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90화
대체 그렇게까지 해 가며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일까. 권력? 부? 명예? 황태자의 안위? 그레이스는 그것이 무엇이든 무고한 이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가치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싸늘한 분노로 표정을 굳히며 아서를 향해 말했다.
“내가 죽……. 아니, 기절해 있던 사이에 앨버튼 공작가 혹은 황실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나요?”
“첩자들로부터 별다른 보고를 받지 못한 걸 보면 그렇습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서는 푸른 눈을 분노의 불꽃으로 태우며 자신을 향해 묻는 그레이스에게 조금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늘 다정한 그녀가 이토록 서늘한 목소리로 추궁하듯 말한 것도 그랬으나, 귀족답지 않게 소탈하고 암투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던 그녀가 자연스럽게 자신이 보낸 첩자가 있을 것이라 가정하며 묻는 것에 더 놀랐다.
그레이스가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아직 제가 살아났다는 걸 모르는 거겠죠?”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아서, 당분간 제가 아직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공표해 줘요. 저택 사람들 입단속도 시키고요. ……가슴 아프지만, 레온에게도 비밀로 하고요. 내가 깨어난 건 당신과 샐리, 올리버 경처럼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알리도록 해요.”
“……그 말대로 하겠습니다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레이스는 자신의 말에 조금 의아하다는 듯 묻는 아서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싸늘하게 미소 띤 채 대답했다.
“시간을 벌려고요.”
“시간이요?”
“네. 황태자의 비밀을 알아낼 시간이요.”
그레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아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은 마치 앞으로 자신이 꾸밀 일에 대해 공범자가 되어 줄 것을 제안하는 듯했다.
그레이스는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며 분노로 뜨겁게 달아올라 팽팽 돌아가는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배열하고 재창조했다.
지금껏 보고 듣고 찾아냈던 기록들과 기억에 비춰 볼 때, 자신의 죽음과 펠릭스 공작가에서 일어났던 모든 불행에 황태자의 ‘비밀’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레이스는 확신했다.
그리고 이젠 아버지라고도 부르기 싫은 그자, 앨버튼 공작은 그 비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쓰려고 했을 것일 테고, 그 과정에서 누가 죽은들 개의치 않았을 터였다.
……설령, 그것이 딸의 목숨이라도.
그레이스는 뒤늦게 그 역겨운 사실을 마음속 깊은 곳에 새기며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엔 이 모든 일이 황태자 전하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요. 아니, 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 일을 해결하려면 그 비밀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내야 해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니 아서, 미안하지만 동쪽 탑의 기록들을 전부 이곳, 별채로 옮겨 줘요.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은밀히요.”
“알겠습니다. 올리버 경을 시켜 옮기도록 하죠.”
“그리고 날 치료하기 위해 온 신관들과 의사들에겐 당신과 샐리가 간호한다는 명목으로 전부 돌려보내 줘요. 앨버튼 공작은 신전 쪽에도 연줄이 많으니, 분명 그들을 통해 내 상태에 관한 정보를 듣고 있을 테니까.”
“그사이 부인께서는 황태자의 비밀에 대해 조사할 셈입니까?”
“네.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죠. 계속 혼수상태인 척할 수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레온을 오랫동안 속이고 싶진 않거든요.”
아서는 쓴웃음을 짓는 그레이스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계속 이 침실에서만 머무르셔야 할 텐데, 답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틈이 날 때마다 들르겠습니다.”
“그래 주면 좋죠. 오실 때 잔뜩 굳은 표정을 하고 오는 것도 잊지 마요. 당신이 웃으며 들어오면 누군가 의심할 테니까요.”
“당신을 보러 오는데 굳은 표정을 연기해야 한다니, 부인 생각만 나면 웃음이 흐르는 내겐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부, 부끄럽게 무슨 말이에요!”
그레이스가 양 볼을 붉히며 두 팔로 자신을 안아 오는 아서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낮게 웃음을 터트리는 아서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슬쩍 흘겨보다 곧 마주 웃으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는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앨버튼 공작과 황실이 숨기고 있는 비밀에 대해 알아내고 말겠어.’
그리고 그 비밀을 알아낸 순간, 이 일들을 꾸민 자들에게 아서와 자신이 당한 것의 몇 배로 복수해 주겠다고, 그레이스는 굳게 결심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등을 다정히 쓸어내리는 아서를 향해 다짐하듯 말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까진 당신의 저주를 푸는 데만 골몰하느라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안 썼지만, 이젠 아니에요. 더 이상 그 사람들이 당신도 레온도, 그리고 나를 해치게끔 두지 않을 거예요. 이번 일에 대한 대가도 반드시 받아 낼 거고요.”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서 또한 굳게 다짐하며 품에 안은 그레이스의 몸을 살짝 떼어 낸 후,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목소리’는 자신이 또다시 되살아나면, 제 영혼은 신이 만들어 놓은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떨어지게 되고 말 것이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신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선 그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신의 미움을 사는 것보다 아서와 함께 이런 순간들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이 더 싫고 두려웠다.
만약 그녀에게 누군가가 신의 미움과 아서가 없는 삶 중 어느 것이 더 싫고 두렵냐 묻는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서가 없는 삶이 더 무섭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그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다음 생 같은 건 없어도 좋아. 이 사람을 지킬 수 있다면, 이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서의 따뜻하고 다정한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 * *
황제를 움직여 펠릭스 공작을 플라이엔 성으로 보낸 날로부터 며칠 뒤. 늦은 밤, 홀로 서재에 있던 앨버튼 공작은 플라이엔 성에 심어 놓았던 첩자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아서 펠릭스 공작이 펠릭스 성에서 온 서신을 받자마자 부하들을 남겨 둔 채 귀환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마 지금쯤 펠릭스 성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끝난 서신을 읽은 앨버튼 공작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그때, 앨버튼 공작이 서 있던 서재의 짙은 색의 커튼이 쳐진 창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앨버튼 공작은 기다렸다는 듯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문 앞을 맴돌고 올빼미가 큰 날개를 퍼덕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앨버튼 공작은 부리로 깃털을 다듬는 올빼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조금 전, 첩자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어. 일은 제대로 한 모양이지?”
그 말에 앨버튼 공작을 흘긋 올려다본 올빼미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더니 곧 한 명의 사람으로 변했다. 긴 로브로 온몸을 가린 그가 낮게 낄낄거리며 깡마른 손으로 앨버튼 공작의 어깨를 퍽퍽 두들기고는 대답했다.
“물론이지, 친구. 이 벨리알을 뭘로 보고.”
“신경독소의 양은 제대로 조절했겠지? 그 괴물 공작 놈이 도착하기 전에 그것의 심장이 멎어 버리면―.”
“알아, 안다고! 내가 그런 일 하나 똑바로 못할 것 같아? 펠릭스 성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 빠져나올 때 확인까지 했어. 아직 제물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어. 살아 있었다고!”
앨버튼 공작이 염려를 쏟아 내는 것이 귀찮다는 듯,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벨리알은 굽은 등을 한 채 느릿느릿 걸어 서재의 비밀 문 앞에 섰다.
그 후, 책장을 밀어 비밀의 방 안으로 들어간 벨리알은 방의 중앙에 있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테이블 앞에 서서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기묘한 문양 위로 진녹색의 오묘한 빛이 튀어나와 문양의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벨리알의 후드 밑 기괴한 입술이 양옆으로 크게 벌어졌다.
벨리알이 자신의 뒤를 따라온 앨버튼 공작을 향해 말했다.
“자, 봐! 이 마법진의 빛이 꺼지지 않았다는 건 아직 그 제물이 살아 있다는 뜻임을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
“다행이군.”
“게다가 조금 전 첩자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면, 그 괴물 놈이 펠릭스 성으로 귀환했음을 알리는 것이었겠지?”
“그래.”
“그렇다면 그 괴물 놈은 빠르면 오늘 밤, 늦으면 3일 내로 자신의 목숨과 제물의 목숨을 연결하는 마법을 쓰게 될 테고, 그 후 무사히 제물이 되살아나면 너는 그 제물을 잡아다 칼을 쥔 황태자의 앞에 가져다주면 되는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염려 말라며 벨리알은 시끄럽게 웃어 댔다. 앨버튼 공작은 그를 따라 웃으며 탐욕스러운 눈으로 번쩍이는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기나긴 숙원이 이뤄지는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
앨버튼 공작은 황태자의 장인이자 생명의 은인, 그리고 장차 이 제국 황태손의 외할아버지이자 제국을 호령하는 섭정이 되는 제 미래를 그리며 가슴 벅차 했다.
벨리알이 그런 그의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이봐, 인간 친구. 그렇게 좋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좋지.”
앨버튼 공작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벨리알에게 대답하고는 음흉하게 웃었다.
모든 일이 제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껏 가문의 수치로 길러 준 값도 못 하던 그레이스는 자신의 권력을 위한 제물이 되어 주었고, 그것의 희생으로 황실과 황태자에게 큰 빚을 지웠다.
그뿐인가. 그레이스가 죽는 순간, 그 괴물 공작 놈도 함께 죽을 테니 그때 군사들을 동원해 펠릭스 성을 쳐 그 괴물 놈의 어린 동생을 해치워 버리면 그 막대한 재산과 군권을 자신이 상속할 수도 있었다.
또한, 그레이스의 죽음을 계기로 감히 자신을 거스르고 계획을 망치려 한 황태자에 큰 교훈도 심어 줄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자신을 방해하려 해도 막을 수 없다는 것. 신은 제 편이며, 모든 일은 이 앨버튼 공작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