샐리를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배고픈데. 우리, 같이 아침 먹을까?”

“……네? 아, 네! 당장 준비해 올게요!”

어떤 부탁을 하시려는 걸까, 긴장한 표정으로 그레이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샐리는 돌아온 대답에 활짝 핀 꽃 같은 얼굴이 되어 다급히 침실 밖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 아서의 당부를 떠올린 건지 침실 문 앞에서 눈치를 살피며 가볍게 숨을 고르더니, 곧 표정을 구기며 방을 나갔다.

마치 희극 배우 같은 샐리의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그레이스는 작게 킥킥거리다 편안한 한숨을 내쉬며 침대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샐리가 돌아오고, 아서에게 모든 소식을 들은 올리버 경이 동쪽 탑 지하실에 있는 기록들을 가져올 때까지 잠시 쉴 생각이었다.

* * *

잠시 후, 샐리는 너비가 족히 3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큰 약초 바구니를 든 채 침실로 들어왔다.

바구니가 적잖이 무거운 모양인지, 샐리는 낑낑거리며 그레이스가 기대앉아 있는 침대 옆까지 다가와선 그 바구니를 열었다.

커다란 바구니 안에는 침대에 놓을 만한 작은 접이식 은 테이블과 부드러운 흰 빵 사이에 신선한 채소와 얇게 저민 고기를 듬뿍 넣은 샌드위치, 그리고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옥수수 수프와 레몬과 허브 잎을 잘라 넣은 물병과 값비싼 이국의 과일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레이스는 도저히 둘이 먹기엔 무리다 싶을 만큼 많은 음식을 하나둘 차려 놓은 샐리를 향해 질겁하며 말했다.

“……세상에. 샐리, 설마 이 많은 걸 다 나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그럼요! 요 며칠간 식사도 못 하셨는데, 이제부터라도 든든히 드셔야죠! 게다가, 오늘 종일 동쪽 탑 지하실에 있는 기록들을 살펴보실 예정이시라면서요? 그럼 더더욱 든든히 드셔야 해요!”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가져올 때 주방장이나 다른 시종들이 의심하진 않았어?”

“그럴까 봐 주방장에게는 공작님께 가져다드릴 거라고 하고 가져왔죠. 그리고 주방을 나와서는 바구니 안에 신경독소를 해독하는 약초와 화로가 들어 있다고 말했고요. 그러니 다들 순순히 납득하던걸요?”

“……그랬구나.”

“네. 그러니, 안심하고 식사하세요.”

샐리는 걱정 말라는 듯 밝게 웃으며 그레이스의 앞에 차려 놓은 음식들을 한입에 먹기 좋게 자르고 손질했다.

그 후, 샐리는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불 꺼진 화로와 그 곁에 놓인 약초를 한 줌 집어 들더니 식사를 시작한 그레이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당분간은 약초를 피우는 척하기 위해 향초를 좀 태울 생각인데. 괜찮으시죠?”

“물론이지.”

“연기가 맵다 싶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응.”

그레이스는 따끈한 수프를 한 숟갈 입에 떠 넣으며 대답했다.

샐리는 그레이스가 식사를 시작한 걸 확인하곤 침실의 입구 쪽에 폭이 좁고 키가 큰 테이블을 가져다 놓더니 그 위에 화로를 놓고 향초를 태웠다.

최대한 침대 부근에는 연기가 닿지 않도록, 동시에 향이 침실 밖으로 퍼져 나가 이 앞 복도를 지나는 이들은 그레이스가 아직 와병 중이라 착각하도록 조치한 후, 샐리는 얼른 그레이스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천천히 식사하는 그레이스의 곁에서 시중을 들다가 그레이스가 식사를 마치자 그녀를 씻기고 편한 차림으로 단장해 주었다.

똑똑.

마지막으로 긴 머리를 높게 틀어 올려 멋들어진 장미 장식으로 고정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침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샐리와 그레이스는 짧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레이스는 짙은 휘장이 내려진 침대 안으로 들어갔고, 샐리는 문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누구시죠?”

“올리버입니다. 부인께서 드실 해독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침실 문을 두드린 것은 올리버 경이었다.

샐리는 살짝 문을 열고는 자신의 눈동자 크기만큼 벌어진 문틈 사이로 올리버 경을 살피며 속삭이듯 물었다.

“……공작님은, 뵙고 오신 거죠?”

“물론입니다. 부인의 상태에 대해 전부 전해 듣고 ‘그곳’에 들렀다 오는 길입니다.”

올리버 경은 보란 듯 손에 든 묵직한 바구니를 눈앞에 들어 보였다. 샐리는 문틈을 벌리며 올리버 경의 등 뒤를 살피고 다시 물었다.

“……따라온 사람은 없었겠죠?”

“네. 공작님께서 저주를 언급하시며 별채를 비우라 지시하셔서 지금 이곳에는 저희뿐입니다.”

“알겠어요. 얼른 들어오세요, 올리버 경.”

나름대로 확인을 끝낸 샐리가 문을 열자 올리버 경이 빠르게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마자 샐리는 다시 침실 문 앞으로 약초를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높은 테이블을 가져다 놓고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올리버 경은 샐리가 문단속하는 것을 확인한 후, 인영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두꺼운 휘장이 내려진 그레이스의 침대 앞에 갖고 온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올리버 경.”

그레이스는 휘장을 걷고 나와 올리버 경에게 인사했다. 그는 침대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무사하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공작 부인.”

“고마워요. 내가 아서에게 부탁했던 것은……. 가져왔나요?”

그레이스가 조심스레 묻자, 올리버 경이 자신의 옆에 놓아둔 바구니를 눈짓하며 대답했다.

“네. 의심을 사지 않을 만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많이 가져왔습니다.”

“고마워요. 당분간 종종 이런 부탁을 하게 될 텐데, 그때마다 이번처럼 들키지 않게 가져다주세요.”

“맡겨 주십시오. 기사 올리버, 공작 부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레이스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는 올리버 경에게 미소로 대답한 후, 얼른 그가 가져온 바구니를 열었다.

그러자 동쪽 탑 지하실의 석실에서 보았던 서책과 말린 양피지들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그것을 침대 위에 전부 쏟아붓고 다시 침대 위로 두꺼운 휘장을 치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올리버 경. 이제 나가 봐도 좋아요. 또 부탁할 것이 있으면 샐리를 통해 말을 전할게요.”

“예. 알겠습니다.”

올리버 경은 다시 휘장이 내려진 침대 안으로 들어가는 그레이스에게 예를 표하곤 몸을 일으켰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침실 안이 다시 고요해지자 그레이스는 문 앞에 서 있을 샐리를 향해 촛불을 하나 가져다달라 부탁했다.

당분간은 자신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비밀로 하기 위해 침실 안, 창문에 달린 두꺼운 커튼을 모두 쳐 놓아서 낮임에도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샐리는 얼른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촛대에 촛불을 켜 주었다. 그레이스는 그제야 밝아진 시야에 만족하며 아무렇게나 쏟아 놓은 서책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레이스의 침실이 있는 층 계단 쪽에서 높은 고함이 들리더니 누군가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 전 올리버 경이 별채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했는데, 누가 이리 시끄럽게 다가오고 건지 의문이었다.

그레이스는 살짝 침대 휘장을 걷고 문 앞에 기대선 샐리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소란이지?”

“……글쎄요. 잠깐 나가볼까요?”

“응, 부탁해. 혹시 침입자일지도 모르니 단검이라도 갖고 나가.”

“네, 마님.”

샐리는 그레이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침실 안에 홀로 남은 그레이스는 마법 언어로 적힌 서책을 읽고자 애쓰려 했지만 귀로는 밖의 소란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샐리가 나간 이후 잠잠해질 줄 알았던 소란이 더 심해졌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이 소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싫어! 놔아! 형수님한테 갈 거야!”

“아, 안 됩니다! 레온 님!”

“나도 안 돼! 비켜! 비키라고! 으앙!”

“……아무리 울고 떼를 쓰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그 순간, 그레이스는 들려온 레온의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레온이 왜 여기에……? 혹시, 내가 독에 당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나? 그래서 저렇게 울고 있는 거야?’

“대체 왜 못 가게 하는 거야?! 역시 위급하신 거지? 그렇지?”

“레온 님,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공작 부인께서는 무사하…….”

“거짓말 마! 형수님께서 독에 당하셨잖아! 그래서 목숨이 위험하신 거고!”

“레온 님!”

“나도 다 알아, 안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말, 다 들었어! 나랑 형님의 저주가 임한 거라고! 그래서 쓰러지신 거라고!”

“대체 누가 그런 말을! 절대로 그런 게 아닙니다!”

“나랑 형님 때문이잖아! 그래서 쓰러지신 거잖아!”

“……레온 님.”

“제발 뵙게 해 줘. 손을 꼭 붙잡고 신께 기도드릴래. 그러면……. 그러면 신께서도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지금껏 얌전하게, 착하게 형님 말씀 잘 들으면서 살아왔으니까 신께서 들어 주지 않을까? 응?”

“……레온 님. 심정은 알겠지만……. 그런 행동은 마님께서 편히 쉬는 걸 방해할 뿐이랍니다.”

샐리와 레온을 돌보는 시녀장이 아무리 말려도 아이는 연신 울음을 터트리며 그레이스를 만나게 해 달라고만 했다.

‘레온…….’

그레이스는 눈에 가득 차오른 눈물을 닦고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음이 갈가리 찢기는 듯 아팠다. 그레이스는 조용히 흐느끼며 레온이 어른들에게 설득당해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이가 떼쓰는 소리는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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