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87화
“허억! 윽!”
그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신도 모르는 새 깜빡 잠들었던 아서는 돌연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숨넘어가는 소리에 다급히 눈을 떴다. 지독히 불길한 소리였다. 아서는 얼른 그레이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스는 고통스러운지 예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쥐고 흔들며 소리쳤다.
“부인,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윽! 허윽!”
“――그레이스!”
그러나, 그레이스는 고통스러운 신음만 낼 뿐, 눈을 뜨질 못했다.
게다가 내뱉는 숨이 불규칙한 게 심상치 않았다. 한 번 숨을 내뱉는 것마저 괴롭다는 듯 잠시 움직임이 멎었다가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아서는 절망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괴롭게 숨을 토해 내는 그레이스의 왼쪽 가슴부를 압박하며 소리쳤다.
“그레이스! ……제발, 제발 눈을 떠요! 난, 나는 이렇게 당신을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서는 그레이스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그녀의 심장께를 두드리고 창백한 뺨을 가볍게 쳤다.
그러던 그때.
괴롭게 숨을 토해 내던 그레이스의 숨소리가 멎었다. 힘겹게 들썩이던 어깨 또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서의 손바닥 아래 작게나마 콩콩 뛰던 심장 박동 또한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
아서의 눈에 차올랐던 절망, 슬픔과 같은 감정 또한 전부 사라져 버렸다. 아서는 생기가 사라져 새까맣게 죽어 버린 눈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레이스?”
“…….”
“이런 장난, 하나도 재밌지 않습니다. 네?”
“…….”
“아, 안 돼! 말도 안 돼! 눈을 뜨고 나를 봐요! 제발! 오, 신이시여! 제발!”
아서는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그레이스의 몸을 끌어안고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과 신을 부르며 오열했다.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 없었다. 아직 그녀와 못한 것이 많은데, 해 준 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대로 그녀와 이별한단 말인가.
아서는 여전히 온기가 남은 그레이스의 뺨에 눈물 젖은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서럽게 울음을 토해 냈다.
‘……제발. 그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이 사람의 목숨을 살려 줘.’
평생 저주받은 공작으로 살게 되어도 좋았다.
다시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다 해도 좋았다.
그녀가 어디에선가 살아서 웃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되어도 견딜 수 있었고 가진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목숨이라도.
“……윽!”
그렇게 간절히 빌던 그때였다.
아서는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전쟁터에서 수없이 많은 부상을 경험한 그조차 참을 수 없을 만큼 강한 고통이었다.
아서는 쿵쿵, 고통스럽게 울리는 가슴께를 오른손으로 움켜쥐며 잠든 듯 눈을 감은 그레이스의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던 그때.
아서의 심장께에서 희미한 붉은빛이 새어 나오더니 곧 가슴 밖으로 털실을 뭉친 듯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그것은 그의 심장께 위에서 기괴하게 일그러졌고, 이어 중심부에서 작은 선 하나가 뽑혀 나왔다.
그 선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아서의 가슴과 팔을 타 꿈틀거리며 기어갔다. 이윽고 그 선이 아서의 손끝에 닿은 순간, 그것은 순식간에 그레이스의 손끝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내 그 선은 조금 전처럼 그레이스의 손끝을 지나 그녀의 심장께로 들어가더니, 마치 바느질하듯 그녀의 가슴 위를 관통했다 뛰쳐나오기를 반복했다.
“……!”
그사이, 아서는 점점 끔찍한 고통에 새어 나오는 비명을 힘겹게 삼켰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비명을 질러 사람을 부르고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이 이상 현상을 막아야 했지만, 아서는 그럴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치 본능이 이 고통을 참으라 명령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서는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버린 그레이스의 손이 하얗게 될 때까지 꽉 붙잡으며 치미는 고통을 참았다.
이윽고 아서의 심장께부터 이어진 정체 모를 붉은 선이 그레이스의 가슴 위를 뛰놀던 것을 멈춘 순간, 그를 괴롭히던 끔찍한 고통이 멈췄다.
동시에 아서는 자신의 심장이 조금 전과 다른 방식으로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쿵, 쿵, 쿵, 쿵.
마치 자신의 심장 옆에 다른 이의 심장이 들어와 몸속에서 함께 뛰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아서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심장 옆에서 뛰고 있는, 자신의 것보다 작고 빠르게 움직이는 이 심장 박동이 그레이스의 것이라는 것을.
또한, 자신이 흘려들었던 눈의 공작의 이야기가 정말로 펠릭스 공작가에 내려오는 이야기였음을.
‘……아아, 신이시여.’
죽음을 맞아 신의 품에 안겨야 할,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자신의 생명과 묶어 ‘하나의 목숨’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둘 중 한 명이 또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붉은 선’으로 연결된 다른 이의 목숨 또한 끊어지고 마는 마법.
만약 펠릭스 가의 사람들에게 내려오는 저주가 이것이라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비록 만물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일지라도, 그로 인해 벌이 내려진다고 해도 좋았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만 있어 준다면.
“하, 하하…….”
그것을 자각한 순간, 아서는 낮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기뻐서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슬펐다. 이토록 무겁고 무서운 마음으로 그녀의 목숨을 제게 묶어 버려, 이제는 그녀가 원한다 해도 놓아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기에.
아서는 그렇게 울고 웃으며 조금씩 따뜻해지는 그레이스의 손을 다시금 꽉 쥐었다. 쿵, 쿵. 그녀의 손을 타고 흐르는 혈관이 느리게 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스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서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레이스가 자신의 손을 꽉 붙잡고 있는 아서에게로 시선을 돌린 순간,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그레이스.”
그 부름에 그레이스는 멍하니 아서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곧 다급히 몸을 일으켜 울고 웃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레이스는 아서의 짧은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 넘기며 작게 흐느꼈고, 그는 말없이 그녀의 등에 자신의 두 팔을 감아 마주 안았다.
곧, 그레이스가 다정히 아서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꼭 쥐더니 그의 어깨를 때리며 소리쳤다.
“대체 왜 그랬어요! 왜!”
아서는 그레이스의 말뜻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귓가에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리듯, 그녀의 귓가에도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 테니.
아서는 원망 섞인 목소리에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살 수 있다면, 나는 더 한 것도 할 겁니다.”
결정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는 아서의 말을 듣고, 그레이스는 조용히 흐느꼈다.
아서는 자신의 어깨를 적셔 오는 그레이스의 얼굴을 더없이 소중하다는 듯 끌어안았다. 그녀가 아무리 자신에게 울며 원망을 쏟아 내도, 그는 조금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자신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것이.
혹여, 이치를 거스르는 힘으로 인해 저주받은 공작이라는 오명을 영영 벗을 수 없다 해도 좋았다.
그에게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저주였기에.
* * *
빛 한 줄기 없는, 캄캄한 허공 속을 헤맸다.
아서가 위급하다는 소식이 담긴 서신을 펼치던 중 무언가에 손이 찔렸다고 느낀 순간,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지더니 정신을 잃었다.
그 후, 그레이스가 마주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둠 속이었다.
그레이스는 캄캄한 이곳이 대체 어딘지는 알 수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그 어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무작정 어둠 속을 돌아다녔다. 어디든 빛이 들어오는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던 그때.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가려고?]
그레이스는 황급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환청인 걸까.
그래도 좋았다. 환청이든 무엇이든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 준다면 어떤 말이든 대답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잠긴 목을 잠깐 가다듬은 후, 대답했다.
“돌아가야 해.”
[왜?]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들려온 목소리는 그레이스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짧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그녀를 향해 질문했다.
[꼭 돌아가야겠어?]
“응.”
[앞으로 널 기다리고 있는 게 고통뿐이라고 해도?]
“그래. 그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 겪을 고통보다, 그 사람 없이 누릴 편안한 삶이 내게는 더 고통일 테니까.”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연신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에게 솔직히 대답했다. 자신이 왜 이토록 충실히 대답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목소리가 조금 전과 똑같이 불만스럽게 목을 울리며 대꾸했다.
[그래도 안 돼. 그냥 이대로 나와 함께 신의 곁으로 가자.]
“……뭐?”
[난 너의 ‘힘’이자 네 ‘영혼’이기도 해. 한 번 너를 되살린 것으로 나는 내가 가진 힘의 절반이나 썼어. 그 과정에서 네 영혼은 망가지고 말았다고. 그런데 이 상황에서 또다시 너를 살리기 위해 힘을 쓰면, 너는 다음 생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게 돼. 신이 널 위해 만들어 놓은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떨어져 버리게 된단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날 살렸다고?”
[그래. 그러니, 이 이상 신의 미움을 사기 전에 나와 함께 신의 곁으로 가자. 다시 운명의 수레바퀴에 올라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야.]
그레이스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었지만, 목소리는 기쁜 목소리로 자신과 함께 신의 곁으로 가자며 채근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