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82화
거친 움직임에 아서의 말이 한 발짝 뒤로 밀려나자, 로이엔느 대공은 더욱 거세게 검을 휘두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서는 집요하게 자신의 목과 몸통의 경계를 노리며 달려드는 로이엔느 대공의 검을 받아치며 소리쳤다.
“어째서 전쟁을 일으킨 거지?”
로이엔느 대공이 또다시 목을 울려 낮게 웃더니 쓰고 있던 푸른 깃털의 투구를 벗었다. 그가 땀에 젖은 짧은 금발을 갑주 낀 손으로 쓸어 올리며 증오에 가득 찬 녹갈색 눈으로 아서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나?”
로이엔느 대공의 검이 다시 아서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아서는 그 공격을 간단히 받아치며 자신을 향해 증오를 불태우는 로이엔느 대공에게 또다시 물었다.
“군사를 일으킨 이유가 나를 향한 복수 때문이라면, 어째서 펠릭스 성이 아니라 플라이엔 성을 공략한 거지?”
“그 또한 네놈에게 대답할 이유는 없어!”
로이엔느 대공은 거칠게 일갈한 후 집요하게 아서를 공략했고, 그때마다 아서는 번번이 그의 검을 막아 냈다.
그럴수록 로이엔느 대공의 공격이 거칠어지고 날카로워졌지만, 아서는 별 어려움 없이 가벼운 몸짓으로 그의 검을 쳐 냈다.
분명 로이엔느 대공이 계속해서 공격을 감행하고, 아서는 그것을 막기만 하는 중이었지만 실력 차가 완연한 탓에 일견 로이엔느 대공이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로이엔느 대공 혼자만의 필사적인 격전이 이루어지던 그때, 로이엔느 공국군의 부단장 엘컨 후작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대공! 멈추십시오! 설마,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 이유를 잊으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로이엔느 대공이 거센 공격을 멈췄다. 검을 내리고 말을 뒤로 물리는 그 모습은 마치 조금 전 아서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서는 여전히 자신을 태워 죽일 것처럼 강렬한 시선으로 노려보면서도 얌전히 검을 거두는 로이엔느 대공의 모습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모습은 제 목숨을 해치기 전까진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건만, 부하의 말 한마디에 검을 거두는 그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아서는 로이엔느 대공의 속내를 캐내기 위해 일부러 도발하듯 말했다.
“도망치는 건가?”
줄곧 아서를 노려보던 로이엔느 대공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아서는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검을 휘두를 것 같은 로이엔느 대공을 주시하며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자존심 강하고 다혈질인 그이니 분명 이런 작은 도발에도 쉽게 속내를 털어놓을 터였다.
“……하, 웃기는군.”
그런데 아서의 예상과는 달리, 로이엔느 대공은 싸늘한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그가 업신여기는 듯한 시선으로 아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도망치는 거냐고? 하, 착각하지 마라. 내 비록 너 같은 괴물보다 약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네놈이 겁이 나 도망을 칠만큼 유약하지는 않다!”
“기사가 전쟁터에서 맞붙던 중 등을 돌려 퇴각하는 것이 도망이 아니라면 뭐지?”
아서의 말에 로이엔느 대공은 순간 발끈한 표정을 했지만, 이번에도 그는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증오로 타오르는 눈이며 핏줄이 다 불거질 만큼 검을 꽉 쥔 손을 보면 당장이라도 검을 던질 것 같은데, 줄곧 참는 그의 모습은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아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한 번 더 그를 자극하고자 말을 고르던 그때였다.
“나라고 네놈의 그 증오스러운 목을 베지 못한 채 이리 등을 돌리고 싶은 줄 알아? 빌어먹을! 엘리, 그 불쌍한 아이의 시신만 아니었어도 네놈은 이미 내 손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뭐? 이 상황과 내 전처의 시신이 무슨 관계가 있지?”
“전처!? 이 빌어먹을 괴물 놈! 엘리를 그따위 저주받은 호칭으로 언급하지 마라!”
결국, 로이엔느 대공은 분노에 차 소리치며 아서를 향해 쥐고 있던 검을 집어 던졌다. 아서는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그 검을 가볍게 쳐 내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역시 뭔가가 있군.’
엘렉트라 공녀가 불미스러운 죽음을 맞은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군사를 일으킨 이유, 그리고 그 이유를 만든 배후와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서는 차분히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한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로이엔느 대공에게 물었다.
“혹시 군사를 일으키는 대가로 황실 묘지에 잠들어 있는 엘렉트라 공녀의 시신을 돌려받기로 했나?”
“……뭐?”
로이엔느 대공의 눈이 순간 놀란 듯 커졌다.
아서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아서는 멍한 표정이 된 로이엔느 대공을 향해 연신 질문을 퍼부었다.
“네게 그 제안을 한 건 누구지? 그리고 그자의 목적은 뭐지? 이 일로 인해 그들은 대체 뭘 얻게 되는 건가. 혹시, 대공은 뭔가 알고 있나?”
“……내가 왜 그걸 네놈에게 말해 줘야 하지?”
그러나 로이엔느 대공은 그사이 평정을 되찾은 듯 싸늘히 비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더니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양 말 머리를 돌렸다.
아서는 군사들을 향해 퇴각 명령을 내리기 위해 허리춤에 찬 뿔피리를 뽑아 드는 로이엔느 대공에게로 달려가 그의 목에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말해! 대체 이런 짓을 벌인 배후가 누군지!”
로이엔느 대공은 자신의 목을 겨눈 아서의 검을 철갑을 뒤집어쓴 손으로 거칠게 밀쳐 내며 대답했다.
“이 순간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단 하나, 네놈은 이미 그들이 판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것뿐이다.”
“……뭐라고?”
“너도 사랑하는 이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느껴 보도록 해.”
아서를 향해 섬뜩한 악담을 퍼부은 후, 로이엔느 대공이 손에 든 뿔피리를 입에 물었다.
함성과 간간이 들려오던 다친 병사의 신음,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했던 전쟁터에 웅웅거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플라이엔 기사단과 원군인 펠릭스 기사단을 상대하던 로이엔느 공국군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서로를 향해 소리쳤다.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퇴각하라!”
그들은 각자의 말에 올라타거나 혹은 다친 동료를 업고 빠르게 후방에 구축한 군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과 생사를 놓고 전투 중이던 제국군이었다. 아서는 짧게 혀를 차며 펠릭스 기사단을 향해 소리쳤다.
“퇴각 중인 로이엔느 공국군을 쫓는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그 후, 아서는 말 머리를 돌려 멀어지는 로이엔느 공국군을 쫓기 위해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반드시 로이엔느 공국군을 토벌하고 대공을 붙잡아야 했다. 그리고 대체 조금 전 자신에게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그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만약 그 배후가 황제나 앨버튼 공작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것이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그레이스나 레온의 목숨이라면 반드시 저들을 붙잡아 그 일의 진상에 대해 알아내야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펠릭스 공작!”
그때, 로이엔느 공국군을 쫓는 아서를 막아 세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전투가 벌어진 성의 영주인 플라이엔 후작이었다. 중년의 그는 군데군데 센 갈색의 짧은 머리를 흩날리며 다급히 말을 몰아 아서의 앞을 막았다.
아서가 그런 그를 차갑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비켜라, 플라이엔 후작! 저 빌어먹을 잔당 놈들을 이대로 보낼 셈인가!”
“그들을 이리 보내선 안 된다는 그 마음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이대로 그들의 본진까지 소탕하기엔 저희의 힘이 모자랍니다. 공작님께서도 섣불리 진군했다가 아끼는 부하들을 잃고 싶진 않으실 것 아닙니까!”
자신을 막아 세운 플라이엔 후작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아서의 시선이 이어진 그의 설득에 냉정을 되찾았다.
아서는 끓어오르는 호승심과 초조함을 억누르며 플라이엔 후작에게 말했다.
“우리 군의 피해가 어느 정도지?”
“……플라이엔 기사단과 펠릭스 기사단을 합해 부상당한 기사가 103명, 중태에 빠진 기사는 34명 정도입니다. 전사자의 숫자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수백은 넘을 겁니다. 공작님께서 도착하기 전까지 저희와 로이엔느 공국군은 격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빌어먹을.”
아서가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의 말을 들어 보니 확실히 이대로 진군했다간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아서는 이 전투를 일으킨 배후가 그레이스를 해치려 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순간 이성을 잃어버린 스스로를 반성했다. 이런 상황일수록 적의 도발에 넘어갈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했건만, 자신이 어리석었다.
아서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플라이엔 후작에게 말했다.
“……미안하네. 로이엔느 대공의 도발에 넘어가 순간 이성을 잃고 경솔하게 행동했어. 그자가 내 아픈 부분을 건드렸거든.”
“아닙니다. 로이엔느 대공은 다혈질인 성품만큼이나 간사하고도 교활한 혓바닥을 지녔기로 유명하니까요. 아마 공작님을 도발하기 위해 일부러 약점을 건드렸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더 큰 충격을 주기 위해 적당히 거짓말을 섞기도 했을 테죠.”
“하지만 내가 아는 그자는 그리 거짓말을 하진 않는데…….”
아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자신의 사과를 받는 플라이엔 후작을 향해 대꾸했다.
분명 플라이엔 후작의 말처럼 조금 전 대공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싸늘하게 비웃으며 증오 섞인 저주를 퍼붓는 그의 얼굴에는 한 줌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역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그리고 설령 그 말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부인과 레온을 펠릭스 성이 아닌 다른 안전한 곳으로 도피시켜야겠군.’
아서는 조용히 생각을 더듬으며 플라이엔 후작을 향해 말했다.
“알겠네. 우리도 당장 군사를 물리고 재정비에 들어가도록 하지. 내 기사단의 정비는 내가 챙길 테니, 후작은 플라이엔군의 정비를 도맡게.”
“예, 그러지요.”
플라이엔 후작은 짧게 고개를 숙인 후, 말고삐를 틀어 그들이 성 앞에 구축한 막사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잠시 눈으로 좇던 아서는 곧 몸을 돌려 말을 몰았다. 전투 중 흩어져 버린 올리버 경과 자신의 기사들을 소집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아서는 플라이엔 성으로 보냈던 전서구를 찾아 한시라도 빨리 펠릭스 성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혹여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그래서 아서는 알지 못했다.
생각에 잠긴 그의 머리 위로 한 마리의 흰 올빼미가 한 바퀴 돌다 사라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