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83화
아서가 플라이엔 성으로 출정한 지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그레이스는 동쪽 탑 지하실에 틀어박혀 자신을 좀먹어 들어가는 저주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다행히 아서가 성에 없는 일주일간 그때처럼 또 정신을 잃은 채 날붙이를 손에 쥐고 정원을 걷다 다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또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생각하니 무서워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되는 대로 서책을 헤집고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처음 지하실에서 기록을 보았던 날처럼 눈앞의 마법 언어들이 제국어로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4일째.
오늘도 레온과 아침 식사를 한 후 곧장 지하실에 틀어박혀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글자들과 씨름하던 그레이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으으! 하나도 모르겠어! 대체 왜 그날처럼 글자들이 바뀌어 주지 않는 거야!”
그날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 건 과한 욕심이었던 걸까. 그레이스는 혹시나 싶은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또다시 마법 언어로 가득한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책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홀로 푸념했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왜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사이 마법 언어 공부를 열심히 해 둘걸 그랬다고 후회하던 그때였다.
[보고 싶어? 그럼 보여 줄게.]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전까지 하나도 읽을 수 없던 책 속 문자들이 춤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가 대체 누구의 것인지 파악하기도 전, 그레이스는 눈앞에 움직이는 글자들에 정신이 팔렸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레이스는 얼른 내려놓았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읽을 수 없었던 마법 언어들이 이리저리 뒤섞이더니 익숙한 제국어로 변했다.
[태초의 신에게 감히 반기를 든 자여, 강한 힘을 얻기 위해 피를 섞지 말라.]
[그대들이 숭배하는 그 피는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 아니다. 신으로부터의 저주가 흐르는 피이다.]
[그 피를 짙게 이어받을수록 힘이 강해지는 한편, 저주 또한 강해질 것이니. 그대들은 두 눈이 각각 다른 색을 품은 자를 경계하라.]
그것은 지난번처럼 ‘강한 힘’과 ‘피’를 경계할 것을 당부하는 글이었다.
‘이건…….’
그레이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도 분명 신에게 필적하는 힘을 얻으려는 자를 경계하고, 그 힘을 얻기 위해 핏줄을 이으려 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리고 ‘두 눈이 각각 다른 색을 품은 자’를 조심하라고도 했었다.
두 눈에 각각 다른 색을 품은 자.
순간 그레이스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 문구가 의미하는 건 오드아이인가? 그렇다면 아서와 레온에게 진짜로 저주받은 피가 흐른다는 거야?’
그땐 눈앞에서 글자가 움직이는 것과 눈앞에 선대 펠릭스 공작 부부의 환상을 본 것에 너무 놀라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문구는 아서를 지칭하는 듯했다.
그레이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책장을 넘겼다. 경고를 남겼다면 경고를 어긴 자가 겪을 상황과 그 문제를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도 반드시 있을 터였다.
그레이스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움직이는 글자들을 좇았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글귀 하나에 넘기던 책장을 멈추었다.
[그러니 제국의 황제이시여, 부디 한 방울이라도 그대의 몸에 흐르는 피를 섞어 저주와 멀어지게 하소서.]
[신께서는 그 피 한 방울 한 방울에 저주를 걸어 응보의 대가를 치르게 하려 하심이니, 그 피가 세상에서 소멸하지 않는 한 저주를 벗어날 길은 없나이다.]
[혹여 그 핏속에 흐르는 강한 힘으로 저주에서 벗고자 하여도 그 힘보다 저주가 먼저 그자를 집어삼킬 것이니. 그자는 필히 성인이 되기 전에 가장 비참히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이에 황제께서 정녕 자신과 후손들에게 내려질 저주에서 벗어날 길은 없느냐 물으셨고, 신관은 대답하였다. 저주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다. 방법은 존재하나, 그것은 또 다른 저주를 부를 뿐이다. 그 대답에 황제는 탄식하였다.]
[그러므로 황가의 피를 이은 이들은 4촌 이내의 근친혼을 삼가야 한다. 그리고 그 피에 깃든 힘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힘을 사용하는 순간, 잠들어 있던 저주가 깨어나 그자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니.]
그레이스는 눈앞에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글자들을 놀란 눈으로 좇았다.
강한 힘을 사용하는 것과 혈통을 지키기 위한 근친혼. 그것은 이미 제국의 황실과 귀족들 사회에선 만연한 일이었다. 특히 황실은 지금껏 그들의 피로 인한 신체적 강함으로도 모자라 마법 능력을 타고난 앨버튼 공작가와의 혼인을 반복해 왔다.
그레이스는 거미줄처럼 엮인 황실과 앨버튼 가문의 혼맥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신의 저주를 받아야 할 자들은 펠릭스 가문의 사람들이 아니라……. 황실 아닌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아서에게 저주받았다고 하며 그를 괴물이라 손가락질하는가.
설마, 황실보다 펠릭스 공작가가 그 ‘저주받은 피’를 더 강하게 물려받아서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레이스가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였다.
“마님! 어디 계세요! 마님――!”
갑자기 위에서 수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그레이스를 애타게 찾는 샐리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처음 샐리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단순히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던 그레이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지자 결국 글자가 춤추듯 움직이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샐리?”
그렇게 외치며 그레이스는 지하실 문을 닫고 나와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동쪽 탑 1층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을 찾는 샐리의 목소리와 허둥지둥 어디론가 달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무래도 뭔가 큰일이 난 모양이었다. 그레이스는 다급히 닫힌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가지 마! 경고했어!]
그런데 그 순간, 그레이스의 귓가에 날카로운 고함이 들렸다. 얼마나 거세고 앙칼진지, 순간 뒤로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레이스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며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캄캄한 지하실의 어둠과 벽면에 붙은 작은 촛불뿐, 목소리를 낼 만한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대체. 누구야?”
“마님! 대체 어디 계셔요!”
그러나 그레이스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전, 문밖에서 들리는 샐리의 외침에 그녀는 얼른 문을 열고 동쪽 탑 1층으로 나갔다. 자신을 찾는 샐리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해서 조금 전 들려온 목소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1층으로 나가자 맞은편 복도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연신 자신을 찾으며 소리치는 샐리가 보였다. 그레이스는 공작 부인으로서의 체면도 잊고 얼른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이야?”
“크, 큰일 났어요!”
“큰일이라니?”
샐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레이스의 손을 꼭 잡더니 거친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 플라이엔 성에서 전령이 도착했어요. 공작님께서 보낸 서신을 갖고요.”
“뭐? 그게 정말이야?”
“네. 그래서 공작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임시로 성의 방위를 맡은 캐러독 경이 마님께 당장 이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어요.”
“캐러독 경은 어디 계셔?”
“본채 응접실에서 전령과 함께 계세요.”
“알겠어. 앞장서 줘, 샐리.”
“네!”
샐리로부터 자조지종을 전해 들은 그레이스는 곧장 그녀를 따라 본채로 향했다.
출정 중인 아서가 어떤 내용의 서신을 보냈을지 궁금하면서도 조금 불안했다. 단순히 자신의 안부를 묻는 내용만 적혀 있다면 다행이지만, 혹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오셨습니까, 공작 부인.”
걸음을 바삐 옮겨 본채 응접실 문 앞에 도착하자,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인사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레이스는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갯짓한 후,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응접실 안에서 잘 익은 당근 같은 주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기사와 파란색 가죽 갑옷을 걸친 채 투구를 쓴 한 병사가 그녀를 맞았다.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다가와 손등 위에 짧은 키스를 남기며 예를 표하는 주홍색 머리카락의 기사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캐러독 경인가요? 반가워요.”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 부인.”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공작님의 서신은 어디 있죠?”
“전령, 이리로.”
그레이스가 묻자 캐러독 경이 파란색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에게 소리쳤다. 그레이스의 앞으로 다가온 병사가 품속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더니 그것을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그레이스는 곧장 그것을 받아 들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의 안에는 푸른 리본으로 묶인 채 둥글게 말린 양피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레이스는 망설임 없이 양피지를 집어 들고 푸른 리본을 끌렀다.
그 후 적힌 서신의 내용을 확인하려는 순간, 손끝이 뭔가에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얏.”
“왜 그러세요, 마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양피지에 까끌까끌한 부분이 있었던 걸까? 순간 따끔했지만 딱히 신경이 쓰일 일은 아니었기에 그레이스는 샐리에게 괜찮다고 대답하며 계속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어?’
그런데 채 한 줄을 읽기도 전, 그레이스는 눈앞이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이어 갑자기 숨이 거칠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상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온몸에서 힘이 줄줄 새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서신 한 통조차 쥘 힘마저 사라진 그레이스는 그대로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마, 마님!”
“왜 그러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공작 부인!”
곁에 서 있던 캐러독 경과 샐리가 쓰러지는 자신의 몸을 부축하는 느낌과 함께, 향해 소리치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스는 점점 아득해지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눈을 깜빡였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대체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묻고 싶은데 혓바닥은 굳어 버린 듯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
그렇게 점점 의식과 감각이 사라지던 그때, 그레이스의 눈에 싸늘하게 웃고 있는 전령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레이스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자의 이름을 소리 내 부르고자 했지만, 그 순간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그녀의 귓가에는 저 전령을 가두라 소리치는 캐러독 경의 목소리도, 울며 소리치는 샐리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죽어 버린 이처럼 고요히 눈을 감은 그레이스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