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88화
그레이스는 불길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신의 곁으로 가자는 것은 이번 생의 끝을 내포한 말이었으니까.
싫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다시 돌아온 삶인데, 또다시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삶 따위 관심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아서와 함께하는 현재의 삶이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그레이스는 도리질했지만, 그녀를 둘러싼 주변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마치 천국의 빛이 내려와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꼼짝없이 죽게 될 터였다.
“꺅!”
그러던 그때였다.
내려온 빛에 조금씩 힘을 잃고 꿈틀거리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붉은 선이 튀어나오더니 그레이스의 발목을 휘감았다.
붉은 선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여 그녀의 발목을 옭아매더니 점점 몸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소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 안 돼! 멈춰! 멈추라고!]
그러나 붉은 선은 목소리의 외침을 무시한 채, 그레이스의 왼쪽 가슴으로 그 끝을 쑤셔 넣었다.
“……!”
그 순간, 그레이스는 자신의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심장이 귀에 옮겨붙은 것 같았다.
쿵, 쿵, 쿵, 쿵.
쉴 틈 없이 시끄럽게 뛰는 심장 소리가 신기했다. 말도 안 되지만 꼭 자신의 가슴속에 심장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레이스는 가만히 ‘하나의 심장이 더 생긴’ 심장께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를 옭아맨 붉은 선이 사라지고, 점점 주변을 밝히던 눈부신 빛 또한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다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그녀를 덮치자, 목소리가 짜증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그 괴물 놈이 저주받은 힘을 썼잖아!]
“……뭐? 누가 힘을 썼다고?”
[바보 같긴, 네 남편 말이야! 그 괴물 놈이 너와 자신의 목숨을 엮었어. 죽어 가던 네 생명을 제 생명과 이어 붙였다고!]
“……아서가!? 정말, 아서가 그랬다고?”
[그래! ……젠장! 이래서야 그놈들 좋을 대로 일이 흘러가게 생겼잖아! 이래서 그날 널 조종해서 놈을 찌르게끔 만들었던 건데!]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내가 정신을 잃었던 날 밤 나를 조종했던 게……. 너야?”
[그래! 네가 그 괴물과 멀어져야만 널 노리는 다른 괴물에게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목소리는 연신 그레이스를 향해 소리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레이스는 충격에 빠져 멍한 얼굴로 목소리가 알려 준 사실들을 곱씹었다.
‘……아서가 나를 살리기 위해 힘을 썼다고? 눈의 공작처럼? 하지만, 그때 분명 아서는 자신에겐 그런 힘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는 건, 아서는 자신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여태껏 몰랐다는 걸까. 왜?
생각을 더듬고 있던 그때, 그레이스는 점점 발끝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신기한 감각에 시선을 아래로 내린 순간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의 몸이 발끝부터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당황한 눈으로 가루처럼 흩날려 사라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잠시 분노를 터트리는 것을 멈추고 씨근덕거리고 있던 목소리가 다급히 그레이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 괴물 놈의 의식이 널 끌어내고 있잖아! ……빌어먹을, 운명의 수레바퀴에 올라타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 괴물 놈이라는 거, 아서를 말하는 거지? 그 사람이 날 끌어내고 있어?”
[에잇.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잘 들어, 그레이스. 마지막으로 힌트를 줄게.]
“뭐? 무슨 힌트?”
[널 사랑하는 두 남자는 다 괴물이야. 한 괴물은 네가 살아야만 살 수 있는 괴물이고, 나머지 한 괴물은 네가 죽어야만 살 수 있는 괴물이지.]
“내가 죽어야만 살 수 있는 괴물? 그게 누군데?”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제 네 목숨은 네 것이 아니야. 이제 그 괴물 놈이 죽으면 너도 죽고, 네가 죽으면 그 괴물 놈도 죽어. 그러니 살고 싶으면 둘 다 지켜.]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더는 내게 묻지 마. 그리고, ‘나’를 깨우지 마. 이 이상 신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다면.]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그레이스는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꿈에서 쫓겨나고 만 것이다.
* * *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레이스는 귓가에 들리는 아서의 숨소리에 점점 자신의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곧 제 손을 꼭 잡은 그의 손의 감촉도, 감고 있는 눈 안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불빛도 느껴졌다.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고 의식이 명료해지자, 그레이스는 얼른 감은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눈이 열리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아서의 얼굴이었다.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자신을 부르는 아서의 목소리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눈물에 잔뜩 젖은 얼굴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그 얼굴이 애달팠고, 또 원망스러웠다. 사랑스러운데 밉고, 그래서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아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양가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아서의 얼굴이 자신의 품에 파묻히는 순간, 자신의 심장께거 ‘두 배로’ 시끄럽게 뛰는 소리를 듣는 순간, 실감했다. 아서가 또다시 찾아온 죽음에서 자신을 구해 냈음을, 그로 인해 그의 목숨이 자신의 목숨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그레이스는 눈물을 터트렸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가 내린 결정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아서 그랬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전쟁터를 오갔던 사람이고, 황명이 내려올 때마다 어김없이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자신 때문에 전쟁터에서 위축될까 봐 두려웠다. 그로 인해 그가 어렵게 쌓아 올린 명성을 초라하게 잃을까 봐 겁이 났다.
레온의 안정된 삶, 펠릭스 성 사람들의 안전, 거느리는 기사들의 미래. 그것들을 전부 짊어지느라 안 그래도 어깨가 무거운 사람에게 자신의 목숨마저 지게 만들어서 미안했다.
그럼에도 기꺼이 자신을 살려 주고, 자신을 마주 안아 주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그레이스는 연신 소리 내어 울며, 아서의 어깨를 때리며 소리쳤다.
“대체 왜 그랬어요! 왜!”
그레이스는 낳아 준 부모마저 버린 자신이 뭐가 예쁘다고 목숨까지 걸어서 살려 준 거냐고, 왜 자신 때문에 안 그래도 무거운 어깨에 더 큰 짐을 자처해서 지냐고 묻고 싶었다.
저주받은 공작이라 불리는 그를 구원해 주고 싶었는데, 결국 그로 인해 구원을 받고 만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이 말로 터져 나오니 원망이 되었다.
그런 그레이스에게 아서는 다정히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살 수 있다면, 나는 더 한 것도 할 겁니다.”
그레이스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더없이 소중하다는 듯 품는 아서의 팔에 기대 조용히 흐느끼기만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기껏 목숨을 걸고 살려 준 사람에게 원망을 들었을 때 화를 낼 텐데, 그저 다 안다는 듯 조용히 웃어 주며 안아 주는 그가 고맙고 애틋했다.
아서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다정히 토닥이는 아서의 머리카락에 눈물로 젖은 입술을 내렸다.
* * *
긴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찾아왔다.
줄곧 서로를 안아 주며 조용히 흐느끼던 두 사람은 퉁퉁 부은 서로의 눈과 얼굴을 마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레이스는 눈물 자국이 남은 아서의 뺨을 훔치며 말했다.
“당신은 울어서 퉁퉁 부어도 잘생겼네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리 울어도 예쁜 사람은 부인뿐일 겁니다.”
“뭐예요, 낯간지럽게.”
“낯간지러운 말을 먼저 시작한 건 당신이면서.”
남들이 들으면 몸서리를 칠, 낯간지러운 말을 툭툭 주고받던 두 사람은 또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리 눈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가벼운 몇 마디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생각했다. 새삼스럽게도 말이다. 그레이스는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주는 아서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플라이엔 성의 일은 어떻게 하고 온 거예요? 무사히 마치고 왔어요?”
아서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기사들을 그곳에 주둔시킨 채 나와 올리버 경만 급히 귀환했습니다.”
“그럼 어떡해요? 그러다 전투에서 져서 플라이엔 성이 함락당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당신이 지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나 대신 토어 경이 펠릭스 기사단의 지휘를 맡았거든요. 그는 손꼽힐 만큼 뛰어난 백전노장의 기사죠. 그 어떤 전투가 있었다 해도 승리를 거두었을 겁니다.”
“그래요? 다행이에요.”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전쟁을 일으킨 로이엔느 공국 놈들은 지금쯤 모두 귀환했을 겁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들의 목적은 이 전투에서 이겨 플라이엔 성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어머, 그럼요? 그럼 대체 왜 군사를 일으킨 거래요?”
그레이스가 흥미로워하며 물었지만, 아서는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죽을 뻔한 고비를 겨우 넘기고 살아난 그녀에게 괜히 고민거리를 안겨 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연신 궁금하다는 얼굴로 채근하자 아서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