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79화
바로 문맥을 짚어 내지 못하는 앨버튼 공작의 모습에 앨버튼 공작 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하자, 앨버튼 공작은 짧게 감탄하며 말했다.
“아! 그렇군! 맞아, 황태자가 그 아둔한 그레이스를 마음에 담았다고 했지, 참.”
“어휴, 이래서 남자들이란. 당신은 남녀 간의 애정 관계에 대해 너무 몰라요.”
“그야 나는 태어나 지금껏 당신밖에 없었으니까.”
“어머, 당신도 참.”
앨버튼 공작이 무뚝뚝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자 앨버튼 공작 부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그 모습에 앨버튼 공작은 자신의 아내가 여전히 참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그건 그렇고,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좀 난감하게 되었군.’
그 후, 앨버튼 공작은 짐짓 심각해진 표정으로 생각했다.
원래 계획은 어떻게든 황태자와 마리안느의 결혼식을 앞당기고 그 결혼식장에서 그레이스를 처리할 생각이었건만.
앨버튼 가문과 척을 진 마법사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신이 미리 접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대로 계획을 진행했다간 하마터면 일이 크게 어긋날 뻔했다.
앨버튼 공작은 인상을 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 말대로 나는 남녀 간의 애정 관계에 너무 몰랐던 듯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놈이 그레이스에게 그만큼 애정을 가진 줄 몰랐지. 난 그저 그놈이 그레이스의 외모에만 홀린 줄 알았지, 그것을 살려서 곁에 두려고까지 하는 줄은 몰랐어.”
“그러게 말이에요.”
“……아무래도 황태자, 그놈의 각오가 심상치 않아. 당신 말을 들으니 그놈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마법사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쉽게 포기할 것 같지도 않고. ……안 되겠어. 이 이상 그놈에게 시간을 주면 안 될 것 같군.”
“여보?”
앨버튼 공작은 혼자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마구 지껄였다. 그러더니 곧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굳이 그레이스가 죽을 무대로 황태자와 마리안느의 결혼식장을 고집할 이유는 없지.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앞당기다니, 어떻게요?”
“황제를 부추길 거야. 황제는 한시라도 빨리 황태자의 몸에 깃든 저주를 풀고 싶어 하니 계획을 앞당기자고 해도 불만은 없을 테지.”
“그건 그렇지만, 그레이스 그것을 어떻게 때맞춰 죽일 생각이에요? 보아하니 펠릭스 공작, 그 괴물 놈이 그것을 많이 아끼는 것 같던데. 우리가 그것을 해칠 것을 대비해 반드시 방책을 세웠을 거라고요.”
“걱정 마, 다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앨버튼 공작은 아내의 지적을 일축하며 머릿속으로 그레이스를 효과적으로 해칠 방법을 궁리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자 사악하고 교활한 그의 머리는 금방 좋은 대책을 토해 냈다. 앨버튼 공작은 낮게 킬킬거렸다.
이럴 때마다 자신의 쓸모없는 둘째 딸이 선량한 마음을 갖고 태어난 것이 고마웠다. 자고로 사악한 이가 선량한 이를 속이고 해치는 것은 어린아이의 손목 꺾는 것만큼이나 쉬운 법이니까. 그러니 자신의 딸은 자신이 파 놓은 함정에 간단하게 걸려들 터였다.
엘버튼 공작은 걱정으로 표정이 어두워진 앨버튼 공작 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 당신은 그냥 날 믿고 지켜보기만 해. 그레이스 그것을 보란 듯이 죽여서 황태자 그놈에게 본때를 보여 줄 테니.”
그리고 이참에 펠릭스 공작 부인이 되었다고 감히 자신에게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대들던 그레이스 그것과 그것을 비호하는 그 괴물 공작 놈에게도 쓴맛을 보여 줄 작정이었다.
앨버튼 공작은 자신의 장담에 조금 안심한 듯 표정이 밝아진 앨버튼 공작 부인을 흘긋 바라보고는 닫힌 응접실 문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는가!”
그러자 누군가 후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조금 전 앨버튼 공작에게 첩자의 서신을 전한 젊은 기사가 응접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앨버튼 공작은 경박스럽게 허둥거리는 그 젊은 기사의 모습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경이 꼭 해 줘야 할 일이 있는데.”
“네? 뭐, 뭐든 말씀하십시오! 각하.”
“황궁으로 서신을 한 통 보내 주게. 내용은 ‘그때 계획한 대로 괴물에게 출전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가 좋겠군.”
“아, 예!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전하겠습니다!”
젊은 기사는 허겁지겁 예를 표한 후 곧장 응접실을 나갔다.
앨버튼 공작은 그 정신없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혀를 찼다. 저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분명 조금 전까지 동료 평민 기사들과 갖은 천박한 말을 동원해 자신을 비난하고 있었으리라.
정작 본인의 위치가 한낱 소모품인 줄도 모르면서. 앨버튼 공작은 하여튼 자신의 주변에는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뭐, 그것도 이제 잠깐이야.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그 누구도 나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때가 올 테지.’
앨버튼 공작은 자신이 이 제국의 정점에 올라선 미래를 상상하며 기대감으로 눈을 번뜩였다.
* * *
한편, 잔뜩 생채기가 난 손등을 치료한 후 아서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그레이스는 반나절을 침실에서 보내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홀로 별채의 정원으로 나와 산책을 했다.
종일 그레이스의 곁에서 눈치를 보던 샐리가 동행하고자 했지만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냥 홀로 정원을 걸으며 복잡해진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홀로 빈 정원으로 나온 그레이스는 눈 덮인 정원을 걸으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차가운 공기에 그녀의 숨이 뽀얗게 흩어졌다.
그레이스는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채 걸었다. 가볍게 흩어지는 저 차가운 숨처럼 이 찜찜한 마음도 흩어져 버리면 좋으련만. 그레이스는 또다시 무거운 숨을 내쉬며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별채의 정원에서 동쪽 탑으로 이어지는 골목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레이스는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여기서 몇 발짝만 더 걸으면 아서의 집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정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멈추고 근처에 있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후 그녀는 불과 조금 전 아서가 치료해 주고 간 자신의 왼쪽 손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말, 어제 내 잠꼬대 때문에 내 손등이 이렇게 된 걸까?’
손등에 난 상처는 아무리 봐도 잠을 자다 좀 버둥거린 정도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크게 멍이 들어 있었다면 그 해명을 듣고 납득했을 텐데, 꼭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것처럼 죽죽 금이 간 생채기는 차라리 나뭇가지 같은 것에 쓸려 생긴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서의 행동도 석연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연고를 덧바르던 그의 푸르고 붉은 두 눈에 떠올랐던 희미한 두려움과 염려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또한,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자꾸만 자신을 살피던 그의 조심스러운 시선의 이유도 궁금했다.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굳게 약속했으면서!’
그레이스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반나절 내내 침실에 틀어박혀 오전의 일을 곱씹을수록 그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만 강해졌다.
그리고 어젯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에 대해 반드시 알아내고 말겠다는 오기가 불쑥 생겨났다. 역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레이스는 벌떡 일어나 쿵쿵 발을 구르며 동쪽 탑을 낀 정원을 향해 걸었다. 그 후 곧장 아서의 집무실이 올려다보이는 위치에 섰다.
고개를 들어 탑을 올려다보자 벌써 촛불을 켠 건지 창문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보니 그레이스는 조금 전까지 차올랐던 짜증과 오기가 한풀 꺾이는 것을 느꼈다.
펠릭스 성뿐만 아니라, 펠릭스 공작가가 소유한 광활한 영지의 일들을 전부 신경 쓰느라 늘 바쁜 사람인데, 그런 그에게 괜히 오전의 행동이 좀 이상했다고 추궁하며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냐, 그래도 물어는 봐야지.’
날카롭게 죄인 추궁하듯이 묻진 말고, 부드럽게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레이스는 어떻게 아서를 불러낼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대로 동쪽 탑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 그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무난했다. 그래서 몸을 돌려 정문으로 들어가려던 그레이스의 머릿속으로 문득 유치한 장난이 떠올랐다.
‘아, 어릴 때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던 장난이긴 한데. 해도 되나?’
잠깐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이 이곳으로 시집을 왔을 때 자신을 냉담하게 대하던 아서는 그리 말했었다. ‘내정 간섭과 레온을 괴롭히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 해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뻔뻔해진 그레이스는 그 자리에 서서 짧게 목을 고른 후, 집무실 창을 향해 고개를 올리며 소리쳤다.
“창문을 열어 줘요, 봄의 왕국의 공주님! 저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 모진 눈보라를 뚫고 온 눈의 공작이랍니다!”
그레이스가 떠올린 유치한 장난은 동화 눈의 공작에서 눈의 공작이 탑에 갇혀 있던 봄의 왕국의 공주를 처음 만났던 그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에 곧장 아서의 집무실 창문이 열렸다. 그러더니 평소처럼 검은 정복에 가면을 쓴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아서는 창문 바로 아래 정원에서 얼굴 옆에 두 손을 모으고 있다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그레이스를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서는 창틀에 두 팔을 짚으며 자신이 있는 집무실을 올려다보는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눈부신 은발과 사파이어같이 반짝이는 두 눈동자에 아름다운 얼굴을 보아하니 봄의 왕국의 공주님은 제가 아니라 그쪽 같습니다만.”
“생김새랑은 관계없이 탑에 갇혀 구출을 원하는 사람이 공주님이죠! 지금 탑에 갇혀 있는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잖아요? 그러니 봄의 왕국의 공주님 역할도 당신이 하는 게 맞고요.”
아서의 반박에 그레이스는 어깨를 살짝 올렸다 내리며 너스레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