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78화
‘뭔가, 아서가 이상해. 왜 이러지?’
어젯밤 일이 바빠 저녁 식사조차 함께하지 못했던 아서가 자신의 침실을 찾은 것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 밤에 일을 마치고 나니 자신이 보고 싶어졌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조금 전부터 묘하게 자신을 자꾸 살피는 그의 시선 속에 묘한 감정이 어린 것이 이상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처음 그녀가 환상을 보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서가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담겨 있던 감정과 똑같은 그런.
그리고 어젯밤 일에 대해 샐리가 언급하려 할 때마다 취하는 아서의 태도도 그렇고, 그런 아서의 눈치를 보는 샐리도 그렇고.
아무래도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기는 한데, 당최 기억이 나질 않으니 감히 뭐라 물어보기도 어려워 괜한 의혹만 쌓였다.
‘아냐. 그냥 내 착각일 수도 있잖아. 자꾸 복잡하게 상황을 해석하지 말자.’
그레이스는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자꾸만 마음속 신경을 건드리는 찜찜함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 *
그 시각, 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앨버튼 공작가의 응접실에선 앨버튼 공작과 앨버튼 공작 부인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느긋하게 모닝티를 즐기는 중이었다.
마리안느가 아침 일찍부터 저택을 방문한 직인들에게 둘러싸여 웨딩드레스와 보석들을 고르느라 별채에 머물러 있어, 이리 오붓하게 부부만이 티타임을 가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앨버튼 공작 부인은 아침부터 신경 써서 드레스를 고르고 머리를 틀어 올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녀의 눈에는 멋있기만 한 남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기껏 신경 써서 아름답게 꾸몄건만, 앨버튼 공작은 그런 제 아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뜨거운 홍차만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앨버튼 공작 부인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 앨버튼 공작을 향해 말했다.
“여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러다 코가 차에 빠지겠어요.”
그 말에 앨버튼 공작은 무뚝뚝한 얼굴로 제 곁에 앉은 앨버튼 공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이제야 앨버튼 공작 부인이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그런 남편의 눈빛을 알아챈 앨버튼 공작 부인이 슬며시 인상을 쓰자, 앨버튼 공작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안, 레지나. 잠시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그 생각할 것이라는 게 뭔데요? 혹시 폐하께서 황태자와 우리 마리안느와의 결혼에 대해 뭐라고 하신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앨버튼 공작은 손가락에 끼우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더니 대답했다.
“아니, 당신도 알다시피 황제는 우리 일에서 별문제가 아니야. 황태자만 살릴 수 있다면 어떤 짓이든 할 인사니까, 여차하면 황태자를 걸고넘어지면 돼.”
“그런데요?”
“……문제는 바로 괴물 공작 그놈과 황태자야.”
“황태자궁과 펠릭스 성에 심어 놓은 첩자로부터 어떤 연락이 왔군요? 그들이 뭐라고 전하던가요?”
앨버튼 공작의 대답을 듣자 표정을 굳힌 앨버튼 공작 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앨버튼 공작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펠릭스 성에서 온 서신에서는 평소와 특별히 다른 보고를 받지 못했어. 그저 벨리알이 건 저주가 먹혀든 것이 맞는지 확인만 해 달라고 보낸 것이었으니까.”
“……그럼 황태자궁에서 온 서신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맞아. 그것도 아주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지.”
앨버튼 공작은 비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쳐버린 레이나 백작 영애를 이용해 황태자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마법 의식을 거행했던 그날, 자신이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대놓고 마리안느와의 결혼을 앞당길 것을 주장하고 심지어 황제에게 은근한 협박까지 가한 것을 분명 황태자도 익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예상보다 반응이 너무나 조용했다. 지금껏 마리안느만 보면 괴물을 본 듯 끔찍해하는 그 저주받은 괴물이 이대로 순순히 저항을 포기하고 결혼을 받아들인다면야 굳이 힘 뺄 것 없는 일이기는 했으나, 앨버튼 공작은 절대 황태자가 그런 심약한 인물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태자궁을 감시하는 자를 몇 더 붙였고, 그 끝에 앨버튼 공작은 ‘황태자궁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서신을 받아 든 것이었다.
앨버튼 공작은 그 서신을 받았던 날 소름이 돋아 머리털이 쭈뼛 섰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렴, 그 끔찍한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 내며 살아온 괴물 황태자가 그리 쉽게 물러날 리 없지. 끈질긴 놈.’
하나 그 괴물 같은 황태자가 아무리 끈질겨도, 피를 이은 자식까지 이용해 그 괴물과 황실을 엮을 계획을 짠 자신의 집념을 이길 수는 없었다.
즉, 이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둘 사람은 바로 이 앨버튼 공작이란 말이었다.
앨버튼 공작이 음흉한 표정으로 웃자, 앨버튼 공작이 그런 남편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는데요?”
그 물음에 앨버튼 공작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순간 이 사실을 아내에게 솔직히 털어놓아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비밀은 한 명이라도 적은 사람이 알수록 더 좋은 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앨버튼 공작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 그래도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고 기분이 상해 있는 아내의 심기를 굳이 더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아내는 20년 전 출산의 고통으로 인한 미움을 지금껏 품고 있을 만큼 생각보다 더 집요하고 원한이 깊은 여자였기에 더더욱.
‘여자들은 참 알다가도 모를 존재지. 같은 진통을 겪고 낳은 아이임에도 그 고통의 경중에 따라 한 아이는 지극히 사랑하고, 한 아이는 죽도록 미워한다는 게.’
뭐, 그 덕분에 자신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피를 이은 아이’를 이용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앨버튼 공작은 꾸며 낸 상냥한 미소로 아내를 마주 보며 말했다.
“그놈이 은밀히 어떤 사람을 찾고 있다더군.”
“네? 황태자가 사람을 왜 찾아요? 그것도 은밀하게 말인가요?”
“그래. 수상하지 않아?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면 굳이 은밀하게 사람을 보낼 것이 아니라, 전국에 수배지 한 장 만들어서 그것을 뿌리라 명하는 편이 더 간단할 텐데 말이야.”
“……그러게요. 정말 수상하네요. 굳이 그런 방법을 이용해 찾아야만 하는 사람이 누굴까요?”
“나도 지금 그걸 찾는 중이야.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의 충실한 친구가 그 황태자가 찾아 헤매는 상대에 대해 알아냈다고 하더군.”
이어진 앨버튼 공작의 말에 앨버튼 공작 부인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호들갑스럽게 되물었다.
“어머, 정말요?”
“아아. 늦어도 오늘 오후엔 전서구를 보내겠다고 했어. 그러니 기다려 봐야지.”
앨버튼 공작은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후 그는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 우유도 설탕도 넣지 않았지만 차 맛이 달았다. 꼭 지금 앨버튼 공작의 기분처럼.
“공작 각하! 안에 계십니까!”
그렇게 앨버튼 공작 부부가 조용히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비우고 있던 그때, 응접실 문밖에서 다급하게 공작을 찾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버튼 공작은 기다렸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고 어느새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아내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 후 앨버튼 공작은 문을 향해 소리치듯 대답했다.
“얼른 들어오거라.”
그러자 응접실 문이 열리더니 앨버튼 공작가를 상징하는 흰 올빼미가 새겨진 견장을 찬 기사가 들어왔다.
그는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앨버튼 부부를 바라보며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앨버튼 공작은 그런 그를 손짓으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래, 첩자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나?”
“예. 조금 전 그레고리의 발목에 서신이 매달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지금 가져오는 길입니다.”
“얼른 이리 주고, 경은 이만 나가 보게.”
“……아, 네. 알겠습니다.”
앨버튼 공작의 차가운 축객령에 기대감 가득했던 젊은 기사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기사는 별말 없이 앨버튼 공작에게 서신을 내민 후 응접실을 나갔고, 그 뒷모습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앨버튼 공작은 그가 사라지자 짧게 혀를 찼다.
하여튼, 서신 하나 전하고서 일일이 대가를 받으려는 천박한 평민 출신 기사는 저래서 뽑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앨버튼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기사가 내민 서신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앨버튼 공작은 눈으로 빠르게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앨버튼 공작 부인은 그 모습을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얼른 자신의 남편이 서신을 전부 읽고 그 내용을 자신에게 말로 풀어 주길 기다렸다.
잠시 후, 서신을 다 읽은 앨버튼 공작은 펼쳐 놓았던 그것을 탁 소리 나게 접으며 말했다.
“하하, 하하하. 어리석은 괴물 놈. 답지 않게 잔머리를 굴렸군.”
“……왜요, 여보? 잔머리라니, 황태자가 대체 누굴 찾았기예요?”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남편의 혼잣말에 앨버튼 공작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앨버튼 공작이 연신 킥킥거리며 말했다.
“하하, 글쎄 이 건방진 놈이 마법사를 찾고 있었다는군.”
“마법사를요?”
“더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이 제국뿐 아니라 이웃 제국과 공국, 심지어 우리 적국까지 서신을 보내 우리와 척을 진 마법사를 찾았다는군. 하하하!”
“어머, 호호호.”
남편인 앨버튼 공작이 말을 전한 후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앨버튼 공작 부인 또한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호호 웃었다.
정말이지 생각하는 수준이 미천했다. 앨버튼 공작 가의 사람이 이 서신을 본다면 누구든 웃음을 터트릴 게 분명했다. 앨버튼 공작은 지나치게 웃느라 눈초리에 맺힌 눈물을 한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혼동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를 찾았다더군.”
“어머, 혼동 마법을요? 호호, 그런 고차원의 마법을 할 수 있는 이들을 찾기는 어려우셨을 텐데요.”
“게다가 우리 가문과 척을 진 자 중에? 하하하, 어리석은 놈! 그런 자가 있을 리 만무한데 말이야.”
“맞아요.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도 드물거니와…….”
앨버튼 공작 부인이 마주 웃으며 일부러 말끝을 흐리자, 앨버튼 공작이 싸늘하게 웃으며 덧붙이듯 말했다.
“그런 마법을 쓸 수 있으면서, 우리 가문과 척을 진 자를 나와 가문의 원로들이 살려 둘 리가 없지.”
“그럼요. 살려 두면 반드시 우리 가문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자를 왜 살려 두겠어요? 어림도 없는 일이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잔인한 말을 내뱉는 앨버튼 공작 부인의 얼굴은 남편의 것과 꼭 닮아 있었다.
그런 아내의 뜻에 동의한다는 듯 앨버튼 공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접어 버린 서신을 허공 위로 휙 던졌다. 그러자 공중 위로 가볍게 떠오른 서신에 갑자기 불이 붙더니 곧 빠르게 타들어 가다 사라졌다.
그로써 증거 인멸까지 완벽하게 수행한 앨버튼 공작은 찻잔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다 들이켰다. 웃느라 목이 말랐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괘씸하지 않나, 레지나?”
“그러게요. 감히 우리 앨버튼 공작가를 어떻게 보고 말이에요.”
“그놈은 왜 혼동 마법이 필요했던 걸까. 그를 통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거지?”
“……여보. 정말 몰라서 물으세요?”
앨버튼 공작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앨버튼 공작 부인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그 혼동 마법으로 또 다른 ‘그레이스’를 만들 작정이었겠죠. 적당히 죽어 가는 여자 하나를 구해다, 그 여자를 괴물 공작 앞에 세워 놓고 괴물 공작의 눈에 혼동 마법을 걸려고요.
그럼 그 괴물의 눈에 ‘이름 모를 죽어 가는 여자’는 ‘그레이스’로 보일 테고, 그럼 그 괴물은 멍청하게도 그레이스 대신 그 죽어 가는 여자와 자신의 목숨을 연결해, 그 여자를 소생시킬 테니까요. 그럼 황태자를 살리기 위한 제물로 그레이스가 희생될 필요가 없잖아요. 그 이름 모를 여자를 죽이면 되니까요.”
“……음? 어째서 그런 귀찮은 짓을 할 필요가 있지?”
“바보 같기는! 정말 몰라서 물어요? 황태자가 그레이스 그 망할 계집애를 마음에 두었으니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