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76화
“고, 공작님!”
그렇게 계단을 전부 올라 그레이스의 방이 위치한 층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창백한 얼굴의 샐리가 서 있었다.
잠옷 차림에 등불 하나만을 손에 들고 연신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아서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다, 곧 그의 품 안에 그레이스가 안긴 것을 보자 슬며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조금 전까지 두 분께서 함께 계셨던 건가요?”
“……그래. 조금 전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부인께서 잠이 들자 안고 왔다.”
아서는 여전히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샐리를 향해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 말에 샐리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서를 향해 말했다.
“그럼 미리 제게 언질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저는 마님께서 침실에 계시지 않아 그 잠깐 사이 무슨 큰일이 난 줄 알고……!”
“미안하군. 하지만 밤늦게 문득 이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마침 이 사람도 날 보고 싶어 했던 것 같고.”
“어머, 그럼 서로 마음이 통하셨던 거로군요! 낭만적이네요!”
아서가 연신 해명을 늘어놓자 슬쩍 원망을 늘어놓던 샐리의 얼굴이 부드럽게 펴졌다.
아서는 그 모습에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히 그녀는 자신의 해명을 믿어 줄 모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서는 희미한 죄책감도 느꼈다. 샐리가 가진 순진하고 낭만적인 면모를 이용해 결국 그녀를 속이고 말았기에.
‘하지만 별수 없지.’
그에게는 샐리보다 자신의 품에 안긴 아내 그레이스가 훨씬 더 소중했으니까. 아서는 복잡한 감정을 숨긴 채 태연히 웃으며 샐리에게 명했다.
“미안하지만 샐리, 침실 문을 좀 열어 주겠어? 이 사람을 침대에 눕히고 싶은데.”
“아, 그럼요! 물론이죠!”
샐리는 후다닥 닫혀 있던 침실의 문을 열었고, 아서는 열린 문을 넘어 그레이스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아서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그레이스의 침실 풍경에 표정을 굳히며 자신을 따라 침실 안으로 들어오려는 샐리를 향해 소리쳤다.
“……들어오지 마라!”
“예? 공작님, 왜 그러세요? 침실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갑자기 아서의 언성이 높아지자 샐리는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물음에 순식간에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한 아서는 의아한 표정을 한 샐리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순간, 침실 창문에 든 그림자를 보고 놀랐을 뿐.”
“……예? 어머, 혹시 침실에 침입자라도 든 걸까요? 그런 거라면 당장 기사들을 불러야……!”
“그럴 것 없어, 샐리. 잊었나? 내가 누구인지.”
아서의 말에 호들갑을 떨며 일을 크게 키우려는 듯한 샐리의 모습에 아서는 얼른 그 말을 막듯 대꾸했다.
그러자 샐리는 순순히 아서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아서의 말대로, 이 성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아서였기에 수상한 침입자 한 둘쯤은 굳이 기사단을 부르는 수고를 벌이지 않아도 처리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아서는 그런 샐리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며 말했다.
“그럼 이제 그만 침실로 돌아가도록 해. 이후의 일은 내게 맡기고.”
“감히 제가 그래도 될까요? 두 분이 누우실 침대라도 정리해 드려야 할 텐데…….”
“그런 걱정은 말아. 어차피 샐리가 아무리 열심히 정리해도 금방 흐트러질 테니.”
아서는 일부러 샐리가 오해하기 좋을 법한 말을 섞으며 말했다. 그 말에 중년의 샐리는 순진하게 양 볼을 붉혔다. 그러더니 황급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그, 그런 거라면…… 저, 저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공작님. 편한 밤 되셔요.”
“그래.”
“혹여 절 찾을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종을 울려 불러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샐리는 후다닥 걸음을 옮겨 같은 층에 있는 본인의 침실로 돌아갔다.
아서는 샐리가 본인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확인한 후, 느릿한 한숨을 내쉬며 그레이스의 침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 후 아서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레이스의 침실 안을 살폈다.
전부 열려 검은 입을 벌린 서랍과 흩어진 옷가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물건들과 깨진 연약한 유리 장신구, 그리고 사람이 누워 있다 일어난 흔적이 있는 침대와 켜진 적 없는 전등까지.
침실 안의 풍경은 마치 초짜 도둑이 침실을 한 번 헤집고 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서는 또다시 이채롭게 눈을 빛냈다. 다행히 침입자가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누군가가 들어왔다면 분명 발자국이 남았을 텐데, 그런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 듯 창문은 열린 흔적도 없었고 창틀 위도 깨끗했다.
‘그렇다는 건, 침실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부인이라는 건가.’
아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정돈되지 않은 침대 위로 걸어가 줄곧 품에 안고 있던 그레이스를 내려놓았다.
다행히 그레이스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소란은 전혀 모른다는 듯 여전히 곤한 잠에 빠진 상태였다. 아서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잠든 그녀의 몸 위로 시트를 덮어 주었다.
그 후 아서는 몸을 돌려 어지러운 침실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던져진 물건들은 전부 차곡차곡 서랍 속에 넣고, 흩어져 있던 옷가지는 전부 걸어 옷장 속에 넣고 깨진 장신구는 손으로 쓸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던졌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고군분투한 끝에 아서는 침실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혹여 자신이 정리하지 못한 곳이 있나 마지막으로 확인까지 한 아서는 발소리를 죽여 잠이 든 그레이스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 후 잠이 든 그녀의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아서는 가면을 벗은 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잠이 든 그레이스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부인.”
그리고 아서는 마치 탄식을 내뱉는 듯한 목소리로 그레이스를 불렀다.
잠든 그레이스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조금 전 일은 없었던 것처럼. 아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절망했다.
다행히 그녀가 더 큰 소동을 벌이지 않고 자신에게 발견된 것이 참 다행이었고,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그녀의 몸에 저주가 파고들었음을 알게 되어 절망했다.
아서는 자신의 뺨에 와 닿은 그레이스의 작고 따뜻한 손을 꼭 쥐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오늘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제발 이 사람만은 아무것도 모르기를.
그래서 이 사람이 또다시 두려운 일을 겪지 않게 되기를. 아서는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차라리 이 저주가 나의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그래서 자신은 괴물 공작이라는 이름으로 죽고 이 사람이 기쁨과 행복한 일생을 보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자신은 몇 번이고 괴물이 될 수도 있었건만. 잔인한 신과 그 운명은 자신이 그리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윽!”
아서는 이를 악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저도 모르게 절망과 자괴감, 죄책감 같은 흉측한 감정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레이스의 사랑을 받고, 그녀와 마음이 통했다는 행복으로 잠깐 잠들어 있던 그 감정들은 그의 일생을 지배해 온 ‘저주’가 살짝 그 독니를 드러낸 순간 간단히 사랑과 행복이라는 장벽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아서는 또다시 자신을 좀먹기 시작하는 그 끔찍한 감정들에 치를 떨며 잡은 그레이스의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제발,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그녀에게 불행이 찾아오지 않기를.
아서는 동이 틀 때까지 빌고 또 빌었다.
* * *
어쩐지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난 기분이었다.
그레이스는 조용히 감고 있던 눈 위로 푸르스름한 새벽의 햇살이 내려온 순간 스르르 눈을 떴다.
그 후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커다란 자신의 침대 위 늘어진 커튼과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을 뜨기 전 몸이 느꼈던 대로 아직 이른 새벽인 듯했다.
‘아직은 샐리도 잠이 들어 있겠지.’
그렇다면 샐리가 깨우러 오기 전까지 한숨 더 자고 난 후에 일어날까.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슬쩍 뒤척였다.
‘……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꼭 무언가에 잡힌 것처럼. 그러고 보니 자신의 오른쪽 팔에 무언가 올려진 느낌이 들었다.
‘설마 나 어디론가 납치된 건 아닐까? 그래서 누가 날 묶어 놓은 건 아니겠지?’
괜히 앨버튼 성에서 꾸었던 악몽도 떠올라 덜컥 겁을 집어먹은 그레이스는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누군가가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눈을 굴려 붙잡힌 오른쪽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 후 그레이스가 그 존재를 확인했을 때,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어머.”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고 있던 사람은 아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서는 그레이스의 오른손을 베개처럼 벤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그녀의 침대 옆에 둔 의자에 앉아서 불편하게 허리를 굽힌 채로 말이었다.
‘대체 아서가 왜, 이런 자세로 내 침실에?’
그레이스는 불과 몇 시간 전, 집무가 바빠 오늘은 밤새워야 할 것 같다고 말하던 아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부인, 레온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연신 미안해했고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며 그를 집무실로 올려 보냈었다.
분명 그랬었건만.
‘아, 혹시 그렇다면 일을 마치고 새벽에 그가 이 방을 찾은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자신과 자신의 오른손에 와 닿는 아서의 볼과 아랫턱이 까칠했다. 꼭 어젯밤 이곳에서 잠이 든 사람 같았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의아한 얼굴로 잠이 든 아서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였다.
“으음, 부인?”
그레이스의 시선을 느낀 건지, 스르르 눈을 뜬 아서는 푸르고 붉은 오드아이를 느리게 깜빡이며 시선을 올렸다.