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91화
앨버튼 공작이 소리 내어 웃으며 벨리알에게 말했다.
“벨리알, 지금 당장 황궁으로 서신을 보내.”
“좋아. 뭐라고 보내지?”
“그냥 알현을 청한다고 하면 된다. 아, 그리고 그 자리에 반드시 황태자를 출석시키라고도 덧붙이고.”
“쯧, 알았다. 그레고리! 네가 나설 시간이구나!”
앨버튼 공작의 지시에 벨리알은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비밀의 방 구석에 놓인 새장에서 흰 올빼미, 그레고리를 꺼내 주었다. 그러자 흰 올빼미가 빠르게 날아올라 벨리알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벨리알은 그레고리의 둥그런 머리를 쓰다듬으며 허공에 검지를 휘둘렀다. 이어 그곳에 양피지 한 장과 깃펜이 나타나더니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이며 서신을 써 내려갔다.
조금 전, 앨버튼 공작이 말한 대로 알현을 청하는 내용과 반드시 그 자리에 황태자를 출석시킬 것을 당부하는 서신이 완성되자 깃펜은 자연스레 사라졌고, 양피지는 둥글게 말려 그레고리의 앞으로 날아왔다.
벨리알은 그 서신을 작은 리본으로 묶어 단단히 봉하고는 그레고리의 발 옆에 묶어 준 후, 창문을 열었다. 앨버튼 공작은 창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날아가는 그레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 후, 비밀의 방을 걸어 나가며 그레고리가 날아간 창가에 기대어 선 벨리알에게 말했다.
“수고했어.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내일 황궁에 갈 준비를 해야 하거든.”
“그래. 잘 가, 인간 친구.”
“내일 황궁에 다녀와서 추후의 일을 의논하도록 하지.”
“더불어 우리의 계약 조건에 대해서도 논하도록 하자고.”
그 말에 비밀의 방을 나가던 앨버튼 공작이 우뚝 멈춰 섰다. 벨리알은 그런 그를 향해 싸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잊지 마. 내가 널 도와주는 건, 어디까지나 너와의 계약 때문이란 걸.”
“……알고 있다.”
“알지? 계약을 어긴 순간, 내가 어떻게 나올지.”
“그래.”
벨리알의 서늘한 협박에 앨버튼 공작은 고개를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벨리알은 두 번이나 거듭된 확답을 받고 나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됐어. 내일 잘 다녀오라고.”
앨버튼 공작은 마치 천진한 아이처럼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벨리알을 잠시 노려보곤 거칠게 비밀의 방 문을 닫고 서재로 나왔다.
“하…….”
거칠게 문을 닫은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한동안 서재의 비밀 문을 노려보던 앨버튼 공작은 곧 짧게 한숨을 내쉬며 서재 안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젠장, 재촉하기는! 이제 막 골치 아픈 일들이 착착 해결돼서 기분이 좋던 참이었건만!’
앨버튼 공작은 씨근덕거리며 바닥에 잔뜩 어질러져 발에 차이는 책들을 걷어찼다. 그러길 몇 번쯤 반복하자 다행히 화가 가라앉고 기분이 나아졌다.
앨버튼 공작은 길게 심호흡하며 즐거운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래, 예를 들면 내일 알현하게 될 황제의 얼굴이라든가 황태자의 얼굴을 말이다.
‘분명, 이 소식을 전하면 그 늙은 황제는 본인과 본인의 조상들이 일궈 낸 제국을 내게 통째로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저주받은 아들놈을 살렸다며 속없이 기뻐할 테지? 그리고, 어리고 어리석은 그 황태자 놈은 계획이 무산된 좌절감과 제 손으로 마음에 둔 여자를 해쳐야 한다는 사실에 비통해할 테고.’
그 꼴 좋은 얼굴들을 상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앨버튼 공작은 그렇게 홀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 후, 앨버튼 공작은 곧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서재를 휘 돌아보았다. 지난번에 그 바보 같은 황태자 놈이 한 번 서재에 들어왔다 나가는 사이, 중요한 기록이 담긴 수첩이 사라진 바람에 생긴 새로운 습관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자신이 어지른 것 외엔 사라진 것도 변한 것도 없었다. 앨버튼 공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서재를 나와 문을 단단히 잠그고는 촛불이 드문드문 빛을 밝힌 복도를 걸어 나갔다.
* * *
이른 아침부터 황궁은 알현을 청한 앨버튼 공작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했다.
황궁의 시종장 로쉬 백작은 집정관과 황궁 요리사를 채근해 가장 질 좋은 차와 디저트를 내오게끔 지시하곤 시종들에게 명해 비밀 정원에 야외 테이블을 설치했다.
집정관과 황궁 주방장은 로쉬 백작의 채근에 묵묵히 따르면서도 뒤로는 이리 갑작스레 준비하는 건 무슨 경우냐며 투덜거렸다.
로쉬 백작 또한 그들의 불만을 이해했으나 그 또한 별수 없었다. 어젯밤 자정이 가까운 시각, 갑자기 내일 당장 알현하겠다는 앨버튼 공작의 서신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로쉬 백작은 사실 황제 폐하가 앨버튼 공작의 알현 요청을 거절하리라 짐작했는데, 황제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당장 알현을 허락한다는 답신을 보내고는 내일 국빈을 대접하듯 화려하게 준비해 두라 명했다.
게다가 내일 황태자의 모든 일정 또한 취소하고, 이번 알현에 그를 참석시킬 것이니 그리 이르라고도 했다. 로쉬 백작은 의아했지만 군말 없이 그 명을 따랐다.
그리고 지금, 그는 황제의 알현실인 태양의 방 앞에 서 있었다. 로쉬 백작은 태양의 방 앞을 지키는 기사에게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로쉬 백작은 그 안으로 들어가 황제와 황태자 오웬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오, 로쉬 백작! 그래, 앨버튼 공작을 맞이할 준비는 차질 없이 마쳤는가?”
“예, 폐하. 명하신 대로 앨버튼 공작께서 즐겨 찾으시는 베르가못 향 홍차와 고급 꿀이 가득 들어간 블랙커런트 파이를 준비해 두라고 일렀습니다.”
“잘했네. 다른 이도 아니고 앨버튼 공작인데 귀중히 대접해야지.”
황제는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대꾸했고, 그 말을 들은 로쉬 백작과 황태자 오웬은 티 나지 않게 인상을 굳혔다. 평소 귀찮아하거나 혹은 신경질적인 태도로 앨버튼 공작을 맞이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황제의 모습 때문이었다.
대체 어제 앨버튼 공작이 보낸 서신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기에 황제가 저렇게까지 기꺼워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로쉬 백작은 황태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또한 앨버튼 공작이 보낸 서신의 내용에 대해서 모르는 듯했다. 그 모습에 로쉬 백작은 조금씩 마음이 찜찜해졌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못했다.
그러던 그때, 태양의 방의 문이 열리더니 조금 전 로쉬 백작에게 문을 열어 주었던 근위기사가 황제에게 다가와 고했다.
“폐하, 앨버튼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오오! 그래, 얼른 들라 하거라.”
황제는 반색하며 그리 명했고, 로쉬 백작은 슬쩍 뒤로 물러나 태양의 방 구석에 섰다.
다른 이의 알현이었다면 적당히 눈치껏 방을 나갔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 알현을 꼭 지켜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황태자 또한 같은 생각인 듯 굳이 그를 향해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다. 로쉬 백작은 자신을 바라보는 황태자와 찰나에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 후, 태양의 문이 열리고 앨버튼 공작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마치 개선장군 같은 당당한 걸음으로 황제와 황태자 오웬이 앉은 옥좌 앞으로 걸어왔다.
황제는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는 앨버튼 공작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앨버튼 공작이 웃으며 황제를 향해 말했다.
“피츠제럴드 앨버튼, 위대하신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어서 오게. 앨버튼 공작!”
“지난밤 평안하셨는지요, 폐하.”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앨버튼 공작의 말에 황제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평안했을 뿐이겠는가! 어젯밤 자네가 보낸 서신 때문에 가슴이 뛰어서 잠들지조차 못했네!”
“그러셨습니까? 이것 참, 이거 의도치 않게 폐하께 무례를 범한 꼴이 되었군요.”
“이 사람, 참! 허허! 그것이 무례라 생각되어 송구하다면 얼른 짐이 들으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할 그 소식이 뭔지나 말해 주게.”
황제는 기대에 찬 젊은이처럼 눈을 빛내며 앨버튼 공작을 채근했다. 앨버튼 공작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리며 한번 입술을 축이더니 은근한 시선으로 황태자, 오웬을 응시했다.
“…….”
그 조금은 무례한 시선에 오웬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앨버튼 공작의 음흉한 미소 속에 숨은 묘한 승리감과 자신을 깔보는 듯한 눈빛이 불안했다.
오웬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앨버튼 공작을 노려보았고, 앨버튼 공작은 그런 그의 모습을 비웃듯 가볍게 웃고는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려 대답했다.
“제물이 함정에 빠져들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네. 게다가, 어젯밤 플라이엔 성에 심어 놓은 첩자로부터 그 소식을 들은 괴물 공작이 다급히 펠릭스 성으로 귀환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쯤이면 아마 펠릭스 성에 도착했을 테니, 늦어도 3일 안에는 그 괴물 공작이 제물을 되살리는 것에 성공할 것 같습니다.”
“오오! 세상에! 이렇게 기쁠 수가 있나!”
앨버튼 공작의 말을 들은 황제는 진심으로 감격하며 두 손을 포개었다. 드디어 기나긴 숙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온 것이었다.
반면, 곁에서 그 말을 들은 오웬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는 충격으로 덜덜 떨리는 눈으로 앨버튼 공작을 노려보았다.
설마, 저 교활한 자가 이렇게까지 일을 빠르게 처리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오웬은 지금 눈앞에 앨버튼 공작과 황제가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충격으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어리석은 놈.’
앨버튼 공작은 그런 오웬을 곁눈질하며 차갑게 비웃었다.
고작 그런 얕은 수로 덤비니 당하고 마는 것이다.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감히 자신처럼 평생을 중상모략 속에 살아온 자를 이길 수 있으리라 믿었다니. 참으로 어리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