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92화
앨버튼 공작은 충격받은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오웬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놓고 비웃고 싶은 심정을 어렵게 참았다.
대신, 그는 지금껏 황제를 향해 지은 적 없던 환한 미소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예.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폐하. 이제 황태자 전하의 저주를 벗겨 내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아, 다행이네. 정말로 다행이야!”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제 제안대로 따라 주시니 이리 일이 쉬운 것을요.”
앨버튼 공작이 조금 건방지다 싶을 만한 어조로 그동안 자신을 의심하고 진행하는 일마다 미적거렸던 황제를 향해 비꼬듯 대답했다.
그 오만한 태도에 오웬은 곧바로 인상을 구겼지만, 기쁨에 가득 차 이성이 마비된 황제는 그 말에 오히려 자신을 책하며 대답했다.
“그래, 그 말대로군. 내가 자네를 좀 더 제대로 믿어 주었다면 일이 더 쉽게 풀렸을 것을!”
“이제라도 알아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사실, 짐은 자네가 로이엔느 공녀의 시신을 빌미로 그 새파랗게 젊은 로이엔느 대공과 거래하라고 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다네. 설마, 그놈이 몇 년 전에 죽어 버린 여동생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병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었거든. 그런데, 그놈이 너무도 쉽게 제안을 승낙할 줄이야.”
“저 또한 아무리 로이엔느 대공이 하나뿐인 여동생을 제 자식처럼 아꼈다고는 하나, 그리 곧장 제안에 응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수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나!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런 방법은 생각해 내지 못했을 테지. 아아, 이 일은 모두가 다 자네의 공이네! 고맙네, 앨버튼 공작.”
“천만에요.”
황제의 거듭된 칭찬에 앨버튼 공작은 살짝 자세를 낮추며 겸손히 대답했다.
그 후, 앨버튼 공작은 연신 즐겁게 웃고 있는 황제와 그 곁에서 표정이 굳어진 황태자 오웬을 살폈다.
황제에게 자신이 이뤄 낸 성과를 전했으니, 이제 그에게 대가를 요구할 차례였다. 앨버튼 공작은 살짝 헛기침하여 황제의 주의를 제게 돌리고는 말했다.
“크흠. 그래서 말입니다, 폐하.”
“음? 왜 그러는가, 앨버튼 공작.”
“화급한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겠다, 이제 황태자 전하와 제 딸의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의논을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오오! 그렇지! 그래야지!”
그 말에 황제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앨버튼 공작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고, 오웬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사색이 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돌려 황제에게 말했다.
“폐, 폐하! 갑자기 이런!”
“결혼식 날짜는 최대한 빨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마리안느의 나이가 어느새 스물하고도 셋이 되었지 않습니까? 스물이 되자마자 혼인하는 다른 귀족 영애들에 비하면 지금도 많이 늦은 편이지요.”
“……하긴. 그렇긴 하지. 기다리게 하여 미안하네, 앨버튼 공작.”
“아닙니다. 이제라도 알아주셔서 기쁩니다.”
그러나 마치 말을 차단하듯 목소리를 높인 앨버튼 공작 때문에 오웬의 항의는 가볍게 묵살되고 말았다.
오웬은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앨버튼 공작의 뜻대로 그 끔찍한 여자, 마리안느와 결혼하게 될 것 같았다.
오웬이 제 가슴을 쿵쿵 치며 소리쳤다.
“아버님! 제 말을 좀……!”
“정숙하거라, 황태자.”
“하지만……!”
“감히 짐의 말을 거역할 셈이냐?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황태자인 너라도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큰 죄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하지만 오웬의 시도는 수포가 되고 말았다. 황제는 그에게 엄숙히 침묵할 것을 명했고, 결국 오웬은 울분을 삼키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세게 깨물며 자신의 아버지, 황제를 노려보았다.
“하아…….”
그러자 황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낀 손으로 오웬을 위로하듯 가볍게 토닥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아래에서 승리자처럼 웃고 있는 앨버튼 공작을 향해 말했다.
“자네의 말대로 마냥 마리안느 영애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결혼식은 언제 거행하는 것이 좋겠나?”
“저희 가문에선 최대한 빨리 진행하기를 원하옵니다.”
“그렇다면 다음 달 두 번째 주 토요일은 어떤가?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아버님! 그건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황제의 말에 앨버튼 공작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고, 오웬은 경악 섞인 비명을 질렀다.
다음 달 두 번째 주 토요일이라면 약 3주 뒤였다. 오웬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하고 마리안느와의 결혼을 피하기엔 너무나도 짧은 기간이었다.
정말이지 이럴 수는 없었다. 오웬은 또다시 항의하려 했지만, 황제는 그에게 아무 말 말라는 듯 손을 들어 그의 입가를 가려 버렸다.
“알겠네. 그럼, 짐 또한 신전에 다음 달 둘째 주 토요일에 무사히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준비하라 명하지. 로쉬 백작, 당장 집정관에게 일러 황태자의 결혼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앨버튼 공작은 감격하며 황제에게 허리를 숙였다.
드디어 차일피일 황태자의 결혼을 미루던 황제가 결단을 내렸다. 앨버튼 공작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자신의 찬란한 미래를 그리며 감격에 벅차올라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런 앨버튼 공작과 제 곁에서 사색이 된 오웬을 번갈아 보던 황제의 얼굴에 잠깐 복잡한 감정이 머물렀다 사라졌다.
“그럼 앨버튼 공작,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괜찮다면 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짐과 차를 마시며 대화하지 않겠는가? 자네를 위해 황궁 주방장이 최고급 홍차와 블랙커런트 파이를 준비해 두었다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폐하. 마침 아침 식사도 거른 참이라서요.”
“잘됐군. 로쉬 백작, 앨버튼 공작을 정원으로 안내하게.”
“……예, 폐하.”
황제의 명령에 로쉬 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후, 앨버튼 공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곧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을 한 앨버튼 공작이 로쉬 백작을 따라 나가자, 태양의 방에는 황제와 황태자만이 남았다.
오웬은 곧장 줄곧 참아 왔던 울분을 토해 내듯 소리쳤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제게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제가 얼마나 앨버튼 공작과 마리안느, 그 여자를 끔찍해하는 줄 잘 아시면서!”
황제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오웬은 복잡한 황제의 얼굴에서 지금이라도 명을 거둬 주지 않을까, 하는 조금의 희망을 엿보았다.
“……아들아.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듯하구나.”
그러나, 돌아온 황제의 대답에 오웬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황제는 충격으로 멍해진 오웬의 어깨를 주름진 손으로 토닥였다. 오웬은 그런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또다시 간절히 애원했다.
“아뇨!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저도 지금 그걸 찾고 있었고요!”
“아니, 이제는 늦었다. 네가 찾고 있는 그 방법이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떤 수도 앨버튼 공작은 전부 다 간파하고 있을 테지.”
“……아버님!”
“그러니 이제 헛된 노력은 그만두거라. 네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세상엔 짐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것이다.”
오웬의 애원에도 황제는 연신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 모습에 좌절로 일그러져 있던 오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는 연신 자신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그만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황제를 향해 절규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고 말겠습니다!”
그 말에 안쓰러운 듯 오웬을 바라보던 황제 또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어리석은 소리 말거라! 네가 감히 내게 그따위 소리를 해? 나와 황후가 너를 살려 보겠다고 지금껏 무슨 짓을 벌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말이다!”
“아버님!”
“됐다!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말거라.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짐은 이 결혼을 강행할 것이니.”
황제는 간절한 시선으로 매달리듯 바라보는 오웬의 시선을 피한 채 돌아섰다.
그 모습에 오웬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줄 여자는 자신의 손으로 해쳐야 하고, 자신이 가진 껍데기에만 관심 있는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 운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체념과 절망밖에는 남지 않은 그 미래를 상상하자 꼴사납게도 눈물이 맺혔다. 오웬은 볼 위로 뚝 떨어지는 눈물을 거칠게 닦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황제가 우뚝 멈춰 서더니, 당장이라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애써 냉정하게 아들을 향해 뒤돌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네가 행복한 죽음을 맞기보다 불행한 삶을 이어 나가길 바란다.”
“…….”
“살다 보면 처음에는 불행이라 여겼던 순간도,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는 때가 온다. 아니, 오히려 그 불행한 사건이 행복의 전조였던 경우도 많지. 지금은 네가 마리안느 영애와의 결혼이 불행이라 여길지 몰라도, 나중엔 이 선택을 하길 잘했다고 여길 날이 올 거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 그럴 거다. 그래야만 하고.”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태양의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