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84화 (84/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84화

노을 진 하늘 위로 뿌연 연기가 솟아올라 흩어졌다.

플라이엔 성 앞. 임시로 차려진 펠릭스 기사단의 막사 앞 공터에는 로이엔느 공국군과의 교전을 마치고 개인 정비를 하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아서는 그 중심에 서서 흙먼지가 가득한 갑옷을 닦는 시동들과 피가 뚝뚝 흐르는 상처들을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는 기사들을 면밀히 살폈다.

로이엔느 공국군의 빠른 퇴각으로 교전은 짧았으나, 생각보다 제국군의 피해가 컸다. 아서는 전사한 플라이엔 후작군의 시신을 태우는 자욱한 연기를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만약 펠릭스 기사단이 지원을 오지 않았더라면 플라이엔은 꼼짝없이 점령당하고 말았을 터다. 아서는 그것을 저지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로이엔느 공국군은 플라이엔 성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설령 나와 내 기사단이 참전했다고 해도 갑자기 퇴각할 만큼 그들에게 불리한 전황이 아니었는데 로이엔느 대공은 나와 조금 검을 맞대며 시간을 끌다 갑작스레 퇴각해 버렸어. ……왜지?’

만약 그들이 군사를 일으킨 목적이 플라이엔 성의 점령이라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퇴각하기 전, 로이엔느 대공이 말한 함정이라는 말이 못내 걸렸다. 그래서 아서는 막사에 돌아오자마자 각각 로이엔느 성에 심어 둔 첩자와 펠릭스 성으로 전서구를 띄웠다.

그 후, 연락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지 몇 시간째. 아서는 점점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전서구가 늦어진다는 것은 보낼 서신에 보고할 내용이 많아서이거나, 서신을 보내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렇게 아서가 일분일초 시간이 지나는 것에 애타던 그때였다.

“가, 각하! 큰일입니다!”

올리버 경이 막사 맞은편에서 한 통의 서신을 손에 쥔 채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로 그를 향해 달려왔다.

아서는 얼른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는 올리버 경에게 말했다.

“펠릭스 성에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면, 로이엔느 공국의 첩자에게서 연락이 온 건가?”

“……불행하게도 둘 다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빨리 고하라.”

아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올리버 경을 향해 재촉했다. 그러자 차마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듯 머뭇거리던 올리버 경이 아랫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는 대답했다.

“공작 부인께서 독에 당하셨다고 합니다.”

“……뭐?”

그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가 멈춘 듯이 잠잠해졌다. 자신이 들은 것이 사실일까, 거짓은 아닐까. 너무 큰 충격에 머리가 사고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어째서 그 사람이 왜? 무슨 독을?’

순간, 머릿속에 어머니가 절명하던 순간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울고 있는 시종들과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머리 위를 덮은 흰 천. 침대 밖으로 축 늘어진 어머니의 창백한 손과 귀청을 찢을 듯 울어 대는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 그리고 비통한 표정으로 넋이 나간 자신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던 샐리의 슬픈 눈.

이후 이어진 엘렉트라 공녀의 죽음, 그리고 그녀처럼 불행한 죽음을 맞았거나 미쳐 갔던 약혼녀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끔찍하고도 슬픈 기억들 속 그녀들의 얼굴이 그레이스의 얼굴로 바뀌는 순간, 아서는 당장이라도 허리춤에 찬 검으로 자신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한 절망이 자신을 삼키려 하는 것을 느꼈다.

‘아냐, 아닐 거다. 아직, 아직은 늦지 않았을 거다.’

아서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올리버 경을 향해 말했다.

“지금 부인의 상태는 어떻지? 의사는, 신관은 불렀나?”

“공작 부인께서 독에 당해 쓰러진 순간, 캐러독 경이 서신을 가져온 전령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성내 최고의 의사와 신관을 불러들였다고는 합니다만.”

“그런데?”

“불행하게도 부인께서는 숨이 붙어 있으나 의식을 찾지 못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아마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신경독소에 당하신 것 같다고……, 공작 각하!”

올리버 경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 아서는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찬 오드아이를 번들거리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당장이라도 공작 부인에게 독을 쓴 자를 베어 버릴 듯 싸늘하게 분노를 태우는 그 모습은 마치 신화 속 악마의 현신과도 같았다. 함께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비며 그의 군신 같은 면모에 익숙한 올리버 경과 펠릭스 기사들마저 두려움에 몸을 떨 정도였다.

아서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올리버 경을 향해 고압적으로 말했다.

“그 전령 놈을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고 했지?”

“예, 각하.”

“내가 도착할 때까지 그 누구도 그놈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전해. 그놈에게 태어난 것을 후회하도록 해 주겠어.”

“예, 당장 전서구를 띄우겠습니다.”

“당장 말을 준비해. 펠릭스 성으로 돌아간다. 경은 나를 따르도록. 나와 경을 제외한 펠릭스 기사단은 플라이엔 성에 남는다. 지휘의 전권은 부단장인 토어 경에게 맡기겠다.”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올리버 경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서는 검을 빼든 채로 세워 둔 말을 향해 달려갔다.

매 둔 끈을 칼로 끊고 단숨에 말 위에 올라탄 아서는 곧장 고삐로 말을 내려쳤다. 그러자 아서의 말이 울음소리를 토해 내며 그가 이끄는 방향을 따라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올리버 경이 다급히 따라붙었다. 아서는 빠른 속도로 달려와 자신의 곁을 나란히 달리는 그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대체 어쩌다가 부인께서 독 묻은 서신을 보게 된 거지?”

“누군가 서신을 조작하여 공작 부인께 공작님께서 위독하다는 서신을 보낸 모양입니다. 그래서 부인께서는 다급히 그 서신을 뜯어 보셨고, 그러다 그만 서신에 발려 있던 독에 당하신 모양이고요.”

“부인에게 서신을 전달하기 전, 그 서신을 만진 이가 아무도 없었나?”

“예. 저희가 기밀을 전할 때처럼 상자 안에 담겨 있어, 공작 부인께서 상자를 열기 전엔 아무도 그 서신을 만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이어진 올리버 경의 보고에 아서는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오로지 그레이스만을 노린 정교하게 만들어진 함정이었다. 마침 자신이 펠릭스 성을 떠난 상황과 전서구를 주고받기 어려울 만큼 급박히 돌아간 전쟁, 그리고 자신과 그레이스가 서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모르는 이라면 절대로 짜낼 수 없는 흉계였다.

잘 짜 맞춰진 상황을 빠르게 더듬어 가던 아서의 머릿속으로 로이엔느 대공이 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하. 이걸 말하는 거였군.”

아서는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로이엔느 대공이 그토록 의기양양한 얼굴로 퇴각을 명했는지.

아서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격렬한 분노를 억누르며 올리버 경에게 물었다.

“로이엔느 공국의 첩자에게도 서신이 왔다고 했나? 혹시 그 서신에 로이엔느 대공이 군사를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나?”

“예. 서신은 도착했습니다만……. 그 이유에 대해선 아직 모른다고 합니다.”

“이유를 모른다? 그렇다면 로이엔느 대공은 적당한 명분조차 내걸지 않고 군사를 일으켰다는 건가? 그것도 감히 제국을 상대로? 그 과정에서 가신들과 평민들의 반발은 어떻게 무마한 거지?”

“안 그래도 첩자 또한 이번 로이엔느 대공의 결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매우 충동적이고 신속히 진행되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각하의 예상대로 이번 결정에 기사들과 공국민들의 반발이 매우 심했는데, 그럼에도 출정을 강행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인즉 대공에겐 반드시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거로군. 첩자에겐 대공이 왜 이번 출정을 강행했는지,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내자마자 서신을 보내라고 전해.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도 그놈이 부인의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건 틀림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각하.”

“……젠장. 말이 길어졌군. 이제부터 속도를 빨리한다. 한시라도 빨리 펠릭스 성에 도착해야 해.”

올리버 경의 보고를 전부 들은 아서는 달리는 말에 더욱 거세게 채찍질했다.

한시가 급하건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것뿐이라는 것이 분했다.

생각 같아선 마법사를 불러 순간 이동을 하고 싶었으나, 이번 일의 배후가 앨버튼 공작일지도 모르는 지금 마법을 이용하는 것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다급한 상황을 보여 주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아서는 피가 맺힐 만큼 강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이번 일을 벌인 자가 누구든,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그녀를 해하려 한 죗값을 반드시 그들의 피로 받아 내고 말 것이라.

아서는 그리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