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80화
아서가 다정히 웃더니 곧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레이스는 갑자기 사라진 아서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다 말고 갑자기 어디로 간 걸까 생각하던 그레이스는 잠시 후, 탑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아서의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아서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원래 그냥 올라가서 부르려고 했는데, 아서의 집무실 창문을 보니까 문득 ‘눈의 공작’ 속 한 장면이 떠올라 장난이 치고 싶지 뭐예요. 좀 유치했죠?”
“괜찮습니다. 마침 쌓인 일들을 처리하느라 지루하기도 하고 조금 짜증도 나던 참이었는데, 부인의 장난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런데, 이 시간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지금쯤 부인께서는 이른 저녁을 드실 시간이 아니십니까. 혹시 동쪽 탑의 지하실을 조사하러 오신 겁니까?”
아서는 추위에 얼어 살짝 붉어진 그레이스의 뺨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 물음에 그레이스는 조금 표정을 굳혔다. 자신의 가볍고 유치한 장난으로 말랑해진 분위기를 자신의 입으로 다시 망가뜨려야 한다는 기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마음속에 깃든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계속 찜찜할 거야.’
그러니 용기를 내 보자고 결심하며 그레이스는 말했다.
“……좀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어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해 줘요.”
그녀의 물음에 듣고 있던 아서의 다정한 얼굴이 순간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 모습에서 그레이스는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란 것에 확신을 얻었다. 그레이스는 슬며시 시선을 피하는 아서의 눈을 좇으며 말했다.
“서로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그 약속, 잊어버린 건 아니죠?”
“……부인.”
“어물쩍 넘어갈 생각하지 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야겠으니까.”
그레이스의 매서운 추궁에 아서가 땅이 꺼져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는 듯 몇 번 아랫입술을 깨물던 아서는 그레이스의 뺨 위에 올려진 손을 스르르 내렸다. 그레이스는 끈질기게 눈으로 그의 행동을 좇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 결국 아서는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쉰 다음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부인 말씀대로 나는 오늘 아침 어젯밤 일에 대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레이스가 묻자, 아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렵게 입을 뗐다.
“어젯밤 부인께서는 한 손에 날붙이를 들고 이 동쪽 탑의 정원을 헤매고 계셨습니다.”
“제가요!?”
“손등의 상처는 그때 나뭇가지에 쓸려 생긴 상첩니다.”
“……세상에. 그래서요? 그 이후에 어떻게 됐는데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내려온 나를 본 순간 부인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고, 나는 그런 부인을 침실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뿐입니다.”
“……어머.”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는 경악한 얼굴로 붕대 감긴 왼손을 응시했다. 자신이 또다시 헛것을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전처럼 혼자 무언가를 보고 쓰러진 것이 아니라 날붙이를 들고 야밤에 이곳을 헤맸을 줄이야.
그 모습을 상상하자 그레이스는 덜컥 겁이 났다. 이번에는 아서가 일찍 발견해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러다 누군가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서나 레온이었다면.
그레이스는 자꾸만 발전하는 끔찍한 상상에 사색이 되어 아서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아서, 어떡하죠? 나에게 진짜로 저주가 걸리고 만 걸까요? 그래서 이런 걸까요?”
“아닐 겁니다. 진정하세요.”
“그런 짓을 벌였는데 왜 나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을까요? 다, 당신이 제때 그런 날 발견해 줬으니 망정이지, 만약 내가 그 날카로운 것으로 누군가를 해쳤다면……. 그러면…….”
“아뇨.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요.”
아서는 사색이 된 채 두려움에 떠는 그레이스의 두 손을 붙잡은 후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자신의 품 안에 맥없이 기대 오는 그레이스의 긴 은발을 위로하듯 쓰다듬으며 아서는 이를 악물었다. 이럴까 봐 일부러 어젯밤 그녀가 자신을 공격한 일에 대해선 함구했건만. 추후 부인의 원망을 듣더라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고 아서는 자책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리 만들 겁니다.”
“……아서.”
아서는 불안감에 가득 찬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레이스의 눈에 위로하듯 입맞춤했다.
‘차라리 그레이스의 추측대로 내가 눈의 공작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이미 한번 끔찍한 죽음을 겪어야 했던 그녀를 죽음으로부터 살려 줄 힘이 있었다면, 이리 불안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아서가 잘게 몸을 떠는 그레이스를 꼭 안아 위로하던 그때였다.
“공작님! 여, 여기 계셨습니까!”
한 손에 서신을 든 올리버 경이 펠릭스 성문 쪽에서 두 사람이 서 있는 동쪽 탑 정원을 향해 다급히 달려왔다.
아서와 그레이스는 서로의 몸에서 살짝 떨어진 후 시선을 교환했다. 아서를 부르는 올리버 경의 목소리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아서는 그레이스의 손을 맞잡으며 올리버 경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지?”
“폐, 폐하께서 공작님께 당장 출정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예. 그리고 이것이 출정 명령이 적힌 폐하의 서신입니다.”
“이리 주게.”
아서는 굳은 얼굴로 올리버 경이 내미는 서신을 펼쳐 들었다. 그 곁에 선 그레이스 또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서가 펼쳐든 서신을 곁눈질했다.
유려한 서기관의 필체로 적힌 그 서신은 현재 로이엔느 공국이 군사를 일으켜 제국의 북동쪽 국경에 위치한 플라이엔 성을 침공했다는 것을 알렸다. 또한 현재 그곳이 수세에 몰려 있다고 덧붙이며 당장 아서가 로이엔느 공국으로 출정할 것을 명하고 있었다.
로이엔느 공국. 그 이름을 본 순간 그레이스는 놀라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쳤다.
“……로이엔느 공국이라니, 이곳은 아서 당신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엘렉트라 공녀의 고향이잖아요?”
“……맞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한 아서는 펼쳐 든 서신을 말아 쥔 후,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올리버 경에게 말했다.
“현재 로이엔느 군을 이끄는 단장은 누구지?”
“……그것이, 엘렉트라 공녀님의 큰 오빠인 라이넨스 로이엔느 대공입니다.”
“전쟁을 일으킬 명분도, 능력도 충분한 자를 선봉에 세웠군.”
올리버 경의 대답을 들은 아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넨스 로이엔느는 몇 년 전 엘렉트라 공녀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이후 줄곧 제국에 그녀의 죽음을 명백히 밝혀 줄 것을 요구해 온 자였다. 또한, 그는 엘렉트라 공녀의 죽음의 원인인 자신과 그녀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은 제국을 향해 강한 유감을 표해 온 자이기도 했다.
아서는 복잡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지금 플라이엔 성의 상황은 어떻지?”
“현재 플라이엔 성과 로이엔느 국경이 맞닿는 켈른 평야에서 서로 대치 중이라고 합니다. 몇 번 국지전을 벌였고, 플라이엔 후작께서 라이넨스 대공에게 각자의 군이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이만 군사를 물릴 것을 청했지만 대공은 거부했다고 합니다. 공작님께서 출정하기 전엔 자신은 군사를 물릴 생각이 없다면서요.”
올리버 경의 대답에 아서는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나와 검을 맞대고 싶었다면 펠릭스 성으로 군사를 끌고 왔으면 될 텐데, 왜 펠릭스 성이 아닌 플라이엔 성으로 출정한 거지?”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로이엔느 공국 군 규모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크고 강하다는 것뿐입니다. 마치 오랜 기간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온 것처럼 말입니다.”
올리버 경의 짧은 보고에 아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아서는 시선을 돌려 자신과 손을 맞잡은 그레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는 마치 그 시선이 오랜 여행을 떠나기 전 가족을 살피는 방랑 기사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스는 아서의 손을 깍지 껴 붙잡았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그의 출정이어서인지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아서는 그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러고는 차갑게 내려앉은 시선으로 올리버 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장 출정한다. 경은 당장 기사들을 소집해 성문 앞으로 집합시키도록 해.”
“예, 각하.”
“정확히 한 시간 뒤 성을 떠날 수 있도록 군장 준비를 마치라고도 전해. 귀환할 때까지 얼마만큼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 군량과 정복을 넉넉히 준비할 수 있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그럼 당장 기사단 숙소로 가 출정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아서의 명령이 떨어지자 올리버 경은 짧게 고개를 숙인 후, 몸을 일으켜 달려왔던 방향으로 다시 뛰어갔다.
그레이스는 멀어지는 올리버 경의 모습과 그 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갑작스레 출정이라니, 하필 자신이 저주에 걸려 불안한 상황에서 그까지 성을 비우게 되자 그레이스는 마음이 자꾸만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레이스는 조심스럽게 아서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아서. 당신이 꼭 가야 하는 거죠?”
“……부인.”
“알아요, 나도. 감히 폐하의 출정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는 거. 나도 아는데 자꾸 걱정이 돼요.”
“……부인께서 어떤 마음이실지 잘 압니다.”
아서는 자신의 소맷자락을 쥔 그레이스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가볍게 토닥였다. 그레이스는 다정한 그의 손길에 이상하게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서가 얼마나 강한 기사인지, 뛰어난 단장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황제가 저주받은 괴물 공작을 내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백전불패의 기사이기 때문’이라며 가볍게 입을 놀려 댔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아서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돌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왜 자꾸 마음이 이렇게 불안하지?’
꼭 그를 보내면 안 될 것처럼.
그레이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꾸 자신의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불안을 참고 있자, 아서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다정히 말했다.
“걱정 마세요. 꼭 이기고 돌아오겠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는 게 중요하죠.”
그레이스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아서가 살포시 웃더니 두 팔로 그녀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친 곳 없이 무사히 이기고 돌아오겠습니다.”
“……꼭 그러셔야 해요. 약속이에요.”
자신을 안은 아서에게서 한 발짝 물러난 후 그레이스가 약속하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서가 기꺼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교차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