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86화
아서가 이를 갈며 올리버 경을 향해 말했다.
“그 말인즉, 이 일을 꾸민 이가 페하라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본인이 다스리는 제국의 국경을 위험으로 이끌면서까지 나를 전쟁터로 내몰아야 할 이유가 뭐지? 오로지 내 아내를 해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고? 그 전쟁으로 국경 지대의 병사들과 평민들이 목숨을 잃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저도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 일에 폐하께서 개입하신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혹은 누군가가 뒤에서 폐하를 충동질한 자가 있을 수도 있고요.”
“충동질이라.”
올리버 경의 말에 아서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황제를 충동질할 자.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해치고 싶어 할 만큼 미워하는 자. 아서는 이 두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앨버튼 공작.’
그 교활한 늙은이가 황제를 충동질해 그레이스에게 흉측한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아서는 당장이라도 눈앞에 앨버튼 공작이 있다면 그를 도륙할 것 같은 분노를 드러내며 험악하게 씨근덕거렸다.
만약 배후가 그자라면, 그래서 이번 일을 꾸몄다면 그 전령 또한 그자의 특기인 마법을 이용했으리라. 아서가 올리버 경을 향해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캐러독 경에게 지하 감옥의 수색을 중단하라고 전해라.”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각하.”
“내 예상이 맞다면 이 성안에 조력자는 없을 것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신지.”
“그자는 마법을 써서 탈출했을 테니까.”
“마법이요? ……설마!”
“그래. 이 일의 배후에는 분명 앨버튼 공작, 그 늙은이가 있어. 분명 그 빌어먹을 늙은이가 황제를 충동질했을 거다.”
차갑게 일갈하는 아서의 말에 올리버 경 또한 표정을 굳히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일은 생각보다 더 복잡하게 돌아갈 터였다. 어찌 되었든 황제는 자신의 주군보다 더 강한 군대를 언제든 동원할 수 있고, 그를 따르는 지지 세력 또한 견고하기에 그들이 이번 일을 벌였다는 확실한 증거 없이는 함부로 항의조차 힘들 테다.
문득, 올리버 경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서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앨버튼 공작은 어떤 방법을 써서 황제를 움직인 걸까요?”
“……음?”
“그렇잖습니까. 지금 황태자 전하와의 결혼 문제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사람은 앨버튼 공작이 아닙니까? 마법 능력을 지닌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만 빼면 마리안느 영애가 다른 공국의 공녀나 이웃 제국의 황녀들에 비해 조건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게다가,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황태자가 마리안느 영애에게 마음이 없다던데. 그럼 더더욱 황제가 더 유리한 입장 아닙니까? 그런데 앨버튼 공작이 황제를 쥐고 흔든다고요? 뭔가 인과 관계가 어색하게 느껴지는데요.”
그의 말에 아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상했다. 자고로 한 권력자가 다른 권력자를 지배할 수 있는 상황은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때뿐이었다.
압도하는 방식은 보통 무력이거나, 혹은.
‘상대방이 가진 권력을 근본부터 뿌리째 흔들 수 있는 약점을 쥐었을 때.’
아서의 푸르고 붉은 오드아이가 이채로운 빛을 띠고 반짝였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앨버튼 공작이 황제를 쥐고 흔들 만한 힘의 원천을 찾아내는 것이리라.
아서가 올리버 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경의 말대로다. 확실히 어색한 부분이 있어. 상황만 놓고 보면 황제에게 끌려다녀야 할 쪽은 앨버튼 공작인데, 정작 황제가 그에게 끌려다니고 있지.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설마, 폐하께서 앨버튼 공작에게 약점이라도 잡혔다는 겁니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올리버 경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앨버튼 공작에게 약점을 잡힐 만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듯했다.
곧, 조용히 눈을 빛낸 올리버 경이 아서를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황궁과 황태자 궁, 앨버튼 성에 심어 둔 첩자들에게 그들의 동향에 대해서 무엇이든 알아보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안 돼.”
“네?”
“이참에 그들을 전부 잘라 내는 게 좋겠어. 그들이 제대로 일을 했다면, 부인께서 이리되시는 일은 없었겠지.”
“……듣고 보니 그렇군요.”
“이전에 보냈던 자들보다 더 유능한 자들을 보내도록 해. 인원도 늘리고. 그리고, 그들에게 황제와 앨버튼 공작, 황태자 사이에 어떤 말과 서신이 오가는지 단 한 자도 빼놓지 말고 보고하라 전해.”
“알겠습니다. 당장 거행하겠습니다, 각하.”
아서의 지시를 들은 올리버 경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후 침실을 나갔다.
아서는 그런 올리버 경을 눈으로 좇다가 그가 나가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레이스가 누워 있는 침대로 돌아왔다.
그 후, 놓았던 그레이스의 손을 다시 꼭 붙잡은 아서는 꼭 깊은 잠에 든 것 같은 그레이스의 얼굴을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늘 붉었던 입술에 핏기가 조금 가시고, 밝게 빛나던 푸른 눈이 감겨 꼭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은 그 얼굴은 자신이 부르면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조금 전 자신과 기사들이 만들어 낸 소란에도 미동 하나 없는 그 모습이 아서를 절망에 빠지게 했다.
설마, 이대로 그녀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러면 자신은 어떡해야 할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레온도, 펠릭스 성도, 공작으로서의 책무도 잊고 미쳐서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 전에 심장이 멎고 숨이 멈출지도 모른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자신 때문에 이리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만큼 괴로운데, 이 사람이 정말로 세상을 떠나 버린다면 그땐…….
“…….”
아서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괴롭고 또 괴로워서 자꾸만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아서는 그레이스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창백한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공작님.”
그 모습이 어찌나 애달프고 안타까운지, 줄곧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샐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아서는 눈물을 참느라 잔뜩 충혈된 눈으로 샐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물러나 있도록 해, 샐리.”
“……하지만, 간호할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내가 하지. 부인께서 당하신 것처럼 강한 독은 아니었지만, 나도 정적이 보낸 독에 당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공작님.”
“부인과 단둘이 있고 싶어. 나가 줘.”
아서는 단호한 목소리로 샐리에게 명했다.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샐리는 곧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테이블 옆의 종을 울려 절 불러 주세요.”
“……그리고, 이번 일이 레온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
“이미 캐러독 경께서 단단히 입단속시키셨습니다.”
“그래. 그만 나가 봐.”
샐리가 나간 후 문이 닫히고, 불이 꺼진 침실에 단둘만 남게 되자 아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쓰고 있던 검은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지쳐 핼쑥해진 탓에 퇴폐함마저 흐르는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서는 맥없이 늘어진 채 희미하게 맥이 뛰는 그레이스의 손목에 짧게 입맞춤했다.
제발 무사히 그녀가 눈을 뜨기를, 그리고 자신을 향해 웃어 주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평생 그녀의 곁에 머물 수 없게 되도 좋았다. 그녀만 살 수 있다면 어떤 고통을 받는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작정이었다.
그러니, 신이시여. 제발 단 한 번만, 마지막으로 이 저주받은 자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아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레이스의 입술에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내렸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 * *
고통스러웠던 낮이 지나고 공포스러운 밤이 찾아왔다.
아서는 여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한 그레이스를 돌보며 그 곁에서 몇 번 선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혹여 자신이 잠깐 잠든 사이 그녀의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에서였다.
아서는 희미하게 자신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레이스의 숨에 몇 번이고 구원받으며 끊임없이 그녀의 몸 안에 퍼진 끔찍한 독을 빼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증거로 그레이스가 누워 있는 침대 옆 테이블에는 빈 해독제 포션 병과 약초를 태우는 화로가 놓여 있었다.
아서는 약초를 태운 탓에 더운 공기가 가득 찬 침실을 분주히 오가며 그레이스의 손과 발, 얼굴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부지런히 닦아 주었다.
다행히 노력이 통한 것인지 창백했던 그레이스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한 아서는 진심으로 감격하며 그레이스의 뺨에 입맞춤했다.
그 후, 자신이 줄곧 붙잡고 있어 살짝 땀이 밴 그녀의 손을 닦아 주던 아서는 참을 수 없는 졸음으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깜빡였다.
플라이엔 성에서 펠릭스 성으로 귀환하는 도중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말을 몬 데다 그레이스를 간호하느라 또 밤을 지새우고 있으니 피로가 풀릴 틈이 없었다.
무릇 잠의 신의 마법 앞에서는 신들의 왕조차 이길 수 없는 법. 피로에 물든 아서의 얼굴이 그레이스의 손 위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